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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국왕 목록

박씨 왕조 석씨 왕조 김씨 왕조

초대박씨 왕조
박혁거세
(기원전 57년~4년)
제2대박씨 왕조
제3대박씨 왕조
제4대석씨 왕조
석탈해
제5대박씨 왕조
박파사
제6대박씨 왕조
제7대박씨 왕조
제8대박씨 왕조
제9대석씨 왕조
제10대석씨 왕조
제11대석씨 왕조
제12대석씨 왕조
제13대김씨 왕조
제14대석씨 왕조
제15대석씨 왕조
제16대석씨 왕조
제17대김씨 왕조
제18대김씨 왕조
제19대김씨 왕조
제20대김씨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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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김씨 왕조
김지대로
제23대김씨 왕조
제24대김씨 왕조
김삼맥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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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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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대박씨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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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대박씨 왕조
제56대김씨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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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元聖王)
본명김경신(金敬信)
본관경주 김씨
골품진골
국가신라
능묘경주 원성왕릉(괘릉)
추가 정보
다른 이름김경신(金敬愼)
딸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
모후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 소문태후로 추존
묘호열조(烈祖), 후대의 숭복사비에서 확인
부왕김효양(金孝讓), 명덕대왕으로 추존
사망798년 음력 12월 29일
성씨김씨(金氏)
손자소성왕, 헌덕왕, 흥덕왕, 김충공, 김헌정, 김균정 등
시호원성대왕(元聖大王)
아들김인겸(金仁謙), 김의영(金義英), 김예영(金禮英)
왕비숙정부인(淑貞夫人) 김씨
왕조신라 김씨 왕조
장인김신술(金神述)
장지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한 뒤 토함산 서쪽에 능 조성
재위785년 음력 1월 ~ 798년 음력 12월 29일
전임선덕왕
조부김위문(金魏文), 흥평대왕으로 추존
조상내물 마립간의 12세손
주요 사건780년 김지정의 난 진압, 785년 김주원과의 왕위계승 경쟁, 791년 제공의 모반
주요 업적788년 독서삼품과 실시, 790년 벽골제 증축 및 발해와의 외교, 불교 승정 정비, 왕실 후계체계 확립
즉위 전 관직이찬, 상대등
증조부김의관(金義寬), 신영대왕으로 추존
지위신라 제38대 국왕
출생미상
후임소성왕

비가 존나게 오는 바람에 원래 왕이 될 사람이 강을 못 건너자 그 틈을 타 왕이 되어 버린 남자.

그런데 그냥 운 좋게 왕위에 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양반은 이미 상대등으로 신라의 최고 권력층에 있던 인물이었으며, 즉위 이후에는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을 중심으로 왕실의 권력을 재편했다.

그 결과 원성왕의 후손들은 이후 120년이 넘도록 신라의 왕위를 차지했다.

그러니까 폭우 한 번에 왕이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기 집안이 신라를 대대로 해먹을 기반을 제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더욱이 신라의 관리들이 유교경전을 얼마나 공부했는지에 따라 관직에 등용하는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동안 혈통과 정치적인 인맥이 중요했던 신라에서 학문적인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려는 제도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국왕이다.

물론 그 제도가 골품제를 없애거나 누구나 시험을 잘 보면 고위 관리가 될 수 있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개요

원성왕(元聖王, ?~798년)은 신라의 제38대 국왕으로, 785년부터 798년까지 재위했다. 본명은 김경신(金敬信)이며, 김경신(金敬愼)이라는 표기도 존재한다. 내물 마립간의 12세손으로 전해지는 진골 왕족이며, 혜공왕 말기의 정치적 혼란에서 김양상과 협력해 권력을 확보한 뒤 선덕왕 시대에는 상대등을 역임했다.

원성왕은 신라 하대의 정치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다.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왕부터 신라 하대가 시작된 것으로 구분하지만, 실제로 오랫동안 왕위를 계승한 가문의 창시자라는 점에서는 원성왕을 신라 하대의 실질적인 개창자로 평가하는 견해가 존재한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신라에서는 태종무열왕의 후손들이 오랫동안 왕실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780년 혜공왕이 정치적인 반란과 정변 속에서 사망하면서 무열왕의 직계 왕통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김양상이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다. 원성왕 김경신은 이러한 정치적 변화에 참여한 핵심 인물이었다.

이후 785년 선덕왕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새로운 왕위쟁탈전이 발생했다. 당시 신하들이 처음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인물은 무열왕계의 왕족인 김주원이었다. 그러나 김주원이 궁궐로 향하던 도중 폭우로 알천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지 못했고, 그 사이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다고 전한다.

원래 다른 사람이 왕이 되기로 했는데 비가 내려 강을 건너지 못하는 바람에 왕이 바뀌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다.

하지만 현대의 역사학에서는 이 사건을 단순한 자연재해로 설명하기보다 김경신과 김주원 사이의 정치적인 경쟁이 반영된 기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김경신이 실제로는 궁궐과 군사적인 기반을 먼저 장악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원성왕은 즉위한 뒤 자신의 조상들을 왕으로 추존하고 아들 김인겸을 태자로 책봉하는 등 새로운 왕통의 정통성을 강화했다. 또한 신라의 지방관제를 정비하고 독서삼품과를 시행했으며, 벽골제 증축과 발해 외교 등 여러 분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기간이 완전히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자연재해와 기근이 반복되었고, 791년에는 제공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또한 후계자로 정한 아들들이 연달아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문제를 여러 차례 다시 정리해야 했다.

