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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안드레
생년월일1935년 9월 16일 ~ 2024년 1월 24일
국적미국
출생지미국 매사추세츠주 퀸시
직업조각가, 시인
활동기간1950년대 ~ 2024년
장르미니멀리즘, 현대조각, 개념미술
영문Carl Andre

칼 안드레(Carl Andre, 1935년 9월 16일 ~ 2024년 1월 24일)는 미국의 조각가이자 시인으로, 미니멀리즘 조각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나무·벽돌·강철·구리·알루미늄·납 같은 산업용 재료를 거의 가공하지 않은 채 일정한 규칙으로 바닥에 배열하는 작업으로 유명하며, 조각을 받침대 위에 세워 감상하는 독립된 물체가 아니라 관람객과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장소로 이해했다.[1]

대표작으로는 내화벽돌 120개를 바닥에 배열한 《Equivalent VIII》, 금속판 144장을 정사각형으로 깐 《144 Lead Square》 등이 있다. 작품 제작에 손기술이나 복잡한 가공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 보면 공사장에서 자재 갖다놓고 작업 끝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안드레에게 중요한 것은 개별 벽돌의 조형성이 아니라 재료의 무게·크기·표면과 공간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만드는가였다.[2][3]

그는 도널드 저드, 댄 플래빈, 로버트 모리스, 솔 르윗 등과 함께 1960년대 미국 미니멀리즘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만 작가 자신은 작품을 순수한 아이디어의 구현이라고 보기보다는 실제 재료와 공간의 물질적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훗날 개념미술과 함께 분류되는 경우에도 자신은 개념 자체보다 물질이 가진 성질에 더 관심이 있다고 강조했다.[1]

생애

칼 안드레는 1935년 매사추세츠주 퀸시에서 태어났다. 퀸시는 조선업과 화강암 채석 등 산업적 환경으로 유명한 지역이었고, 안드레는 어린 시절부터 철도와 선박, 석재와 목재 같은 대규모 산업재료를 접하며 성장했다. 이후 매사추세츠의 명문 사립학교인 필립스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는데 이 시기에 훗날 실험영화 감독으로 활동하는 홀리스 프램프턴과 친해졌다.[4]

학교를 마친 뒤 미 육군에 복무했고 유럽을 여행한 후 1957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에서는 초기 조각과 시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으며 당시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조각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는 나무를 직접 자르고 깎아 수직적인 조각을 만들었지만 점차 작가가 재료를 형태로 바꾸는 행위 자체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1]

1960년부터 1964년까지는 펜실베이니아 철도에서 제동수와 차장 보조 등으로 일했다. 이 경험은 그의 작업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긴 철로와 반복되는 침목, 산업용 강철의 형태, 무거운 재료가 수평으로 놓이는 구조 등을 매일 접하면서 조각을 위로 세우는 대신 바닥에 펼치는 방식으로 관심이 이동했다. MoMA는 안드레가 철도에서 일한 경험이 자신을 기존 미술의 허세에서 떼어놓고 강철과 녹의 수평적인 선으로 돌아가게 했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고 소개한다.[3]

1965년 뉴욕 Tibor de Nagy Gallery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이후 빠르게 주목받았다. 1966년 뉴욕 유대인박물관에서 열린 《Primary Structures》 전시, 1968년 도큐멘타 4, 1969년 베른 쿤스트할레의 《When Attitudes Become Form》 등 1960년대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전시에 잇달아 참여했다. 1970년에는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는데 당시 35세에 불과했다.[4]

미니멀리즘

칼 안드레의 조각은 미니멀리즘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작품에는 작가의 감정이나 서사, 상징적 이미지가 거의 드러나지 않고 벽돌·목재·금속판 같은 단순한 재료가 일정한 규칙으로 반복된다.

