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는 982년(성종 원년) 6월 고려의 문신 최승로(崔承老)가 성종에게 올린 28개 조항의 정치개혁 건의문이다.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정책 건의문으로, 지방관 파견과 국방체제 정비, 국가재정의 절약, 불교행사의 축소, 유교적인 통치질서의 확립과 신분제도 정비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성종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중앙의 5품 이상 관료들에게 국가의 정치적인 문제와 개선방안을 건의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최승로는 역대 국왕들의 정치적 업적과 잘못을 평가한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과 국가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무 28조」를 작성하여 올렸다.
최승로의 상서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앞부분의 「오조정적평」은 태조부터 경종까지 다섯 국왕의 정치를 평가한 글이며, 뒷부분의 「시무 28조」는 성종이 실제로 추진해야 할 28가지 정책을 제안한 글이다.
시무 28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실제 내용이 전해지는 것은 제1조부터 제22조까지 총 22개 조항뿐이다. 나머지 6개 조항은 소실되어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문서가 작성된 배경에는 고려 초기의 정치적인 문제가 존재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지방의 호족들을 포섭했지만, 이들은 통일 이후에도 상당한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광종은 이러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등을 시행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 했으나, 정치적인 숙청과 신분제도 변화에 대한 반발도 불러일으켰다.
최승로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려면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뿐 아니라 지방행정을 정비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며, 국왕이 유교적인 도덕정치의 원칙에 따라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건의는 성종의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성종은 983년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했으며, 유교적인 교육과 국가의례를 정비했다. 또한 과도한 불교행사를 억제하고 국가재정을 절약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최승로의 개혁사상이 오늘날의 민주주의나 평등주의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호족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귀족과 공신들의 지위를 보호하고 기존의 양천제와 노비의 신분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시무 28조는 고려가 후삼국 통일 이후의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유교적인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종합적인 개혁안으로 평가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시무 28조를 고려 전기의 정치와 사회, 종교와 대외관계에 관한 광범위한 문제를 검토한 정책서이자 상서문으로 설명한다.[1]
기본 정보
| 시무 28조 | |
|---|---|
| 한자 | 時務二十八條 |
| 종류 | 정치개혁 건의문, 상서문 |
| 작성자 | 최승로(崔承老) |
| 제출 대상 | 성종 |
| 작성 국가 | 고려 |
| 제출 시기 | 982년 6월 (성종 원년) |
| 당시 작성자의 관직 |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 |
| 본래 조항 수 | 28개 |
| 현존 조항 | 22개 (제1조~제22조) |
| 소실 조항 | 제23조~제28조, 총 6개 |
| 주요 내용 | 지방관 파견, 국방체제 정비, 민생안정, 불교행사 축소, 유교적 통치질서 확립, 신분제도 정비 |
| 사상적 기반 | 유교, 민본주의, 중앙집권적 귀족정치 |
| 주요 관련 정책 | 12목 설치, 지방관 파견, 불교행사 억제, 유학교육 진흥 |
| 관련 문서 | 오조정적평, 최승로 상서문 |
| 주요 수록 사료 | 《고려사》, 《고려사절요》 |
| 온라인 열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올리다 |
명칭
시무 28조는 한자로 時務二十八條라고 표기한다.
여기서 시무(時務)는 당시 국가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나 정치적인 문제를 의미한다. 이십팔조(二十八條)는 28개의 조항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시무 28조라는 명칭은 당시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28가지 정책 건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곧 28개 조항으로 구성된 법률이라는 뜻은 아니다. 최승로는 국왕에게 정책을 건의했으며, 이를 실제 법률이나 행정제도로 시행할 것인지는 국왕과 정부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즉 시무 28조는 현대적인 의미의 법전이나 헌법보다는 국왕에게 제출한 정책 제안서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시무 28조는 최승로가 제출한 전체 상서문 가운데 뒷부분에 해당한다. 역대 국왕들의 정치를 평가한 앞부분의 오조정적평과는 엄밀하게 구분된다.
역사적 배경
고려 건국과 호족세력
918년 왕건은 고려를 건국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후고구려와 후백제, 신라 등이 경쟁하고 있었으며, 각 지역에는 상당한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을 가진 호족들이 존재했다.
왕건은 이러한 지방세력과 협력하여 후삼국을 통일했다.
그는 여러 호족과 혼인관계를 맺고 관직과 정치적인 지위를 인정해 주면서 새로운 왕조에 편입시켰다.
이러한 방식은 고려의 건국과 통일에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지방 호족들이 상당한 자율성과 영향력을 유지하는 결과도 가져왔다.
일부 호족은 토지와 노비를 보유하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운영했다. 또한 중앙정부의 통제가 충분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국가의 업무를 대신한다는 명분으로 주민들에게 조세와 노동력을 요구하기도 했다.
최승로는 이러한 문제가 고려의 국가적인 통치질서를 정비하는 데 중요한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했다.
광종의 왕권 강화
949년 즉위한 광종은 기존의 호족과 공신들을 견제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 했다.
956년에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본래 양인이었다가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의 신분을 회복시키려 했다.
958년에는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국가가 시험을 통해 새로운 관료를 선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960년에는 관료들의 공복제도를 정비했다.
