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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고려의 인물, 사건, 제도, 문화 및 기타 관련 내용을 다룹니다.

개요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은 987년(성종 6년) 고려에서 시행한 신분제도 관련 법령으로, 광종 시대에 노비안검법 등을 통해 양인으로 회복되었던 사람 가운데 일정한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을 다시 노비 신분으로 환원하도록 한 정책이다.

환천(還賤)은 문자 그대로 천한 신분으로 되돌린다는 의미다. 여기서 천(賤)은 고려시대의 법제상 신분구분인 양천제에서 천인(賤人)을 가리키며, 노비환천법에서는 양인으로 회복되었던 사람을 다시 이전의 주인에게 예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956년 광종은 본래 양인이었으나 전쟁이나 호족의 강압 등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신분을 회복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했다. 이 정책은 호족이 보유한 노동력과 사적인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의 통치 기반을 확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비를 소유하던 호족과 공신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발했다. 광종의 왕비였던 대목왕후까지 정책의 중단을 건의했으며, 광종이 사망한 이후에는 기존 지배층의 불만이 더욱 커졌다.

982년(성종 원년)에는 최승로가 성종에게 글을 올려 노비안검법의 폐단을 비판했다. 그는 양인과 천인의 신분질서가 무너지면서 노비들이 기존의 주인을 업신여기고 사회질서가 혼란해졌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종은 987년 7월 교서를 내려, 양인으로 회복되었던 노비가 옛 주인을 욕하거나 그 주인의 친족과 다툰 경우 다시 노비로 환원하여 부리도록 했다. 또한 주인을 대신하여 전쟁에 참여하거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한 노비는 공로를 심사하고 나이가 40세를 넘은 경우에 한하여 면천을 허용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그러나 노비환천법이 시행되면서 광종이 해방했던 모든 노비가 자동적으로 다시 노비가 되었다는 설명은 부정확하다. 실제 사료에는 특정한 환천 사유와 면천 조건이 명시되어 있으며,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분을 되돌려졌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현종 시대인 1013년에는 환천된 노비가 다시 양인 신분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 장형을 가하고 얼굴에 낙인을 새긴 뒤 원래 주인에게 돌려보내도록 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노비환천법은 고려 초기 왕권 강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신분제도의 변화가 기존 지배층의 반발로 후퇴한 사례로 평가된다. 이는 동시에 고려의 국가권력이 노비의 신분과 주인의 권리를 법률로 규정하고 통제하려 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노비환천법을 광종의 노비안검법으로 노비를 잃은 지배층이 인적·물적 손실을 회복하려는 요구를 관철한 결과로 설명한다.[1]

노비안검법이 호족에게 예속되어 있던 사람을 국가의 양인으로 되돌리려는 정책이었다면, 노비환천법은 그 가운데 일부를 다시 옛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제도였던 것이다.

기본 정보

노비환천법
한자 奴婢還賤法
시행 국가 고려
시행 연도 987년 (성종 6년)
시행 국왕 성종
제도 성격 신분 환원 및 노비 소유관계 보호 정책
주요 내용 일정한 사유에 해당하는 면천자의 노비 신분 환원
환천 사유 옛 주인에 대한 욕설, 주인의 친족과의 다툼 등
면천 관련 규정 공로 심사 및 40세 초과 등의 조건
정치적 배경 노비안검법에 대한 호족·공신·귀족층의 반발
주요 관련 인물 성종, 광종, 최승로, 대목왕후
후속 조치 1013년(현종 4년) 환천된 노비의 재소송 처벌 규정
주요 사료 《고려사》 형법지, 《고려사절요》

명칭

노비환천법은 한자로 奴婢還賤法이라고 표기한다.

노비(奴婢)는 신분적으로 주인에게 예속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노(奴)는 남자 종을, 비(婢)는 여자 종을 가리키며 두 글자를 함께 사용하여 남녀 노비를 통칭했다.

환천(還賤)은 천인 신분으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양인으로 회복되었던 사람을 다시 노비로 만드는 조치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면천(免賤) 또는 종량(從良)과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다.