이전의 전통적인 조각에서는 대리석이나 청동을 깎고 주조해 사람이나 동물, 특정한 형태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안드레는 이런 방식을 거의 전부 버렸다. 공장에서 생산된 벽돌이나 금속판을 주문해 그대로 가져온 뒤 자르거나 용접하지 않고 단순히 옆에 놓거나 쌓았다.

중요한 것은 재료가 무엇으로 변했는가가 아니라 재료가 원래 무엇인가였다. 구리는 구리이고, 납은 납이며, 벽돌은 벽돌이었다. 작가가 재료 위에 자신의 솜씨를 과도하게 남기는 대신 재료 자체의 무게와 질감, 색과 크기를 관람객이 직접 인식하도록 만들었다.[1]

이 때문에 안드레 작품은 다른 미니멀리즘 조각과 비교해도 특히 가공이 적다. 도널드 저드의 금속 상자는 정밀하게 제작된 산업제품처럼 보이지만 안드레 작품은 진짜 공업자재를 그냥 가져다놓는 경우가 많다. 미술관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 빼면 건축현장에서 봐도 아무 이상하지 않을 물건들이다.

조각을 바닥으로 내리다

안드레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조각을 세우는 것에서 눕히는 것으로 바꾼 데 있다. 전통적인 조각은 보통 받침대 위에 세워지고 관람객은 작품 주변을 돌면서 바라본다.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생긴다.

안드레는 받침대를 제거하고 작품을 미술관 바닥에 직접 놓았다. 일부 작품은 너무 낮아 거의 바닥의 일부처럼 보이며 관람객이 작품 위를 직접 걸을 수 있도록 설치되기도 했다.

1969년 《144 Lead Square》는 대표적인 사례다. 12인치 정사각형 납판 144장을 12×12 형태로 나란히 배치해 약 12피트짜리 큰 정사각형을 만든 작품이다. 두께는 약 1cm에 불과해 조각이라기보다 금속 바닥처럼 보인다.[3]

여기서 작품은 더 이상 방 안에 들어 있는 물체가 아니라 방의 바닥과 직접 결합한다. 관람객 역시 작품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같은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안드레가 자신의 조각을 sculpture as place라고 설명한 것도 이런 이유다.[1]

Equivalent

안드레의 가장 유명한 연작 가운데 하나가 Equivalent 시리즈다.

1966년 처음 제작된 이 작품들은 각각 동일한 종류의 벽돌 120개를 사용했다. 모든 작품은 벽돌의 개수, 전체 부피, 높이 등이 동일하지만 바닥에 배치되는 가로와 세로의 형태가 서로 달랐다.[2]

예를 들어 《Equivalent V》는 벽돌을 가로 5개 길이, 세로 12개 폭으로 배열하고 《Equivalent VIII》은 가로 10개 길이, 세로 6개 폭으로 배열했다. 모양은 다르지만 사용한 벽돌의 수와 물질량은 같다.

안드레는 이를 통해 조각의 정체성이 특정한 형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재료의 양과 공간 속 배열 관계에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작품 제목의 Equivalent, 즉 동등한 것이라는 말도 이 구조에서 나온다.

1966년 제작된 초기 Equivalent 작품 대부분은 전시 후 해체됐고 1969년 안드레가 내화벽돌로 다시 제작했다. 초기 작품의 모래·석회 벽돌을 더 이상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2]

Equivalent VIII

《Equivalent VIII》은 칼 안드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하면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많은 욕을 먹은 작품이다.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내화벽돌 120개를 바닥에 두 층 높이의 낮은 직사각형으로 쌓아놓은 것이 전부다.

테이트 미술관이 1972년 작품을 구입했는데, 1976년 영국 언론에서 공공 미술관이 세금으로 벽돌 더미를 샀다는 식의 보도가 나오면서 엄청난 논쟁이 벌어졌다. 작품은 흔히 The Bricks라고 불리며 현대미술을 조롱하는 대표 사례처럼 취급됐다.