그럼에도 원성왕은 자신의 손자인 김준옹을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 계승을 안정시켰고, 798년 사망한 뒤 김준옹이 제39대 소성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원성왕의 여러 후손들은 서로 왕위를 놓고 싸우기도 했지만, 제52대 효공왕에 이르기까지 같은 가계집단 안에서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다.

출생과 가문

내물왕의 12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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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은 내물 마립간의 12세손으로 전한다. 내물왕은 4세기 신라의 국왕으로, 김씨 왕실이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고 왕위의 부자 계승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다만 원성왕은 당시까지 왕위를 계승하던 무열왕계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내물왕으로 이어지는 다른 계통의 김씨 왕족이었다. 따라서 그가 왕위에 오른 사건은 단순히 한 사람이 국왕으로 바뀐 것을 넘어 왕위 계승의 중심 가문이 달라지는 정치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원성왕의 아버지는 김효양(金孝讓)으로, 일길찬의 관등을 가진 인물이었다. 할아버지는 김위문(金魏文), 증조부는 김의관(金義寬), 고조부는 김법선(金法宣)으로 전한다. 이들은 김씨 왕족이었지만 모두 실제로 국왕의 자리에 오른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경신이 왕위에 오른 뒤 상황이 달라졌다.

원성왕은 자신의 아버지 김효양을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존했으며, 할아버지 김위문을 흥평대왕(興平大王), 증조부 김의관을 신영대왕(神英大王), 고조부 김법선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높였다.

본인이 국왕이 되자 그전까지 왕이 아니었던 아버지와 선조들에게 줄줄이 왕의 칭호를 붙여 준 것이다.

이러한 추존은 단순히 조상들을 존경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왕통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원성왕의 가문이 이전부터 왕위를 계승할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치적으로 드러내려는 조치였다.

어머니와 왕비

원성왕의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로, 지오부인(知烏夫人)이라는 이름으로도 전한다. 원성왕은 즉위한 뒤 어머니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존했다.

왕비는 숙정부인(淑貞夫人) 김씨로, 각간 김신술(金神述)의 딸이었다. 각간은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가장 높은 관등인 이벌찬을 가리키는 명칭이므로, 왕비 역시 유력한 진골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원성왕에게는 김인겸과 김의영, 김예영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삼국유사》에는 대룡부인과 소룡부인이라는 두 딸도 등장한다.

이 가운데 김인겸과 김예영의 후손들은 훗날 신라의 왕위 계승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을 형성했다. 특히 김인겸의 후손에서는 소성왕과 헌덕왕, 흥덕왕 등이 등장했으며, 김예영의 후손에서는 희강왕과 신무왕, 헌안왕 등이 등장했다.

아들과 손자들이 왕이 된다

인물 원성왕과의 관계 주요 후손
김인겸(金仁謙) 장남 소성왕, 헌덕왕, 흥덕왕, 김충공 등
김의영(金義英) 차남 후손 관계가 명확하지 않음
김예영(金禮英) 삼남 희강왕, 신무왕, 헌안왕 등
대룡부인 딸 구체적인 후손은 불명확
소룡부인 딸 구체적인 후손은 불명확

여기서 주목할 점은 원성왕의 가문이 훗날 신라 하대의 거의 모든 왕위쟁탈전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김인겸 계통과 김예영 계통은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9세기 신라의 정치적인 혼란을 주도했다.

따라서 원성왕이 자신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통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왕통이 끝까지 평화롭게 유지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원성왕의 후손들이 너무 많아지고 각자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면서 나중에는 같은 집안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죽이는 왕위쟁탈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혜공왕의 죽음과 정치적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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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 김경신이 중앙정치의 핵심 인물로 등장한 계기는 780년의 정치적인 혼란이었다.

당시 신라의 국왕은 제36대 혜공왕이었다. 혜공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며, 재위기간에는 여러 진골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왕권이 상당히 불안정했다.

특히 780년에는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포위했다.

이에 상대등이었던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은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혜공왕과 왕비가 사망했다.

김지정의 난

김지정의 난은 신라 중대 왕실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당시 김지정은 궁궐을 포위하고 국왕의 권위에 도전했으며, 김양상과 김경신은 이에 맞서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혜공왕이 반란군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다른 사료와 연구에서는 김양상 측의 정변과 혜공왕의 죽음을 더욱 밀접하게 연결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따라서 김경신이 혜공왕을 직접 살해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혜공왕의 죽음 이후 이루어진 정치적인 변화에서 김경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김양상은 왕위에 올라 제37대 선덕왕이 되었고, 김경신은 반란 진압의 공로를 인정받아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국왕이 반란으로 죽는 과정에서 새 국왕을 세우는 데 성공했고, 자신도 신라 귀족사회의 최고위 관직을 차지한 것이다.