용어 한자 의미
면천 免賤 천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됨
종량 從良 양인의 신분을 얻거나 양인으로 편입됨
방량 放良 노비를 풀어 양인이 되게 함
환천 還賤 양인이 되었던 사람을 다시 천인의 신분으로 되돌림
속량 贖良 대가를 치르는 등의 방법으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남

다만 《고려사》에 오늘날의 법률처럼 '노비환천법'이라는 제목으로 독립된 완전한 법전이 수록된 것은 아니다. 현재 이 이름은 성종의 환천 관련 교서와 이후의 신분제도 운영을 설명하는 역사적인 명칭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당시에 어떤 규정이 적용되었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하려면 《고려사》 형법지 등에 수록된 개별 교서와 판결 규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적 배경

신라 말과 후삼국시대

9세기 후반 신라의 중앙집권적인 통치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유력자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지역의 토지와 주민을 통제하고 군사조직을 운영하면서 호족으로 성장했다. 또한 후삼국시대의 전쟁과 정치적인 혼란을 이용하여 많은 토지와 노동력을 확보했다.

전쟁 포로가 된 사람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 사람 가운데 일부는 노비 신분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노비는 노동력인 동시에 소유자의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므로 노비를 많이 보유한 호족은 경제적으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일부 예속민은 호족의 사적인 군사조직에 동원되기도 했다.

따라서 노비의 소유관계는 개인적인 노동력 확보를 넘어 지방세력의 정치적·군사적 영향력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태조의 호족 포섭

918년 왕건은 고려를 건국했다.

그는 여러 호족과 협력하면서 후삼국을 통일했으며, 936년 통일을 완성한 이후에도 호족들의 협조를 필요로 했다.

이에 따라 태조는 지방의 유력자들을 일방적으로 제거하기보다 관직과 혼인관계, 정치적인 혜택 등을 통해 새로운 왕조에 편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에서는 호족들이 기존에 보유한 토지와 노비를 상당 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고려의 통일과 초기 국가체제 형성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국왕이 지방세력을 완전히 통제하기는 어렵게 만드는 요인도 되었다.

최승로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역시 전쟁 포로를 양인으로 회복시키려 했지만 공신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전면적인 조치를 시행하지 못했다.

광종의 왕권 강화

949년 왕위에 오른 광종은 호족과 공신들의 영향력을 줄이고 국왕 중심의 통치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956년 노비안검법을 실시하고, 958년에는 과거제도를 시행했으며, 960년에는 관리들의 공복제도를 정비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시행되었지만 기존의 지방세력과 공신들이 독점하던 권력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공유했다.

그러나 광종의 개혁은 기존 지배층에게 상당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노비안검법은 호족과 공신들이 보유한 노비의 소유관계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크게 충돌했다.

노비안검법

956년 광종은 노비의 신분을 조사하여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본래 양인이었으나 전쟁과 강압 등으로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양인으로 회복된 사람들은 기존의 주인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되지 않게 되었으며, 국가의 조세와 역을 부담할 수 있는 인구로 편입될 가능성이 있었다.

반면 노비를 보유하던 호족들은 자신들의 노동력과 재산을 잃을 수 있었다.

기존 지배층의 불만

노비안검법은 호족과 공신들의 이해관계를 직접적으로 건드렸다.

당시 호족들에게 노비는 농업생산과 사적인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노비가 양인으로 회복되면 이전처럼 개인적인 소유물로 부릴 수 없게 되므로 호족들은 경제적인 손해를 입을 수 있었다.

또한 양인이 된 사람들이 옛 주인을 상대로 신분적인 권리를 주장하거나 소송을 제기할 경우 기존의 주종관계에도 변화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지배층은 노비안검법을 자신들의 권리와 사회적인 질서를 위협하는 정책으로 인식했다.

대목왕후의 반대

광종의 왕비였던 대목왕후도 노비안검법에 반대했다.

《고려사》 대목왕후 열전에는 광종이 노비를 조사하여 시비를 판단하도록 하자 대목왕후가 간절하게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은 노비안검법에 대한 반발이 지방 호족뿐 아니라 왕실 내부에서도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목왕후가 실제로 어떤 이유를 들어 반대했는지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부족하다.

따라서 그녀가 모든 노비의 신분 회복 자체를 부정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적인 반발과 사회적인 갈등을 우려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광종 사후의 변화

975년 광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했다.

