개요
최승로(崔承老, 927년 ~ 989년)는 고려 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성종에게 시무 28조를 건의하여 고려의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와 유교적 정치질서의 정비에 기여한 인물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신라의 옛 수도였던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신라의 6두품 출신인 최은함이다. 935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아버지와 함께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이주했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뛰어났다고 전해지며, 12세 때 태조 왕건 앞에서 《논어》를 읽어 재능을 인정받았다. 태조는 그를 원봉성의 학생으로 삼고 여러 물품과 식량을 하사했다.
이후 고려 조정에서 문장과 학문에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광종과 경종 시대의 구체적인 활동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최승로가 역사적인 인물로 두드러지게 등장한 것은 982년(성종 원년)이었다. 성종이 중앙의 5품 이상 관리들에게 국가의 정치적 문제와 개선방안을 건의하도록 명령하자, 최승로는 역대 다섯 국왕의 정치에 대한 평가인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과 구체적인 개혁방안인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를 올렸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호족과 지방세력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었으며, 일부 사찰과 귀족들이 백성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지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국왕이 불교행사와 기복적인 활동에 지나치게 몰두하기보다 유교적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최승로는 불교 자체를 부정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불교가 개인의 수양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실제 국가를 통치하는 데에는 유교의 원리와 민생의 안정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건의는 성종의 개혁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983년 12목 설치와 지방관 파견을 비롯한 중앙집권적인 행정제도 정비에도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최승로의 개혁사상이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광종의 노비안검법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기존의 양천제와 주인·노비 사이의 신분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최승로는 지방 호족의 전횡과 국가재정의 낭비를 비판하면서도, 신분적인 위계질서와 유교적 사회규범을 중시했던 고려 초기의 개혁적인 보수 관료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983년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고, 988년에는 문하수시중에 임명되어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이듬해인 989년 사망했으며, 이후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최승로가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체계화하고 고려의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1]
광종이 호족을 견제하면서 국왕의 권력을 강화했다면, 최승로는 성종에게 그 권력을 어떠한 원칙과 제도로 운영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정보
| 최승로 | |
|---|---|
| 한자 | 崔承老 |
| 출생 | 927년 (태조 10년) |
| 사망 | 989년 (성종 8년) |
| 출생지 | 신라 경주 |
| 본관 | 경주 최씨 |
| 국가 | 신라 → 고려 |
| 신분적 배경 | 신라 6두품 계통의 가문 |
| 아버지 | 최은함(崔殷含) |
| 직업 | 문신, 유학자, 정치가 |
| 주요 관직 | 행선관어사, 문하시랑평장사, 문하수시중 |
| 작위 | 청하후(淸河侯) |
| 식읍 | 700호 |
| 시호 | 문정(文貞) |
| 추증 | 태사, 대광 내사령 등 |
| 주요 저술 | 시무 28조, 오조정적평 |
| 주요 활동 | 유교적 정치이념 정립, 지방관 파견 건의, 국가재정 및 신분제도에 관한 개혁안 제출 |
| 관련 국왕 | 태조, 광종, 경종, 성종 |
| 사후 배향 | 성종 묘정 |
출생과 가문
신라의 6두품 출신
최승로는 927년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은함은 신라의 6두품 계통에 속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6두품은 신라의 골품제에서 진골보다 낮은 신분으로, 학문과 행정에 종사하는 지식인들을 다수 배출했다.
6두품 출신 가운데에는 중국에 유학하거나 유교적인 학문을 연구한 인물들이 존재했으며, 신라 말에는 기존의 정치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6두품은 신라의 신분제도에서 정치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왕족과 진골 귀족들이 주요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학문적인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일정한 수준 이상의 정치적 지위에 오르기 어려웠다.
신라 말에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약화되면서 일부 6두품 지식인들은 새로운 정치세력과 협력하거나 고려의 건국과 국가체제 정비에 참여했다.
최승로의 가문 역시 이러한 역사적인 변화 속에서 고려의 관료사회에 진출했다.
아버지 최은함
최은함은 신라 말의 관료로, 고려가 신라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고려 조정에 협력했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최은함도 고려의 수도로 이동했다.
당시 최승로는 어린아이였으며, 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국가의 통치 아래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다만 최은함의 관직 경력과 정치적인 활동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많지 않다.
《고려사》와 《삼국유사》에는 최은함의 이름을 표기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고려사》에서는 崔殷含으로, 《삼국유사》에서는 崔殷諴으로 표기한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최승로의 이름도 崔丞魯라고 기록하여 일반적인 崔承老 표기와 차이가 있다.
이는 중세의 역사자료에서 동일한 인물의 이름이 서로 다른 한자로 전승되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1]
출생에 관한 전설
최승로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삼국유사》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국유사》의 「삼소관음 중생사」(三所觀音衆生寺) 항목에 따르면 최은함은 오랫동안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는 관세음보살에게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했으며, 이후 최승로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927년 포석정 전투와 관련된 시기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관음보살상 아래에 숨긴 아이
전승에 따르면 최은함은 후백제 군대가 서라벌을 공격하자 갓난아기였던 최승로를 안전하게 피신시킬 방법을 찾았다.