상대등이 되다

상대등(上大等)은 신라의 최고위 귀족 관직으로, 진골 귀족들의 정치적인 의사를 대표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원성왕은 선덕왕이 즉위한 뒤 상대등으로 임명되면서 중앙정부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특히 국왕의 후계자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상대등이 새로운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가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김경신은 단순히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다. 이미 중앙정부의 최고위 관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선덕왕의 즉위에 기여한 공신이라는 정치적인 기반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덕왕이 사망하면서 김경신에게 왕위를 차지할 기회가 찾아왔다.

785년 알천의 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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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ㅡ발 뭐가 뭔지 몰?루겟소요. 무섭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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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이 국왕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다.

785년 음력 정월 선덕왕이 사망했다. 그런데 선덕왕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신라의 귀족들은 새로운 국왕을 결정해야 했다.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는 김주원(金周元)이었다.

김주원은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 중대 왕실과 연결된 정치적인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중앙정부의 시중을 역임한 경력이 있는 유력한 진골 귀족이었다.

그런데 국왕을 정하려던 과정에서 매우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비가 내려 강을 못 건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주원은 수도의 북쪽 약 20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신하들은 김주원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며, 김주원도 왕위에 오르기 위해 궁궐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때마침 엄청난 폭우가 내렸다.

그 결과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나 김주원이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알천은 오늘날 경주시의 북천에 해당하는 하천이다.

김주원이 강을 건너지 못하자 귀족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주장이 등장했다.

“

왕위는 하늘의 뜻에 따라 정해지는 것인데, 이렇게 비가 쏟아져 김주원이 오지 못하는 것은 하늘이 그를 왕으로 세우지 않으려는 것 아니겠는가?

”

결국 신하들은 김주원 대신 상대등 김경신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김경신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비가 그쳤다고 한다.

원래 왕이 될 사람이 비 때문에 강을 못 건넜는데,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왕이 되자 비가 멈췄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김경신은 날씨 덕분에 왕위에 오른 셈이다.

정말 비 때문에 왕이 바뀌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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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

국왕을 결정하는 것은 왕실과 귀족들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왕위에 오르기로 결정된 사람이 일시적으로 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국왕으로 세웠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특히 김주원은 당시 김경신보다 왕위 계승의 서열에서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사료에는 김주원을 상재(上宰), 김경신을 이재(二宰)로 표현한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에 정치적인 경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김경신이 이미 귀족들 가운데 상당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김주원이 궁궐에 들어오기 전에 정치적·군사적인 주도권을 장악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알천의 홍수는 김경신의 왕위 계승을 하늘의 뜻으로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야기였을 수 있다.

다만 실제로 김경신이 군대를 동원해 김주원을 막았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따라서 김경신이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즉위가 단순한 우연이나 자연재해의 결과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1]

삼국유사의 이상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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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는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기묘한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 꿈은 단순한 길몽이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김경신이 자신의 인생이 망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불길하게 해석되었다.

복두를 벗고 삿갓을 쓰다

꿈속에서 김경신은 관리들이 쓰던 복두를 벗고 흰 삿갓을 썼다.

그리고 열두 줄의 현을 가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의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김경신은 꿈에서 깨어난 뒤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해몽을 부탁했다.

그런데 처음 돌아온 해몽은 상당히 끔찍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에서 쫓겨난다는 뜻이며, 삿갓을 쓴 것은 죄를 지어 처벌받을 징조라는 것이었다. 또한 가야금은 형벌을 받고 우물에 들어간 것은 감옥에 갇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김경신은 이 이야기를 듣고 크게 두려워했다고 한다.

꿈 하나 잘못 꾸었다가 관직도 잘리고 감옥에 갇히게 생겼다고 생각해 집에서 나오지도 못한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길몽이라고 한다

김경신이 낙담하고 있을 때 여삼이라는 인물이 찾아왔다.

여삼은 김경신에게 꿈의 내용을 물어본 뒤 처음의 해몽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그의 해석은 완전히 달랐다.

복두를 벗는 것은 더 이상 위에 모실 사람이 없다는 뜻이며, 흰 삿갓을 쓰는 것은 국왕의 면류관을 쓰게 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또한 열두 줄의 가야금은 왕위가 후손들에게 이어질 징조이며, 우물로 들어가는 것은 궁궐에 들어간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김경신이 국왕이 될 것이라는 해몽이었다.

김경신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지만 여전히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보다 왕위 계승에 유리한 김주원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자 여삼은 알천의 신에게 몰래 제사를 지내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이후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선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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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꿈 이야기는 실제로 초자연적인 힘이 김경신을 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아니다.

오히려 원성왕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지거나 전승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의미가 강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같은 꿈을 두 사람이 정반대로 해석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처음에는 관직을 잃고 처벌받을 불길한 꿈이라고 설명했지만, 나중에는 국왕이 될 상서로운 꿈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는 동일한 사건이나 상징도 정치적인 상황과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알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는 김경신이 왕위 계승을 위해 미리 어떤 준비를 했을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결국 왕이 될 운명이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강조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설화가 실제로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김경신의 즉위 당시부터 널리 전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김주원은 어떻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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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김주원은 상당히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

원래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으로 기대했지만 김경신이 국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군대를 동원해 새로운 국왕과 싸우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김주원은 수도를 떠나 명주(溟州) 지역으로 물러났다.