경종 시대에는 광종의 강압적인 정치와 개혁정책에 대한 반발이 커졌으며, 노비안검법 역시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경종 즉위 이후 노비안검법이 폐지되었으며, 성종 시대에는 해방된 노비 가운데 일부가 다시 노비 신분으로 환원되었다고 설명한다.[2]

그러나 노비안검법이 폐지된 뒤 실제 신분관계가 어떤 절차로 정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사료가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광종이 죽은 즉시 해방된 사람들이 모두 노비로 되돌아갔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최승로의 비판

노비환천법의 시행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물은 최승로다.

최승로는 고려 전기의 문신으로, 성종 시대에 국가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982년 성종 원년 6월에는 성종에게 상서문을 올려 국가의 통치 방향에 관한 의견을 제시했다.

이 문서에서는 역대 국왕들의 정책을 평가했으며, 시무 28조를 통해 고려가 시행해야 할 정책을 건의했다.

최승로는 광종의 노비안검법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양천질서의 유지

최승로는 고려의 양인과 천인 사이의 신분질서가 오래전부터 유지되어 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광종이 노비의 신분을 조사하면서 기존의 주인과 노비 사이의 관계가 흔들렸다고 주장했다.

또한 양인으로 회복된 노비들이 기존의 주인을 모함하거나 귀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일이 발생했다고 비판했다.

최승로는 노비와 주인 사이의 신분적 위계질서를 유지해야 국가와 사회가 안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주장은 고려 초기의 지배층이 노비의 노동력뿐 아니라 신분적인 복종관계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태조와 광종의 비교

최승로는 태조 왕건이 건국 초기에 전쟁 포로를 양인으로 풀어주려 했지만 공신들의 반발을 우려해 이를 제한적으로 시행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광종은 노비를 조사하여 신분을 회복시키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공신들의 원망을 불러일으켰다고 비판했다.

그는 광종이 무리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정치적인 혼란과 반발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승로의 이러한 설명에는 기존 지배층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양인으로 회복된 사람에게는 정당한 신분 회복이었더라도 기존의 주인에게는 자신의 재산과 노동력을 상실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최승로 기록의 한계

최승로가 노비안검법을 비판했다는 사실이 곧 노비안검법의 실제 효과가 모두 부정적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의 기록에는 기존 주인을 모함하거나 허위로 신분을 주장한 사람이 많았다는 설명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례가 발생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통계는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최승로는 성종에게 새로운 정책을 건의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상서문은 당시 지배층의 불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면서도 특정한 정치적 관점을 반영한 주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최승로의 건의가 성종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논의되고 받아들여졌는지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고 설명한다.[3]

987년 노비환천법의 시행

987년(성종 6년) 7월 성종은 노비의 면천과 환천에 관한 교서를 내렸다.

이 교서는 《고려사》 권85, 지 권39 형법2의 노비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 정부는 양인으로 회복된 노비가 옛 주인을 경멸하거나 신분적인 질서를 위반하는 일을 막으려 했다.

교서에는 특정한 행동을 한 사람을 다시 천인의 신분으로 되돌려 부리도록 하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옛 주인에 대한 욕설

환천 사유 가운데 하나는 이전의 주인을 욕하는 행위였다.

양인으로 회복된 사람이 과거의 주인을 모욕한 경우 다시 노비로 환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법률과 비교하면 매우 강한 신분적인 제재였다.

단순히 상대방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벌금이나 형벌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유로운 신분 자체를 박탈하고 다시 종속적인 관계에 놓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정은 당시의 국가가 기존의 주종관계와 신분적인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주인의 친족과의 다툼

또 다른 환천 사유는 과거 주인의 친족과 다투는 행위였다.

양인으로 회복된 사람이 이전 주인의 친족과 분쟁을 벌인 경우에도 다시 노비로 환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종류의 분쟁이 환천 사유에 해당했으며 어느 정도의 증거가 필요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모든 사소한 말다툼이 곧바로 노비 신분의 환원으로 이어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법령 자체가 옛 주인과 그 친족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환천과 사역

노비환천법은 환천된 사람을 다시 주인에게 소속시켜 노동력을 제공하도록 했다.