대중 입장에서는 실제 건축용 벽돌과 별 차이 없어 보이는 물건을 미술관이 돈 주고 구입했다는 사실이 황당하게 느껴질 만했다. 특히 작품 제작기술을 미술의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안드레가 한 일은 벽돌 주문해서 바닥에 정렬한 게 사실상 전부다.

하지만 작품의 미술사적 맥락은 벽돌 자체를 특별한 물체로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동일한 산업재료를 반복적으로 배열하면서 조각의 형태·무게·부피·공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받침대라는 전통적인 조각의 경계를 제거한 것이 핵심이었다.[2]

이 작품을 좋아하느냐와 미술사적으로 왜 중요한가는 별개의 문제다. 벽돌 120개가 보기 싫으면 보기 싫은 거고, 그렇다고 이 작품이 1960년대 조각의 공간 개념을 바꾸는 흐름에서 중요한 사례라는 사실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재료

칼 안드레는 작품의 재료를 가능한 한 원래 상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가 자주 사용한 재료는 다음과 같다.

  • 벽돌
  • 목재
  • 강철
  • 구리
  • 알루미늄
  • 납
  • 아연
  • 마그네슘
  • 주석
  • 화강암
  • 석회암

안드레는 이런 재료를 조각해서 다른 모양으로 바꾸기보다 공장에서 생산된 표준 규격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로 다른 금속을 동일한 크기의 판으로 만들어 나란히 놓으면 관람객은 형태보다 금속마다 다른 색과 반사율, 무게감과 표면을 비교하게 된다.

MoMA의 《144 Lead Square》 역시 같은 시스템을 납뿐 아니라 알루미늄·강철·아연·구리·마그네슘·주석 등 여러 금속으로 제작한 작업군 가운데 하나다.[3]

장소

안드레는 조각이 공간을 단순히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조각 하나를 빈 전시장 중앙에 세우는 대신 바닥 전체에 금속판을 깔거나 목재를 긴 선으로 배치하면 관람객이 공간을 통과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이런 접근은 조각을 독립적인 물체로 보는 기존의 관점을 약화시켰다. 작품의 크기와 방향, 전시공간의 벽과 바닥, 관람객의 움직임이 모두 작품 경험에 포함된다.

Dia Art Foundation의 안드레 회고전 제목이 《Sculpture as Place, 1958–2010》이었던 것도 그의 조각론을 직접 반영한 것이다.[1]

철도와 수평성

안드레 작품에서 유난히 수평선과 반복적인 배열이 많이 나타나는 데에는 철도 노동 경험이 자주 언급된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 펜실베이니아 철도에서 일하며 긴 철로와 침목, 화물차의 반복구조를 매일 경험했고 안드레 자신도 이 시기가 조각의 수평성을 발견하는 데 중요했다고 회고했다.[3]

철로는 조각처럼 위로 솟아오르지 않고 땅을 따라 계속 이어진다. 철로의 각각의 침목도 하나하나 독특한 조각이 아니라 동일한 단위가 반복되는 구조다.

안드레의 바닥조각은 이런 산업적 풍경과 상당히 닮았다. 금속판 하나하나보다 여러 단위가 반복되면서 만들어내는 길이나 면이 중요하다.

솔 르윗과의 관계

솔 르윗과 칼 안드레는 1960년대 뉴욕 미술계에서 활동한 가까운 동료이자 오랜 친구였다. 두 사람은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의 형성 과정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르윗이 규칙과 아이디어를 먼저 정한 뒤 다른 사람이 그 지침을 실행해도 작품이 성립한다고 봤다면 안드레는 실제 재료의 물질성과 공간적 배치를 더 직접적으로 강조했다.