그러나 광종은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강하게 숙청했으며, 이 과정에서 무고와 밀고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또한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여러 불교행사를 개최하고 사찰과 승려들을 지원했다.
최승로는 광종의 집권 초기에는 긍정적인 성과가 있었다고 인정했지만, 이후의 강압적인 정치와 지나친 불교행사, 노비안검법으로 발생한 신분적인 분쟁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경종 시대의 정치적 혼란
975년 광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했다.
경종은 광종 시대의 정치적인 숙청으로 처벌받았던 일부 사람들을 석방하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최승로는 경종이 국정을 일부 권신들에게 맡기고 정치적인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국왕이 국가의 통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소수의 측근에게 권력을 지나치게 위임하면 정치적인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최승로는 새로운 국왕인 성종에게 구체적인 개혁방안을 제시하려 했다.
작성 경위
성종의 즉위
981년 고려 제6대 국왕 성종이 즉위했다.
당시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지 약 45년이 지났지만 중앙정부의 지방통치 능력과 국가행정의 조직적인 정비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존재했다.
성종은 새로운 국왕으로서 국가의 제도와 정책을 정비하려 했으며, 관료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했다.
982년의 정책 건의 명령
982년 6월 성종은 중앙의 5품 이상 관리들에게 국가의 정치적인 문제와 개선방안을 건의하도록 명령했다.
당시에는 국왕에게 글을 밀봉하여 올리는 봉사(封事)라는 형식이 사용되었다.
봉사는 일반적인 보고와 달리 국왕에게 직접 정책과 정치적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최승로는 이러한 명령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장문의 상서문을 작성했다.
그는 당시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의 지위에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고려사절요》 원문에 따르면 성종은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면서 잘못된 정책이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했고, 관료들에게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도록 명령했다.[2]
정관정요의 영향
최승로는 상서문의 서두에서 중국 당나라의 역사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언급했다.
《정관정요》는 당나라의 사관 오긍이 당태종 시대의 정치적 경험과 군신관계 등을 정리한 책이다.
오긍은 당현종에게 태종의 정치를 본받도록 권했으며, 최승로는 이러한 사례를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성종도 이전 국왕들의 정치에서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통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시무 28조는 단순히 당장의 행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건의만은 아니었다.
과거의 역사에서 정치적인 교훈을 얻고 국왕의 통치원리를 정비해야 한다는 유교적인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오조정적평과의 관계
최승로가 제출한 상서문의 앞부분은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이다.
오조는 태조와 혜종, 정종과 광종, 경종의 다섯 국왕을 의미한다.
최승로는 이들의 정치적인 업적과 잘못을 평가하면서 성종이 어떤 정책을 본받고 어떤 행동을 경계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 국왕 | 최승로의 주요 평가 |
|---|---|
| 태조 | 후삼국 통일과 지방세력 포섭, 관대한 통치와 검소한 생활을 높이 평가 |
| 혜종 | 신하들을 예우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유지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신하들에 대한 의심과 지나친 호위병의 사용을 비판 |
| 정종 | 왕실의 위기를 극복한 점은 인정했지만, 서경 천도 추진과 지나친 부역으로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 점을 비판 |
| 광종 | 초기의 정치적 성과는 인정했으나, 신진 관료의 무분별한 등용과 숙청, 과도한 불교행사 등을 강하게 비판 |
| 경종 | 억울하게 처벌받은 사람들을 석방한 점을 인정했지만, 권신에게 국정을 맡기고 정치에 소홀했던 점을 비판 |
최승로는 다섯 국왕 가운데 태조 왕건을 가장 이상적인 군주에 가까운 인물로 평가했다.
그는 태조가 다양한 세력을 포용하고 절약과 검소함을 중시하며 신하들을 예우했다고 생각했다.
반면 광종에 대해서는 집권 초기의 정치적인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후반기의 강압적인 통치와 과도한 불교 후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평가는 최승로가 생각한 이상적인 국가운영 방식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준다.
그는 국왕이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더라도 신하들을 존중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며, 국가재정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조정적평이 과거의 국왕들을 평가하여 정치적 교훈을 제시한 글이라면, 시무 28조는 그 교훈을 바탕으로 성종이 실제로 추진해야 할 정책을 정리한 글이었다.
시무 28조의 구성
최승로가 작성한 시무 28조는 원래 28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제1조부터 제22조까지의 내용만 전해진다.
