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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박씨 왕조
박혁거세
(기원전 57년~4년)
제2대박씨 왕조
제3대박씨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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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昭聖王)
본명김준옹(金俊邕)
본관경주 김씨
골품진골
국가신라
능묘위치 미상
추가 정보
다른 이름소성왕(昭成王)
딸장화부인(章和夫人)
모후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
부왕혜충태자 김인겸(金仁謙), 혜충대왕으로 추존
사망800년 음력 6월
사망 원인미상
성씨김씨(金氏)
시호소성대왕(昭聖大王)
아들애장왕 김청명, 김체명(金體明)
왕비계화부인(桂花夫人) 김씨
왕조신라 김씨 왕조
장인김숙명(金叔明)
재위798년 음력 12월 말 또는 799년 음력 1월 ~ 800년 음력 6월
전임원성왕
조부원성왕 김경신
주요 사건799년 거로현을 학생녹읍으로 지정, 9척 인삼 진상, 800년 궁궐 폭풍 피해, 왕태자 책봉
주요 업적국학 학생녹읍 설치, 왕실의 추존과 후계자 정비, 당나라와의 외교
즉위 전 관직대아찬, 파진찬, 재상, 시중, 병부령, 왕태자
지위신라 제39대 국왕
출생미상
형제헌덕왕 김언승, 흥덕왕 김수종, 김충공(金忠恭), 김제옹(金悌邕) 등
후임애장왕
신라의 역대 국왕
37대 38대 39대 40대 41대
선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헌덕왕

할아버지 밑에서 왕이 될 준비를 착실하게 했는데 정작 왕이 된 지 1년 반 만에 죽어 버린 국왕.

이름은 김준옹. 신라 제39대 왕으로, 원성왕의 장손이자 애장왕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일찍 죽었고, 그다음 태자가 된 작은할아버지까지 죽는 바람에 결국 본인이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되기 전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시중과 병부령까지 역임한 나름대로 경력직 국왕이었는데, 정작 재위기간에는 9척이나 되는 인삼을 당나라에 선물했다가 가짜 취급당해 거절당하는 기막힌 일도 있었다.

그러다 800년에 병으로 죽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고, 겨우 13살이었던 아들 애장왕에게 왕위를 넘겼다.

그런데 그 아들은 9년 뒤 자기 삼촌인 김언승에게 살해당한다.

개요

소성왕(昭聖王, ?~800년)은 신라의 제39대 국왕으로, 799년부터 800년까지 재위했다. 본명은 김준옹(金俊邕)이며, 소성왕(昭成王)이라는 다른 한자 표기도 전한다. 제38대 원성왕의 손자이자 혜충태자 김인겸의 아들로, 할아버지 원성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일반적으로 신라 하대의 국왕 가운데 존재감이 크지 않은 인물로 평가된다. 재위기간이 약 1년 5개월에 불과했고, 왕위에 오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즉위하기 전의 경력을 살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이미 원성왕 시대부터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재상과 시중, 병부령 등 중앙정부의 핵심적인 관직을 거쳤다. 따라서 어린 나이에 아무런 정치적 경험도 없이 왕위를 물려받은 아들 애장왕과는 상당히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소성왕은 원성왕의 직계 왕통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후계자로 준비된 인물이었다. 아버지 김인겸과 작은할아버지 김의영이 차례로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사망하면서 795년 본인이 태자로 지명되었고, 이후 약 4년 동안 왕위 계승을 준비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즉위 자체는 갑작스러운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원성왕이 생전에 마련한 후계자 구도에 따른 것이었다.

재위기간에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799년 국학의 학생들을 위해 거로현을 녹읍으로 지정한 일이다. 이는 신라의 관리 양성기관인 국학의 경제적인 기반을 강화하려는 정책으로 해석된다. 또한 아버지를 혜충대왕으로, 어머니를 성목태후로 추존하면서 자신의 왕위 계승이 정당한 왕실 혈통에 근거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800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통치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아들 김청명을 태자로 책봉한 바로 그해 세상을 떠났고, 겨우 13세였던 김청명이 왕위에 올랐다. 문제는 이 어린 국왕을 대신해 숙부 김언승이 섭정으로서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언승은 이후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했으며, 결국 809년 군사적인 정변을 일으켜 애장왕과 그의 동생 김체명을 살해했다. 이후 직접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소성왕은 할아버지가 열심히 준비시켜 준 덕분에 안정적으로 왕이 되었지만, 정작 본인이 일찍 죽으면서 어린 아들을 정치적인 권력투쟁 한복판에 남겨 놓은 셈이다.

출생과 가문

원성왕의 장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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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은 제38대 원성왕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맏아들인 김인겸(金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다. 소성왕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왕위에 올랐을 당시 몇 살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원성왕은 785년 선덕왕이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당시에는 태종무열왕계의 후손인 김주원이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지만, 결국 김경신이 왕위를 차지하여 원성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원성왕은 자신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정치적인 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소성왕은 이러한 원성왕계 왕실의 핵심적인 혈통에 속한 인물이었다. 특히 아버지 김인겸은 원성왕의 첫째 아들이었으며 785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따라서 원성왕의 왕위 계승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면 김인겸이 다음 국왕이 되고, 그 뒤를 김준옹이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김인겸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의 순서가 달라지게 되었다.

아버지 김인겸

김인겸은 원성왕의 장남으로, 785년 원성왕이 즉위하자 왕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791년에 사망하여 실제로 국왕이 되지는 못했다. 당시 김준옹은 이미 궁궐에서 성장하고 있었으며, 원성왕은 아버지를 잃은 손자를 직접 보호하고 후계자로 양성하려 했다.