즉 단순히 사회적인 지위가 낮아지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노동관계와 소유관계까지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정책은 기존 노비 소유층의 경제적인 권리를 보호하고 회복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환천되었으며 환천된 뒤 어떤 노동을 수행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부족하다.

《고려사》의 원문

노비환천법의 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료는 《고려사》 권85의 형법지다.

987년 7월 성종이 내린 교서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기록되어 있다.

若有罵本主, 又與本主親族相抗者, 還賤役使.

이는 옛 주인을 욕하거나 그 주인의 친족과 서로 다툰 사람이 있다면 다시 천인으로 환원하여 부리라는 의미다.

같은 교서에는 주인을 대신하여 수로로 전쟁에 참여하거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한 노비에 대한 면천 규정도 함께 등장한다.

이러한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4]

987년이라는 연도

일반적인 역사서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사편찬위원회의 사료 연대 목록에서는 노비환천법의 시행을 987년(성종 6년)으로 기록한다.

다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해당 개별 기록에서는 일자 항목이 987년으로 되어 있으면서도 국역문 괄호에 988년으로 표시되는 차이가 있다.

성종 원년은 982년이므로 성종 6년은 987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본 문서에서는 사료의 연대 목록과 통용되는 역사연구상의 표기인 987년을 사용한다.

공로에 따른 면천

노비환천법은 노비를 다시 천인의 신분으로 되돌리는 규정뿐 아니라 일부 노비의 면천 조건도 함께 규정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신분제도가 단순히 모든 노비의 해방을 금지하는 방식으로만 운영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면천이 허용되는 조건은 제한적이었다.

주인을 대신한 군사적 공로

교서에는 노비가 자신의 주인을 대신하여 수로로 전쟁에 참여한 경우가 등장한다.

당시 국가는 전쟁이나 군사적인 활동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해야 했으며, 특정한 사람이 주인을 대신하여 군사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종은 이러한 공로가 있는 노비에 대하여 일정한 절차를 거쳐 면천을 허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전쟁에 한 번 참여하기만 하면 누구나 자동으로 양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이 담당 관청에 공로를 신고하고, 국가가 그 공로를 심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3년 동안의 여묘살이

여묘(廬墓)는 무덤 근처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상례를 지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성종의 교서에서는 노비가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한 경우에도 공로를 심사하여 면천을 허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당시의 유교적인 윤리와 상례가 신분제도의 운영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여 면천된 노비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40세 초과 조건

노비가 군사적 공로나 여묘살이 등의 조건을 충족했다고 해서 무조건 양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성종의 교서에서는 주인이 담당 관청에 보고하고 공로를 심사한 뒤, 40세가 넘은 사람에 한하여 면천을 허용한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면천의 허용 여부에는 노비의 공로뿐 아니라 나이와 주인의 신고, 국가의 심사 등이 영향을 미쳤다.

이 조항은 공로에 따른 제한적인 면천을 허용하면서도 노비 소유자의 권리와 기존의 신분질서를 보호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노비 소유자의 권리 보호

노비환천법의 시행은 당시 지배층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고려의 노비는 소유자의 노동력과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며, 상속과 증여, 매매 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노비를 잃는 일은 기존 소유자에게 경제적인 손실로 인식될 수 있었다.

노동력의 회복

광종의 노비안검법으로 일부 노비가 양인으로 회복되면서 호족과 공신들은 기존에 보유하던 노동력을 잃었다.

노비환천법은 일정한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을 다시 이전의 주인에게 환원함으로써 이러한 손실을 일부 회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로 환천된 사람의 규모가 확인되지 않으므로 노비 소유층의 경제력이 얼마나 회복되었는지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다.

주종관계의 강화

노비환천법은 주인과 노비 사이의 신분적인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기존 주인을 모욕하거나 그 친족과 다툰 사람을 다시 노비로 만들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신분적인 복종을 강제하는 성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정은 국가가 신분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신분을 박탈하는 강한 제재를 사용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986년 도망 노비 관련 규정

노비환천법이 시행되기 전인 986년(성종 5년) 7월에는 다른 사람의 도망친 노비를 숨겨 자신의 노비로 부린 사람에 관한 규정도 마련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타인의 도망 노비를 몰래 숨겨 부린 사람은 일정한 기준에 따라 원래 주인에게 보상을 해야 했다.