현존하는 조항들은 국방과 외교, 왕실의 운영과 지방행정, 신분질서와 종교, 민생안정 등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다음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원문 해설을 바탕으로 각 조항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3][1]
현존 22개 조항
| 조항 | 주요 내용 | 핵심 분야 |
|---|---|---|
| 제1조 | 서북 변경의 요충지를 정비하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한 현지 병력을 활용하여 국경을 방어할 것 | 국방 |
| 제2조 | 과도한 불교의 공덕재와 백성의 재산을 소모하는 불필요한 불사를 제한할 것 | 불교·재정 |
| 제3조 | 광종 이후 증가한 왕실 시위병을 줄이고 정예병력 중심으로 운영할 것 | 왕실·군사 |
| 제4조 | 국왕의 사소한 시혜보다 공정한 상벌과 올바른 정치를 중시할 것 | 정치 |
| 제5조 | 중국으로 보내는 사절의 왕래와 무역을 정비하고 불필요한 사적인 교역을 제한할 것 | 외교·무역 |
| 제6조 | 사찰의 불보전곡을 이용한 고리대금과 지나친 이자 징수를 금지할 것 | 불교·경제 |
| 제7조 | 지방관을 파견하여 호족들이 국가업무를 빙자하여 백성을 수탈하는 일을 막을 것 | 지방행정 |
| 제8조 | 사굴산의 승려 여철을 궁중에 초빙하여 지나치게 대우하는 일을 중단할 것 | 왕실·불교 |
| 제9조 | 관료와 일반인의 의복을 신분에 따라 구분하여 복식제도를 정비할 것 | 신분질서 |
| 제10조 | 승려들이 관청의 객관과 역참을 이용하며 지방관리와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을 금지할 것 | 불교·행정 |
| 제11조 | 유교적인 정치윤리와 교육은 중국을 본받되 의복과 생활풍속은 고려의 전통을 존중할 것 | 문화·외교 |
| 제12조 | 섬 주민들이 과도한 공물과 부역에 시달리지 않도록 부담을 공평하게 조정할 것 | 민생·재정 |
| 제13조 | 연등회와 팔관회에 동원되는 노동력을 줄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우인 제작을 금지할 것 | 종교·민생 |
| 제14조 | 국왕이 교만하지 않고 신하를 예우하며, 죄의 경중에 따라 법률을 공정하게 적용할 것 | 군주관 |
| 제15조 | 궁중의 노비와 말의 수를 줄여 왕실의 비용과 국가재정의 낭비를 방지할 것 | 왕실·재정 |
| 제16조 | 지나치게 많은 사찰과 불당을 건립하면서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일을 금지할 것 | 불교·민생 |
| 제17조 | 신분에 따른 주택의 규모와 건축제도를 정하고 규정을 위반한 대규모 건축을 제한할 것 | 신분·주거 |
| 제18조 | 금과 은 등 귀금속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불상과 불경을 제작하는 사치를 제한할 것 | 불교·재정 |
| 제19조 | 삼한공신과 기존 공신가문 및 그 자손들을 공로에 따라 적절하게 등용하고 대우할 것 | 인사·귀족 |
| 제20조 | 불교의 신앙 자체는 인정하되 국가의 통치는 유교에 근거하고 불필요한 불교행사를 줄일 것 | 유교·불교 |
| 제21조 | 산천과 별 등에 대한 지나친 제사를 줄이고 종묘·사직의 의례와 군주의 도덕적 수양을 중시할 것 | 제사·정치 |
| 제22조 | 양천제와 주종관계를 유지하고 노비 신분의 판결을 신중하게 처리하되 이전에 결정된 신분관계를 함부로 뒤집지 말 것 | 신분제도 |
※ 위 표는 현존하는 각 조항의 핵심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원문의 전체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다.
국방과 군사제도
제1조: 국경 방어
최승로는 제1조에서 고려의 서북쪽 국경을 방어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국경의 요충지를 정비하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방어에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현지의 병력 가운데 지휘관을 선발하여 군사조직을 운영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당시에는 중앙의 군사를 국경에 파견하면 많은 군량과 물자를 운송해야 했으며, 군사들의 장기간 복무도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최승로는 현지의 지형과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을 활용하면 국방에 필요한 비용과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국경방어 자체를 약화하거나 군사력을 무조건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국가의 방어능력을 유지하면서도 병력의 운영방식을 효율적으로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제3조: 왕실 시위군의 축소
제3조에서는 국왕을 호위하는 시위병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고 비판했다.
최승로는 태조 시대에는 왕실을 호위하는 병력이 많지 않았지만 광종 시대에 그 규모가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실제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만 남기고 불필요한 인원은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가재정의 낭비를 막기 위한 건의인 동시에 국왕의 개인적인 군사력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경계한 주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광종 시대에 시위군의 수가 얼마나 증가했으며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몇 명이 감축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불교와 종교정책
최승로는 시무 28조에서 불교와 관련된 문제를 여러 차례 다루었다.
제2조와 제6조, 제8조와 제10조, 제16조와 제18조, 제20조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불교의 교리 자체보다 사찰의 경제활동과 국가의 지나친 불교행사가 백성들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문제로 삼았다.
제2조: 공덕재의 폐단
제2조에서는 불교행사를 위해 백성들의 재물과 노동력을 지나치게 사용하는 일을 비판했다.
당시 일부 불교행사에는 많은 승려와 참가자들이 동원되었으며, 행사비용은 국가재정과 백성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최승로는 국왕이 종교적인 공덕을 쌓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것보다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종교적인 행사가 사회질서를 위반한 사람들에게 악용될 가능성도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에는 당시의 유교적인 도덕관념과 승려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반영되어 있으므로 모든 승려와 불교행사가 실제로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제6조: 사찰의 고리대금
제6조에서는 사찰이 보유한 불보전곡(佛寶錢穀)을 이용한 경제적 폐단을 비판했다.
불보는 불교와 관련하여 보관하거나 운영하는 재물을 의미한다.
