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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정약용(丁若鏞)
근세에 태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호는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이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같은 책을 남긴 조선 후기 지식인 최종보스급 인물이다.
상세
반도의 테크니션<반도 최초의 궁궐 테크니션은 장영실>이자 실학자이다.
저술이 매우 많다. 현재 전집인 여유당전서가 다산학술문화재단 등에 의해 정본화, 전산화, 표점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방대한 분량으로 정리되어 있다. 다만 전체가 현대인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완역본으로 다 풀린 건 아니니, “와 다산 전집 읽어야지 ㅎㅎ” 하고 덤비면 영혼이 먼저 유배 간다.
18c에 이미 여전제를 통해 공산주의 비슷한 개념을 내세웠지만, 스스로 문제점을 깨닫고(공동경작하면 쳐 노는새끼들 때문에 생산이 안된다) 과도적 개념인 정전제를 주장한다. 동구권의 몰락보다 무려 200년을 앞서 스스로 깨우친 선비를 18년동안 유배지에서 썩게 만든 후기조선은 망해도 할말이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산주의는 현대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와 1:1로 같은 게 아니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 농업사회에서 토지 문제와 백성 생계를 해결하려고 머리를 굴린 유교적 개혁가에 가깝다. 그래도 공동경작의 무임승차 문제를 감 잡은 건 확실히 무섭다. 조선 선비가 회사 조별과제의 본질을 먼저 깨달은 셈이다.
수원화성 축조 당시 그가 발명했다는 거중기는 사실 오리지널 작품이 아닌 청의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다.
ㄴ참고로 <기기도설>은 서양 선교사가 청나라에서 낸 책이므로 말만 청나라 책이지 실상은 서양의 기술을 쓴 책이다.
어쨌든 대단한 사람이다. 공부를 잘 했지만 공부 말고 딴거도 다 잘했음.
ㄴ는 지랄이고 존나 멍청한 새끼였다. 좆약용의 설명은 '右分立。役丁用力。轉輻繅車一周。緪亦繞軸一周。而大小滑輪。相隨而轉。緪縮一尺。物擧一尺。此其擧重之大略也。'인데 도르래의 원리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조선의 최고 학자 수준 ㅋ ㅋ <- 고등학교 과탐 물리1 이수한 게 인생 최대 업적인 새끼이다
ㄴ 저거 한문 해석 좀. 그리고 도르래의 원리도 제대로 몰랐으면 거중기는 어떤 원리로 만든 거냐?
ㄴ 책 보고 베껴서 대충 만들었겠지. 저거 뜻이 대충 줄을 땡기면 다른 줄이 비슷한 길이만큼 이동한다는 소리인데, 실제로는 줄이 다른 줄보다 더 많이 움직이거나 더 적게 움직이잖아.
ㄴ 저거 실제로 화성성역의궤와 거중기분도, 거중기전도 등을 살피면 있는 말이다. 심지어 그림도 노답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동양놈들이 맨날 우덜것들이 최고라고 하는데 언제 한 번 그대로 복원해서 배틀로얄 떠봐야 할 듯.
ㄴ 먼저 책 보고 베껴서 대충 만들었다, 독자적인 부분이 아니었다는 주장에 대한 연구가 있다.
ㄴ 애초에 그런 과학적인 베이스도 없었는데 책한권 붙들고 거중기 하나 뚞딱 만들어냈으면 ㅆㅅㅌㅊ지 븅1신 대가리에 비계낀 빢대가리새기야!!!!
기기도설의 諸器利用편에는 특히 활차의 활용이 강조되고 있는데, 활차를 통하여 힘을 줄이고 쓰기에 편리한 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 중 제 54항에서 활차의 줄을 거는 방법을 설명하기를, 양쪽 끝을 위로 향하게 하고 활차에 물체를 달게 되면 힘을 반으로 줄이면서 물체를 들어 올리게 된다는 점을 설명하는 부분이 보인다. (중략) 다산이 기중가[거중기]에서 활차를 여럿 연결하여 힘을 줄이고자 한 것은 바로 기기도설의 활차 원리 설명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기기도설의 全器圖說 편에 실린 기중도설은 모두 11개의 그림이 실려서 앞서 다산의 문집 기사와 일치한다. 이 가운데 제1도에서 제11도까지 11개의 그림중 다산이 고안한 기중가와 유사한 그림은 보이지 않는다. 11개 그림가운데 다산이 주로 참고하였다고 하는 것은 제8도와 제11도였다. ... 제8도와 제11도의 모습은 ... 그러나 그 형태나 기구 사용의 목적은 매우 다른 것으로 보인다. ...