그는 아이를 안고 절로 가 관음보살상 아래에 숨겼으며, 아이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한 뒤 떠났다.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절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전승에 따르면 아기는 약 보름 동안 아무런 보호 없이 무사히 살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아이의 몸에서는 젖 냄새가 났다고 설명했다.
이 이야기는 관음보살의 영험함으로 아기가 보호되었다는 불교적인 설화다.
역사적 사실과의 구분
이러한 이야기는 최승로가 신라 말의 전쟁과 혼란 속에서 태어났다는 시대적인 배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갓난아기가 보름 동안 아무런 음식과 보호 없이 생존했다는 내용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이 아니다.
《삼국유사》에 이 이야기가 수록된 목적 역시 불교적인 신앙과 관음보살의 영험함을 설명하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최승로의 출생과 관련된 전승으로 소개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모든 일이 기록된 그대로 발생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설화가 관음보살상의 영험함을 전하는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한다.[2]
고려로의 이주
935년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신라는 독립적인 왕조로서의 지위를 잃고 고려에 편입되었다.
최승로의 아버지 최은함도 경순왕을 따라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이동했다.
최승로 역시 아버지와 함께 개경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는 그의 인생에 중요한 변화였다.
신라의 6두품 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신라의 신분제도 아래에서 활동하는 대신 새롭게 건국된 고려의 관료제도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고려 태조는 신라의 관료와 지식인들을 포섭하면서 새로운 국가의 행정체제를 정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학문적인 능력을 가진 신라 출신 인물들은 고려의 국가운영에 기여할 수 있었다.
태조 왕건과의 만남
최승로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왕건은 최승로가 총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불러 직접 만나 보았다.
당시 최승로는 12세였다.
927년 출생이라는 기록과 나이를 기준으로 하면 938년 무렵의 일이었다.
논어를 읽다
태조는 최승로에게 《논어》를 읽도록 했다.
최승로는 태조 앞에서 논어를 읽었으며, 태조는 그의 학문적인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이후 태조는 최승로에게 여러 물품과 식량을 하사했다.
또한 그를 원봉성의 학생으로 삼아 학문을 계속 공부하도록 했다.
원봉성학생
원봉성(元鳳省)은 고려 초기에 운영된 관청으로, 문서와 학문 등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다.
최승로는 어린 나이에 원봉성학생(元鳳省學生)이라는 지위를 받았다.
태조는 그에게 소금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가마인 염분(鹽盆)과 안장을 갖춘 말, 식량 등을 하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최승로가 어린 시절부터 국왕의 관심을 받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고려사》에서는 이때부터 최승로가 문병(文柄)을 잡았다고 설명하지만, 12세의 소년이 곧바로 국가의 주요 문서업무를 총괄했다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해당 기록은 그의 학문적인 능력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거나 이후의 활동을 어린 시절의 일화와 연결한 서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광종·경종 시대
최승로는 태조 이후 혜종과 정종, 광종과 경종에 이르는 여러 국왕의 재위기간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구체적인 관직 경력과 정치적인 활동에 관한 기록은 제한적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최승로가 학사 계통의 업무를 담당하면서 문헌과 문장에 관련된 활동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광종 시대의 관직생활
최승로가 20대부터 40대 후반에 이르는 시기는 대부분 광종의 재위기간에 해당한다.
광종은 호족과 공신들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956년에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했으며, 958년에는 과거제도를 도입했다.
이후 관리들의 복식제도를 정비하고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숙청을 진행했다.
《고려사》에는 최승로가 광종 시대에 문병을 맡았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문병은 문장과 문서에 관한 중요한 권한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가 광종의 개혁정책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연구에서는 쌍기를 비롯한 새로운 관료들이 광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최승로가 충분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자료에 근거한 추정이므로, 최승로가 쌍기에게 직접적으로 밀려났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경종 시대
975년 광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했다.
경종 시대에는 광종의 정치에 대한 반발과 기존 지배층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최승로의 구체적인 활동에 관한 자료는 충분하지 않다.
그가 확실하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성종의 즉위 이후다.
성종의 즉위
981년 성종이 고려의 제6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성종은 고려의 통치제도를 정비하고 국왕 중심의 행정체제를 보다 체계적으로 운영하려 했다.
당시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지 약 45년이 지난 상태였지만 지방의 호족들이 상당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중앙정부의 행정체제와 지방관의 파견, 관료들의 역할과 국가의례 등에 관한 정비가 필요했다.
성종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료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5품 이상 관리들의 건의
982년(성종 원년) 6월 성종은 중앙의 5품 이상 관리들에게 국가의 정치적인 문제와 개선방안을 서면으로 제출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관료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봉사(封事)의 형태로 제출했다.
봉사는 글을 밀봉하여 국왕에게 직접 올리는 건의문을 의미한다.
이는 관료들이 국가의 정책에 관하여 보다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최승로는 이러한 성종의 명령에 따라 장문의 정책 건의문을 작성했다.