원문에는 하루에 포 30척을 보상하되 전체 보상액이 노비의 원래 가격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규정은 노비의 소유관계를 법률적으로 보호하고 분쟁을 통제하려 했다는 점에서 987년의 환천 규정과 같은 신분제도 정비의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다만 986년의 도망 노비 관련 규정과 987년의 노비환천법은 서로 다른 시기에 내려진 교서이므로 하나의 동일한 법조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5]

현종 시대의 강화

노비환천법과 관련된 신분제도의 통제는 성종 이후에도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는 1013년(현종 4년)에 마련된 처벌 규정이다.

이 시기에는 환천된 노비가 다시 양인 신분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하는 일을 제한했다.

재소송의 금지

《고려사》 형법지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기록되어 있다.

還賤奴婢, 更訴良者, 杖之鈒面, 還主.

이는 환천된 노비가 다시 양인 신분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할 경우 장형을 가하고 얼굴에 낙인을 새긴 뒤 주인에게 돌려보내라는 의미다.

이 규정은 환천된 노비가 다시 신분 회복을 시도하는 것을 강하게 억제하려는 조치였다.

이전에는 일정한 조건 아래 양인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존재했지만, 환천된 사람에게는 그러한 주장을 다시 제기하는 행위 자체가 처벌의 대상이 된 것이다.[6]

장형

장형(杖刑)은 곤장과 같은 도구로 사람을 때리는 형벌을 가리킨다.

고려시대의 형벌체계에서는 신체적인 처벌이 다양한 형태로 시행되었다.

현종의 규정에서는 환천된 노비가 양인으로 회복되기 위한 소송을 다시 제기하는 경우 장형을 가하도록 했다.

그러나 원문의 해당 조항에는 장형의 구체적인 횟수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일정한 횟수의 곤장을 쳤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삽면

삽면(鈒面)은 얼굴에 글자나 표시를 새기는 형벌이다.

일반적으로 얼굴의 피부에 상처를 내고 먹물 등을 넣어 표식을 남기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이는 처벌받은 사람에게 신체적인 고통을 가할 뿐 아니라 이후에도 신분이나 범죄 이력이 드러나게 만드는 제재였다.

현종의 규정은 환천된 노비가 다시 양인으로 회복되기 위해 소송하는 것을 매우 강하게 억제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후속 조치의 의미

1013년의 규정은 987년의 노비환천법 이후에도 신분을 둘러싼 분쟁이 계속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환천된 사람이 양인 신분을 다시 주장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소송을 처벌하는 규정을 별도로 마련할 필요도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만으로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송을 제기했으며 어느 정도의 처벌을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법령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실제로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시행되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고려의 양천제

노비환천법은 고려의 양천제와 관련된 정책이다.

양천제는 사람을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는 신분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고려의 실제 사회계층은 양인과 천인이라는 두 가지 법적인 구분만으로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양인 내부에서도 관직과 가문, 경제적인 능력과 지역적인 조건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랐으며, 천인과 노비 역시 소속과 노동형태 등에 차이가 존재했다.

양인

양인은 법적으로 노비 신분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양인은 국가의 조세와 역을 부담하는 기본적인 인구집단이었다.

그러나 양인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하거나 경제적으로 충분한 재산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토지와 재산이 부족한 양인은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생활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광종의 노비안검법으로 양인 신분을 회복했다는 사실과 해당 인물이 곧바로 경제적인 자립을 달성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천인과 노비

천인은 양인과 구분되는 신분으로, 대표적으로 노비가 포함되었다.

노비는 법률적으로 주인에게 예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노비는 소유관계와 노동방식에 따라 여러 형태로 구분될 수 있었다.

고려에서는 국가와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가 존재했다.

노비환천법은 이러한 신분적 예속관계를 보호하거나 복구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주노지분

주노지분(主奴之分)은 주인과 노비 사이의 신분적 구분과 위계질서를 의미한다.

최승로는 노비안검법을 비판하면서 주인과 노비 사이의 구분이 무너지면 국가적인 질서가 혼란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종의 노비환천법 역시 이러한 질서를 강화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노지분은 당시의 신분제도에 근거한 개념이므로 오늘날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법률적 관념과는 구분해야 한다.

