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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이 19세기 전반에 저술한 백과사전 형식의 방대한 학술서다. 역사와 지리, 천문학과 수학, 농업과 의학, 경제와 상업, 군사기술과 자연과학, 종교와 풍속 등 당시 알려져 있던 여러 분야의 지식을 수집하고 고증한 책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백과사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현존하는 책은 60권 60책의 필사본으로, 일반적으로 1,417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한다. 다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416개 항목으로 소개하고 있어 자료에 따라 집계에 차이가 있다.

저자인 이규경은 정조 시대의 실학자 이덕무의 손자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이어진 학문적 전통을 바탕으로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주요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대부분의 생애를 학문 연구와 저술에 바쳤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특징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모아놓았다는 데 있지 않다. 저자는 기존 문헌들을 비교하고 서로 다른 주장에 대한 근거를 검토하면서 사물과 제도의 기원, 작동원리와 실제적인 활용방법 등을 설명하려 했다. 각 항목에 변증설(辨證說)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러한 학문적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당시 조선의 학문적 주류였던 성리학에만 머무르지 않고 청나라의 고증학과 서양의 천문학, 수학과 과학기술 등에 관심을 가졌다. 실제로 서양과 관련된 내용이 약 80개 항목에 걸쳐 등장하며, 여러 외국의 서적과 세계지도에 관한 정보도 수록되어 있다.

오늘날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 가운데 하나는 조선에 감자가 처음 전래된 시기를 추정한 「북저변증설」이다. 이규경은 이 글에서 감자가 1824~1825년 무렵 북쪽 국경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는 기록과 전승을 소개했다. 이는 조선 후기의 식량작물과 농업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1]

그 밖에도 임진왜란 당시 사람이 하늘을 날아 이동했다는 비차(飛車)의 전승과 조선의 시장·서점, 음악과 복식, 의료와 예방접종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에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만든 거대한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과정도 흥미롭다. 일제강점기에는 군밤을 싸는 종이로 사용될 뻔했던 책을 발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이후 최남선이 소장했던 필사본은 6·25 전쟁 중 소실되었다. 그러나 다른 필사본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내용이 보존될 수 있었다.[2]

기본 정보

오주연문장전산고
한자 五洲衍文長箋散稿
저자 이규경 (李圭景)
저술 시기 19세기 전반 ~ 중엽
국가 조선
분야 백과사전, 실학, 고증학, 박물학
언어 한문
현존 규모 60권 60책
항목 수 일반적으로 1,417개
일부 자료에서는 1,416개
저술 방식 변증설(辨證說)
주요 구성 천지편, 인사편, 경사편, 시문편
주요 주제 역사·지리·천문·수학·의학·농업·경제·종교·풍속·군사기술 등
판본 필사본
주요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관련 저술 《오주서종》, 《오주서종박물고변》, 《백운필》
주요 특징 다양한 문헌의 비교·고증, 청나라와 서양의 지식 수용, 실용적 학문의 강조

명칭

책의 제목인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오주(五洲), 연문(衍文), 장전(長箋), 산고(散稿)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오주는 저자인 이규경의 호다. 五洲라는 글자는 다섯 대륙을 의미하는 표현이기도 하며, 당시 서양의 세계지리 지식과 관련된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

연문은 내용을 부연하거나 길게 설명한 글이라는 뜻이며, 장전은 긴 주석이나 설명을 덧붙인 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 산고는 흩어져 있는 원고 또는 아직 완전하게 정리되지 않은 글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제목을 풀어서 설명하면 오주라는 사람이 여러 주제에 관해 상세한 설명과 고증을 덧붙여 모은 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학자 강명관은 이 책의 제목을 오주·연문·장전·산고로 구분하여 읽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저자의 학문적 관심과 서술방식이 책의 이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3]

이러한 명칭은 단순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나열한 책이라는 의미보다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사물의 원리와 역사를 자세히 설명한 저술이라는 성격에 가깝다.

저자 이규경

이규경(李圭景, 1788년 ~ 1856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박물학자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며, 자는 백규(伯揆), 호는 오주(五洲) 또는 소운거사(嘯雲居士)다.

다만 이규경의 사망 연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1856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연대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 항목에서는 1863년으로 표기한다. 생몰년에 관해서는 이러한 자료상의 차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4][2]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의 할아버지는 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였던 이덕무다.

이덕무는 박지원과 박제가, 유득공 등과 교류하면서 북학과 문학, 역사와 박물학을 연구했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활동했으며, 방대한 저술인 《청장관전서》를 남겼다.