김인겸은 사후 혜충태자(惠忠太子)라는 시호를 받았고, 훗날 아들 소성왕이 즉위하면서 혜충대왕(惠忠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실제로 왕위에 오른 적이 없는 태자에게 국왕의 칭호를 부여한 것은 새로운 왕의 정치적인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국왕이 된 인물이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이는 단순히 죽은 가족을 기리기 위한 행동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혈통이 왕위를 계승할 정당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국가적인 의례를 통해 확인하는 의미도 있었다.

김인겸은 생전에 국왕이 되지 못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신라의 왕위 계승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성왕뿐 아니라 헌덕왕과 흥덕왕도 모두 그의 아들이었으며, 민애왕 역시 그의 손자였다.

동생들이 전부 쟁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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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의 동생 가운데에는 훗날 국왕이 된 인물이 두 명이나 존재한다. 바로 김언승(金彦昇)과 김수종(金秀宗)으로, 각각 제41대 헌덕왕과 제42대 흥덕왕이다. 또 다른 동생으로는 김충공과 김제옹 등이 전하며, 누이로는 귀보부인이 있었다.

이 형제들은 모두 원성왕의 손자이자 김인겸의 자녀들이었으므로 신라 왕실의 핵심적인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김언승은 원성왕 시대부터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보했다. 김수종 역시 중앙정부의 중요한 관직을 차지했으며, 훗날 헌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 형제들의 정치적인 관계는 상당히 복잡했다. 소성왕이 살아 있을 때에는 왕실의 유력한 형제들이 그의 통치를 뒷받침할 수 있었지만, 소성왕이 사망한 뒤에는 그들이 어린 애장왕의 정치적 권한을 대신 행사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김언승은 809년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수종도 헌덕왕의 뒤를 이어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소성왕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동생들이 있었던 셈인데, 정작 그 동생 하나가 자기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왕비 계화부인

소성왕의 왕비는 계화부인(桂花夫人) 김씨로, 대아찬 김숙명(金叔明)의 딸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숙명공(夙明公)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계화부인은 소성왕의 아들인 애장왕과 김체명의 어머니이며, 딸 장화부인도 낳았다.

계화부인은 소성왕이 즉위한 뒤인 800년 음력 정월 왕후로 책봉되었다. 이후 소성왕이 사망하고 어린 애장왕이 즉위하면서 왕실의 대비로서 중요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소성왕의 왕실 계보에는 중국 측 기록과의 차이가 존재한다. 당나라에서는 계화부인의 성씨를 숙씨(叔氏)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아버지 김숙명의 이름에서 숙(叔)자를 따와 성씨로 잘못 이해한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신라 왕실에서는 가까운 왕족들 사이의 혼인이 이루어졌으므로, 이러한 혼인관계를 중국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인명이나 성씨에 관한 혼란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신라 조정이 왕실의 근친혼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잘못된 성씨를 전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계화부인의 성씨와 가계는 신라와 당나라의 외교문서를 대조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태자들이 줄줄이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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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이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 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왕태자들이 연달아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원성왕이 왕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태자로 책봉한 인물은 자신의 맏아들 김인겸이었다. 그런데 김인겸은 791년에 사망하면서 국왕이 되지 못했다.

그러자 원성왕은 자신의 다른 아들인 김의영(金義英)을 새로운 태자로 책봉했다. 김의영은 소성왕에게 작은할아버지에 해당한다. 그러나 김의영 역시 794년에 사망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이렇게 원성왕이 후계자로 선택한 두 사람이 연달아 사망하면서 새로운 왕위 계승 후보가 필요해졌다.

그 결과 795년 음력 정월 원성왕은 자신의 장손이었던 김준옹을 왕태자로 책봉했다.

세 번째 태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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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옹은 원성왕의 장손이자 처음 태자로 책봉되었던 김인겸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혈통적으로는 원성왕의 직계 왕통을 이어갈 수 있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김준옹은 이미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시중과 병부령 등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한 경험이 있었다. 따라서 단순히 원성왕의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태자로 책봉된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정치적인 경력과 왕실의 혈통을 함께 가지고 있었으므로 원성왕의 뒤를 이어 국왕으로 즉위하기에 적합한 후보로 여겨졌을 것이다.

특히 김준옹의 태자 책봉은 왕실의 또 다른 계통들이 왕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원성왕의 직계 후손을 후계자로 확정했다는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선택은 실제로 왕위 계승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798년 원성왕이 사망했을 때 김준옹은 별다른 대규모 왕위쟁탈전 없이 국왕으로 즉위했다.

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가 줄줄이 죽으면서 태자 자리가 자기에게 돌아왔는데, 정작 본인도 왕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정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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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은 신라 하대의 국왕 가운데 즉위 이전의 정치적인 경력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특히 원성왕 시대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상당한 정치적인 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점은 후대에 어린 나이로 즉위한 애장왕과 비교할 때 중요한 차이가 된다. 애장왕은 즉위 당시 13세에 불과하여 숙부의 섭정을 받아야 했지만, 소성왕은 이미 국왕이 되기 이전부터 중앙정부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789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다

789년 김준옹은 원성왕의 명령을 받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활발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왕족이나 고위 귀족들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외교적인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김준옹은 이러한 외교적인 임무를 수행하면서 대아찬의 관등을 받았다. 대아찬은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5등에 해당하는 높은 관등으로, 진골 귀족들이 차지할 수 있는 주요 관등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김준옹은 이 시기부터 이미 왕실의 중요한 정치적인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국제적인 외교업무를 경험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다만 당시 김준옹이 당나라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업무를 수행했으며 당나라 황제와 직접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재상과 시중을 역임하다

790년 김준옹은 파진찬의 관등을 가지고 재상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파진찬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4등에 해당하는 관등으로, 대아찬보다 높은 지위였다.