이처럼 실제 기기도설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다산이 이 책에서 활차등의 원리를 참고한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되지만 실제 기중가의 고안에서는 기기도설의 기구를 모방한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다산의 기중가 고안은 비록 기기도설에서 중요한 원리의 단서를 빌려온 것이기는 하지만 기구 자체의 형태나 모습은 전적으로 다산의 창의에 의해 이룩되었음을 알 수 있다.[1]
위 한문 구절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좌우에 일꾼들을 나누어 세워서 힘을 써서 얼레 바퀴를 한바퀴 돌리게 한다. 그러면 동아줄도 축을 한 바퀴 감게 된다. 이렇게 되면 크고 작은 활륜도 서로 잇따라서 돌게 된다. 동아줄이 1자 쯤 줄어들면 물건도 1자쯤 들려 올라간다. 이것이 그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절차의 대강이다."[2]
출처랑 번역 찾느라 직쌌네 씨발놈들아 문헌을 인용할 때는 출처를 밝히는 게 기본 아니냐?
그래서 "緪縮一尺。物擧一尺。" 이 부분을 가지고 지금 좆나 멍청한 새끼였느니 좆약용이니 씨부리는 건데,
1. (움직)도르래를 사용하는 핵심은, 더 적은 힘을 들이고 물체를 들어올리는 데 있는 거 아니냐? 2. 너네야 급식 처먹을 때 과학 교과서에서 배우니까 알지, 중국에서도 처음 들어온 과학기술서 가지고 처음 연구하는데 멀쩡한 사람이 아니고 꼭 좆빡대가리라야 저런 실수가 나오는 거냐?
- 저 새끼 말대로면 공기저항은 좆도 모르면서 가벼운 물체는 더 느리게 떨어진다는 개소리를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걍 침팬지두뇌 취급해도 ㅇㅈ해야함. 븅신 아니냐 저거
다만 정약용이 현대적 의미의 공학자였던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서양 과학기술 지식이 들어간 책을 참고해서 조선의 실제 공사 현장에 써먹을 수 있게 정리하고 응용한 사람에 가깝다. 그러니까 “순수 독자 발명가”라고 빨면 과장이고, “그냥 베낀 놈”이라고 까면 그건 그것대로 빡대가리다. 남의 기술서를 보고 실제 조선 공사장에 맞춰 굴러가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다.
호(다산)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식이 되게 많다.
ㄴ 사실 다산이라는 호는 자식 많이 낳아서 붙은 게 아니다. 강진 유배 시절의 다산초당과 관련된 호다. 자식이 많았던 건 맞지만, 호를 보고 “다산이라 다산했구나!” 하는 건 개드립이다.
ㄴ차를 존나 좋아해서 산처럼 차를 쌓아두고 먹어서 다산이라는 호가 붙었다고 추측한다.
ㄴ 이것도 드립으로만 보자. 다산은 차 산더미가 아니라 강진의 다산초당 쪽으로 보는 게 맞다. 물론 차와 인연이 있었던 건 맞다. 유배지에서 차 마시고 책 쓰고 제자 가르치고 있었으니, 조선 후기판 카페형 지식인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도 자식교육은 잘했는지 아들 정학유(丁學游)[3]는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급식충은 왠 듣보가 이딴거 지어서 고생시키냐고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당시 농사 방법 등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한다.
드라마에선 정조랑 존나 친한 것처럼 나오지만 정작 실록에선 한 번도 언급이 안됬다던가. 근데 이건 어쩔 수 없다. 실록은 2차사료라 승정원일기를 보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근데 이거 이제 탈초되어서 아직까지 한글로 번역이 다 안됐다. 2020년대 중반 기준으로도 번역률이 아직 절반에 훨씬 못 미치며, 영조대 기록 번역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정조대 기록까지 편하게 다 번역되어 내려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그러니까 드라마 작가들이 정조-정약용 브로맨스를 마음껏 굴리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자료 공백과 상상력의 합작품이다.
유교탈레반들이 공자 엉덩이 빨고 맹자 정액 연구하고 할 때 진짜 백성들이 원하는 일을 실천한 인물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유교탈레반의 악습을 신랄하게 까주셨다. 하지만 노비제를 찬성했다는 옥에티가 있는분. ㄴ 조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약용은 당시 주희를 거쳐 공리공론으로 심하게 변질된 성리학을 비판하고 공자와 맹자의 실용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편 사람이었다. 실제로 선진 유학이라고 하는 공자와 맹자, 순자대의 유학은 상당히 실천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학문이었다.