명주는 오늘날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

이후 김주원은 이곳에서 상당한 정치적·경제적인 기반을 형성했다.

명주군왕이 되다

원성왕은 김주원을 완전히 제거하기보다 일정한 지위와 권한을 인정하는 정책을 취했다.

김주원은 명주군왕(溟州郡王)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명주 일대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조치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김주원과 그의 지지세력의 불만을 완화하려는 정치적인 타협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김주원은 무열왕계의 유력한 왕족이었으므로 그를 무조건 제거했다면 오히려 새로운 반란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다.

따라서 원성왕은 김주원을 지방으로 물러나게 하면서도 그에게 일정한 정치적인 지위를 부여하여 갈등을 완화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이 장기적인 문제까지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김주원의 아들 김종기를 등용하다

원성왕은 790년 김주원의 아들 김종기(金宗基)를 시중으로 임명했다.

시중은 국왕의 행정업무를 보좌하는 중요한 관직이었다.

따라서 왕위 계승 경쟁자의 아들을 중앙정부의 핵심 관직에 등용한 것은 정치적인 의미가 상당히 컸다.

일부 연구에서는 이를 원성왕이 김주원 계통의 유력 귀족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김종기는 오래지 않아 시중에서 물러났으며, 그 자리는 원성왕의 손자인 김준옹에게 돌아갔다.

김준옹은 훗날 소성왕이 되는 인물이다.

따라서 원성왕이 김주원 계통을 일정 부분 포용하면서도 중앙정부의 핵심적인 권력은 자신의 직계 후손들에게 집중시키려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아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킨다

주의! 이 대상은 위험에 처했습니다.
왜 위험에 처했냐면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답이 없다는 것은 노답을 의미합니다.
마치 소행성이 떨어져 지구가 폭발하는 것과 같은 노답력을 가졌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대상을 마주친다면 당장 도망가시기 바랍니다.

김주원의 또 다른 아들은 바로 김헌창이다.

김헌창은 훗날 웅천주도독이 되었으며, 822년 헌덕왕 시대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버지 김주원이 과거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일을 중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그리고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정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이 반란에는 신라의 여러 지방이 참여했으며, 중앙정부는 상당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원성왕이 김주원을 제치고 왕이 된 뒤 수십 년이 지나, 김주원의 아들이 그 일을 문제 삼아 아예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김헌창의 난을 단순히 아버지의 왕위 계승 실패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

당시에는 중앙정부의 권력 집중과 지방사회의 경제적인 어려움, 진골 귀족들의 정치적인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성왕과 김주원의 왕위계승 경쟁이 후대까지 중요한 정치적인 갈등의 원인으로 남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785년 새로운 왕통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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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은 왕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하려 했다.

특히 김주원과의 왕위계승 경쟁에서 승리한 만큼 자신의 왕위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했다.

이에 원성왕은 아버지와 조상들을 왕으로 추존하고 아들 김인겸을 태자로 책봉하는 등 새로운 왕통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중앙정부의 주요 관직에 자신의 후손들과 가까운 왕족들을 임명하면서 정치적인 기반을 다졌다.

이러한 정책은 이후 신라 하대의 정치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9주의 총관을 도독으로 바꾸다

785년 원성왕은 신라의 9주를 다스리는 총관(摠管)의 명칭을 도독(都督)으로 변경했다.

신라는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으며, 각 주의 장관은 지방의 행정과 군사적인 업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지방 장관의 명칭을 정비한 것은 중앙정부의 지방행정체계를 정리하려는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총관이라는 이름을 도독으로 바꾸었다는 사실만으로 지방 장관의 실제 권한이 크게 달라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중국식 관제의 영향을 받아 관직의 명칭을 정비하고 중앙집권적인 행정질서를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 승정을 정비하다

원성왕은 즉위한 해에 불교계를 관리하는 정법전(政法典)의 제도도 정비했다.

정법전은 신라에서 불교와 승려들을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원성왕은 이 기관에 승관(僧官)을 두고 불교적인 학문과 수행에 뛰어난 승려들을 등용하도록 했다.

이는 단순히 불교를 후원하는 정책만이 아니었다.

당시 사찰들은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상당한 경제적·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국왕에게는 불교계의 활동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원성왕은 승관을 통해 불교계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왕실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788년 독서삼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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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의 가장 중요한 제도적인 업적.

788년 원성왕은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실시했다.

독서삼품과는 유교경전에 관한 학문적인 능력을 평가하여 관리 선발에 반영하는 제도였다.

당시 신라에서는 골품제에 따라 개인이 차지할 수 있는 관직과 관등에 제한이 존재했다.

특히 진골 귀족들이 중앙정부의 고위 관직을 대부분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학문적인 능력만으로 정치적인 지위를 높이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원성왕은 유교경전을 얼마나 공부했는지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고, 그 결과를 관리 선발에 활용하도록 한 것이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중요하지만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도 관직을 주는 기준으로 삼겠다는 발상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공무원 시험처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응시 자격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학문적인 능력을 국가의 인재 등용에 반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제도였다.