791년에는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시중은 집사부의 장관으로서 국왕의 행정업무를 보좌하는 중요한 관직이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진골 귀족들이 중앙정부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김준옹이 시중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원성왕의 신뢰를 받는 핵심 정치인으로 성장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김준옹이 시중에 임명될 당시의 관등이 대아찬이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는 즉위 기사에 나오는 790년 파진찬 승진 기록과 차이가 있다. 따라서 당시 김준옹의 정확한 관등 변동에 대해서는 사료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792년 병으로 사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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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년 음력 8월 김준옹은 병을 이유로 시중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이찬 김숭빈이 새로운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이 기록은 소성왕의 건강상태를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자료다. 김준옹은 왕위에 오르기 이전부터 한 차례 병으로 고위 관직에서 물러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어떤 질병을 앓았으며 병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792년에 발생한 질병과 800년 사망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존재했는지도 알 수 없다.

따라서 김준옹이 어릴 때부터 병약했다거나 792년의 질병 때문에 결국 사망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삼국사기》의 소성왕 즉위 기사에는 그가 원성왕 8년인 792년에 병부령을 역임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반면 원성왕 본기에는 같은 해 병으로 시중직에서 물러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당시의 관직 변동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에는 사료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어쨌든 김준옹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행정과 군사 분야의 높은 관직을 경험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799년 국왕으로 즉위하다

798년 음력 12월 29일 원성왕이 사망했다.

이에 태자로 책봉되어 있던 김준옹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바로 신라 제39대 소성왕이다.

그런데 소성왕의 즉위 연도를 설명할 때에는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원성왕이 사망한 날짜는 798년 음력 12월 29일이었으므로, 실제 왕위 계승은 798년 말에 시작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소성왕 본기는 799년 음력 정월을 즉위 기사로 기록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소성왕의 재위기간 역시 799년부터 800년까지로 정리한다.

따라서 자료에 따라 798년에 즉위했다고 설명하거나 799년부터 재위한 것으로 표기하는 차이가 존재한다.

원성왕이 만들어 놓은 왕통

소성왕의 즉위는 원성왕이 생전에 마련해 둔 왕위 계승의 결과였다. 특히 원성왕은 김인겸과 김의영이 차례로 사망하자 자신의 장손인 김준옹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귀족들의 정치적인 갈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소성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다른 왕족이 군대를 동원하여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기록이 없다고 해서 당시 왕실 내부에 아무런 정치적인 갈등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후 희강왕과 민애왕, 신무왕 시대에 발생한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과 비교하면 소성왕의 즉위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소성왕은 이러한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장기간 유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즉위한 지 약 1년 반 만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799년 국학 학생녹읍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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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

799년 음력 3월 소성왕은 청주 거로현(菁州 居老縣)을 국학 학생들의 녹읍으로 지정했다.

여기서 청주(菁州)는 오늘날의 충청북도 청주시가 아니라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으로,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가리킨다. 거로현은 오늘날의 경상남도 거제시 아주동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즉 소성왕은 오늘날 거제도 일대의 고을 하나를 국가 교육기관의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경제적인 기반으로 지정한 것이다.

국학이 무엇인가?

국학은 신라의 국가적인 교육기관으로,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관리가 될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국학은 682년 신문왕 시대에 설치되었으며, 이후 신라의 중앙정부에서 관리로 활동할 수 있는 인재들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발전했다.

특히 788년 원성왕 시대에는 독서삼품과라는 관리 선발제도가 시행되었다. 독서삼품과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수준을 평가하여 관리를 선발하거나 등용하는 데 활용하려 했던 제도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서는 여전히 골품제에 따른 신분적인 제한이 존재했다. 따라서 독서삼품과가 실시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신분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제도는 학문적인 능력을 관리 등용에 반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학생들에게 녹읍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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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이 설치한 학생녹읍(學生祿邑)은 국학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는 데 필요한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로 이해된다.

녹읍은 특정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경제적인 수입을 확보하거나 주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할 권한을 인정해 주는 제도였다. 일반적으로 신라에서는 관리들에게 경제적인 보수의 성격으로 녹읍을 지급하는 일이 존재했다.

그런데 소성왕은 이러한 녹읍을 국학의 학생들을 위해 지정한 것이다.

다만 실제로 학생 개개인에게 거로현의 경제적인 수입을 나누어 주었는지, 아니면 국학이라는 기관에 녹읍을 부여하여 학생들의 교육비와 생활비에 사용하도록 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현대적인 의미의 장학금처럼 국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현금이 지급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국학의 교육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특정 지역의 경제적인 수입을 활용하도록 했다는 점은 중요한 사실이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에서 대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특정 지역에서 걷히는 수입을 교육재정에 활용하도록 지정한 셈이다.

왜 국학을 지원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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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의 학생녹읍 설치는 할아버지 원성왕의 교육정책과 연결해 이해할 수 있다.