그때 그의 관직은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이었다.
56세의 최승로
최승로는 927년에 태어났으므로 982년에는 당시의 나이 계산법으로 56세에 해당했다.
그는 태조부터 경종까지 다섯 국왕의 재위기간을 직접 경험한 관료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과거의 통치와 정책을 평가하고 성종이 앞으로 추진해야 할 개혁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건의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 태조부터 경종까지 다섯 국왕의 정치를 평가한 글
-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 성종이 추진해야 할 28가지 개혁과제를 제시한 글
오늘날에는 두 부분을 함께 시무 28조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오조정적평과 시무 28조는 서로 구분되는 내용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건의문이 982년 6월 성종에게 제출되었으며,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한다.[3]
오조정적평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은 태조부터 경종까지 다섯 국왕의 정치적인 업적과 잘못을 평가한 글이다.
최승로는 각 국왕이 시행했던 정책과 정치적인 상황을 검토하면서 성종이 본받아야 할 점과 경계해야 할 점을 제시했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인 회고가 아니라 현재의 국왕이 올바른 정치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한 정치적인 조언이었다.
최승로는 당나라의 학자 오긍이 《정관정요》를 편찬하여 당 태종의 정치를 후대 국왕에게 교훈으로 전달한 사례를 참고했다.
다섯 국왕에 대한 평가
| 국왕 | 최승로의 주요 평가 |
|---|---|
| 태조 | 후삼국 통일과 호족 포섭, 국가의 기초를 마련한 업적을 높이 평가 |
| 혜종 | 초기의 정치를 인정하면서도 정치적 불안과 왕권의 한계를 지적 |
| 정종 | 정치적인 혼란과 서경 천도 추진 등에 따른 부담을 비판 |
| 광종 | 초기의 정치적 성과는 인정했지만 과도한 불교행사, 신진 관료의 등용과 숙청, 노비안검법의 부작용 등을 강하게 비판 |
| 경종 | 광종 이후의 정치적인 혼란과 인사·통치상의 문제 등을 지적 |
이 평가는 최승로의 정치적 관점을 요약한 것으로, 각 국왕의 실제 업적에 대한 현대 역사학계의 최종적인 평가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태조에 대한 높은 평가
최승로는 태조 왕건의 정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여러 정치세력을 포섭하면서 새로운 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았다.
또한 태조가 신하들을 대하는 태도와 백성에 대한 배려 등을 본받아야 할 사례로 제시했다.
최승로가 어린 시절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과 연결하면 그의 태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는 개인적인 경험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만으로 그의 모든 역사적 평가가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정종의 서경 천도 문제
최승로는 정종의 정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평가를 남겼다.
정종은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으며, 이를 위한 준비 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최승로는 이러한 사업이 백성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국왕이 국가적인 사업을 추진할 때 그 사업이 실제로 백성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광종에 대한 강한 비판
최승로가 가장 강하게 비판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광종이었다.
광종은 956년 노비안검법을 시행하고 958년 과거제도를 도입하면서 기존의 호족세력을 견제했다.
또한 신진 관료를 등용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을 숙청했다.
최승로는 광종이 지나치게 강압적인 정치와 숙청을 추진했다고 비판했다.
노비안검법에 대해서도 기존의 주인과 노비 사이의 신분적인 관계를 혼란하게 만들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는 최승로 자신의 유교적인 정치관과 신분질서에 대한 관념이 반영되어 있었다.
따라서 광종의 개혁이 실제로 모두 실패한 정책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과거의 역사를 정치적 교훈으로
최승로가 오조정적평을 작성한 목적은 이전 국왕들의 정치를 단순히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는 성종이 선왕들의 성공과 실패를 참고하여 올바른 국가운영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은 유교적인 정치사상에서 중요한 역사적 교훈과 군주의 수양이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따라서 오조정적평은 고려 초기의 정치사를 연구하는 자료이면서 동시에 최승로가 생각한 이상적인 국왕의 모습을 보여주는 정치사상 자료이기도 하다.
시무 28조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는 최승로가 982년 성종에게 올린 28개 조항의 정책 건의문이다.
시무(時務)는 당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시무 28조는 고려가 당면한 정치와 사회, 경제와 외교, 군사와 종교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28가지 개혁방안이었다.
최승로는 지방 호족의 전횡을 제한하고 국가의 행정조직을 정비하며, 불교행사와 사찰의 경제적 폐단을 줄이고 백성들의 부담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의 유교적 정치제도와 문화를 참고하면서도 고려의 실정에 맞지 않는 제도를 무조건 모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현존하는 조항
시무 28조는 원래 28개 조항으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제1조부터 제22조까지 총 22개 조항만 전해지고 있다.