검서관은 규장각에서 서적을 검토하고 교정하며 편찬사업을 담당했던 관직이다. 당시 서얼 출신 지식인들에게도 일정한 관직 진출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규경의 아버지인 이광규 역시 규장각의 검서관을 지냈다.

따라서 이규경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서적을 수집하고 검토하며 학문을 연구했던 가문에서 성장한 셈이다.

이러한 환경은 그의 학문적 성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존의 문헌을 폭넓게 읽고 서로 다른 자료를 비교하는 습관은 훗날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저술방식으로 이어졌다.

관직 진출의 좌절

이규경은 1808년(순조 8년) 규장각 검서관의 취재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취재는 일정한 직책을 맡을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 실시한 능력평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검서관으로 활동했던 만큼 이규경 역시 관직에 진출하여 학문과 문헌편찬에 참여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시험에 실패한 뒤 관직에서 중요한 경력을 쌓지 못했다.

이규경의 관직 경력에 대해서는 일부 인명사전에서 검서관을 역임했다고 소개하는 등 서술에 차이가 있다. 반면 국사편찬위원회는 1808년 취재에 낙방했고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고 명시한다.

따라서 그의 실제 학문적 성과를 평가할 때에는 고위 관료로서의 행정경험보다 재야 학자로서의 연구와 저술활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적절하다.

재야 학자로서의 활동

이규경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충주와 서천 등 여러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양반 지식인들이 중앙정부의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지만, 이규경은 주요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상태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의 농업과 생활문화를 관찰했으며, 중국의 서적과 조선의 기존 문헌을 폭넓게 읽었다.

또한 서유구, 최한기, 김정호, 최성환 등과 교류하면서 지리학과 과학기술, 세계정세 등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이규경은 조선과 중국의 역사뿐 아니라 서양의 과학과 기술, 세계 각지의 지리와 풍속 등에까지 학문적 관심을 확대했다.[2]

저술 배경

조선 후기의 실학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조선 후기의 실학과 북학이라는 학문적 흐름 속에서 저술되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적인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며, 양반 지식인들의 학문에서도 유교 경전과 도덕적인 원리에 관한 연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일부 지식인들은 기존의 경전 연구뿐 아니라 실제 사회의 경제와 농업, 행정제도와 과학기술 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상업을 발전시키며 국가재정을 개선하려는 정책적인 관심과 연결되었다.

18세기에는 이익과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 여러 인물들이 사회제도와 농업, 경제와 과학기술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이규경은 이러한 학문적 전통이 19세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박학과 고증학

이규경의 학문에서는 박학(博學)과 고증(考證)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박학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폭넓게 연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고증은 문헌과 기록, 실제 사물 등을 비교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연구방법이다.

이규경은 특정한 주제에 관한 하나의 설명만을 받아들이기보다 여러 문헌을 찾아 비교하고 그 차이를 검토하려 했다.

이러한 학문적 태도에는 청나라에서 발전한 고증학의 영향도 존재했다.

청나라의 학자들은 문헌의 원문과 판본, 글자의 뜻과 역사적인 기록 등을 자세히 검토하여 기존의 학설을 다시 살펴보는 연구를 발전시켰다.

이규경 역시 이러한 방식을 받아들이면서 조선과 중국의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자신의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그가 모든 주제를 현대 과학의 실험이나 검증방법으로 연구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오래된 문헌의 기록과 역사적인 전승이 중요한 근거로 사용되었으므로 오늘날의 연구 기준에서 보면 정확하지 않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중국과 서양 지식의 수용

19세기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과학과 지리, 종교 등에 관한 서적이 유입되고 있었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천문학과 수학, 지리학과 의학 등의 내용을 한문으로 번역하거나 소개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한역 서양서를 통해 직접 유럽을 방문하지 않고도 서양의 문명과 과학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규경은 이러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읽고 자신의 저술에 반영했다.

그가 참고한 서적 가운데에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줄리오 알레니의 《직방외기》 등이 있었다.

이러한 문헌들은 서양의 종교뿐 아니라 세계지리와 자연과학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다.[5]

책의 구성

현존하는 《오주연문장전산고》는 60권 60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천지편(天地篇), 인사편(人事篇), 경사편(經史篇), 시문편(詩文篇) 등으로 구분되며, 여러 분야의 지식이 다시 세부 항목으로 나뉜다.

이러한 구분은 현대적인 백과사전의 대분류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오늘날의 학문체계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구분 주요 내용
천지편(天地篇) 천문과 역법, 지리와 자연현상, 우주와 세계에 관한 지식
인사편(人事篇) 인간의 생활과 사회제도, 풍속과 기술, 농업과 경제 등
경사편(經史篇) 유교 경전과 역사, 학설과 문헌에 관한 고증
시문편(詩文篇) 문학과 시문, 문체와 관련된 여러 지식

이 책은 권1의 「십이중천변증설」에서 시작하여 권60의 「황정편정변증설」로 끝난다.