솔 르윗 칼 안드레
주요 관심 규칙, 시스템, 아이디어, 실행 재료, 무게, 장소, 배열
대표 형식 벽 드로잉, 지시문, 정육면체 구조 벽돌, 목재, 금속판 바닥조각
제작 다른 사람이 지시에 따라 제작 가능 표준 산업재료를 직접 공간에 배치
공간 규칙이 공간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듦 작품 자체가 공간을 장소로 변환

둘은 개인적으로도 오랫동안 교류했다. Dia Art Foundation은 2014년 르윗이 소장했던 안드레의 편지·시·콜라주 등 200점이 넘는 자료를 전시한 《A Friendship: Carl Andre’s Works on Paper from the LeWitt Collection》을 열기도 했다.[5]

시

칼 안드레는 조각가로 가장 유명하지만 시 작업도 매우 많이 했다. Dia에 따르면 1960년대에만 1,300쪽이 넘는 시를 제작했으며 전체 활동기간 동안 조각 못지않게 많은 시를 남겼다.[1]

그의 시는 일반적인 문학작품처럼 문장을 길게 쓰는 방식보다 타자기로 단어와 글자를 종이 위에 반복하고 배열해 시각적인 구조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글자의 의미뿐 아니라 단어가 종이 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형태 자체를 물질처럼 다뤘다.

1963년 제작한 《one hundred sonnets》은 타자기로 만든 100장의 작업으로 구성돼 있다.[6]

조각에서는 벽돌이나 금속판이라는 기본 단위를 반복해서 배치하고 시에서는 단어나 글자를 반복해서 배열했다는 점에서 두 작업은 의외로 상당히 비슷하다.

브랑쿠시의 영향

안드레의 초기 조각에는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브랑쿠시는 복잡한 사실적인 묘사보다 단순한 형태를 반복하고 재료 자체의 특성을 드러내는 조각을 제작했다. 특히 《끝없는 기둥》처럼 기본 단위를 수직으로 반복하는 방식은 젊은 안드레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안드레 역시 처음에는 목재를 쌓아 수직적인 구조물을 만들었지만 점차 이를 수평으로 눕혔다. 브랑쿠시의 기둥이 위로 계속 올라간다면 안드레의 작품은 그 기둥을 바닥에 눕혀 공간 속으로 이어나간 것처럼 볼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조각의 수직성과 기념비적인 성격은 약해지고 관람객이 실제로 걸어 다니는 바닥이 조각의 핵심 무대가 됐다.

작품 위를 걷기

안드레의 일부 바닥조각은 관람객이 작품 위를 직접 걷는 것을 전제로 했다.

금속판이나 벽돌이 바닥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있기 때문에 작품을 피해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작품 표면을 밟으면서 재료의 감촉과 소리, 공간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규칙과 정반대에 가깝다.

다만 현재 모든 미술관이 모든 안드레 작품을 자유롭게 밟게 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보존과 안전 문제에 따라 접근을 제한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전시장에 안드레 작품이 있다고 무작정 올라가면 그냥 직원한테 제지당할 수 있다.

작품 제작

안드레 작품에서는 작가의 손기술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벽돌은 벽돌공장에서 만들고 금속판도 산업체에서 절단한다. 안드레는 이미 존재하는 표준화된 재료를 선택하고 개수와 배열방식을 결정한다.

이 때문에 그의 조각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만들었다기보다 배치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안드레는 작품을 단순한 아이디어로 축소하지 않았다. 실제 벽돌의 무게와 금속판의 차가운 표면, 나무의 냄새처럼 현실의 물질적인 특성이 중요했다. 그래서 같은 형태를 종이에 그려놓는 것과 실제 납판 144장을 바닥에 까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라고 봤다.[1]

이 점에서 그는 조셉 코수스나 로렌스 위너처럼 언어와 아이디어 자체를 작품의 중심으로 삼은 개념미술가들과는 차이가 있다.

Equivalent VIII 논쟁

《Equivalent VIII》을 둘러싼 영국의 논쟁은 현대미술과 대중 사이의 충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벽돌이라는 재료 자체가 너무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거대한 형상을 만들었다면 작품 가격이 비싸더라도 제작기술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벽돌 120개는 일반인도 건자재점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다.