그러니까 정약용은 유교를 버린 반유교 혁명가가 아니다. 오히려 유교 내부에서 “야 이게 원래 백성 살리자고 만든 학문이지, 니들끼리 개념 딸딸이 치라고 만든 학문이냐?” 하고 갈군 사람에 가깝다. 성리학을 전면 폐기했다기보다, 성리학이 공허한 관념놀이가 된 현실을 깐 것이다.
사실 이분도 철학사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일상생활에 안 넣어될 이과지식을 개 쳐잡듯이 쑤컹쑤컹 넣는 이레기들이 죽어도 안보는 윤리와 사상에 갓약용님의 성기호설이다. 유교탈레반들의 사상인 성선설에 구애받지 않고 뿅 나온 것이 성기호설.
성기호설은 너 같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새끼라도 선을 좋아한다. 단 원래부터 안착함....
조금 더 풀어쓰면, 정약용은 인간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기호를 가지고 있다고 봤다. 하지만 그게 곧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동 선행머신이다”라는 뜻은 아니다. 선을 좋아하는 경향은 있지만, 실제로 선하게 살려면 공부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쪽이다. 현실적인 인간관이다. 인간을 너무 믿지도 않고, 완전히 쓰레기로 보지도 않는다.
사회주의(굳이 따지면 대동사상)에 입각한 저서를 많이 썻고 이런 내용을 본 호치민이 삘받아서 정약용을 흠모했다고...
ㄴ그외 혼자서 5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한 인간이 이정도에 방대한 책을 쓴게 놀랍다.
정약용은 <흠흠신서>로 자신의 추리력을 맘껏 뽐냈다. 영화 <조선명탐정>의 명탐정의 모티브였을 정도로 법의학적 지식이 뛰어났다.
흠흠신서는 대충 “사람 죽고 형벌 때리는 문제를 대충 처리하지 말자”는 책이다. 조선 후기판 형사재판 매뉴얼이자 법의학 참고서에 가깝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 억울하게 처벌받는 사람, 대충 자백 받아서 사건 끝내려는 관료들을 경계한 책이다. 조선시대에 이 정도로 형벌과 증거를 신중하게 보자는 말을 한 것만으로도 꽤 의미가 있다.
둘째 형 정약전도 천재였다. 유배를 그것도 하필이면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지옥 오브 지옥이라 할 수 있는 신안군 흑산도(흑산면)으로 유배갔다(게다가 동생 정약용은 강진군으로 유배갈 때 같이 가다 헤어지기 전 둘이 껴안고 슬피 울었다.)! 이후 거기서 지내면서 쓴 책이 <자산어보>다. 그리고 셋째 형 정약종은 복자다. 한국 카톨릭 쪽에서 시성을 추진 중이지만 아직 성인은 아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124위 순교 복자 중 한 명으로 시복되었고, 시성에는 별도 절차와 기적 인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게다가 참수형을 당할 때 누워서 맞았으며, 한 번 칼을 맞고도 일어나 기도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쯤되면 이 집안은 뭔가 좀 무서울 정도... 그나마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은 형제 중에선 존재감이 적지만, 첫째인 만큼 조정 출사는 당연히 했으며, 아쉬운 점은 황사영을 사위로 들였다는 것.
근데 활쏘기는 못한 것 같다. 정조가 활쏘기를 시켰는데 잘 못했는지 다른 초계문신들이랑 같이 가둬서 활쏘기 연습하라 했더니 그제야 좀 맞았다는 거 보니 활쏠 때 어리버리탔을듯...
ㄴ 그건 조선 왕 중 최고 완전체인 정조대왕님이 취하시면 문관들한테 활쏘기 시켰다고 한다. 그래도 연습해서 맞은거 보면 아주 무에 소질이 없지는 않은듯
ㄴ 정조대왕님은 최고의 완전체시다. 이성계와 세조가 무에, 태종과 세종이 문에만 치우쳐 있던 인물들이라 이렇게 문무에 밝은 분은 동서고금에 없을듯..
개고기매니아였다고 한다. 이분이 형에게 셰프박의 개고기 요리법 같은걸 편지로 보낸 기록이 남아있다. 셰프정이 아니라 셰프박인 건 자기가 아니라 박제가가 만든 요리법 형한테 알려준 거라서. 다만 문제는 형님이 간 흑산도는 지옥이라 그런 먹을 것이 부족했다는 것.
서울 4대문 밖으로 나가살면 패가망신 할거라는 선구자적인 혜안을 자랑했다.
후에 안동 김씨가 되는 부패 세력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어렵게 되자 왜 폭동 안일으키냐고 존나 답답해했다. 그러나 결국 안동김씨가 나라 다 말아먹을때까지 폭동은 없었다.