상품·중품·하품으로 나누다

독서삼품과는 유교경전에 관한 이해도를 기준으로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등급 기준
상품(上品) 《춘추좌씨전》·《예기》·《문선》을 이해하고, 《논어》와 《효경》에도 밝은 사람
중품(中品) 《곡례》·《논어》·《효경》에 밝은 사람
하품(下品) 《곡례》와 《효경》을 이해하는 사람
특별 선발 오경·삼사·제자백가의 저술에 널리 통달한 사람은 등급을 뛰어넘어 등용 가능

이러한 기준을 보면 당시 신라의 관료들이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능력만을 평가받았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논어》와 《효경》, 《예기》 등은 유교적인 도덕관념과 사회질서를 설명하는 중요한 경전이었다.

따라서 독서삼품과는 학문적인 지식을 평가하는 동시에 유교적인 통치이념에 익숙한 관료들을 양성하려는 정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국학과의 관계

독서삼품과는 신라의 교육기관인 국학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국학은 682년 신문왕 시대에 설치된 국가적인 교육기관으로,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관리에게 필요한 지식과 교양을 가르쳤다.

그러나 국학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관직에 진출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성왕이 독서삼품과를 실시하면서 유교 교육과 관리 선발을 연결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일부 연구에서는 독서삼품과를 국학의 졸업시험과 비슷한 제도로 평가한다.

반면 국학에서 가르친 책과 독서삼품과의 평가 대상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근거로 별도의 관리 선발제도였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따라서 독서삼품과가 단순히 국학 졸업생들만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과거제의 시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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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삼품과는 한국사에서 학문적인 능력에 따라 관료를 선발하려 했던 초기 제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를 훗날 고려와 조선에서 시행된 과거제와 완전히 동일한 제도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고려의 과거제는 958년 광종 시대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으며, 이후 관료 선발의 중요한 제도로 발전했다.

반면 신라의 독서삼품과는 골품제를 대체하지 못했다.

아무리 유교경전에 능통하더라도 신분에 따라 차지할 수 있는 관직과 관등에 제한이 존재했다.

따라서 독서삼품과는 혈통 중심의 정치질서 속에서 학문적인 능력을 관리 선발에 반영하려는 시도였다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시험을 잘 본다고 진골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진골이 아니라고 시험을 잘 봐도 무조건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원성왕이 유교적인 교육과 관리 선발을 제도적으로 연결하려 했다는 사실은 신라 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2]

789년 자옥의 지방관 임명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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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삼품과가 시행된 다음 해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789년 원성왕은 자옥(子玉)이라는 인물을 양근현의 소수(少守)로 임명하려 했다.

소수는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관직으로, 작은 현을 다스리는 지방관에 해당했다.

그런데 집사사의 관리였던 모초(毛肖)가 이 임명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자옥이 문적(文籍)을 통해 선발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시험을 안 봤으니 임명할 수 없습니다

모초는 자옥이 정해진 학문적인 선발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지방관으로 임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시중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자옥이 비록 문적을 통해 선발된 것은 아니지만 당나라에 유학한 경험이 있으므로 지방관으로 등용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원성왕은 시중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 사건은 독서삼품과와 학문적인 능력에 따른 인사제도가 실제 관료 선발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관리의 임명에 대해 다른 관리가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국왕이 지방관 하나 임명하려는데 어떤 관리는 정식으로 선발된 사람이 아니라며 반대하고, 다른 관리는 당나라 유학 경력이 있으니 괜찮다고 한 것이다.

다만 이 기록만으로 당시 모든 지방관이 독서삼품과를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학문적인 선발 기준과 기존의 인사 관행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실제 관리 임명에서 갈등이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다.[3]

벽골제 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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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은 관리 선발과 중앙정부의 인사정책뿐 아니라 농업 생산을 위한 수리시설의 정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790년에는 벽골제를 증축하도록 명령했다.

벽골제는 오늘날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일대에 위치한 고대의 대규모 저수시설로, 백제 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벽골제는 호남 지역의 농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원성왕 시대에는 그 규모를 확대하거나 기존 시설을 보수하는 사업이 이루어졌다.

7주의 주민들을 동원하다

790년 원성왕은 전주를 비롯한 7주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벽골제를 증축하도록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사업이 단순히 김제 일대의 주민들만을 동원한 지방공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지역의 주민들까지 동원했으므로 상당한 규모의 국가적인 토목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는 농업을 중심으로 국가경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저수시설과 제방을 정비하는 일은 국가재정과 주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특히 가뭄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물을 저장하고 농경지에 공급하는 시설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벽골제 증축은 농업생산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중앙정부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규모 공사에는 부작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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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증축은 농업생산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대규모 수리시설을 건설하려면 많은 주민들이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특히 7주의 주민들을 동원했다는 사실은 국가가 상당한 규모의 노동력을 징발했다는 의미다.

따라서 농업시설을 확충하는 정책이면서도 실제 공사에 참여한 주민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사업 때문에 직접적인 농업 피해나 주민들의 반란이 발생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벽골제 증축을 무조건 백성들을 괴롭힌 토목사업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가뭄을 막으려고 대규모 저수시설을 고쳤지만, 그 시설을 고치는 데에도 백성들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원성왕 시대에는 798년 영천의 청제(菁堤)를 수리했다는 금석문 자료도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당시 신라가 여러 지역에서 수리시설을 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4]

발해와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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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은 발해와도 외교적인 관계를 맺었다.