나머지 6개 조항은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010년 거란의 제2차 침입 당시 개경의 혼란과 자료 소실 과정에서 일부 조항이 사라졌을 가능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로 정확히 어느 시점에 어떤 경위로 소실되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알려지지 않은 여섯 조항의 내용을 임의로 추정하여 확정적인 역사적 사실처럼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름은 숫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설명적인 이름을 사용하세요
현존 22개 조항의 내용
다음은 오늘날 전해지는 22개 조항의 핵심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조항 | 주요 건의 내용 |
|---|---|
| 제1조 | 국경의 요충지를 정비하고 현지의 군사력을 활용하여 방어체제를 마련할 것 |
| 제2조 | 백성에게 부담을 주는 과도한 불교행사와 불필요한 시주를 제한할 것 |
| 제3조 | 지나치게 많아진 국왕의 시위병을 줄이고 실제 능력이 뛰어난 병력만 남길 것 |
| 제4조 | 국왕이 사소한 시혜에 몰두하기보다 공정한 상벌과 올바른 정치를 실천할 것 |
| 제5조 | 외교사절의 왕래와 무역을 정비하고 불필요한 사적인 교역을 제한할 것 |
| 제6조 | 사찰이 불보의 재원을 이용하여 고리대금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을 금지할 것 |
| 제7조 | 지방관을 파견하여 호족이 공무를 빙자해 백성을 수탈하는 일을 막을 것 |
| 제8조 | 국왕이 승려를 지나치게 가까이하거나 궁중에 초빙하는 일을 삼갈 것 |
| 제9조 | 관료와 일반인의 의복제도를 정비하여 신분적 위계질서를 확립할 것 |
| 제10조 | 승려들이 관청의 숙박시설과 역참을 이용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금지할 것 |
| 제11조 | 중국의 유교적인 제도는 받아들이되 의복과 생활풍속은 고려의 실정에 맞게 유지할 것 |
| 제12조 |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과도한 공물과 부역을 부담하지 않도록 개선할 것 |
| 제13조 | 연등회와 팔관회의 규모를 줄여 백성들의 노동력과 재정적인 부담을 덜 것 |
| 제14조 | 국왕이 교만하지 않고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형벌을 시행할 것 |
| 제15조 | 궁중의 말과 노비 등을 적정한 규모로 줄여 국가재정의 낭비를 방지할 것 |
| 제16조 | 사찰과 불당의 건립을 위해 백성들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일을 금지할 것 |
| 제17조 | 신분에 맞지 않는 호화주택의 건축을 제한하고 건축에 따른 폐단을 막을 것 |
| 제18조 | 금과 은을 과도하게 사용한 불상·경전 제작 등 사치스러운 불교활동을 제한할 것 |
| 제19조 | 건국공신과 공로자 및 그 자손들을 공적에 맞게 등용하고 대우할 것 |
| 제20조 | 불교신앙 자체는 인정하되 국가가 주관하는 불필요한 불교행사는 축소할 것 |
| 제21조 | 산천과 별 등에 대한 지나친 제사와 기도를 줄이고 백성들의 부담을 완화할 것 |
| 제22조 | 양인과 천인의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노비 소송을 신중하게 처리하며 이미 결정된 사안을 함부로 다시 다투지 않도록 할 것 |
※ 위의 내용은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주요 정책을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각 조항의 상세한 내용은 《고려사》 최승로 열전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시무 28조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름은 숫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설명적인 이름을 사용하세요
지방관 파견 주장
최승로의 대표적인 개혁안 가운데 하나는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 호족의 전횡을 견제하자는 주장이었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부 호족은 국가의 공적인 업무를 수행한다는 명분으로 주민들에게 세금과 노동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앙정부가 모든 지방을 직접 관리하는 행정체계가 충분히 정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제7조의 건의
최승로는 시무 28조 제7조에서 지방의 유력자들이 국가의 업무를 핑계 삼아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왕이 모든 백성의 생활을 직접 살필 수는 없으므로 지방관을 보내어 지역의 행정과 주민들의 생활을 감독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당시 고려의 행정능력을 고려하여 모든 지방에 한꺼번에 관리를 파견하기보다 여러 주와 현을 묶어 단계적으로 관청을 설치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조항을 지방 호족의 수탈을 막고 중앙정부의 지방통치 능력을 강화하려는 정책 건의로 설명한다.[4]
983년 12목 설치
983년(성종 2년) 성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十二牧)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이는 고려의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12목의 설치는 최승로가 제시한 지방관 파견의 필요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최승로 혼자서 12목 제도의 구체적인 행정구역과 관료조직을 모두 설계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성종의 지방제도 개편에는 다른 관료들의 건의와 국가의 행정적 필요도 함께 작용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 호족과 중앙정부
최승로가 지방관의 파견을 건의한 이유는 지방세력을 단순히 억압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지방 호족들이 주민을 부당하게 수탈하는 문제를 지적하며 국가가 직접 주민들의 생활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지방 호족의 영향력이 곧바로 완전히 사라졌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고려에서는 이후에도 지방의 향리와 유력자들이 지역행정과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최승로의 건의와 성종의 12목 설치는 지방에 대한 국가적 통제를 확대하는 과정의 중요한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불교에 대한 입장
최승로는 유교적인 정치질서를 강조했으며, 불교행사와 사찰의 경제적인 활동이 초래한 폐단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를 불교 자체를 폐지하거나 모든 승려를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당시 고려에서는 불교가 왕실과 귀족들의 신앙뿐 아니라 국가적인 의례와 사회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태조 왕건도 불교를 후원했으며, 광종 역시 여러 불교행사를 개최하고 사찰과 승려를 지원했다.