원성왕은 788년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학문적인 능력을 관리 등용에 반영하려 했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가 실제로 운영되려면 국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지원하고 교육기관의 경제적인 기반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소성왕이 거로현을 학생녹읍으로 지정한 것은 이러한 정책의 연장선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국학 학생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지원할 수 있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 교육기관에서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학생녹읍이 얼마나 오래 유지되었으며 국학의 교육수준과 관리 등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충분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신라 하대에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국내 국학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따라서 소성왕의 정책이 국학을 완전히 부흥시켰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국가 교육기관의 경제적인 기반을 강화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1]

왕실의 정통성 강화

소성왕은 즉위한 뒤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새로운 칭호를 부여하면서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

799년 음력 5월에는 아버지 혜충태자 김인겸을 혜충대왕(惠忠大王)으로 추존했다. 이어 같은 해 음력 8월에는 어머니 김씨를 성목태후(聖穆太后)로 추존했다.

특히 아버지 김인겸은 실제로 국왕이 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원성왕의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원성왕보다 먼저 사망했으므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들 김준옹이 왕위에 오르면서 김인겸은 사후에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아버지도 왕으로 만들어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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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추존은 단순히 죽은 부모를 기리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소성왕은 원성왕의 장손이었지만 실제로 국왕이 되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김인겸이 태자 신분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할아버지 원성왕에게서 직접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소성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혈통적인 정통성을 명확하게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아버지를 혜충대왕으로 추존하는 것은 자신의 왕위 계승이 김인겸으로 이어지는 왕실의 정당한 혈통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적인 의례를 통해 확인하는 행위였다.

또한 어머니를 성목태후로 추존한 것도 새로운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강화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버지는 살아 있을 때 왕이 되지 못했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른 덕분에 죽어서라도 왕의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다만 이러한 조치가 실제로 다른 왕족들과의 정치적인 갈등을 얼마나 완화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성왕의 재위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추존 이후의 정치적인 변화에 관한 기록도 충분하지 않다.

흰 사슴과 흰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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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의 재위기간에는 여러 기이한 동물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799년 음력 3월 냉정현(冷井縣)의 현령이었던 염철(廉哲)은 흰 사슴을 발견하여 국왕에게 바쳤다. 이어 같은 해 음력 8월에는 한산주(漢山州)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일반적인 동물과 다른 색을 가진 새나 짐승이 나타나는 일을 특별한 징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흰 사슴이나 흰 까마귀와 같은 동물은 국왕의 덕이나 국가의 운명과 연결하여 해석되기도 했다.

따라서 지방에서 이러한 동물을 발견하면 중앙정부에 보고하거나 국왕에게 바치는 일이 존재했다.

진짜 흰색 동물이었나?

오늘날에도 유전적인 요인이나 색소의 부족으로 일반적인 개체와 다른 색의 동물이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백색증이나 백변증과 같은 현상이 알려져 있다.

따라서 소성왕 시대에 발견된 흰 사슴이나 흰 까마귀도 이러한 생물학적인 현상으로 설명할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발견된 동물들의 유전적 특징이나 정확한 종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특히 역사서에 기록된 흰색이라는 표현이 오늘날의 생물학적인 분류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어떤 원인에 의해 흰색을 띠었는지 확정할 수 없다.

어쨌든 지방에서 흰 사슴과 흰 까마귀가 나타났다는 기록을 국왕에게 보고했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이 이러한 현상을 상당히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이라면 특이한 동물이 발견되었다며 뉴스에 나올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국왕에게 직접 바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정체불명의 코가 긴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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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성왕 시대에는 흰 사슴이나 흰 까마귀보다 훨씬 더 기괴한 동물에 관한 기록도 등장한다.

799년 음력 5월 우두주(牛頭州)의 도독이 사신을 보내 정체불명의 거대한 동물이 나타났다고 보고한 것이다.

우두주는 오늘날 강원도 춘천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방 관리가 보고한 동물의 생김새가 상당히 특이했다.

“

소처럼 생긴 기이한 짐승이 있는데, 몸이 길고 높으며 꼬리는 길이가 3척이나 되고, 털이 없으며 코가 길었습니다. 현성천에서 나타나 오식양 쪽으로 갔습니다.

”

《삼국사기》 소성왕 원년의 기록이다.

소처럼 생겼는데 몸이 거대하고 털도 없으며 코가 길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만 보면 일반적인 소나 말과는 상당히 다른 동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설마 코끼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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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에서는 이 기록에 등장하는 동물이 코끼리였을 가능성을 생각하기도 한다.

코끼리는 몸집이 크고 코가 길며, 일부 종은 털이 매우 적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신라의 우두주 지역에 코끼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다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해당 동물이 정말 코끼리였다면 어떻게 한반도의 내륙지역까지 이동했는지에 관한 문제도 남는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국제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통해 여러 지역의 진귀한 동물들이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외국 상인이 코끼리를 데리고 왔다가 놓쳤다거나 왕실에 선물로 바치려던 코끼리가 도망쳤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코끼리설은 어디까지나 생김새에 대한 설명을 바탕으로 한 추정에 불과하다.

진짜 무슨 동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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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당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했던 대형 동물을 잘못 묘사했거나, 실제보다 크기와 특징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고대 역사서에서는 정체불명의 동물이 나타나는 현상을 국가의 운명과 연결하여 기록하는 경우가 존재했다.

따라서 실제로 어떤 동물이 나타났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현성천(峴城川)과 오식양(烏食壤)의 정확한 위치 역시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이 동물이 어디에서 나타나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도 알 수 없다.

결국 현재로서는 코가 길고 털이 없는 대형 동물이 나타났다는 기록만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정체를 확정할 수는 없다.

신라의 지방 관리들이 국왕에게 코끼리 비슷한 무언가가 나타났다고 보고했지만, 정작 그놈이 무슨 동물이었는지는 1,200년이 넘도록 아무도 모르는 셈이다.[2]

9척짜리 인삼을 당나라에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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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의 재위기간에서 가장 웃기는 사건 가운데 하나.