ㄴ 조금만 죽창들 기미가 보이면 족쳤다. 그리고 반란은 도시적인 지역에서 일어나기 쉬운데 좆센처럼 촌동네나라가 반란이 일어나면 대단하지.
저서
정약용은 책을 존나 많이 썼다. 대표작만 봐도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아방강역고 등등이 있다.
이 중에서 목민심서는 지방 수령이 어떻게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쓴 책이다. 쉽게 말하면 조선시대 지방공무원 윤리·행정 매뉴얼이다. “수령이 청렴해야 한다”, “아전 조심해라”, “백성 등골 빼먹지 마라”, “형벌 함부로 쓰지 마라” 같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경세유표는 국가 제도 개혁안이다. 목민심서가 지방 행정 매뉴얼이면 경세유표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영체제를 갈아엎자는 정책 보고서에 가깝다.
흠흠신서는 형벌과 재판에 관한 책이다. 조선 후기 기준으로 보면 법의학, 형사재판, 수사 실무에 해당하는 내용이 많다. 조선명탐정 드립이 완전히 허공에서 나온 건 아니다.
마과회통은 홍역 관련 의학서다. 아니 이 인간은 행정, 법, 경제, 토지제도, 의학까지 다 건드렸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문과인데 의대 논문도 보고 공대 장비도 만들고 법학 리포트도 쓰는 이상한 인간이다.
강진 유배
정약용 인생의 핵심은 강진 유배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천주교 문제, 남인 계열 탄압, 정조 사후 정치판 개박살이 한꺼번에 겹친 결과다.
18년 가까이 유배지에서 썩었는데, 여기서 보통 사람 같으면 “아 조선 망해라” 하고 술이나 마셨을 것이다. 그런데 정약용은 거기서 책을 미친 듯이 썼다. 다산초당에서 제자도 가르치고, 제도개혁안도 쓰고, 형벌서도 쓰고, 행정서도 썼다.
한마디로 유배를 보냈더니 연구소가 생겼다.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정약용을 묻어버린다고 보냈는데, 정작 후대에는 그 유배지에서 나온 책들이 정약용의 본체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걸 “유배 가서 오히려 좋았네”라고 하면 안 된다. 유배는 유배다. 가족과 떨어지고, 정치적으로 매장되고, 인생이 개박살난 상태였다. 정약용 본인도 고통스러웠다. 다만 그 와중에 생산성이 미쳐 돌아갔을 뿐이다.
목민심서
목민심서는 정약용의 대표작이다. 수령이 어떻게 해야 백성을 덜 괴롭히고 지방 행정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쓴 책이다.
조선 후기 지방 행정은 수령, 아전, 향리, 토호, 양반, 백성들이 서로 얽힌 개판이었다. 수령은 중앙에서 내려와 몇 년 있다가 가고, 아전들은 지역에 박혀 실무를 장악하고, 백성들은 세금과 부역에 갈려나갔다.
정약용은 이 구조를 잘 알았다. 그래서 목민심서에는 부패한 아전 조심해라, 세금 함부로 걷지 마라, 재판 신중하게 해라, 백성 굶어죽게 하지 마라 같은 말이 계속 나온다.
말은 당연한데, 조선 후기는 이 당연한 게 안 돼서 문제였다. 그래서 목민심서는 그냥 착한 말 모음집이 아니라 조선 후기 행정 개판 보고서에 가깝다.
경세유표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국가개혁안이다. 제목부터 나라를 경영하는 제도를 제시한다는 뜻이다.
관제, 토지, 군사, 재정 같은 문제를 다룬다. 정약용이 단순히 “백성을 사랑합시다” 같은 따뜻한 말만 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 제도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고민한 정책덕후였다는 걸 보여준다.
문제는 조선이 이걸 제대로 써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은 오답노트를 받아놓고 시험공부를 안 했다. 그리고 나중에 시험장에서 나라가 터졌다.
기타
이분의 정치철학이 실제로 정치에 옮겨지려 한 적이 있었다. 북한이 나라구실은 하던 1960년대에 정권을 잡았던 갑산파가 이분의 사상에 빠져 이분이 말씀하신대로 실현하려 했다. 공산주의 스러운 내용이 많았는데, 거기에 자극을 많이 받은 듯. 근데 애미뒤진 혹부리우스가 부르주아 사상에 오염됬다면서 벌집핏자로 만들어버렸다. 이때부터 북한은 슈퍼막장화가 되기 시작했다.
ㄴ 북조선은 고조선만도 못한 개만도 못한 사상을 가진 나라이니 저럴만 하다.