당시 일부 사찰은 이러한 돈과 곡식을 민간에 빌려주면서 높은 이자를 받았다.
최승로는 사찰이 해마다 원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이자를 징수하는 일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고리대금 행위를 금지하고 사찰의 재원을 다른 방식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다만 이러한 기록이 당시 모든 사찰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고리대금을 운영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제8조: 승려 여철의 궁중 초빙
제8조에서는 성종이 사굴산의 승려 여철(如哲)을 궁중으로 초빙하여 대우하는 일을 비판했다.
최승로는 광종 시대에 후원을 받았던 승려 선회(善會)의 사례를 언급했다.
그는 선회가 국왕의 총애를 받았지만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는 전승을 근거로, 승려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믿음을 경계했다.
이에 따라 여철을 다시 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조항은 모든 승려를 궁궐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명령이 아니라, 당시 성종이 특정한 승려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였던 사례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제10조: 승려의 역참 이용
제10조에서는 승려들이 지방을 이동하면서 관청의 객관과 역참을 이용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당시 일부 승려들은 이러한 시설에 숙박하며 지방관리와 백성들에게 접대와 음식 등을 요구했다.
최승로는 이 과정에서 폭행과 강압적인 요구가 발생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승려들이 관청의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일을 금지하여 지방의 주민들이 부담을 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종교적인 특권이 실제 행정과 민생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건의였다.
제16조: 사찰 건축의 제한
제16조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사찰과 불당을 건립하는 문제를 비판했다.
당시에는 종교적인 공덕을 쌓기 위해 개인이나 승려들이 불당을 건립하는 일이 있었다.
최승로는 이러한 건축사업에 지방의 주민들이 동원되며, 일부 지역에서는 국가의 공적인 부역보다 사찰 건축을 위한 노동이 더 강하게 요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찰 건축을 제한하여 백성들의 노동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18조: 귀금속을 사용한 불상 제작
제18조에서는 불경과 불상을 제작할 때 금과 은 등의 귀금속을 지나치게 사용하는 행위를 비판했다.
최승로는 신라 말에 사치스러운 불교활동이 증가하면서 국가의 재정적인 부담이 커졌다는 역사적인 평가를 제시했다.
그는 불상과 불경을 제작하는 행위 자체보다 지나치게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는 일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또한 귀금속으로 제작된 불교 유물이 도난과 훼손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신라가 멸망한 원인을 사치스러운 불교활동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다.
실제 신라 말의 혼란에는 정치적 갈등과 지방세력의 성장, 사회경제적 변화 등 여러 원인이 작용했다.
제20조: 불교와 유교의 역할
제20조는 최승로의 종교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조항이다.
그는 불교를 믿고 존중하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왕이 종교적인 공덕을 쌓기 위해 백성들의 노동력과 재산을 소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랫동안 유지된 일부 불교의례는 존속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불필요한 행사는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무 28조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전한다.
行釋敎者, 修身之本, 行儒敎者, 理國之源.
이는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라는 의미다.
최승로는 종교적인 수행과 현실적인 국가통치를 구분하면서 국왕이 현재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2]
따라서 최승로가 불교를 완전히 폐지하고 유교만을 믿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설명은 부정확하다. 그는 불교의 종교적인 기능은 인정하면서도 국가의 통치에서는 유교적인 원리를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권과 군주의 통치
제4조: 공정한 상벌
제4조에서는 국왕이 백성들에게 작은 물품을 나누어 주는 행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일을 비판했다.
최승로는 국왕이 직접 미음과 술, 음식 등을 나누어 주는 것이 국가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국왕이 개인적인 선행을 과시하기보다 공정한 상벌을 통해 선행을 장려하고 잘못된 행동을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가의 통치를 일시적인 시혜보다 공정한 제도와 정치적인 원칙에 따라 운영해야 한다는 견해였다.
제14조: 신하에 대한 예우
제14조에서는 국왕이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자랑하거나 교만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최승로는 국왕이 신하들을 예로써 대우하고 공손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도 국왕의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처벌하기보다 법률에 따라 죄의 경중을 판단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는 광종 시대의 강압적인 정치와 숙청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
그러나 최승로가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현대적인 입헌주의나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국왕이 도덕적 수양과 유교적인 정치원칙을 실천하여 신하들과 함께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15조: 궁중의 노비와 말
제15조에서는 궁중에서 보유한 노비와 말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인력과 가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량과 여러 물자가 필요했으며, 국가재정과 백성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최승로는 태조 시대의 기준을 참고하여 필요한 규모만 남기고 나머지는 줄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는 왕실의 비용을 절약하려는 정책인 동시에 지나치게 확대된 궁중의 인력과 자원을 정비하려는 제안이었다.
지방행정과 호족 견제
제7조: 지방관 파견
제7조는 시무 28조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조항으로 알려져 있다.
최승로는 지방의 호족과 유력자들이 국가의 업무를 수행한다는 명분으로 주민들을 수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고려는 전국에 중앙정부의 관리가 충분히 파견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부 지방에서는 호족과 향리들이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최승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가가 직접 지방관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왕이 모든 지방의 주민들을 직접 살필 수 없기 때문에 지방관이 지역의 상황과 주민들의 어려움을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존재한다.