799년 음력 7월 신라에서는 무려 길이가 9척이나 되는 인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매우 기이한 일로 받아들였다.

소성왕 역시 이 인삼을 상당히 특별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결국 국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이 거대한 인삼을 황제에게 바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결과가 상당히 황당했다.

당나라 황제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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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당나라 황제는 당 덕종이었다.

그런데 덕종은 신라에서 보내 온 거대한 인삼을 보고 의심을 품었다.

《삼국사기》에는 당나라 황제가 그것을 인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받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길이가 9척이나 되는 인삼을 얻었다.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겨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바쳤으나, 덕종은 인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받지 않았다.

”

신라에서는 엄청나게 귀한 인삼을 발견했다며 황제에게 선물했는데, 황제는 이거 인삼 아닌 것 같다며 받아 주지도 않은 것이다.

물론 당나라 황제가 실제로 어떠한 표현을 사용하여 인삼을 거절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 크기가 일반적인 인삼과 지나치게 달랐기 때문에 실제 인삼인지 의심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9척이면 도대체 얼마나 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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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척이라는 길이는 당시의 도량형을 정확하게 적용해야 하는 수치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1척의 길이가 달랐으므로, 9척을 오늘날의 특정한 미터 수치로 정확하게 환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삼의 크기와 비교하면 상당히 비정상적인 길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실제로 이렇게 거대한 인삼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일부에서는 인삼의 뿌리가 아닌 다른 식물을 인삼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자연에서 발견된 식물의 길이가 과장되어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서 보낸 실제 식물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쨌든 소성왕은 인삼계의 괴물을 발견했다며 당나라 황제에게 바쳤지만, 황제는 가짜라고 생각하고 반품 처리해 버린 셈이다.[3]

당나라의 책봉

소성왕은 국왕으로 즉위한 뒤 당나라와 기존의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국왕의 책봉을 받는 전통적인 외교질서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신라의 국왕이 대외적으로 당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으면서도 국내에서는 독자적인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소성왕의 경우에는 상당히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나라에서 국왕을 책봉하겠다고 사신을 보냈는데, 정작 그 사신이 신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국왕이 죽어 버린 것이다.

책봉사 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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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덕종은 원성왕이 사망하고 소성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 사신은 위단(韋丹)이라는 인물이었다.

위단은 당나라의 사봉낭중으로, 원성왕의 사망을 조문하고 소성왕을 신라 국왕으로 책봉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나라 조정은 소성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검교태위(檢校太尉)·신라왕(新羅王) 등의 관작을 내리는 책서를 준비했다.

그런데 위단이 신라로 이동하던 도중 소성왕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위단은 신라까지 가지 못하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왕을 책봉하기 위한 문서 역시 신라에 전달되지 못했다.

죽은 사람을 책봉할 수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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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은 이미 신라 국내에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상태였으므로 당나라의 책봉 문서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해서 국왕의 지위를 잃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는 국왕의 책봉이 중요한 의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책봉사절이 실제로 신라에 도착하지 못했으므로 외교적인 절차가 마무리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소성왕의 재위기간이 얼마나 짧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 황제가 왕으로 인정해 주겠다며 문서까지 써서 보냈는데, 그걸 전달하러 가는 동안 왕이 먼저 죽어 버렸으니 사신 입장에서는 상당히 허무했을 것이다.

책봉 문서는 808년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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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808년, 애장왕 시대에 신라의 사신 김력기(金力奇)가 당나라를 방문했다.

이때 김력기는 당나라 황제에게 특별한 요청을 했다.

바로 소성왕의 책봉 문서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 당나라에서 소성왕을 신라 국왕으로 책봉하는 문서를 작성했지만 책봉사 위단이 도중에 돌아가면서 문서가 중서성에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귀국할 때 그 문서를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나라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홍려시를 통해 중서성에 보관되어 있던 소성왕의 책서를 김력기에게 전달하도록 명령했다.

왕이 죽은 지 8년이나 지나서야 왕을 책봉한다는 문서를 받아 간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신라 왕실이 당나라의 책봉을 단순한 외교적인 형식으로만 여기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소성왕의 책봉 문서는 애장왕의 아버지가 당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국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였으므로, 어린 애장왕의 정치적인 정통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김력기가 문서를 요청한 정확한 정치적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다.[4]

800년 왕후 책봉과 관직 정비

800년 음력 정월 소성왕은 계화부인을 정식으로 왕후로 책봉했다.

계화부인은 이미 소성왕의 배우자였지만 왕실의 공식적인 의례를 통해 왕후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또한 같은 달 충분(忠芬)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시중은 신라 집사부의 장관으로서 국왕의 행정업무를 보좌하는 중요한 관직이었다.

따라서 소성왕은 재위 2년째에도 왕실의 위계를 정비하고 중앙정부의 중요한 관직에 새로운 인물을 임명하는 등 국정 운영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만 충분이 어떠한 가문 출신이었는지, 이후 어떠한 정치적인 활동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연구에서는 충분이 이전의 시중 김삼조를 대신했으며, 이후 애장왕 시대까지 시중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실제로 언제 시중에서 물러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소성왕의 재위기간에는 중앙정부의 인사와 왕실의 공식적인 책봉이 이루어졌으며, 그가 국왕으로서 통상적인 행정업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5]

800년 궁궐에 폭풍이 몰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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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이 사망한 해에는 상당히 강력한 폭풍이 발생했다.

800년 음력 4월 서라벌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궁궐의 기와가 날아갔다.

그런데 피해가 발생한 곳은 일반적인 민가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신라의 왕궁에서도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던 것이다.