전체적으로 1,400개가 넘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각 항목은 내용에 따라 길이가 상당히 다르다. 일부는 비교적 간단한 설명이지만 다른 항목은 여러 문헌과 학설을 비교하는 긴 연구에 해당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현존하는 60권 60책에 1,417개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416개로 집계하고 있어 구체적인 항목 수를 인용할 때에는 출처를 함께 밝히는 것이 좋다.

변증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가장 중요한 저술방식은 변증설(辨證說)이다.

변증은 서로 다른 주장과 기록을 비교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의미다.

이규경은 각종 사물과 제도에 관한 문헌을 검토하고, 기록 사이의 차이와 문제점을 살펴본 뒤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려 했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의 기원을 설명하려면 그 물건이 처음 등장한 기록과 이름의 유래, 다른 지역의 유사한 물건에 관한 문헌을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히 선대의 학자들이 남긴 지식을 그대로 베끼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변증설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해서 모든 항목에서 완전히 새로운 연구결과가 제시된 것은 아니다.

이규경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뿐 아니라 다른 책에서 발견한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가치는 개별 항목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뿐 아니라 여러 문헌에 흩어져 있던 지식을 한곳에 모았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자료의 비교

이규경은 조선의 기존 문헌뿐 아니라 청나라에서 유입된 서적들을 폭넓게 참고했다.

중국의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사물과 제도를 비교하고 조선에서 사용되던 명칭 및 풍습과의 차이를 검토했다.

그는 자료가 부족하거나 서로 모순되는 경우에도 여러 설명을 함께 소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특정한 주제에 관하여 당대에 어떤 지식과 논쟁이 존재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설명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 당시의 문헌을 비교한 기록으로 이해해야 한다.

기존 저술의 영향

이규경은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할아버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 기존의 백과사전적 저술들을 참고했다.

이들 책은 한 가지 학문에만 집중하지 않고 역사와 자연, 사회와 생활문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면서 청나라와 서양의 새로운 지식까지 폭넓게 수용한 저술이었다.

2011년 발표된 학술논문에서는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성호사설》의 내용이 105회 인용되었다고 분석했다. 이는 조선 후기의 백과사전적 지식이 후대의 저술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6]

천문학과 세계지리

십이중천변증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첫 번째 항목은 「십이중천변증설」(十二重天辨證說)이다.

이 글은 우주가 여러 겹의 하늘로 구성되어 있다는 기존의 우주론을 다룬다.

십이중천은 서양의 천문학이 중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소개된 우주구조에 관한 설명이었다.

이규경은 이러한 우주론을 여러 문헌과 비교하면서 우주와 천체의 구조에 관한 지식을 검토했다.

오늘날의 천문학에서는 우주가 문자 그대로 여러 겹의 하늘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의 가치는 당시의 우주구조에 관한 설명이 현대 과학적으로 정확했다는 데 있기보다 조선의 학자가 서양의 천문학 지식을 접하고 이를 기존의 학설과 비교했다는 점에 있다.

지구변증설

「지구변증설」(地球辨證說)은 지구의 형태와 세계에 관한 지식을 다룬 항목이다.

이규경은 중국과 서양의 문헌에 등장하는 지구의 구조와 세계지리 지식을 비교했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관점을 수용하면서 모든 지역을 중국이라는 하나의 중심으로 설명하는 기존 세계관의 한계에도 관심을 가졌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이규경은 지구가 둥글다면 특정한 지역만 절대적인 중심이라고 볼 수 없다는 취지의 논의를 전개했다.[2]

이러한 주장은 당시 일부 조선 지식인들이 서양의 지리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러한 논의가 조선 사회 전체에서 전통적인 세계관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대주에 대한 관심

이규경의 호인 오주(五洲)는 다섯 대륙을 의미하는 표현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세계를 조선과 중국 중심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다른 대륙과 국가에 관한 지리적 정보를 수집하려 했다.

서양에서 제작되어 중국어로 번역된 세계지도와 지리서적은 이러한 지식을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지구와 세계지리를 연구하면서 사용한 자료 가운데에는 유럽인들이 중국에서 저술한 서적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지리학을 받아들였다는 사실만으로 당시의 세계지리에 관한 지식이 오늘날과 완전히 같았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륙의 구분과 지명, 국가의 범위 등에 관한 인식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감자의 조선 전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항목 가운데 하나는 「북저변증설」(北藷辨證說)이다.