今竊見鄕豪每假公務, 侵暴百姓, 民不堪命, 請置外官.
이는 지방의 호족들이 공무를 핑계로 백성을 침해하고 괴롭히므로, 이를 막기 위해 지방관을 설치해 달라는 의미다.
단계적인 지방관 파견
최승로는 모든 지방에 한꺼번에 관리를 파견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고려했다.
그는 우선 여러 주와 현을 묶어 하나의 행정단위로 관리하고, 해당 지역을 담당할 관리를 파견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국가의 행정능력을 고려하면서도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확대하려는 제안이었다.
983년 12목 설치
983년 성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이는 중앙정부가 지방행정에 직접 관여하는 범위를 확대한 조치였다.
최승로의 제7조는 이러한 정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전국 12목의 구체적인 위치와 관직제도를 모두 설계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실제 지방제도의 정비에는 성종과 다른 관료들의 판단, 행정적인 필요 등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의복과 주택의 신분질서
제9조: 복식제도 정비
최승로는 제9조에서 신분에 따른 의복의 구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관리와 일반 백성이 착용할 수 있는 의복의 종류와 재료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이 높은 관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화려한 비단옷을 입는 경우가 있었다.
최승로는 이러한 현상이 신분적인 위계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관료들이 공식적인 복식을 갖추고 일반인은 신분에 맞는 의복을 착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인 능력과 관계없이 신분에 따라 의복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제도였다.
제17조: 주택 규모의 제한
제17조에서는 신분에 맞지 않는 대규모 주택의 건축을 제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최승로는 지방의 유력자와 부유한 사람들이 지나치게 큰 집을 지으면서 주민들에게 노동을 요구하는 일을 비판했다.
그는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와 건축기준을 정하고, 이를 위반한 건축물은 철거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건의에는 백성들의 부역을 줄이려는 목적과 기존 신분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이 함께 존재했다.
즉 단순히 사치스러운 주택 건축으로 인한 민생의 부담을 줄이려는 제안이면서 동시에 신분에 따라 주거환경을 제한하려는 정책이었다.
대외관계와 외래문화
제5조: 외교사절과 무역
최승로는 제5조에서 중국과의 외교관계와 무역을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고려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신을 파견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공식적인 외교활동뿐 아니라 물품의 교역도 이루어졌다.
최승로는 지나치게 잦은 사절의 왕래가 국가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식적인 외교사절이 무역을 겸하도록 하고 불필요한 사적인 교역을 제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는 외국과의 교류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외교와 무역을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는 정책이었다.
제11조: 중국 문물의 선택적 수용
제11조는 최승로의 문화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조항이다.
그는 유교적인 정치윤리와 교육, 군주와 신하 및 부모와 자식 사이의 도덕적 관계 등은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복과 수레, 생활풍속 등 모든 문화를 중국과 동일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해당 조항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존재한다.
其餘車馬衣服制度, 可因土風, 使奢儉得中, 不必苟同.
이는 수레와 말, 의복 등의 제도는 그 지역의 풍속을 따를 수 있으며 반드시 중국과 똑같이 만들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최승로는 중국의 정치적·학문적인 장점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현실과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가 중국의 모든 제도와 문화를 무조건 모방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민생과 국가재정
제12조: 섬 주민의 부담
제12조에서는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어려움을 다루었다.
당시 일부 주민은 조상의 죄로 섬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국가기관이 수시로 물품을 징수하면서 경제적인 부담이 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승로는 이러한 주민들에게 다른 지역의 주민들과 비슷한 기준으로 공물과 부역을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중앙의 정치뿐 아니라 지방과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실제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13조: 연등회와 팔관회
제13조에서는 연등회와 팔관회의 규모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고려에서는 봄에 연등회를 개최하고 겨울에는 팔관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행사는 고려의 중요한 국가의례이자 종교적·문화적 행사였다.
그러나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여러 물품과 장식물을 제작해야 했다.
최승로는 이러한 비용과 노동력이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고 생각했다.
또한 행사에 사용한 여러 종류의 우인(偶人)을 한 번 사용한 뒤 버리는 일도 낭비라고 비판했다.
그는 행사의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장식물의 제작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제13조에서 연등회와 팔관회를 모두 즉시 영구적으로 폐지하자고 명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행사에 동원되는 노동력과 비용의 축소를 강조했다.
공신과 귀족의 대우
제19조: 공신 자손의 등용
제19조에서는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공신 및 그 자손들을 적절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승로는 기존의 공신가문 가운데 정치적인 변화로 지위가 낮아지거나 불이익을 받은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로에 따라 적절한 관직과 지위를 부여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광종 시대의 숙청과 정치적 갈등을 수습하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공신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대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세습적인 귀족질서를 유지하려는 성격도 존재했다.
따라서 최승로가 모든 관직을 개인의 능력만으로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국가적인 공로와 가문의 지위, 유교적인 인사제도와 정치적 안정을 함께 고려했다.