궁궐 문 두 개가 무너지다

《삼국사기》에는 당시의 폭풍으로 서난전(瑞蘭殿)의 발이 날아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임해문(臨海門)과 인화문(仁化門) 두 문이 무너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난전은 신라의 왕궁인 월성 안에 있던 전각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위치와 건물의 구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임해문은 동궁과 월지 일대의 임해전과 관련된 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인화문 역시 신라 왕궁의 문으로 이해되지만 실제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당시의 폭풍은 단순히 나뭇가지가 조금 부러진 정도가 아니라 궁궐의 중요한 시설이 무너질 정도로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이 된 지 1년 반도 안 됐는데 궁궐에 폭풍이 몰아쳐 문 두 개가 통째로 무너진 것이다.

불길한 징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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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자연재해를 국왕의 정치적인 덕성과 연결해 해석하는 관념이 존재했다.

특히 궁궐과 왕실의 건물에 피해가 발생하는 사건은 국가의 정치적인 운명과 연결하여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소성왕은 이러한 폭풍이 발생한 지 불과 두 달 뒤인 800년 음력 6월 사망했다.

따라서 후대의 관점에서는 폭풍으로 궁궐의 문이 무너진 사건을 국왕의 죽음을 예고한 불길한 징조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소성왕이 폭풍 때문에 사망했다거나 당시 사람들이 이 사건을 국왕의 죽음과 직접 연결하여 해석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궁궐의 폭풍 피해는 소성왕 시대에 발생한 중요한 자연재해로 이해해야 하며, 이를 초자연적인 예언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국왕이 사망하기 직전에 궁궐의 문 두 개가 폭풍에 무너졌다는 사실은 상당히 인상적인 기록이다.[6]

800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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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은 800년 음력 6월 사망했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죽은 뒤 소성(昭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사망 원인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질병을 앓았으며 사망하기 전 얼마나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정확한 출생 연도도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사망 당시의 나이 역시 확정할 수 없다.

다만 792년에 병으로 시중직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건강상의 문제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792년의 질병과 800년의 사망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는 증거는 없다.

재위기간은 불과 1년 반

소성왕은 799년 음력 정월부터 800년 음력 6월까지 재위했다.

따라서 재위기간은 약 1년 5개월이었다.

당시의 재위 연수로는 2년째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다.

다만 원성왕이 사망한 시점을 기준으로 798년 음력 12월 말부터 소성왕이 실질적으로 왕위를 계승했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기준으로 계산하더라도 재위기간은 2년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소성왕은 태자로 책봉된 뒤 약 4년 동안 왕위 계승을 준비했고, 그 이전에도 중앙정부의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따라서 상당한 정치적 경험을 가지고 국왕으로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자신의 정책을 오랫동안 추진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

왕이 되기 전에는 당나라에 사신도 가고 여러 고위 관직을 거치며 경력을 착실하게 쌓았는데, 정작 왕이 되고 나서는 1년 반도 못 채우고 죽은 것이다.

799년 사망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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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성왕의 사망 연도에는 사료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삼국사기》에는 800년 음력 6월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소성왕이 799년에 즉위하여 같은 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두 역사서 사이에 약 1년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기록이 맞는가?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의 800년 사망 기록을 따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에 소성왕 재위 2년인 800년에 발생한 여러 사건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800년 음력 정월에는 계화부인을 왕후로 책봉하고 충분을 시중으로 임명했으며, 음력 4월에는 강력한 폭풍으로 궁궐의 문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음력 6월에는 왕자를 태자로 책봉한 뒤 국왕이 사망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을 고려하면 소성왕이 실제로 800년까지 생존했다는 설명이 더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다른 견해에서는 소성왕이 실제로 799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사망 소식이 당나라에 전달된 시점이 800년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서와 이를 참고한 《삼국사기》에서 사망 연도가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특히 당나라와 신라 사이의 외교적인 소식은 전달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므로, 사건이 실제로 발생한 시점과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시점이 달랐을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견해 역시 확정된 결론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800년 사망설을 기준으로 정리하되, 《삼국유사》에는 799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함께 밝혀 두는 것이 적절하다.[7]

어린 아들 애장왕의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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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은 사망하기 직전인 800년 음력 6월 자신의 아들을 왕태자로 책봉했다.

그 아들이 바로 김청명(金淸明)으로, 훗날 이름을 김중희(金重熙)로 바꾸는 제40대 애장왕이다.

김청명은 788년에 태어났으므로 800년에는 당시의 나이 계산 방식으로 13세였다.

따라서 아버지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정치적인 경험이 충분하지 않은 어린 왕족이었다.

소성왕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아들을 미리 태자로 책봉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소성왕이 사망하기 직전 병세가 위독해졌기 때문에 서둘러 태자를 책봉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왕태자 책봉과 국왕의 사망이 같은 달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왕위는 아들에게 넘어갔다

소성왕이 사망하자 김청명이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바로 애장왕의 즉위다.

애장왕의 왕위 계승은 혈통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정통성이 강했다.

할아버지는 소성왕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원성왕이었으므로 원성왕의 직계 왕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장왕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것이다.

국왕의 지위는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 중앙정부의 정치적인 권한은 나이가 많은 왕족들이 대신 행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애장왕의 숙부인 김언승은 이미 원성왕 시대부터 중앙정부의 고위 관직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병부령으로서 군사적인 업무를 담당했으며, 이후 섭정으로서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소성왕은 국왕이 되기 전에 충분한 정치적 경험을 쌓았지만, 정작 아들은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13세에 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섭정 김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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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오 의사양반 제 멘탈은.. 끄어어얽!!