790년 음력 3월 원성왕은 일길찬 백어(伯魚)를 북국(北國)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여기서 북국은 발해를 의미한다.

당시 발해의 국왕은 제3대 문왕이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와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발전한 국가였으며, 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두 국가는 서로 다른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외교적인 교류도 유지했다.

신라와 발해는 계속 적대적이었나?

신라와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와 한반도 북부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두 국가가 항상 전쟁을 벌이거나 외교적인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790년 원성왕이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은 양국 사이에 공식적인 외교적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다만 백어가 발해에 가서 어떤 문제를 논의했으며 어떠한 외교적인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상세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건을 근거로 신라와 발해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거나 영토문제를 해결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어쨌든 원성왕은 당나라뿐 아니라 발해와의 관계도 관리하면서 외교적인 활동을 이어 갔다.[5]

당나라에 미녀를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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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 시대에는 당나라와의 외교에서 상당히 특이한 사건도 발생했다.

792년 음력 7월 원성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김정란(金井蘭)이라는 여성을 함께 보냈다.

그런데 이 김정란은 단순한 시녀나 일반적인 수행원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그녀가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몸에서 향기가 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원성왕은 그녀를 당나라에 바쳤다고 한다.

나라 최고의 미녀를 보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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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충격적인 기록이다.

국왕이 외교적인 목적으로 여성을 다른 나라의 황제에게 보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에서는 여러 물품을 선물이나 조공의 형식으로 주고받는 일이 존재했다.

그런데 일부 기록에는 사람까지 외교적인 교류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원성왕이 김정란을 당나라에 보낸 사건도 이러한 외교적인 관행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김정란이 실제로 어떠한 신분의 여성이었으며, 자신의 의사에 따라 당나라로 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그녀가 스스로 원해서 당나라에 갔다거나 강제로 끌려갔다고 어느 한쪽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몸에서 향기가 났다는 이야기가 실제 신체적인 특징을 기록한 것인지, 미모를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인 표현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신라 최고의 미녀라면서 다른 나라 황제에게 보내 버렸는데, 정작 그 여성의 생각이 어땠는지는 역사책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의 외교적인 관행뿐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여성이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어떻게 취급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기록이기도 하다.[6]

791년 제공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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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의 재위기간에는 정치적인 반란도 발생했다.

791년 음력 정월 이찬 제공(悌恭)이 반란을 일으켰다.

제공은 원성왕이 즉위한 직후인 785년에 시중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중요한 관직을 역임한 유력한 귀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중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원성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제공이 반란을 일으킨 구체적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연구에서는 원성왕이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을 중심으로 중앙정부의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기존 진골 귀족들 가운데 일부가 정치적인 지위를 잃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특히 제공이 원성왕의 즉위 직후 시중으로 임명되었다가 물러났다는 사실은 왕실과 그의 정치적인 관계가 변화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791년에는 원성왕의 장남인 김인겸이 사망했다.

이 때문에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제공의 반란과 관련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제공이 실제로 어떤 세력을 동원했고 어떠한 정치적인 명분을 내세웠는지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다.

따라서 그가 원성왕의 독서삼품과 시행에 반대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거나, 특정한 왕족을 국왕으로 세우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손자 김언승이 진압하다

제공의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원성왕의 손자 김언승(金彦昇)이었다.

김언승은 훗날 제41대 헌덕왕으로 즉위하는 인물이다.

그는 당시 대아찬의 관등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란 진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제공은 결국 처형당했다.

원성왕에게 반기를 든 귀족을 훗날 국왕이 되는 손자가 직접 잡아 죽인 것이다.

이 사건은 원성왕이 자신의 후손들을 군사적인 업무와 중앙정치의 핵심에 참여시키면서 왕실의 정치적인 기반을 강화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반대로 왕실의 권력이 특정한 가문에 집중되면서 다른 진골 귀족들의 정치적인 반발이 발생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따라서 제공의 난은 원성왕의 왕권 강화정책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인 갈등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교와 왕권

원성왕은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왕실과 불교사찰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정치적인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당시 신라에서 불교는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가 아니었다.

왕실과 진골 귀족들은 사찰을 후원하고 불상을 조성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권위와 사회적인 영향력을 강화했다.

또한 사찰들은 상당한 토지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원성왕에게 불교계의 지원은 왕실의 정치적인 기반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봉은사와 왕실의 추복사업

원성왕 시대에는 봉은사(奉恩寺)의 건립사업이 마무리되었다.

봉은사는 제25대 진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로, 이전 국왕 시대부터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원성왕은 이러한 불교사업을 이어받아 사찰을 완성하고 왕실의 추복사찰로 유지하도록 했다.

이는 이전 왕실의 불교적인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왕실의 정치적인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원성왕이 봉은사를 처음부터 새롭게 만들었다는 설명은 정확하지 않다.

이미 이전 시대에 사찰 건립을 위한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원성왕 시대에 이르러 완성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다

원성왕은 황룡사의 승려 지해(智海)를 궁궐로 불러 《화엄경》을 독송하게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화엄경은 신라 불교에서 중요한 경전이었다.