이 글은 조선에 감자가 전래된 시기와 경로에 관한 중요한 기록을 담고 있다.

당시 감자는 북저(北藷), 북감저(北甘藷), 토감저(土甘藷)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오늘날에는 감자와 고구마를 서로 다른 작물로 구분하지만 과거에는 감저라는 명칭이 여러 작물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문헌을 해석할 때 주의해야 한다.

1824~1825년 전래설

이규경은 감자가 순조 재위 시기인 1824~1825년 무렵 조선의 북쪽 지방을 통해 들어왔다고 기록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청나라와의 국경을 통해 여러 물품과 작물, 기술이 유입되고 있었다.

감자는 원래 남아메리카에서 재배되던 작물이었으며, 유럽과 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감자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존재했다.

이규경은 이러한 감자의 유입을 설명하면서 서로 다른 전승을 소개했다.

두 가지 전래 경로

「북저변증설」에서는 감자가 조선에 들어온 과정과 관련하여 두 가지 설명을 소개한다.

첫째는 함경도 지역의 사람이 베이징 등지에서 감자의 종자를 가져왔다는 설이다.

둘째는 인삼을 캐기 위해 조선의 북쪽 국경을 넘었던 중국인들이 산속에서 감자를 재배했으며, 이들이 떠난 뒤 남겨진 감자를 조선 사람들이 발견해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이러한 설명은 감자가 북쪽 국경지대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러 전래설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느 한 가지 설명이 완전히 입증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감자가 조선에 처음 들어온 정확한 시점과 경로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여러 기록과 해석이 존재한다.

농촌진흥청은 「북저변증설」에 감자의 전래 시기와 이러한 두 가지 전승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한다.[1]

고구마와의 차이

고구마는 1763년 조엄이 일본 대마도에서 종자를 구해 조선으로 보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반면 감자는 일반적으로 19세기 전반에 북쪽 국경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두 작물의 전래 시기와 경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북저변증설」은 감자의 전래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오주연문장전산고》 항목에서는 「북저변증설」을 소개하면서 고구마를 언급하고 있으나, 국사편찬위원회와 농촌진흥청의 설명 및 다른 감자 관련 문헌에서는 북저를 감자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 항목을 근거로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온 연도를 1824~1825년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농업과 구황작물

이규경은 농업을 국가와 백성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으로 인식했다.

그는 단순히 농작물의 종류를 조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농기구와 재배방법, 생산량과 유통 등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청나라를 비롯한 외국의 농업기술을 참고하여 조선의 농업생산력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검토했다.

새로운 농작물

이규경은 감자와 고구마를 비롯한 새로운 식량작물이 백성들의 생활에 미칠 영향을 주목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흉년이 반복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식량 부족이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감자와 고구마는 기존의 쌀과 보리, 잡곡 등을 보완할 수 있는 식량자원이었다.

그러나 두 작물 모두 조선의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조건으로 재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규경은 이러한 작물의 재배와 전파에 관한 지식을 수집하면서 농업생산을 확대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농기구와 생산기술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농기구와 직조도구, 어업에 사용하는 도구 등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규경은 외국의 농업기술을 조사하고 조선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는 농업을 국가의 경제적 기반으로 인식했으며, 백성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생산기술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은 당대의 일부 실학자들이 강조했던 경세치용과도 연결된다.

경제와 상업

화폐와 시장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화폐와 시장, 상거래 등에 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이규경은 농업뿐 아니라 상업과 물자의 유통도 국가경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장시(場市)의 운영과 상인들의 거래방식, 물자의 가격과 유통에 관한 문제를 검토했다.

또한 매점매석과 고리대 등 경제적인 폐단을 비판하면서 보다 합리적인 상업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시변증설

「장시변증설」(場市辨證說)은 조선의 시장과 상업활동을 다룬 항목이다.

이규경은 전국 각지의 장날과 시장 운영방식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조선의 지방에서는 일정한 날짜마다 장이 열렸으며,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 생활용품 등을 거래했다.

그는 장날을 통일하여 물자의 유통을 편리하게 하고 상업활동의 효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날의 전국적인 통일이 당시의 교통환경과 지역별 경제적 특성에서 실제로 얼마나 효과적이었을지는 별도로 검토할 문제다.

서점에 관한 기록

「서사변증설」(書肆辨證說)은 책을 판매하는 서점에 관한 기록을 다룬다.

이규경은 서점이 무엇인지, 중국과 조선에서 서점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조선에서 책을 판매하는 상업적인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을 검토했다.

이는 당시의 서적 유통과 출판문화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자료다.