애장왕이 즉위하자 소성왕의 동생인 김언승이 섭정으로서 국정을 운영했다.

김언승은 애장왕에게 친삼촌이었다.

따라서 소성왕이 사망한 뒤 어린 아들을 보호하고 왕실의 정치적인 기반을 유지해야 할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김언승은 단순히 조카를 보좌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중앙정부의 군사적인 권한과 귀족정치의 핵심적인 지위를 장악하면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특히 801년에는 상대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애장왕 시대의 여러 정치적인 정책에 관여했다.

조카가 성장하자 문제가 생겼다

일부 연구에서는 애장왕이 성장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권한을 직접 행사하려 했고, 그 결과 섭정 김언승과 갈등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특히 805년에는 공식 20여 조를 반포하고 여러 행정제도를 정비하는 등 중앙정부의 개혁이 추진되었다.

일부에서는 이를 애장왕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증거로 해석한다.

반면 다른 연구에서는 실제로 김언승이 계속 정치적인 실권을 유지했으며, 이러한 개혁 역시 김언승과 그의 형제들이 주도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따라서 애장왕과 김언승 사이에서 실제로 언제부터 정치적인 갈등이 발생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809년에 김언승이 직접 군대를 동원하여 애장왕을 살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결국 아들을 죽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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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년 음력 7월 김언승은 동생 김제옹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갔다.

그리고 국왕 애장왕을 살해했다.

그런데 이때 애장왕의 동생 김체명도 함께 죽었다.

김체명은 형의 곁을 지키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소성왕의 두 아들이 모두 숙부의 군사적인 정변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김언승은 애장왕을 살해한 뒤 직접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제41대 헌덕왕이다.

소성왕은 자신의 동생이 훗날 아들 둘을 모두 죽이고 왕위를 빼앗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소성왕이 실제로 김언승을 얼마나 신뢰했으며 어린 아들의 후견인으로 직접 지정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원성왕의 직계 왕통을 유지하려 했던 소성왕의 입장에서 아들들이 모두 살해당하고 동생이 왕위에 오른 결과는 상당히 비극적인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딸 장화부인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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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의 자녀 가운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아들 애장왕과 김체명뿐만이 아니다.

딸인 장화부인(章和夫人)도 신라의 왕위 계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화부인은 훗날 제42대 흥덕왕 김수종의 왕비가 된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라 왕실 특유의 복잡한 혼인관계가 등장한다.

김수종은 소성왕의 동생이었다.

따라서 장화부인에게는 친삼촌에 해당한다.

그런데 장화부인은 바로 그 삼촌과 혼인한 것이다.

소성왕의 딸이 소성왕의 동생과 결혼했으니, 소성왕 입장에서는 자기 딸이 자기 동생의 아내가 된 것이다.

당시 신라 왕실에서는 왕족과 진골 귀족들 사이의 가까운 혈연관계를 가진 혼인이 이루어지는 사례가 존재했다. 특히 왕위 계승권과 정치적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왕실 내부에서 혼인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장화부인과 김수종의 혼인도 이러한 왕실의 혼인 관행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들들은 죽었지만 딸은 왕비가 됐다

장화부인의 남편 김수종은 826년 헌덕왕이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흥덕왕이다.

따라서 소성왕의 아들들은 809년 숙부에게 살해당했지만, 딸인 장화부인은 이후 국왕의 왕비가 되었다.

다만 장화부인은 흥덕왕이 즉위한 해인 826년 사망했다.

흥덕왕은 아내를 잃은 뒤 극심한 슬픔에 빠졌으며, 새로운 왕비를 맞이하라는 신하들의 권유를 거절했다고 전한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흥덕왕이 장화부인을 잊지 못해 시녀들까지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흥덕왕은 836년 사망하기 전에 자신을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해 달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소성왕의 딸은 삼촌과 결혼해 왕비가 되었고, 그 삼촌은 아내가 죽은 뒤 평생 재혼하지 않을 정도로 슬퍼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성왕의 자녀들은 각각 애장왕의 비극적인 죽음과 흥덕왕의 유명한 순애보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한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소성왕릉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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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의 실제 무덤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소성왕이 800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만, 어디에 장사지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다.

또한 소성왕의 무덤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비문이나 결정적인 유물도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실제 소성왕릉의 위치를 특정하기 어렵다.

국왕인데 무덤도 없다?

소성왕은 원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식 국왕이었으므로 사망한 뒤에는 왕실의 장례 절차에 따라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장례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특히 신라의 왕릉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시대 이후의 문헌과 전승을 바탕으로 비정되었으며, 실제 피장자를 확인할 수 있는 비문이나 고고학적인 자료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소성왕의 경우에는 전통적으로 그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장소조차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경주의 여러 신라 고분 가운데 어느 무덤이 소성왕의 능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왕이 되기까지 할아버지 밑에서 온갖 준비를 다 했는데, 왕이 된 지 1년 반 만에 죽고 지금은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셈이다.

다만 무덤의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당시 소성왕의 장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랜 세월 동안 무덤의 위치와 이름에 관한 정보가 사라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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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은 재위기간이 매우 짧아 국왕으로서의 정치적인 능력을 평가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러나 즉위 이전의 경력을 살펴보면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재상과 시중, 병부령을 역임하는 등 상당한 정치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799년에는 국학 학생들의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거로현을 녹읍으로 지정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추존하여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 800년에는 왕비를 정식으로 책봉하고 중앙정부의 관직을 정비했으며, 아들 김청명을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 계승을 준비했다.