노비안검법과의 비교

노비환천법은 광종의 노비안검법과 반대되는 방향의 신분정책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두 법률의 구체적인 목적과 시행 대상에는 차이가 있다.

구분 노비안검법 노비환천법
시행 연도 956년 987년
시행 국왕 광종 성종
주요 내용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의 신분 조사와 양인 회복 특정한 사유에 해당하는 면천자의 노비 신분 환원
정치적 배경 호족 견제와 왕권 강화 지배층의 반발과 신분질서 정비
직접적인 효과 일부 노비의 양인 회복 일부 양인의 노비 신분 환원
노비 소유층에 미친 영향 기존 노동력과 소유권 감소 가능성 기존 소유관계의 회복과 보호
노비제도의 폐지 여부 폐지하지 않음 폐지하지 않음
사료상의 한계 실제 해방된 사람의 수를 알 수 없음 실제 환천된 사람의 수를 알 수 없음

왕권 강화와 기존 지배층

광종은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시행했다.

반면 성종은 기존의 신분질서를 정비하고 지배층의 불만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노비환천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를 광종은 언제나 백성의 편이었고 성종은 언제나 호족의 편이었다는 식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시행하면서도 다른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과 강압적인 통치를 추진했다.

성종 역시 12목 설치와 지방관 파견, 유교적인 통치제도 정비 등을 통해 중앙정부의 행정력을 강화했다.

따라서 두 국왕의 전체적인 정치방향을 이해하려면 노비정책뿐 아니라 다른 개혁과 행정제도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해방과 환원의 규모

노비안검법과 노비환천법 모두 시행 규모에 관한 자료가 부족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광종 시대에 양인으로 회복되었으며,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종 시대에 다시 노비가 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두 법률의 시행 결과를 정확한 숫자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또한 성종 시대에 환천된 사람들과 광종 시대에 양인으로 회복된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집단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다만 노비환천법이 광종의 노비안검법으로 나타난 신분질서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성종의 개혁정책과의 관계

성종은 고려 제6대 국왕으로, 981년 즉위했다.

그는 최승로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적인 통치질서를 정비하고 중앙정부의 행정능력을 확대하려 했다.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12목 설치와 지방관 파견, 관료제도 정비 등이 있다.

12목 설치

983년(성종 2년) 성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이는 지방 호족들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중앙정부의 명령을 지방에 전달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성종 역시 지방세력을 통제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강화하려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노비환천법을 시행했다는 사실만으로 성종이 광종의 모든 왕권 강화 정책을 부정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유교적 통치질서

성종은 유교적인 정치사상을 국가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국가의 의례와 교육,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국왕과 관료의 관계를 체계화하려 했다.

이러한 정책에는 사회적인 신분질서와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관념도 반영되었다.

노비환천법은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기존의 주종관계를 보호하고 신분적인 분쟁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개혁의 선택적 계승

성종은 광종의 정책을 모두 폐지하거나 이전의 상태로 되돌린 것은 아니었다.

광종이 시행한 과거제도는 이후에도 관료 선발의 중요한 제도로 유지되었다.

반면 노비안검법은 기존의 지배층의 강한 반발을 받아 후퇴했다.

따라서 고려 초기의 제도변화를 이해할 때에는 하나의 국왕이 시행한 정책 전체가 후대에 그대로 계승되거나 전면적으로 폐지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정책마다 실제 이해관계와 국가 운영상의 필요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후의 노비제도

노비환천법 이후에도 고려에서는 노비의 신분과 소유관계, 혼인과 도망 등에 관한 여러 법률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령이 모두 987년 노비환천법의 직접적인 연장선에서 만들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정치적인 상황과 국가의 신분제도 운영방식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1039년 천자수모법

1039년(정종 5년)에는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이 제정되었다.