오늘날에는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는 일이 일반적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서적의 제작과 유통에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따라서 책을 읽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소장한 문헌을 빌리거나 직접 필사하는 등의 방법을 활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자체가 방대한 필사본이라는 사실도 당시의 서적 제작과 유통환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해외 교역과 개국론

이규경은 외국과의 교역을 국가경제의 발전과 연결하여 생각했다.

그는 조선이 다른 나라들과 교류하면서 경제적인 이익과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조선에서 서양 열강과의 교역을 경계하거나 제한하려는 정책과 차이를 보였다.

여번박개시변증설

「여번박개시변증설」(與番舶開市辨證說)은 외국 선박과의 교역 문제를 다룬 항목이다.

이규경은 외국과 교역하는 일이 반드시 국가에 해로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상업과 무역의 발전이 국가의 재정과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이 외국의 기술과 물자를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서양통중국변증설

「서양통중국변증설」(西洋通中國辨證說)은 서양과 중국 사이의 교류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이규경은 서양 국가들과 중국의 무역 및 외교관계를 검토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에 참고할 만한 지식을 얻으려 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양과 직접 교역하는 경험이 제한적이었으므로 청나라에서 유입된 서적과 정보가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규경은 이러한 간접적인 정보를 통해 서양의 경제와 기술, 국제적인 교역에 관한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이규경이 해외교역의 필요성을 주장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오늘날의 자유무역이나 근대적인 국제경제체제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의 생각은 19세기 조선의 정치적·경제적 환경 속에서 제기된 개국통상론의 초기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서양의 과학과 기술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천문학과 지리학뿐 아니라 수학과 의학, 기계와 군사기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서양의 지식이 소개된다.

이규경은 서양의 과학기술이 실제 생활과 국가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의 학문이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상대적으로 강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서양의 학문은 물질적인 사물과 기술을 연구하는 데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이 동서양 학문의 실제 성격을 완전히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규경이 서양의 학문을 단순히 배척할 대상이 아니라 참고하고 배워야 할 지식으로 인식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의학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인체의 구조와 기능, 질병과 치료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인체내외치상변증설」(人體內外置象辨證說)은 인간의 신체구조를 다룬 항목이다.

이규경은 기존의 동아시아 의학뿐 아니라 서양의 해부학과 의학에 관한 자료도 검토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 소개된 서양 의학지식이 모두 현대 의학적으로 정확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저술에는 옛 서양 의학의 이론과 전통적인 동아시아 의학의 관념이 함께 나타난다.

종두법

「종두변증설」(種痘辨證說)은 천연두와 관련된 예방접종 및 종두법에 관한 기록을 다룬다.

이규경은 1854년 무렵 평안도에서 종두법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다만 당시의 종두법과 오늘날의 예방접종은 방법과 안전성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이 기록이 조선 전체에서 예방접종이 처음 시행된 시점을 확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규경이 의료기술의 발전과 외국의 의학지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4]

자명종과 기계장치

「자명종변증설」은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시계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당시의 자명종은 복잡한 기계구조와 정교한 제작기술을 필요로 하는 물건이었다.

이규경은 외국에서 제작된 기계장치에 관심을 가지고 그 구조와 활용에 관한 지식을 수집했다.

또한 용골차와 같은 양수기구 및 농업에 사용할 수 있는 기계장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 후기의 일부 지식인들이 서양과 중국의 기계기술을 관찰하고 실제 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음을 보여준다.

비차변증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일반인들의 관심을 끄는 내용 가운데 하나는 「비차변증설」(飛車辨證說)이다.

비차는 문자 그대로 하늘을 나는 수레라는 의미다.

이규경은 이 글에서 임진왜란 당시 사람이 하늘을 날아 이동했다는 전승을 소개했다.

기록에 따르면 전쟁 당시 왜군에게 포위된 성에서 누군가가 비차를 제작하여 성 안으로 날아 들어갔으며, 사람을 태우고 약 30리 정도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사람이 탈 수 있는 비행기와 유사한 장치가 존재했다는 주장에 이 글이 인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이 실제로 작동하는 비행장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비차의 설계도와 제작과정, 공학적인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기록에 등장하는 거리와 비행방식이 실제로 가능했는지에 관해서도 의문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글은 조선시대에 비행에 관한 전승과 상상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비차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사실과 조선이 실제로 근대적인 비행기를 발명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문제다.

역사학자 신병주는 이 책의 여러 흥미로운 사례 가운데 비차변증설을 소개하면서 조선 후기의 학술적 관심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어 있었는지 설명했다.[7]

음악과 풍속

속악변증설

「속악변증설」(俗樂辨證說)은 조선의 전통음악과 음악문화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이규경은 우리나라 음악의 역사와 노래의 종류, 연주방식 등을 살펴보았다.