이 때문에 작품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미술관이 평범한 벽돌을 비싼 돈을 주고 샀다고 조롱했고, 현대미술이 대중을 속이는 대표적인 사례처럼 취급했다.

반면 작품의 지지자들은 벽돌 개별 가격과 미술작품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것은 작품의 역사적·공간적 맥락을 무시한다고 반박했다.

이 논쟁은 이후에도 현대미술을 둘러싼 기사나 방송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되며 《Equivalent VIII》을 안드레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작품을 좋아해서 유명해졌다기보다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유명해진 측면도 상당하다.

아나 멘디에타 사망 사건

칼 안드레의 생애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건은 당시 아내였던 쿠바계 미국인 미술가 아나 멘디에타의 죽음이다.

1985년 9월 8일 멘디에타는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아파트 34층 창문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당시 안드레와 멘디에타는 부부였으며 사건 당일 두 사람이 다투었다는 정황이 있었다. 안드레는 경찰에 체포됐고 이후 멘디에타를 창문 밖으로 밀어 살해했다는 혐의로 2급 살인죄로 기소됐다.[7]

안드레는 혐의를 부인했다. 사건 초기 911 통화에서는 두 사람이 자신의 미술계 경력과 관련해 다투었고 멘디에타가 창문 밖으로 나갔다는 취지로 설명했으며, 이후 경찰 진술에서는 자신이 방 안에 없을 때 멘디에타가 추락했다고 말했다.[7]

재판은 배심원 없이 판사가 판단하는 방식으로 진행됐고 1988년 법원은 안드레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따라서 법적으로 안드레가 멘디에타를 살해했다고 확정해서 서술하는 것은 잘못이다.[7]

그러나 사건을 둘러싼 논쟁은 무죄판결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멘디에타의 가족과 친구, 여성주의 미술계 인사들과 여러 활동가들은 판결에 문제를 제기하며 안드레의 책임을 계속 주장했다. 반대로 법원은 형사재판에서 유죄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이후 안드레의 전시가 열릴 때마다 반복적으로 언급됐다. 특히 멘디에타의 작품과 경력은 오랫동안 안드레보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됐다는 비판과 결합하면서, 미술기관이 안드레의 작품을 어떻게 전시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졌다.[8]

아나 멘디에타와 미술계 논쟁

아나 멘디에타는 자신의 몸과 자연환경을 결합한 퍼포먼스·사진·영상·랜드아트 작업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특히 《Silueta Series》는 흙·불·꽃·피 등을 이용해 인간의 신체 흔적을 자연 속에 남기는 작업으로 후대 여성주의미술과 퍼포먼스아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멘디에타가 사망한 이후 안드레는 법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두 작가를 둘러싼 미술계의 갈등은 지속됐다.

1992년 구겐하임에서 안드레의 작품이 포함된 전시가 열렸을 때 여성주의 활동가와 예술가들이 미술관 앞에서 멘디에타의 죽음을 환기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후 안드레 회고전이 열릴 때에도 비슷한 항의가 반복됐다.

따라서 안드레를 다룬 현대 전시와 연구에서는 그의 작품과 멘디에타 사망 사건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계속 제기된다. 한쪽에서는 법적으로 무죄인 작가의 작품을 범죄사실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다른 쪽에서는 미술사와 제도가 두 사람에게 부여한 권력과 명성의 차이까지 함께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활동

안드레는 예술을 완전히 정치와 분리한 작가는 아니었다. 1960년대 말에는 예술가의 권리와 미술기관 개혁을 요구한 Art Workers' Coalition 활동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뉴욕의 주요 미술관에 무료관람일 확대, 여성 및 소수자 작가의 전시 확대, 예술가 권리 개선 등을 요구했다.