최승로는 이러한 불교적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보다 국왕과 국가가 불교행사에 지나치게 많은 재정과 노동력을 투입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신과 치국
최승로의 정치사상은 불교와 유교의 역할을 구분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는 불교를 개인의 수양과 내세를 위한 가르침으로, 유교를 현실의 국가통치를 위한 원리로 구분했다.
그의 상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문장이 등장한다.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고,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다.
이러한 표현은 최승로가 불교의 종교적인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국왕은 개인적인 신앙활동에 몰두하기보다 현재의 백성들과 국가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최승로가 불교와 유교의 역할을 구분하여 현실의 정치에 유교적인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설명한다.[4]
연등회와 팔관회
최승로는 고려의 대표적인 국가행사였던 연등회와 팔관회에 관해서도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이러한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많은 백성들이 동원되고 국가재정이 지출된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행사에 소요되는 노동력과 비용을 줄여 백성들의 부담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승로가 처음부터 연등회와 팔관회를 모두 영구적으로 폐지하자고 주장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시무 28조 제13조에서는 행사의 규모를 줄이고 백성들의 노동 부담을 완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후 성종 시대에는 불교행사가 억제되었으며, 팔관회가 폐지되는 조치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책은 최승로의 건의와 관련되어 있지만 실제 정책의 범위는 성종의 판단과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었다.
사찰의 고리대금 비판
최승로는 사찰이 보유한 돈과 곡식을 높은 이자로 빌려주는 행위도 비판했다.
시무 28조 제6조에 따르면 당시 일부 사찰은 불보(佛寶)라는 명목으로 확보한 재원을 이용하여 해마다 높은 이자를 받았다.
그는 이러한 행위가 백성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고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사찰이 돈과 곡식을 이용하여 높은 이자를 받는 일을 금지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교리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실제 경제적인 폐단을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찰 건축과 노동력 동원
최승로는 불당과 사찰을 건립하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는 행위에도 반대했다.
당시 일부 사찰은 지방관리들에게 노동력을 요구하거나 종교적인 명분을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는 경우가 있었다.
최승로는 이러한 일이 국가의 정당한 부역보다 더 큰 부담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왕이 종교적인 행사의 공덕을 쌓는 것보다 백성들의 노동력을 보호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교를 없애자는 주장이었나?
최승로의 주장을 불교 탄압론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며, 오랫동안 유지된 일부 국가적인 불교의례는 존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지나친 사찰의 건축과 왕실의 시주, 경제적인 착취와 과도한 의례는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불교의 완전한 폐지보다는 국가의 통치원리를 유교 중심으로 정비하고 불교의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방향에 가까웠다.
노비안검법에 대한 비판
최승로는 광종의 노비안검법에 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남겼다.
956년 광종은 본래 양인이었으나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양인으로 회복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했다.
이러한 정책은 호족이 보유한 노동력과 인적 자원을 줄이고 중앙정부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노비 소유층에게는 상당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주인과 노비 사이의 질서
최승로는 노비안검법이 시행된 이후 주인과 노비 사이의 신분질서가 혼란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양인이 되려는 노비들이 기존의 주인을 모함하거나 소송을 제기하면서 사회적인 분쟁이 증가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많은 허위소송이 발생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통계는 남아 있지 않다.
또한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면, 기존 노비 소유자의 입장에서는 이를 불복종이나 모함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최승로의 설명은 당시의 신분적인 갈등을 보여주는 사료이면서도 기존 지배층의 입장을 반영한 주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무 28조 제22조
최승로는 제22조에서 고려의 양천제와 기존 주종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가 신분에 관한 판결을 신중하게 내려야 하며, 이미 이전에 결정된 신분관계를 반복적으로 재조사하여 분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는 광종의 노비안검법이 기존 신분관계에 지나치게 개입했다고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모든 노비를 이전의 주인에게 무조건 돌려보내야 한다고 직접 주장한 것과는 구분해야 한다.
노비환천법과의 관계
987년(성종 6년)에는 노비환천법이 시행되었다.
이 정책은 양인으로 회복되었던 사람 가운데 옛 주인을 욕하거나 그 친족과 다툰 사람 등을 다시 노비로 환원하도록 했다.
이는 광종의 노비안검법으로 변화했던 신분관계가 기존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후퇴한 사례였다.
최승로의 노비안검법 비판은 이러한 정책 변화의 정치적·사상적 배경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승로가 노비환천법의 구체적인 조항을 직접 작성했다거나 모든 시행과정을 지휘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최승로가 신분질서의 유지와 기존 판결의 존중을 주장했다는 사실과 성종이 987년에 구체적인 환천 규정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중국 문물에 대한 입장
최승로는 고려가 중국의 유교적인 정치제도를 참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고려는 송나라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중국의 관료제도와 유교 경전, 의례와 행정제도 등은 고려가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였다.