다만 정약용을 현대적 의미의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보는 건 조심해야 한다. 정약용의 토지론과 공동체론은 조선 후기 농업사회와 유교적 왕도정치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현대 이념딱지를 그대로 붙이면 역사 해석이 개판난다. 드립으로 “조선의 마르크스”라고 하는 건 재밌지만 진지하게 믿으면 곤란하다.
수 많은 저서들과 함께 한시 또한 여럿 남겼는데, 대표적인 게 애절양이다. 보면 볼수록 그 당시 헬조선왕조의 상황을 보고 부랄을 탁탁 칠 것이다.
'증문(憎蚊, 모기를 미워하다)'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모기 때문에 빡쳐서 쓴 글이다. 조선 최고 지식인도 모기 앞에서는 평등하다. 밤에 앵앵거리면 실학이고 나발이고 빡치는 것이다.
아전 무시
양반이라 아전을 매우 무시하였다.
...근래 아전의 풍속이 나날이 변하여 하찮은 아전이 길에서 양반을 만나도 절을 하지 않으려 한다. 아전의 아들, 손자로서 아전의 역을 맡지 않는 자는 고을 안의 양반을 대할 때, 맞먹듯이 너나하며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 <목민심서>
...그래서 간사한 아전에게 이를 맡겨 버리고는 감히 알아서 처리하지 못하니, 재물을 숭상하고 의리를 천히 여기는 간사한 아전이 어찌 중도에 맞게 형벌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 <흠흠신서>
정약용이 아전을 깐 건 당시 지방 행정 현실을 보면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조선 후기 아전층은 실제 행정 실무를 장악하고 있었고, 수령을 속이거나 백성을 등쳐먹는 경우가 많았다. 수령은 몇 년 있다가 떠나는 외부인인데, 아전은 지역에 계속 박혀 있으니 정보와 실무를 쥐고 흔들 수 있었다.
다만 동시에 정약용 역시 양반 관료였기 때문에 아전을 보는 시선에 계급의식이 섞여 있었다. 정약용은 백성을 생각한 개혁가였지만 현대식 평등주의자는 아니었다. 노비제 문제에서도 한계가 있었고, 신분질서 자체를 통째로 엎으려 한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래도 조선 후기 양반 지식인 기준으로는 꽤 현실을 똑바로 본 인간이다. 완벽한 성인은 아니지만, 최소한 백성들이 왜 갈려나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평가
정약용은 조선 후기 최고의 지식인 중 하나다. 아니 그냥 “중 하나”라고 하기엔 좀 아깝고, 조선 후기 지식인 올스타전에서 무조건 선발 라인업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대단한 점은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다. 조선에는 머리 좋은 선비가 널렸다. 문제는 그 머리 좋은 선비들 중 상당수가 공자 엉덩이 빨고 맹자 정액 연구하면서 공허한 성리학 말장난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정약용은 적어도 “그래서 백성 밥그릇은 누가 챙기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정약용은 수령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형벌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토지는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국가 제도는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고민했다. 즉 책상물림 선비였지만, 책상 위에서 현실을 보려고 한 사람이다.
물론 한계도 있다. 노비제를 완전히 부정하지 못했고, 아전에 대한 양반식 멸시도 있었으며, 현대인이 원하는 민주주의자나 인권운동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정약용은 21세기 사람이 아니라 18~19세기 조선 사람이다.
하지만 그 시대 기준으로 보면 존나 앞서간 사람이다. 이런 인간을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강진에 처박아둔 조선은 인재관리 능력에서 이미 망조가 든 나라였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오답노트 작성자였다. 문제는 조선이 그 오답노트를 보고도 공부를 안 했다는 것이다.
한줄 요약
조선 후기의 행정덕후, 제도개혁덕후, 책벌레, 유배지 생산성 괴물.
정약용은 완벽한 성인은 아니었지만, 조선이 왜 망해가는지 누구보다 집요하게 관찰했고 그걸 책으로 남긴 사람이다. 수원화성 거중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여유당전서까지 보면 그냥 한 사람이 아니라 작은 싱크탱크 하나가 걸어다닌 수준이다.
조선은 이런 인간을 유배 보냈고,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나라 고치는 법을 썼다. 근데 조선은 안 고쳤다. 그래서 망했다.
관련 항목
각주
- ↑ 출처: 김동욱, 「18세기 수원성 축성에 사용된 자재 운반기구에 대해서」『대한건축학회 논문집』 제10권 제11호(대한건축학회, 1994), 169-171쪽.
- ↑ 출처 http://marumoru.tistory.com/113
- ↑ 배우 정해인은 정약용의 직계 6대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 쪽 후손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