안드레는 개인적으로 좌파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동과 생산, 산업재료에 대한 관심 역시 자신의 조각론과 어느 정도 연결돼 있었다.[1]

다만 작품을 직접적인 정치선전으로 제작한 경우는 많지 않았고 실제 조각은 정치적 메시지보다 재료와 공간의 관계에 집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표 작품

연도 작품 특징
1959~1960 《Last Ladder》 초기 목재 조각
1966 《Lever》 137개의 내화벽돌을 일렬로 배열
1966/1969 《Equivalent》 연작 벽돌 120개를 서로 다른 형태로 배치
1966/1969 《Equivalent VIII》 안드레의 대표작, 영국에서 대규모 현대미술 논쟁 발생
1969 《144 Lead Square》 납판 144장을 12×12 배열로 바닥에 설치
1971 《Inverted Henge》 목재 4개를 수평적으로 배열
1974 《Cooper Station》 골판지 130개를 이용한 바닥작업
1977 《Redoubt》 서부 적삼목 100개를 이용한 대형 구조

Lever

1966년 제작된 《Lever》는 안드레의 초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동일한 내화벽돌 137개를 바닥에 한 줄로 길게 놓은 작품으로, 벽돌 줄이 전시장 중앙에서 관람객 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다.

작품에는 벽돌을 붙이는 접착제나 시멘트가 사용되지 않는다. 그냥 같은 벽돌을 차례로 붙여놓는다.

그러나 이 긴 수평선은 전시장 공간을 실제로 둘로 나누고 관람객의 이동경로를 바꾼다. 작품이 방 안에 하나의 물체로 존재하기보다 공간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안드레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144 Lead Square

《144 Lead Square》는 1969년 제작된 대표적인 금속 바닥조각이다.

12인치 크기의 납판 144장을 12×12 정사각형으로 배열했다. 전체 크기는 약 12×12피트지만 높이는 약 1cm밖에 되지 않는다.[3]

이 작품에서는 모든 단위가 동일한 크기를 갖고 어느 한 부분도 중심이나 장식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조각에서 중요한 받침대, 조각기술, 매끄러운 마감, 수직성 등이 거의 전부 사라진다.

남는 것은 납이라는 재료와 반복되는 정사각형, 그리고 전시장 바닥 위에서 작품이 차지하는 실제 면적이다.

시와 조각

안드레의 시 작업은 조각과 별개의 취미가 아니라 상당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조각에서 벽돌과 금속판 같은 단위를 나란히 배열하듯 시에서는 단어와 문자 자체를 종이 위에 배열했다. 문장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보다 반복과 위치를 통해 단어를 하나의 물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Dia 회고전에서도 조각뿐 아니라 안드레의 타자기 시와 종이작업을 대규모로 함께 전시했다.[1]

이런 작업은 안드레가 단순히 벽돌만 놓던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라 언어와 물질의 구조를 비슷한 방식으로 탐구했던 작가라는 점을 보여준다.

작품 보존

안드레 작품은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보존과 재설치 방식도 독특하다.

벽돌이나 금속판을 서로 용접하거나 접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전시가 끝나면 작품을 다시 개별 부품으로 분해해 보관할 수 있다.

나중에 전시할 때 정확한 배열과 간격에 맞춰 다시 설치하면 된다.

《Equivalent》 연작처럼 초기 작품이 해체된 뒤 같은 규격의 재료로 다시 제작된 사례도 있다. 이런 점에서는 솔 르윗의 벽 드로잉과 비슷하게 특정한 한 번의 설치가 작품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다만 차이점은 르윗의 경우 지시와 시스템 자체가 특히 중요했다면 안드레에게는 실제 사용되는 재료의 물성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이다.

비판

칼 안드레의 작품은 미니멀리즘에 대한 대중적 비판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벽돌을 바닥에 깔거나 철판을 늘어놓는 방식 때문에 미술을 공부하지 않은 관람객이 보기에 작가가 실제로 한 일이 거의 없어 보인다.

특히 《Equivalent VIII》 논쟁 이후 안드레는 이딴 것도 미술이냐는 현대미술 비판에 가장 자주 끌려나오는 작가 중 하나가 됐다.