특히 왕실과 귀족들은 화엄사상을 통해 국가와 불교적인 질서의 조화를 강조하기도 했다.

따라서 원성왕이 승려에게 화엄경을 독송하게 한 것은 개인적인 종교적 관심뿐 아니라 왕실의 불교적인 권위를 드러내려는 행동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원성왕이 특정한 불교 종파를 다른 종파보다 우대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그를 단순히 불교만을 숭배한 군주라고 설명하기보다는 유교적인 행정제도와 불교적인 왕권 의식을 함께 활용했던 인물로 이해할 수 있다.

만파식적과 왕실의 정통성

주의! 이 글이 다루는 대상은 존나 미스터리합니다.
씨ㅡ발 뭐가 뭔지 몰?루겟소요. 무섭습니다. ㅠㅠ

원성왕과 관련된 중요한 정치적 상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만파식적이다.

만파식적은 신라의 전설에 등장하는 신비한 피리로, 이를 불면 나라의 근심과 재앙이 사라진다고 전한다.

원래 만파식적 설화는 신문왕과 그의 아버지 문무왕의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문무왕과 김유신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비한 대나무를 보내 주었다는 이야기는 삼국통일 이후 신라 왕실의 정치적인 정통성을 강조하는 상징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원성왕 시대에는 이러한 만파식적의 전승이 새로운 왕실의 정치적인 권위와 연결되었다.

피리 하나가 왜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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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국왕과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를 소유하거나 그 전승과 연결된 인물이 되는 것은 왕실의 정치적인 정통성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원성왕은 무열왕계와의 정치적인 경쟁에서 승리하여 새로운 왕통을 형성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전 왕실의 정치적·종교적인 상징을 그대로 버리기보다 자신과 연결하여 새로운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일부 연구에서는 원성왕 시대에 만파식적 설화가 재해석된 것을 이러한 정치적인 목적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원성왕이 직접 만파식적 설화의 모든 내용을 만들어 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기존에 존재하던 신라 왕실의 전승이 새로운 정치적 상황에 맞게 해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후계자들이 연달아 죽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이 존나 불쌍합니다...ㅠㅠ
광광 우럭따 8ㅅ8

원성왕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직계 후손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특히 처음 후계자로 정한 아들들이 연달아 사망하면서 원성왕은 왕위 계승 문제를 여러 차례 다시 정리해야 했다.

장남 김인겸의 사망

원성왕은 785년 즉위한 직후 장남 김인겸(金仁謙)을 왕태자로 책봉했다.

김인겸은 원성왕의 정치적인 기반을 유지하고 왕위를 계승할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791년 음력 정월 김인겸이 사망했다.

원성왕은 그에게 혜충(惠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김인겸은 생전에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훗날 아들 김준옹이 소성왕으로 즉위하면서 혜충대왕으로 추존되었다.

따라서 김인겸은 실제로 국왕이 되지 못했지만 여러 국왕의 아버지이자 조상으로서 왕실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차남 김의영도 사망하다

792년 원성왕은 둘째 아들 김의영(金義英)을 새로운 태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김의영 역시 오래 살지 못했다.

794년 음력 2월 사망했기 때문이다.

원성왕은 그에게 헌평(憲平)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렇게 해서 원성왕은 왕위에 오른 뒤 약 10년 만에 태자로 책봉했던 아들 두 명을 모두 잃게 되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두 아들이 특정한 전염병이나 정치적인 암살 때문에 사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연달아 사망하는 상당히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던 것이다.

결국 손자를 태자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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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년 원성왕은 새로운 태자를 책봉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이 아니라 손자 김준옹(金俊邕)이었다.

김준옹은 먼저 사망한 장남 김인겸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원성왕은 장남의 혈통을 이어 왕위를 계승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원성왕에게는 셋째 아들 김예영도 있었지만 그를 태자로 세우지 않았다.

이러한 결정은 단순히 가까운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김준옹이 이미 중앙정부에서 중요한 정치적인 경험을 쌓고 있었으며, 국왕을 계승할 만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다만 김예영 대신 김준옹을 선택한 정확한 정치적인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김준옹은 원성왕이 사망한 뒤 실제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제39대 소성왕이다.

태자 책봉 결과
김인겸 785년 791년 사망, 혜충태자
김의영 792년 794년 사망, 헌평태자
김준옹 795년 798년 소성왕 즉위

아들 둘을 연달아 태자로 세웠다가 모두 먼저 죽자 결국 손자를 왕으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자연재해와 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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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 시대에는 자연재해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특히 가뭄과 홍수, 서리, 메뚜기 피해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신라는 농업을 중심으로 국가경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자연재해는 주민들의 생계와 국가재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농작물의 수확량이 감소하면 주민들은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중앙정부는 조세 수입이 줄어들어 국가적인 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워질 수 있었다.

따라서 자연재해에 대응하는 것은 국왕에게 중요한 정치적인 과제였다.

가뭄과 메뚜기 피해

788년에는 신라의 서쪽 지방에서 가뭄과 메뚜기 피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도적들이 증가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원성왕은 사신을 보내 주민들을 위문하고 지방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했다.

789년에는 한산주의 주민들이 굶주리자 곡식을 나누어 주도록 했다.