이는 자녀의 천인 신분을 결정할 때 어머니의 신분을 기준으로 삼는 원칙과 관련된 법률이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의 양천제와 노비 신분의 세습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1039년의 규정과 987년의 노비환천법은 서로 다른 목적과 시기에 마련된 제도이므로 동일한 법률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1049년 도망 노비 처벌

1049년(문종 3년)에는 공노비와 사노비가 세 차례 도망친 경우 얼굴에 낙인을 새기고 원래 주인에게 돌려보내도록 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는 국가가 노비의 도망을 억제하고 기존의 소유관계를 보호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이 실제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시행되었는지는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려 후기의 신분 변화

고려 후기에는 무신정권과 몽골의 침입, 정치적인 혼란과 사회경제적 변화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신분관계가 변화하거나 신분적인 상승을 추구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또한 노비의 신분을 둘러싼 소송과 분쟁이 중요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강력한 환천과 노비 통제정책에도 불구하고 고려 후기에 노비의 정치적·사회적 진출과 신분상의 변화가 계속되었다고 설명한다.[1]

이는 국가가 신분을 법률로 통제하려 했더라도 실제 사회의 변화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료상의 한계

노비환천법은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신분정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시행 규모와 적용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부족하다.

《고려사》 형법지에는 법령의 주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행정절차와 판결 사례가 충분히 남아 있지는 않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문제는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 노비환천법으로 실제 신분이 환원된 사람의 수
  • 양인으로 회복되었던 사람 가운데 환천된 비율
  • 각 지역에서 실제로 법률을 집행한 기관과 관리
  • 옛 주인에 대한 욕설과 친족 간 분쟁의 구체적인 판단기준
  • 법률에 따른 실제 처벌 사례와 적용 빈도
  • 환천된 사람들의 경제적인 생활과 가족관계의 변화
  • 기존 노비 소유층이 회복한 노동력과 경제적인 이익의 규모

또한 노비환천법에 관한 기록은 후대인 조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사》를 통해 전해진다.

따라서 당시의 법령이 어떤 방식으로 보존되었으며 조선의 편찬자들이 원래의 내용을 어떻게 정리했는지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고려사》가 후대에 편찬된 역사서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실제로 이 책은 고려시대의 역사와 법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이며, 다른 기록들과 비교하여 활용할 수 있다.

역사적 평가

노비안검법의 후퇴

노비환천법은 광종이 시행했던 노비안검법의 효과가 기존 지배층의 반발로 제한된 사례로 평가된다.

노비안검법은 본래 양인이었던 사람들의 신분을 회복시키려 했지만, 이러한 변화는 기존 노비 소유층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충돌했다.

성종 시대의 노비환천법은 일부 면천자를 이전의 노비 신분으로 되돌릴 수 있도록 하면서 기존 소유자의 권리를 강화했다.

이러한 점에서 노비환천법은 광종의 신분정책이 후대에 그대로 유지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배층의 이해관계

노비환천법의 시행에는 귀족과 호족 등 기존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들은 노비의 소유관계를 통해 경제적인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양인으로 회복된 사람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노비환천법은 단순한 사회질서의 정비뿐 아니라 지배층의 경제적인 손실을 회복하는 역할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모든 노비 소유자가 같은 정도의 이익을 얻었다거나 국가재정이 어느 정도 감소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국가권력과 신분제

노비환천법은 국가가 사람의 신분과 주종관계를 법률로 규정하고 통제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양인 신분을 회복했던 사람이 옛 주인을 모욕하거나 친족과 다투었다는 이유로 다시 노비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은 당시의 법적 질서에서 신분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를 오늘날의 법률과 직접 비교하여 동일한 사회적 조건에서 시행된 법률처럼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고려의 신분제도는 현대적인 시민권과 평등권이 확립되기 이전의 사회구조를 바탕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의 제도를 이해한다는 사실이 그 제도에 포함된 신분적인 차별과 예속관계를 정당화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분질서의 지속

노비환천법의 시행 이후에도 고려의 노비제도는 지속되었다.

국가는 노비의 신분과 혼인, 상속과 소유관계, 도망과 소송 등에 관한 여러 규정을 마련했다.

그러나 실제 사회에서는 신분적인 변화와 소송, 권력구조의 변화가 계속되었다.

따라서 노비환천법은 고려의 신분제도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신분을 둘러싼 이해관계와 분쟁이 국가적인 법률의 제정으로 이어질 정도로 중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사 교육에서

노비환천법은 노비안검법과 함께 고려 초기의 정치적 변화를 설명할 때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광종의 왕권 강화와 성종의 통치체제 정비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다룬다.