이 비판에는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다. 안드레 작품은 사실적인 묘사 능력이나 복잡한 수공기술을 보여주려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기준으로 보면 볼거리가 거의 없다.

반면 미술사적으로는 조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존 조건을 대거 제거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된다. 받침대를 없애고, 작가의 손기술을 줄이고, 산업재료를 그대로 사용하고, 조각을 수직적인 물체가 아니라 바닥과 공간의 일부로 만든 변화는 이후 설치미술과 장소특정적 미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고 벽돌만 아무렇게나 깔아놓으면 자동으로 안드레급 미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안드레의 작업은 1960년대 미니멀리즘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기존 조각의 조건을 하나씩 제거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그냥 공사 끝나고 남은 벽돌 120개 방치해놓은 건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정리를 안 한 것이다.

말년

1980년대 이후에도 안드레는 유럽과 미국에서 전시를 계속했지만 멘디에타 사건과 재판은 그의 경력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는 한동안 대규모 회고전이 드물었으나 유럽에서는 비교적 꾸준히 작품이 전시됐다.

2014년 Dia:Beacon은 《Carl Andre: Sculpture as Place, 1958–2010》이라는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했다. 1970년대 후반 이후 미국에서 열린 첫 주요 안드레 회고전으로 약 50점의 조각과 200점 이상의 시·종이작업, 사진과 기록물 등이 전시됐다.[9]

전시는 이후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베를린 Hamburger Bahnhof, 파리 Musée d'Art Moderne 등으로 순회했다.

2024년 1월 24일 뉴욕에서 사망했으며 향년 88세였다.[10]

이름

영문 이름은 Carl Andre이며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칼 안드레라고 표기한다. 자료에 따라 카를 안드레라는 표기도 보인다.

검색할 때는 칼 안드레, Carl Andre, 칼 안드레 미니멀리즘, Carl Andre Equivalent VIII, Carl Andre bricks, 칼 안드레 아나 멘디에타, 144 Lead Square 등의 검색어가 많이 사용된다.

여담

  • 1935년 매사추세츠주 퀸시에서 태어났다.
  • 솔 르윗과 오랫동안 가까운 친구였다.
  • 젊은 시절 펜실베이니아 철도에서 약 4년간 일했다.
  • 철도에서 경험한 수평적인 선과 반복구조가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 조각뿐 아니라 타자기로 만든 시를 대량으로 제작했다.
  • 초기에는 나무를 실제로 자르고 깎는 조각도 만들었다.
  • 시간이 지나면서 재료를 거의 가공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동했다.
  • 작품에 벽돌, 납, 구리, 강철, 알루미늄, 목재 같은 산업재료를 많이 사용했다.
  • 작품을 받침대 위에 올리지 않고 바닥에 직접 놓는 경우가 많다.
  • 관람객이 직접 밟을 수 있도록 제작된 바닥조각도 있다.
  • 《Equivalent》 연작은 각각 벽돌 배치는 다르지만 사용한 벽돌의 수와 부피가 동일하다.
  • 《Equivalent VIII》은 영국에서 현대미술을 둘러싼 대표적인 논쟁을 일으켰다.
  • 안드레는 자신의 조각을 독립된 물체보다 장소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 Dia Art Foundation은 그의 전체 작업에서 2천 점이 넘는 조각과 비슷한 규모의 시 작업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1]
  • 아나 멘디에타의 사망과 관련해 살인 혐의로 기소됐지만 1988년 무죄판결을 받았다.
  • 무죄판결 이후에도 이 사건은 미술계에서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됐다.
  • 2014년 열린 Dia 회고전에서도 작품 자체와 별개로 멘디에타 사건을 둘러싼 시위와 비판이 이어졌다.
  • 2024년 88세로 사망했다.
  • 미술관에 벽돌 깔아놓는다는 현대미술 고정관념을 실제로 만든 당사자 가운데 하나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