또한 고대부터 조선에 이르는 음악문화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정리하려 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오주연문장전산고》 권17의 속악변증설에 우리나라 속악의 연원과 가곡의 종류 및 연주법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한다.[8]

이러한 기록은 오늘날 조선시대의 음악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의복과 장신구

이규경은 조선의 의복과 장신구, 머리모양 등 생활문화에도 관심을 가졌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여성들의 머리장식과 귀고리, 비녀와 댕기 등의 명칭과 형태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의 복식은 신분과 지역,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므로 이러한 기록은 조선 후기의 사회문화와 신분질서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이규경은 조선 여성들의 머리모양이 변화하는 과정과 가체의 사용, 쪽머리의 보급 등에 관한 내용을 남겼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규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여성들의 머리모양과 장신구 문화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설명하고 있다.[9]

놀이와 일상생활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석전과 같은 민간의 놀이, 음악과 연희, 시장과 음식, 생활도구에 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국왕과 고위 관료들의 정치활동을 중심으로 기록된 정사에서 충분히 확인하기 어려운 조선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연구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주로 문헌과 자신의 관찰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모든 지역과 계층의 생활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학자가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문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종교와 사상

이규경은 성리학을 학문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지만 불교와 도교, 천주교에 관한 지식도 수집했다.

그는 여러 종교의 교리와 역사, 경전과 사상적인 특징을 비교했다.

불교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불교의 전래와 교리, 경전과 윤회 등에 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해동불법변증설」과 「지옥변증설」, 「윤회변증설」 등이 있다.

이규경은 유학자로서 성리학을 우위에 두었지만 불교가 가지고 있는 일부 사상적인 특징도 검토했다.

이는 그가 기존의 성리학적인 학문체계 안에서 다른 종교에 관한 지식을 함께 연구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도교

도교에 관한 내용으로는 노자와 《도덕경》, 도교의 역사와 사상에 관한 여러 항목이 있다.

이규경은 도교가 중국과 한반도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발전했는지 살펴보았다.

그는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유교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검토하면서 일부 내용을 학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천주교와 서학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의 확산과 관련하여 정치적·사회적 갈등이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한 여러 박해사건이 발생하면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국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부 학자들은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기술에 관한 지식을 연구했다.

이규경은 천주교의 교리와 서양의 역사, 천문학과 수학 등에 관한 내용을 함께 검토했다.

그러나 그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려 했다는 사실만으로 천주교의 모든 교리를 수용하거나 신앙생활을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당시 서학이라는 표현은 종교적인 교리뿐 아니라 서양에서 전해진 다양한 학문과 기술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른 백과사전과의 비교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조선 후기의 여러 백과사전적 저술 가운데 하나다.

대표적으로 《지봉유설》과 《성호사설》, 《임원경제지》, 《청장관전서》 등이 있다.

저술 저자 주요 특징
지봉유설 이수광 역사와 문학, 자연과 풍속 등 다양한 지식을 수집한 17세기의 백과사전적 저술
성호사설 이익 경전과 역사, 천문과 지리, 사회문제 등에 관한 폭넓은 학술적 기록
청장관전서 이덕무 문학과 역사, 문헌고증과 박물학 등 다양한 저술을 집대성
임원경제지 서유구 농업과 주거, 음식과 생활기술 등 실용적인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
오주연문장전산고 이규경 1,400개가 넘는 주제를 변증설 형식으로 정리한 19세기의 방대한 박물고증서

이러한 책들은 모두 다양한 지식을 수집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저술 목적과 구성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임원경제지》는 농업과 생활경제에 필요한 구체적인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큰 비중을 두었다.

반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다양한 문헌에 등장하는 사실과 학설을 비교하여 고증하는 방식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두 책을 동일한 종류의 백과사전이라고만 설명하기보다는 실제 저술 목적과 활용방식을 구분하는 것이 적절하다.

필사본의 보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소실될 위험을 겪었다.

군밤 포장지로 발견되었다는 일화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오주연문장전산고》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서울 광교 부근에서 한 군밤 장수가 책의 종이를 군밤을 싸는 데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를 발견한 권보상이 책을 입수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후 광문회에 보관되었다가 최남선의 소장품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오주연문장전산고》 해설에도 소개되어 있는 일화다.[2]

다만 이 이야기의 세부적인 경위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당시의 독립적인 기록이 충분한지는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책이 실제로 어느 정도 군밤 포장지로 사용되었는지와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에 관한 세부적인 설명은 전승의 성격을 고려하여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어쨌든 방대한 학술서가 오랫동안 중요한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근대에 다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60권 규모의 조선시대 백과사전이 하마터면 군밤을 싸는 종이로 사라질 뻔했다는 이야기다.