그러나 최승로는 중국의 문화를 아무런 검토 없이 모두 모방하는 데에는 반대했다.
제11조의 건의
시무 28조 제11조에서는 유교의 정치윤리와 교육은 중국의 제도를 본받되, 의복과 수레 등의 생활문화는 고려의 풍속과 실정에 맞추어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국가의 통치원리와 일상생활의 풍속을 구분하는 주장이었다.
최승로는 군주와 신하, 부모와 자식 사이의 도덕적인 관계와 유교 경전의 교육은 중국에서 참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모든 생활풍속을 중국과 동일하게 바꾸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를 중국의 모든 제도와 문화를 무조건 추종한 인물로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외교와 무역
시무 28조 제5조에서는 외교사절의 왕래와 무역에 관한 의견을 제시했다.
최승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하되 무역을 위해 지나치게 많은 사절을 파견하거나 불필요한 교역을 확대하는 일을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식적인 외교사절의 교역과 개인적인 거래를 구분하여 관리할 것을 건의했다.
이는 당시의 외교관계가 단순히 정치적인 의례에 그치지 않고 경제적인 부담과도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민생과 국가재정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서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재정적인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는 국왕과 귀족, 사찰과 지방 호족 등이 자신들의 권력과 재산을 이용하여 백성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는 문제를 비판했다.
궁중의 낭비
최승로는 국왕의 시위병과 궁중에서 사육하는 말이 지나치게 많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량과 물자가 필요했으며, 결과적으로 국가재정과 백성들의 부담이 증가할 수 있었다.
그는 실제로 필요한 인원과 물자만 남겨 궁중의 낭비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도한 주택 건축
시무 28조 제17조에서는 신분에 맞지 않는 지나치게 화려한 주택의 건축을 제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최승로는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 지위에 맞지 않는 거대한 집을 짓고 그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노동을 강요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는 당시의 유교적인 신분질서와 절약의 관념을 바탕으로 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재산권이나 개인의 자유에 관한 관념과는 차이가 있다.
섬 주민들의 부담
시무 28조 제12조에서는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부담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부 주민들은 조상의 죄로 섬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국가와 관청이 요구하는 공물과 노동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승로는 이러한 주민들의 부담을 일반적인 지방의 주민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중앙의 정치와 불교행사뿐 아니라 실제 지역주민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민생 안정과 정치적 정당성
최승로는 국왕이 백성들의 노동력과 재산을 지나치게 소모시키면 국가적인 통치질서도 불안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주가 개인적인 복을 얻기 위해 제사를 지내거나 종교적인 행사를 개최하는 것보다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민생 중심의 주장을 현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나 평등주의와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최승로는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신분적인 위계질서와 국왕 중심의 정치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사와 국방
최승로는 고려의 국경방어와 군사제도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했다.
시무 28조 제1조에서는 국경의 요충지를 정비하고 해당 지역의 지형과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을 활용하여 방어체제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한 사람을 선발하고 지휘관을 두어 국경을 지키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중앙에서 많은 군사를 장기간 파견하는 방식보다 현지의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건의였다.
변경의 방어
고려는 건국 이후 북쪽의 여러 세력과 국경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의 방어체제를 정비하고 군사적인 비용을 관리하는 일은 중요한 문제였다.
최승로는 북쪽 국경을 방어하면서도 중앙군의 부담과 군량의 운송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내용은 국방과 재정, 지방행정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의 인식을 보여준다.
중앙 시위병 축소
제3조에서는 광종 시대에 증가한 국왕의 시위병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제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만 남기고 불필요한 인원은 해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유지하는 일보다 효율적인 군사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국왕의 군사력을 완전히 없애려 했다거나 국가적인 군사력을 축소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았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최승로는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면서 실제 국방에 필요한 군사력을 유지하려 했다.
성종의 개혁에 미친 영향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올린 이후 성종은 여러 분야에서 국가체제를 정비했다.
대표적인 변화는 지방관 파견과 유교적인 교육의 확대, 관료제도 정비와 국가의례 개혁 등이었다.
그러나 성종이 시행한 모든 정책이 최승로 혼자서 만든 개혁안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국가적인 제도의 변화에는 여러 관료와 정치세력의 의견, 외부의 정치적 환경과 실제 행정상의 필요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12목 설치
983년 성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이는 최승로가 시무 28조에서 건의한 지방관 파견과 밀접하게 연결된 정책이었다.
중앙정부가 지방의 행정과 주민들을 직접 관리하는 범위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유교적인 정치질서
성종은 유교적인 학문과 정치원리를 국가운영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국가의 의례와 관료제도를 정비하고 유학 교육을 장려했다.
또한 왕권을 유지하면서도 관료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체제를 발전시키려 했다.
이러한 변화는 최승로가 강조했던 유교적인 정치질서와 연결된다.
불교행사의 축소
성종 시대에는 일부 불교행사가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다.
이는 국가재정의 낭비와 백성들의 노동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최승로의 주장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고려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고려는 이후에도 불교가 왕실과 귀족, 사회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국가로 유지되었다.