따라서 소성왕을 아무런 정치적인 능력이 없는 국왕이었다고 평가할 근거는 부족하다.

그러나 재위기간에 남아 있는 기록이 적고 사망 원인조차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장기적인 정치개혁이나 군사적 업적에 대해서는 평가하기 어렵다.

긍정적인 평가

소성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국학 학생녹읍의 설치다.

이는 국가 교육기관의 경제적인 기반을 강화하고 관리 양성제도를 지원하려는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할아버지 원성왕이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학문적인 능력을 관리 선발에 반영하려 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소성왕은 이러한 정책을 이어받아 국학의 교육활동을 지원하려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소성왕은 원성왕의 뒤를 이어 비교적 안정적으로 즉위했으며,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 계승을 정비했다.

따라서 소성왕의 재위기간 자체에서는 대규모 왕위쟁탈전이나 국왕에 대한 군사적인 반란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소성왕의 통치는 원성왕이 마련한 왕실의 정치적인 기반을 이어받아 유지하려 했던 시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단명한 국왕의 한계

반면 소성왕이 어떠한 장기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재위기간이 2년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국학 학생녹읍의 설치가 실제로 국학의 교육활동을 얼마나 개선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하다.

또한 왕실의 추존과 관직 임명이 실제로 진골 귀족들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을 완화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소성왕의 정책을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거나 반대로 성과가 부족했다는 이유로 무능한 국왕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모두 조심해야 한다.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넘긴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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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이 사망하면서 어린 애장왕이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 것은 이후의 신라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애장왕은 즉위 당시 13세였으므로 숙부 김언승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김언승은 중앙정부의 군사적·정치적인 권한을 장악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했고, 결국 809년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소성왕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이후의 정치적인 권력투쟁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성왕이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넘긴 것이 잘못된 정치적 선택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당시 애장왕은 원성왕의 직계 후손으로서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소성왕의 친아들이기도 했다.

또한 왕실에서 어린 국왕이 즉위하는 일이 그 자체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왕위를 계승한 어린 국왕을 보호하고 국정을 보좌해야 할 섭정세력이 오히려 국왕을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애장왕의 피살을 소성왕 개인의 후계자 결정 실패 때문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종합

소성왕은 원성왕의 장손으로 태어나 태자로 책봉되고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왕위 계승을 준비했던 인물이다. 그는 799년 국왕으로 즉위한 뒤 국학의 경제적인 기반을 강화하고 왕실의 정통성을 정비하려 했으며,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도 유지했다.

그러나 재위기간이 약 1년 5개월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제로 국왕으로서 어떠한 장기적인 정책적 성과를 남길 수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특히 소성왕의 사망으로 어린 애장왕이 즉위하게 되었고, 이후 섭정 김언승이 왕실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결국 국왕을 살해하는 정변이 발생했다.

이러한 점에서 소성왕의 짧은 통치는 신라 하대의 왕위 계승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다가도 국왕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어린 후계자의 즉위로 정치적인 균형이 크게 흔들릴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할아버지 원성왕은 왕위를 물려주려고 장손을 오랫동안 준비시켰는데, 정작 그 장손은 1년 반 만에 죽었고 어린 증손자는 삼촌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성왕이 구축한 왕통은 계속 유지되었지만, 소성왕의 직계 아들들에게서는 왕위가 끊어지고 동생들인 헌덕왕과 흥덕왕에게 권력이 넘어가게 되었다.

여담

  • 본명은 김준옹(金俊邕)이며, 신라 제39대 국왕이다.
  • 소성왕(昭聖王) 외에 소성왕(昭成王)이라는 한자 표기도 존재한다.
  • 제38대 원성왕의 장손이자 혜충태자 김인겸의 아들이다.
  •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이며, 왕비는 계화부인 김씨다.
  • 애장왕과 김체명, 장화부인의 아버지다.
  • 헌덕왕과 흥덕왕은 소성왕의 동생이다.
  • 아버지 김인겸은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사망했고, 작은할아버지 김의영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사망했다.
  • 795년 원성왕의 태자로 책봉되었다.
  • 789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이후 시중과 병부령 등을 역임했다.
  • 792년에는 병으로 시중직에서 물러난 기록이 존재한다.
  • 799년 국왕으로 즉위한 뒤 거로현을 국학 학생들을 위한 녹읍으로 지정했다.
  • 799년에는 흰 사슴과 흰 까마귀가 발견되어 국왕에게 바쳐졌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 같은 해 우두주에서는 코가 길고 털이 없는 거대한 동물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 799년 길이가 9척이나 되는 인삼을 당나라에 바쳤으나 황제 덕종이 인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거절했다.
  • 아버지 김인겸을 혜충대왕으로, 어머니 김씨를 성목태후로 추존했다.
  • 800년에는 계화부인을 왕후로 책봉하고 충분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 같은 해 폭풍으로 궁궐의 임해문과 인화문이 무너졌다.
  • 800년 음력 6월 아들 김청명을 태자로 책봉한 뒤 사망했다.
  • 《삼국유사》에는 799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사망 연도에 관한 사료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 소성왕을 책봉하러 가던 당나라 사신 위단은 왕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 그 책봉 문서는 808년 신라 사신 김력기가 당나라에서 받아 왔다.
  • 소성왕이 사망하자 13세의 아들 애장왕이 왕위에 올랐다.
  • 애장왕과 동생 김체명은 809년 숙부 김언승의 정변으로 함께 살해당했다.
  • 딸 장화부인은 훗날 숙부 흥덕왕의 왕비가 되었다.
  • 정확한 소성왕릉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같이 보기

관련 자료

각주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