최남선 소장본의 소실

최남선은 근대 한국의 문학과 역사, 문화연구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로, 많은 문헌을 수집하고 편찬하는 일에도 관여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필사본 역시 그의 소장품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최남선이 소장했던 필사본은 소실되었다.

이로 인해 원래의 필사본을 직접 확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필사본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책의 내용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규장각 소장본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의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규장각에는 두 종류의 필사본이 존재한다.

첫째는 청구기호 古0160-13에 해당하는 60책의 완질본이다.

둘째는 규5627에 해당하는 필사본으로, 권1부터 권4까지가 빠진 56책이 남아 있다.

이러한 필사본은 최남선의 소장본이 소실된 이후에도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연구하고 간행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5]

다만 현존하는 필사본을 모두 이규경이 직접 손으로 작성한 원고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필사본은 다른 사람이 기존 원고를 베껴 작성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저자의 친필 원고와 필사된 전승본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간행과 번역

《오주연문장전산고》는 근대 이후 필사본과 영인본, 국역본 등의 형태로 간행되었다.

영인본은 기존의 문헌을 사진이나 인쇄기술로 복제하여 출판한 책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58년 동국문화사에서 영인본을 간행했으며, 이후 1982년 명문당과 1993년 고전간행회에서도 관련 판본을 출판했다.

또한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67년 경사편을 국역한 책을 간행했으며, 1982년에는 인사편의 일부를 번역하여 출판했다.

이후에도 여러 연구자들의 번역과 고증작업이 이루어졌으며,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번역자료를 통해 일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10]

그러나 한문 원문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는 옛 지명과 사물의 명칭, 과학적인 용어를 정확하게 해석해야 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또한 원문이 오늘날에는 사용되지 않는 학설과 전승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번역과 별도로 현대적인 주석과 해설이 필요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연구할 때에는 가능하다면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비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역사적 가치

조선 후기의 지식 집대성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조선 후기의 다양한 지식을 하나의 방대한 저술로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치와 역사를 다룬 공식적인 기록뿐 아니라 농업과 의학, 음악과 음식, 복식과 생활도구 등 여러 분야의 자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당시의 학자들이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지식을 얻을 수 있었는지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관심

이규경은 성리학적인 학문을 기본으로 삼으면서도 서양의 과학기술과 청나라의 새로운 학술성과를 수용했다.

그는 외국의 지식을 무조건 거부하기보다 조선의 현실에 도움이 되는지 검토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 개방성이 당시 조선의 지식인 전체에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또한 이규경이 실제로 외국의 기술을 얼마나 직접 실험하고 보급했는지도 개별적인 자료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조선의 사회경제사 연구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농업과 상업, 시장과 유통, 광물과 기술, 의료와 풍속 등에 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적 사건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과 경제활동을 연구하는 데에도 활용된다.

감자의 전래 시기와 관련된 「북저변증설」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북어의 생산과 유통, 조선 여성들의 머리모양과 장신구, 민간의 놀이와 음악 등에 관한 기록도 다른 역사자료와 비교하여 연구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의 계승

《오주연문장전산고》는 18세기의 실학과 북학이 19세기에도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규경은 이익과 이덕무 등 선대 학자들의 저술을 읽고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면서 학문을 발전시켰다.

또한 최한기와 김정호 등 동시대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세계지리와 기술에 관한 지식을 확보했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 후기의 학문이 성리학적인 경전 연구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계

현대적인 백과사전과의 차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오늘날 백과사전이라고 설명되지만 현대적인 백과사전과는 여러 차이가 있다.

우선 모든 항목이 통일된 형식과 길이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일부 글에서는 저자의 설명과 문헌의 인용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같은 주제가 서로 다른 항목에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현대적인 학문분류체계와 다른 기준에 따라 내용을 정리했다.

따라서 오늘날의 백과사전처럼 원하는 주제를 간단하게 검색하여 정확한 정의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저술된 것은 아니다.

기록의 사실성과 전승

이규경은 여러 문헌의 기록을 수집했지만 당시 이용할 수 있는 자료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부 내용은 직접적인 관찰과 경험보다 이전 시대의 문헌이나 전승에 의존했다.

비차에 관한 이야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기록은 역사적인 상상력과 전승을 연구하는 데에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발생한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로 사용되려면 추가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따라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을 활용할 때에는 책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을 구분해야 한다.