개혁의 실제 성과
최승로의 건의는 성종의 개혁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지만, 실제로 각 제도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시행되었는지는 별도의 역사적 문제다.
예를 들어 12목을 설치했다고 해서 고려의 모든 지방에 즉시 중앙정부의 관리가 파견되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불교행사를 줄였다고 해서 사찰의 경제적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개혁안의 제출과 제도의 시행, 실제 사회적 변화는 각각 구분하여 평가해야 한다.
문하시랑평장사와 문하수시중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린 이후 성종의 신임을 받아 고위 관직에 올랐다.
983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임명되었다.
문하시랑평장사는 고려의 중앙정부에서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중요한 고위 관직이었다.
988년에는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에 임명되어 고려의 최고위급 관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청하후
988년에는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으며 식읍 700호를 받았다.
이러한 포상은 최승로가 성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당시 조정에서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식읍 700호를 받았다는 사실이 700명의 주민 전체를 사적인 노비로 소유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식읍은 일정한 지역 또는 인구와 관련된 경제적인 혜택을 부여하는 제도로, 노비의 소유와는 구분해야 한다.
은퇴 요청
최승로는 말년에 여러 차례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성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고령이 된 뒤에도 계속 고위 관직을 맡았다는 사실은 성종이 그의 정치적 경험과 조언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망과 사후 추증
최승로는 989년(성종 8년)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자 성종은 크게 슬퍼했으며, 여러 물품을 하사하여 그의 공로를 기렸다.
《고려사》에는 성종이 포 1,000필과 밀가루 300석, 쌀 500석 등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최승로는 사후 태사(太師)에 추증되었다.
이후 998년(목종 원년)에는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033년(덕종 2년)에는 대광 내사령(大匡內史令)이 더해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1]
묘정 배향
묘정 배향은 국왕의 종묘에 공로가 있는 신하를 함께 모셔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제도다.
이는 국가적인 공로를 인정받은 인물에게 부여되는 중요한 사후의 영예였다.
최승로가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성종 시대의 국가체제 정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치사상
최승로의 정치사상은 유교적인 통치원리와 백성들의 생활 안정, 중앙정부의 행정체제 정비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국왕이 개인적인 신앙과 사치에 몰두하기보다 국가를 올바르게 운영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완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지방의 호족들이 주민들을 사적으로 수탈하는 일을 제한하고 중앙정부의 관리가 지방을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주인과 노비, 귀족과 일반인 사이의 신분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사상에는 기존 사회의 문제를 개선하려는 개혁적인 요소와 전통적인 신분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요소가 함께 존재했다.
유교적 군주관
최승로는 국왕이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며,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상벌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국왕의 권력이 중요하더라도 그 권력이 자의적으로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인 군주관과 연결된다.
그는 국왕이 올바른 덕성을 가지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 국가를 오래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고 보았다.
민본적인 성격
최승로의 정치사상에서는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다.
그는 군사적인 동원과 불교행사, 사찰의 경제활동과 지방 호족의 수탈 등이 민생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백성의 생활을 국가운영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민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민본주의가 곧 백성들에게 국왕을 선출할 권리나 정치적인 평등을 보장하는 사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최승로는 국왕과 관료들이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일반 백성들이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는 체제를 주장하지 않았다.
신분적인 보수성
최승로는 기존의 신분질서와 사회적인 위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노비안검법이 주인과 노비 사이의 관계를 혼란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관료와 일반인의 복식, 주택의 규모 등을 신분에 따라 제한할 것을 건의했다.
이러한 점에서 최승로의 개혁사상은 기존의 사회계층과 신분제도를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국가의 행정과 민생을 개선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광종과 최승로의 비교
광종과 최승로는 고려 초기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정치적인 접근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광종은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호족과 공신들을 직접적으로 견제했다.
반면 최승로는 국왕의 권한을 유지하면서도 유교적인 정치질서와 관료제도, 지방행정의 정비를 강조했다.
| 구분 | 광종 | 최승로 |
|---|---|---|
| 활동 시기 | 949~975년 재위 | 성종 시대에 주요 정치활동 |
| 정치적인 방향 | 강력한 왕권 확립과 기존 세력 견제 | 유교적인 국가운영 원리와 행정제도 정비 |
| 대표적인 정책·건의 |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공복제도 | 시무 28조, 지방관 파견과 민생안정 건의 |
| 호족에 대한 입장 |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약화하려 함 | 호족의 지방수탈을 견제하면서도 기존 신분질서를 중시 |
| 노비안검법 | 시행 | 기존 주종관계의 혼란을 이유로 비판 |
| 불교와 국가운영 | 불교행사와 승려 지원을 적극적으로 추진 | 과도한 불교행사와 사찰의 경제적 폐단을 비판 |
| 주요 특징 | 강력한 왕권 중심의 개혁 | 유교적인 통치원리와 관료제 중심의 개혁 |
그러나 두 사람을 단순히 개혁가와 반개혁가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최승로 역시 지방 호족의 전횡과 국가재정의 낭비를 비판했으며, 광종도 과거제도와 관료제도 정비 등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에 기여한 정책을 시행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차이는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했는가 하는 문제뿐 아니라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원칙에 따라 개혁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역사적 평가
유교 정치이념의 정립
최승로는 고려가 후삼국 통일 이후의 정치적인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적인 국가체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유교적인 통치원리를 제시했다.