제사와 국가의례
제21조: 과도한 제사의 축소
제21조에서는 국가가 개최하는 여러 제사와 기도행사의 규모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승로는 국가의 중요한 제사인 종묘와 사직의 의례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산과 별 등에 대한 지나친 제사와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행사가 많은 비용과 노동력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국왕이 자신의 정치적 잘못을 반성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일이 종교적인 의례를 통해 복을 구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유교적인 정치사상에서 군주의 도덕적인 수양과 백성의 안정이 국가의 흥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관념과 연결된다.
신분제도와 노비 문제
제22조: 양천제의 유지
제22조는 최승로의 신분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항 가운데 하나다.
최승로는 고려가 건국된 이후 오랫동안 양인과 천인의 신분질서를 유지해 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후삼국 통일전쟁의 과정에서 포로가 된 사람들이 노비로 편입되었으며, 기존의 호족과 공신들이 이러한 노비를 보유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태조가 전쟁 포로를 양인으로 회복시키려 했지만 공신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전면적인 조치를 시행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광종의 노비안검법 비판
956년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시행했다.
이는 본래 양인이었으나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신분을 회복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최승로는 이러한 조치 이후 기존 주인과 노비 사이의 분쟁이 증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부 노비들이 허위로 신분을 주장하거나 주인을 모함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많은 허위소송이 발생했는지에 관한 자료는 부족하다.
따라서 최승로의 주장은 당시의 사회적인 갈등을 보여주는 기록이면서도 기존 노비 소유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기존 판결의 존중
최승로는 국왕이 노비와 주인 사이의 신분적인 관계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미 이전의 정부에서 결정된 신분관계를 함부로 다시 조사하여 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건의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신분질서와 소유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최승로가 모든 노비를 이전의 주인에게 일괄적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직접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기존의 양천제와 주종관계를 유지하면서 현재의 신분 관련 판결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비환천법과의 관계
987년(성종 6년) 성종은 노비환천법을 시행했다.
이 제도에서는 양인으로 회복되었던 사람 가운데 옛 주인을 욕하거나 그 주인의 친족과 다툰 사람 등을 다시 노비 신분으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광종의 노비안검법으로 변화했던 신분관계가 기존 지배층의 반발 속에서 후퇴한 사례였다.
최승로의 제22조는 이러한 정책 변화의 중요한 사상적 배경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승로가 987년의 노비환천법을 직접 작성했거나 구체적인 시행과정을 모두 주도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나머지 6개 조항
시무 28조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22개 조항만 남아 있다.
제23조부터 제28조까지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소실 경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나머지 여섯 조항이 1010년(현종 원년) 거란의 제2차 침입 과정에서 소실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당시 고려는 거란의 침입으로 수도 개경이 위협받았으며, 여러 문헌과 국가적인 기록들이 훼손되거나 소실되었다.
따라서 시무 28조의 일부가 이러한 혼란 속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1010년에 해당 여섯 조항이 소실되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자료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실된 시점과 경위를 확정적인 사실로 설명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내용의 복원 문제
일부 연구자들은 현존하는 22개 조항과 고려의 다른 역사기록을 비교하여 소실된 여섯 조항의 내용을 추정하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정책이 제23조부터 제28조에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후대의 역사서와 연구결과에서 특정한 개혁정책이 성종 시대에 시행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소실된 시무 28조의 내용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시무 28조는 원래 28개 조항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만, 오늘날 그 내용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종의 실제 정책에 미친 영향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성종의 국가체제 정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성종이 시행한 모든 정책을 최승로가 직접 설계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실제 국가적인 개혁에는 성종 자신의 정책적인 판단과 다른 관료들의 건의, 당시의 정치적·경제적 상황 등이 함께 작용했다.
983년 12목 설치
983년 성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이는 지방 호족의 독자적인 영향력을 제한하고 중앙정부의 지방통치 능력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최승로가 제7조에서 주장한 지방관 파견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러나 고려의 모든 지역에 동일한 수준의 지방관이 즉시 파견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여러 국왕에 걸쳐 지방제도가 정비되었으며, 지방의 향리와 호족들은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유지했다.
불교행사의 억제
성종 시대에는 과도한 불교행사를 줄이고 국가재정을 절약하려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팔관회가 폐지되었으며, 집을 사찰로 만드는 행위를 제한하는 조치도 시행되었다.
이는 최승로가 주장한 불교행사의 축소와 사찰의 경제적인 폐단 시정이라는 방향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으로 고려의 불교 자체가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에서는 이후에도 불교가 왕실과 귀족, 사회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유교교육의 진흥
성종은 유교적인 국가운영을 위한 교육제도를 정비했다.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박사 등을 파견하여 유학 교육을 확대했다.
이러한 정책은 국왕과 관료들이 유교적인 경전과 정치원리를 이해하고 국가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유교교육의 확대를 시무 28조의 특정한 현존 조항 하나에서 그대로 제시한 정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시무 28조의 전체적인 유교 정치이념과 성종 시대의 국가체제 정비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다른 관료들의 역할
성종 시대의 개혁에는 최승로뿐 아니라 이양과 김심언 등 여러 유학자와 관료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고려의 중앙행정과 지방통치, 교육과 국가의례 등에 관한 정책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따라서 성종의 개혁을 최승로 한 사람이 만든 정책의 단순한 실행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최승로는 중요한 사상적 기반과 구체적인 정책방향을 제시했으며, 실제 제도의 정비는 성종과 여러 관료들이 함께 추진했다.