저술의 체계성

이 책은 저자가 오랜 기간에 걸쳐 수집하고 작성한 글들을 모은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전체적인 구성에 완전히 일관된 체계가 적용되지 않았으며, 항목의 내용과 분량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방대한 지식을 수록했다는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항목의 구성에 체계적인 정리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5]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당시 개인이 방대한 문헌을 조사하고 필사하여 백과사전적 저술을 편찬해야 했던 환경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담

  •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이 19세기 전반부터 중엽에 걸쳐 저술한 백과사전이다.
  • 한자로는 五洲衍文長箋散稿라고 쓴다.
  • 일반적으로 60권 60책, 1,417개 항목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일부 자료에서는 1,416개 항목이라고 설명한다.
  • 저자 이규경의 호는 오주(五洲)다. 다섯 대륙이라는 의미의 오대주와 연결된 이름이다.
  • 이규경은 이덕무의 손자이자 이광규의 아들이다.
  •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규장각에서 검서관으로 활동했다.
  • 반면 이규경은 1808년 검서관 취재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이규경의 사망 연도는 일반적으로 1856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1863년으로 표기한다.
  •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역사와 지리, 천문학과 의학, 농업과 경제, 종교와 음악 등 다양한 지식이 기록되어 있다.
  • 각 항목을 변증설이라는 형식으로 작성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 변증설은 여러 문헌과 학설을 비교하면서 그 근거를 검토하는 방식이다.
  • 그러나 모든 항목에 변증설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해서 내용 전체가 현대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 이규경은 청나라의 고증학과 서양의 과학기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 서양과 관련된 내용만 약 80개 항목에 걸쳐 등장한다.
  • 책의 첫 번째 항목은 「십이중천변증설」로, 당시의 우주론을 다룬다.
  • 「지구변증설」에서는 지구의 형태와 세계지리에 관한 여러 학설을 검토했다.
  • 이규경은 지구가 둥글다는 인식을 받아들이면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상대화하려 했다.
  • 오늘날 《오주연문장전산고》가 자주 인용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감자의 전래 시기에 관한 기록 때문이다.
  • 「북저변증설」에는 감자가 1824~1825년 무렵 조선 북부로 전래되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 당시 감자가 들어온 경로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종자를 가져왔다는 설과 국경을 넘었던 중국인들이 남겨둔 감자를 조선 사람들이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설 등이 전해진다.
  • 따라서 「북저변증설」의 기록만으로 감자가 정확히 누구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는지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다.
  • 고구마는 이보다 앞선 1763년 조엄이 대마도에서 종자를 구해 조선에 보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고구마를 들여온 조엄과 감자의 유입에 관한 기록을 남긴 이규경은 서로 다른 인물이다.
  • 이규경은 농업과 구황작물 외에도 경제와 상업, 외국과의 무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장시변증설」에서는 조선의 시장과 장날에 관한 문제를 검토했다.
  • 「서사변증설」에서는 서점과 책의 판매, 출판문화 등에 관한 기록을 다루었다.
  • 조선 후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 출판시장과 도서유통체계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이규경의 저술 역시 원래는 필사본으로 전해졌다.
  • 「비차변증설」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사람이 하늘을 날아 이동했다는 전승을 소개한다.
  • 그러나 이러한 기록이 실제로 작동하는 비행기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 비차의 구체적인 설계도나 제작기록을 충분히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 책에는 조선시대의 음악과 놀이, 복식과 장신구에 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 따라서 당시의 정치사뿐 아니라 일상생활과 문화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활용된다.
  • 1910년대에 군밤 장수가 책의 종이를 포장지로 사용하던 중 권보상이 발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이 책은 이후 광문회와 최남선을 거쳐 보존되었다.
  • 그러나 최남선이 소장했던 필사본은 6·25 전쟁 과정에서 소실되었다.
  • 다행히 다른 필사본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내용이 전해질 수 있었다.
  • 조선시대에 한 학자가 평생을 바쳐 만든 방대한 백과사전이 군밤 포장지가 될 뻔했다가 살아남았다는 사연은 이 책의 역사만큼이나 흥미롭다.
  •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완질본 60책과 일부 권이 빠진 56책의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 이 책은 《지봉유설》과 《성호사설》, 《청장관전서》 등 조선시대의 백과사전적 저술 전통을 계승했다.
  • 이규경은 조선의 기존 지식에 청나라와 서양의 학문까지 추가하여 자신의 저술을 발전시켰다.
  • 그러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였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분야에서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 그럼에도 당시 조선의 학문과 사회, 생활문화를 폭넓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 오늘날의 인터넷도 인쇄술도 없던 시대에 한 사람이 1,400개가 넘는 주제를 조사하고 정리했다는 점만으로도 상당한 규모의 작업이었다.

관련 문서

각주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