그의 시무 28조는 행정과 외교, 군사와 사회질서, 국가재정과 종교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었다.
이는 단순히 한 가지 정책을 건의한 것이 아니라 고려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종합적인 국가운영 구상을 제시한 것이었다.
지방통치제도 정비
최승로의 지방관 파견 건의는 성종의 12목 설치와 관련된 중요한 정책으로 평가된다.
고려의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확대하고 호족의 전횡을 제한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다만 실제 지방제도의 발전은 여러 국왕과 관료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추진한 정책의 결과였다.
따라서 고려의 지방행정제도가 최승로 한 사람의 건의로 완성되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민생에 대한 관심
최승로는 불교행사와 사찰의 고리대금, 지방 호족의 수탈과 지나친 군사동원 등을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국가적인 통치질서도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건의는 당시 백성들이 겪었던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노비제도에 관한 한계
최승로는 광종의 노비안검법을 비판하면서 기존의 양천제와 주종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는 그의 정치사상이 기존 신분질서의 유지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최승로의 개혁정책을 현대적인 인권과 신분적 평등을 지향한 정책으로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역사적인 기록의 한계
최승로의 생애와 정치적 활동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의 사료를 통해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과 광종·경종 시대의 구체적인 활동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시무 28조 가운데 여섯 조항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정치사상과 정책 건의를 평가할 때에는 남아 있는 기록과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주요 연혁
| 연도 | 사건 |
|---|---|
| 927년 | 신라 경주에서 출생 |
| 927년 | 견훤의 서라벌 공격. 《삼국유사》에 최승로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함 |
| 935년 |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아버지 최은함과 함께 개경으로 이주 |
| 약 938년 | 12세 무렵 태조 왕건 앞에서 《논어》를 읽고 재능을 인정받아 원봉성학생이 됨 |
| 949년 | 광종 즉위 |
| 956년 | 광종이 노비안검법 시행 |
| 958년 | 광종이 과거제도 시행 |
| 975년 | 광종 사망, 경종 즉위 |
| 981년 | 성종 즉위 |
| 982년 6월 | 성종에게 오조정적평과 시무 28조 제출 |
| 983년 | 문하시랑평장사 임명 |
| 983년 | 성종이 12목 설치 및 지방관 파견 |
| 987년 | 성종이 노비환천법 시행 |
| 988년 | 문하수시중 임명, 청하후에 봉해짐 |
| 989년 | 사망, 태사에 추증 |
| 998년 | 성종 묘정에 배향 |
| 1033년 | 대광 내사령 추증 |
여담
- 최승로는 927년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989년 사망했다.
- 아버지 최은함은 신라의 6두품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 따라서 최승로는 신라 말의 지식인 가문이 고려의 새로운 관료사회로 편입된 사례 가운데 하나다.
- 《삼국유사》에는 갓난아기였던 최승로가 관음보살의 보호로 견훤의 공격에서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 그러나 이는 불교적인 영험담으로, 기록의 모든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는 없다.
- 12세 때 태조 왕건 앞에서 《논어》를 읽어 재능을 인정받았다고 전해진다.
- 982년 성종에게 오조정적평과 시무 28조를 올리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 시무 28조는 원래 28개 조항이지만 오늘날에는 22개만 전해진다. 나머지 6개는 소실되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 오조정적평은 태조부터 경종까지 다섯 국왕의 정치를 평가한 글로, 시무 28조와는 구분된다.
- 최승로는 태조의 정치를 높이 평가했지만 광종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 그는 광종의 노비안검법이 기존의 주종관계를 혼란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노비를 보유한 기존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 최승로는 지방관을 파견하여 호족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일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는 성종의 983년 12목 설치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 그는 불교행사와 사찰의 경제적인 폐단을 비판했지만 불교 자체를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 유교를 현실의 국가통치에 적합한 원리로 보고 불교는 개인의 수양에 관한 가르침으로 이해했다.
- 또한 중국의 유교적인 통치원리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생활풍속까지 모두 중국식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 최승로는 국왕의 과도한 지출과 사찰의 고리대금, 호족의 수탈 등을 비판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 반면 신분에 따른 복식과 주택의 제한, 노비제도와 기존의 위계질서를 중시했다.
- 따라서 그의 사상에는 개혁적인 요소와 신분적인 보수성이 함께 존재했다.
- 988년 문하수시중에 임명되었으며 청하후에 봉해졌다.
- 989년 사망한 뒤 태사에 추증되었고, 998년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최승로의 정치사상은 고려가 건국 초기의 호족연합적인 성격을 벗어나 보다 체계적인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그러나 그가 추구한 개혁은 기존의 신분제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인 정치질서 안에서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