정치사상
유교적인 도덕정치
최승로는 국가의 통치가 국왕의 개인적인 권위나 군사력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왕이 도덕적인 수양을 실천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공정한 상벌과 법률을 통해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유교적인 덕치주의와 연결된다.
그는 태조 왕건을 이상적인 군주의 사례로 높이 평가하면서 성종이 그의 관대한 통치와 신하에 대한 예우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앙집권과 귀족정치
최승로는 지방 호족의 전횡을 제한하고 중앙정부가 지방을 통제하는 체제를 발전시키려 했다.
그러나 국왕이 모든 권력을 개인적으로 독점하여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정치에도 반대했다.
그는 중앙정부의 관료와 귀족들이 국왕을 보좌하면서 유교적인 원칙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는 체제를 지향했다.
따라서 그의 이상적인 국가운영 방식은 중앙집권적인 성격과 귀족관료 중심의 정치라는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민생안정
최승로는 여러 조항에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제시했다.
그는 과도한 불교행사와 사찰의 고리대금, 지방 호족의 수탈과 지나친 군사동원 등이 백성들의 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점에서 시무 28조는 민생안정을 중요한 통치원리로 제시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백성의 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과 모든 백성에게 동일한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인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르다.
최승로는 여전히 신분적인 위계질서와 기존 귀족사회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문화적 독자성
최승로는 중국의 유교적 정치제도와 학문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복과 생활풍속까지 모두 중국의 제도와 동일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외국의 문물 가운데 국가에 도움이 되는 부분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전통적인 문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를 현대적인 민족주의나 문화적 독립운동과 동일하게 해석하는 것은 시대적인 차이를 무시하는 설명이 될 수 있다.
한계와 비판
신분적인 보수성
시무 28조의 한계 가운데 하나는 기존 신분질서의 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최승로는 호족의 횡포를 제한하고 백성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양인과 천인의 구분과 주인·노비 사이의 관계는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의복과 주택의 규모를 신분에 따라 구분하는 제도를 제안했다.
이는 그의 개혁사상이 기존의 사회적인 위계질서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공신가문의 특권
최승로는 공신과 그 자손들에게 적절한 관직과 지위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건의는 광종 시대의 정치적인 숙청으로 발생한 갈등을 수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기존 귀족가문의 정치적인 특권을 보존하려는 성격도 존재했다.
따라서 시무 28조를 모든 사람에게 능력에 따른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려는 정책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불교에 대한 평가
최승로는 불교의 교리 자체보다 국가의 과도한 불교행사와 사찰의 경제적인 폐단을 비판했다.
그러나 사찰의 건축과 불교의례가 당시 고려의 정치적·문화적 환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불교는 고려의 국가적인 정체성과 문화, 사회적인 구호활동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국가재정의 낭비에 관한 최승로의 비판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고려의 모든 불교행사가 사회적으로 해로운 활동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 정책과의 차이
시무 28조는 최승로가 국왕에게 제출한 정책 건의문이다.
따라서 각 조항에 기록된 내용이 실제로 모두 법률과 제도로 시행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종은 일부 건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다른 정책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행정능력에 따라 다르게 시행되었을 수 있다.
또한 최승로의 건의를 바탕으로 정책이 추진되었다고 해도 실제로 그 정책이 목표했던 효과를 얼마나 달성했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사료적 가치
고려 초기의 정치사상
시무 28조는 고려 초기의 지식인들이 어떤 국가운영 방식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국왕과 신하의 관계, 지방행정과 국방, 불교와 유교, 신분질서와 국가재정 등 여러 문제에 관한 구체적인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태조부터 경종까지의 정치에 대한 평가를 통해 당시 관료들이 고려의 초기 역사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사회문제의 기록
시무 28조에는 지방 호족의 수탈과 사찰의 고리대금, 과도한 부역과 왕실의 재정낭비 등에 관한 설명이 등장한다.
이러한 기록은 고려 초기의 경제와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최승로는 자신의 개혁안을 정당화하기 위해 문제점을 강조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기록의 모든 내용을 당시 사회 전체의 객관적인 실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 역사적 상황을 연구하려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다른 문헌과 금석문 등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후대 역사서에서의 활용
시무 28조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전해지며, 후대의 역사서인 《동국통감》과 《동사강목》 등에서도 활용되었다.
《고려사》에서는 최승로 열전뿐 아니라 관련 제도를 설명하는 여러 항목에 시무 28조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이는 시무 28조가 고려 전기의 정치제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훈요 10조와의 비교
훈요 10조는 태조 왕건이 후대의 국왕들에게 남겼다고 전해지는 정치적인 유훈이다.
반면 시무 28조는 최승로가 982년 성종에게 제출한 정책 건의문이다.