연도 사건 주요 의미
949년 광종 즉위 호족 견제와 왕권 강화 정책 추진
956년 노비안검법 부당한 노비 신분의 조사와 양인 회복
958년 과거제도 시행 새로운 관료 선발 체제 정비
975년 경종 즉위 광종의 개혁에 대한 반발 확대
981년 성종 즉위 유교적인 통치질서와 중앙 행정체계 정비
982년 최승로의 상서문 노비안검법의 폐단 비판
987년 노비환천법 특정한 조건에 해당하는 면천자의 노비 신분 환원
1013년 현종의 재소송 처벌 규정 환천 노비의 신분 회복 요구에 대한 처벌 강화

노비안검법과 노비환천법을 비교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두 법률이 모두 노비제도 자체를 폐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광종은 본래 양인이었다가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하여 신분을 회복시켰고, 성종은 일정한 조건 아래 그 신분을 다시 이전 상태로 돌릴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956년 모든 노비가 해방되었고 987년 모든 노비가 다시 노비가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실제 역사적인 내용과 차이가 발생한다.

주요 연혁

연도 사건
918년 왕건이 고려 건국
936년 고려의 후삼국 통일
949년 광종 즉위
956년 광종이 노비안검법 시행
958년 광종이 과거제도 시행
960년 광종이 공복제도 정비
975년 광종 사망, 경종 즉위
981년 성종 즉위
982년 최승로가 노비안검법의 폐단을 비판하는 상서문을 올림
983년 성종이 12목 설치 및 지방관 파견
986년 타인의 도망 노비를 숨겨 부린 사람에 대한 처벌·보상 규정 마련
987년 7월 성종이 면천자의 환천에 관한 교서 발표
1013년 현종이 환천된 노비의 재소송에 장형과 삽면을 적용하도록 규정
1039년 정종 시대 천자수모법 제정
1049년 문종 시대 세 차례 도망한 공사노비의 처벌 규정 마련

여담

  • 노비환천법은 987년(성종 6년)에 시행된 고려의 신분제도 관련 정책이다.
  • 956년 광종이 시행한 노비안검법과 반대되는 방향의 정책으로 알려져 있다.
  • 그러나 노비안검법이 모든 노비를 해방한 법이 아니듯 노비환천법도 모든 면천자를 일괄적으로 다시 노비로 만든 법은 아니었다.
  • 982년 최승로는 광종의 노비안검법으로 주인과 노비 사이의 신분질서가 혼란해졌다고 비판했다.
  • 성종의 987년 교서에서는 옛 주인을 욕하거나 주인의 친족과 다툰 사람을 다시 노비로 환원하도록 했다.
  • 주인을 대신하여 전쟁에 참여하거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한 노비는 공로 심사와 40세 초과 등의 조건 아래 면천이 허용될 수 있었다.
  • 노비환천법에는 기존 지배층이 잃어버린 노동력과 경제적인 권리를 회복하려는 목적이 반영되어 있었다고 평가된다.
  • 그러나 당시의 환천 대상자와 실제 신분이 환원된 사람의 수는 확인할 수 없다.
  • 1013년 현종 시대에는 환천된 노비가 다시 양인 신분을 요구하며 소송할 경우 장형과 삽면을 가하도록 했다.
  • 삽면은 얼굴에 글자나 표시를 새기는 형벌이므로 단순한 벌금형보다 훨씬 강한 신체적인 처벌이었다.
  • 노비환천법은 성종 시대의 유교적인 통치질서 정비와도 관련되어 있다.
  • 그러나 성종은 12목 설치와 지방관 파견 등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정책도 시행했으므로 그를 단순히 호족의 이익만 대변한 국왕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 노비환천법과 관련된 주요 내용은 《고려사》 권85의 형법지에 기록되어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987년의 원문과 1013년의 후속 규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 노비환천법은 해방되었던 사람이 이전 주인을 모욕하거나 그 친족과 다투었다는 이유로 다시 노비가 될 수 있었던 고려 초기 신분제도의 특징을 보여준다.

관련 문서

각주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