두 문서는 모두 고려의 국가운영에 관한 원칙과 정책을 다루지만 작성 목적과 성격에는 차이가 있다.
| 구분 | 훈요 10조 | 시무 28조 |
|---|---|---|
| 작성 시기 | 943년으로 전함 | 982년 |
| 작성자 | 태조 왕건에게 귀속 | 최승로 |
| 주요 대상 | 후대의 고려 국왕들 | 성종 |
| 문서 성격 | 왕조의 통치원칙에 관한 유훈 | 국가의 현안에 관한 정책 건의문 |
| 본래 조항 | 10개 | 28개 |
| 현존 조항 | 10개 조항의 내용이 전함 | 22개 조항의 내용이 전함 |
| 주요 내용 | 왕실의 계승, 불교와 풍수, 국방 및 정치적 원칙 | 지방관 파견, 민생안정, 유교적인 통치, 종교와 신분제도 정비 |
훈요 10조는 태조의 유훈으로 전해지는 문서이지만 실제 작성과 전승과정에 관해서는 역사적인 논쟁이 존재한다.
반면 시무 28조는 최승로가 성종 원년에 올린 건의문이라는 사실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두 문서 모두 후대에 편찬된 역사서를 통해 전해지므로 원문과 전승과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 교육에서
시무 28조는 고려 초기의 중앙집권화와 성종의 개혁정책을 설명할 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등에서는 최승로와 성종의 정책, 유교적인 정치질서의 발전, 지방관 파견 등을 연결하여 다루기도 한다.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주제 | 핵심 내용 |
|---|---|
| 작성자 | 최승로 |
| 제출 국왕 | 성종 |
| 제출 시기 | 982년 |
| 주요 정책 | 지방관 파견, 불교행사 축소, 유교적 정치질서 확립 |
| 대표 조항 | 제7조 지방관 파견, 제11조 중국 문물의 선택적 수용, 제13조 연등회·팔관회 축소, 제20조 불교와 유교의 역할, 제22조 양천제 유지 |
| 관련 정책 | 983년 12목 설치 |
| 원래 조항 | 28개 |
| 현존 조항 | 22개 |
| 관련 문서 | 오조정적평 |
다만 시무 28조의 주요 내용이 유교적인 정치질서의 정비였다고 해서 불교를 모두 금지하려 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지방관의 파견을 주장했다는 사실과 고려의 모든 지역에 중앙정부의 관리가 즉시 파견되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주요 연혁
| 연도 | 사건 |
|---|---|
| 918년 | 왕건이 고려 건국 |
| 936년 | 고려의 후삼국 통일 |
| 943년 | 태조 사망, 훈요 10조가 남겨진 시기로 전함 |
| 949년 | 광종 즉위 |
| 956년 | 광종이 노비안검법 시행 |
| 958년 | 광종이 과거제도 시행 |
| 960년 | 광종이 공복제도 정비 |
| 975년 | 광종 사망, 경종 즉위 |
| 981년 | 성종 즉위 |
| 982년 6월 | 최승로가 오조정적평과 시무 28조를 성종에게 제출 |
| 983년 | 성종이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 파견 |
| 987년 | 성종이 노비환천법 시행 |
| 988년 | 최승로가 문하수시중에 임명되고 청하후에 봉해짐 |
| 989년 | 최승로 사망 |
| 992년 | 성종 시대 유교적인 교육제도와 국자감 정비 |
| 1010년 | 거란의 제2차 침입. 시무 28조 일부가 소실된 시기로 추정되기도 함 |
| 1451년 | 《고려사》 완성 |
| 1452년 | 《고려사절요》 완성 |
여담
- 28조라는 이름과 달리 실제로 남아 있는 조항은 22개뿐이다. 나머지 6개는 오늘날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 시무 28조는 고려 성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982년 6월에 제출되었다.
- 작성자는 신라 6두품 계통의 가문에서 태어난 고려의 문신 최승로다.
- 문서는 앞부분의 오조정적평과 뒷부분의 시무 28조로 구성되어 있다.
- 최승로는 역대 국왕의 정치를 평가하면서 태조 왕건을 이상적인 군주의 사례로 높이 평가했다.
- 반면 광종의 집권 후반기 정치와 과도한 불교 후원, 정치적인 숙청 등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다.
- 제7조에서는 지방 호족의 수탈을 막기 위해 지방관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983년 성종의 12목 설치와 연결된다.
- 제11조에서는 중국의 유교적인 정치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의복과 생활풍속은 고려의 전통을 존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제13조에서는 연등회와 팔관회에 동원되는 노동력과 행사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 제20조에서는 불교를 몸을 닦는 데 도움이 되는 가르침으로 인정하면서도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유교가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 최승로는 신분적인 평등을 주장하지 않았다. 제22조에서는 양천제를 유지하고 이미 결정된 신분관계를 함부로 다시 조사하지 말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 제19조에서는 공신과 귀족가문의 자손들에게 적절한 관직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따라서 시무 28조는 민생안정과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 정비를 추진하면서도 기존 귀족사회의 위계질서를 유지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 시무 28조의 일부 내용이 1010년 거란의 제2차 침입 과정에서 소실되었다는 주장이 존재하지만, 정확한 소실 경위는 확인되지 않는다.
- 시무 28조는 후대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 최승로는 고려의 모든 제도를 새롭게 만들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제도 가운데 유지할 부분과 개혁할 부분을 구분하여 국가운영의 방향을 제시하려 했다.
- 그가 강조한 것은 무조건 강한 국왕이 아니라 유교적인 원칙에 따라 신하들과 함께 국가를 운영하는 국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