790년에도 큰 가뭄이 발생했으며, 한산주와 웅천주의 굶주리는 주민들을 구휼했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신라 중앙정부가 자연재해로 발생하는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일정한 구휼정책을 시행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실제로 얼마만큼의 곡식을 지급했고 몇 명의 주민이 도움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원성왕의 구휼정책이 지방의 식량 부족을 완전히 해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796년 수도의 기근

796년에는 수도 서라벌에서도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했다.

이에 원성왕은 국가의 창고를 열어 주민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도록 했다.

수도까지 기근의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특정한 지방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국왕이 직접 국가의 비축 곡식을 사용해 주민들을 구휼했다는 점에서 중앙정부가 재난에 대응하려는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복적인 자연재해와 기근은 이후 신라 하대에도 계속 발생했다.

따라서 원성왕의 재위기간에 모든 경제적·사회적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798년 사망

원성왕은 798년 음력 12월 29일 사망했다.

785년 음력 정월에 즉위했으므로 재위기간은 약 14년이었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사망 당시의 나이는 확인할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원성왕의 정확한 사망 원인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어떤 질병이나 사고 때문에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원성왕은 사망하기 전에 손자 김준옹을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자 문제를 정리해 놓았다.

이에 원성왕이 사망하자 김준옹이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소성왕이다.

손자가 왕위를 계승하다

원성왕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권력을 재편했다.

그 결과 후계자로 정한 아들들이 연달아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자 김준옹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이는 원성왕이 자신의 직계 후손을 중심으로 왕위 계승을 안정시키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김준옹 역시 오래 살지 못했다.

소성왕은 799년 사망했고, 그 뒤 어린 아들 애장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애장왕은 809년 숙부 김언승에게 살해당했으며, 그 김언승이 헌덕왕으로 즉위했다.

이후에는 헌덕왕의 동생인 흥덕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니까 원성왕이 세운 왕통은 계속 유지되었지만, 왕위를 계승하는 방식은 점차 불안정해졌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자기 손자를 왕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나중에는 그 손자의 아들이 다른 손자에게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경주 원성왕릉

경주 원성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위치한 신라의 왕릉이다.

일반적으로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왕릉은 신라 하대의 능묘 가운데 규모와 석조 장식이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왕릉 주변에는 십이지신상과 석사자, 문인석과 무인석 등이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 서역인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무인석이 유명하다.

원성왕릉은 단순히 왕의 무덤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당시 신라의 문화적·예술적인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괘릉이라는 이름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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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ㅡ발 뭐가 뭔지 몰?루겟소요. 무섭습니다. ㅠㅠ

괘릉이라는 이름은 무덤을 조성하는 과정과 관련된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원성왕을 장사지내려던 장소에 물이 고여 있었다.

그래서 관을 직접 땅에 묻지 않고 돌 위에 걸어 놓은 뒤 흙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관을 걸어 놓았다는 뜻의 괘릉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실제 장례 과정에 관한 확정적인 기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삼국사기》에는 원성왕의 유언에 따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토함산 서쪽의 곡사 부근에 왕릉이 있다고 전한다.

따라서 괘릉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후대에 형성된 지역 전승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실제 원성왕릉이라는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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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원성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실제 피장자가 비교적 명확한 사례로 평가된다.

특히 최치원이 지은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의 내용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대숭복사비에는 원성왕의 무덤을 조성하고 그 주변의 사찰을 정비한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원성왕의 사후 왕릉을 조성하면서 기존 사찰의 위치를 옮겼고, 이후 왕실에서 그 사찰을 원성왕의 명복을 비는 장소로 관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의 괘릉이 실제 원성왕릉이라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단순히 후대의 전승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에 작성된 금석문 자료와 왕릉의 위치를 함께 대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서역인처럼 생긴 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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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릉에서 가장 유명한 석조물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무인석이다.

그런데 이 무인석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동아시아 사람의 얼굴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눈이 깊고 코가 높으며, 수염이 풍성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일부에서는 무인석을 서역인 또는 페르시아인의 모습을 본떠 제작한 조각으로 해석한다.

특히 당시 신라는 당나라를 통해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문화적인 영향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국제적인 문화교류가 왕릉 조각에도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무인석이 실제로 특정한 서역인의 얼굴을 모델로 제작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일부 연구에서는 불교의 수호신이나 당나라의 능묘 조각 양식을 바탕으로 제작된 인물상이라는 해석도 제기한다.

따라서 서역풍의 외모를 가진 조각이라는 사실과 실제 서역인이 신라 왕릉을 지켰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그럼에도 원성왕릉의 무인석은 신라의 국제적인 문화교류와 뛰어난 조각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평가된다.

십이지신상과 석사자

원성왕릉의 봉분 주변에는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십이지신상은 열두 방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왕릉을 보호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왕릉 앞에는 석사자상과 문인석, 무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석조물들은 신라 왕릉의 장례문화와 조각예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특히 원성왕릉의 조각은 인물의 얼굴과 의복, 자세를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오늘날 원성왕릉은 신라시대의 왕릉 가운데서도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7]

신라 하대의 실질적인 개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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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은 신라 하대의 정치질서를 확립한 인물로 평가된다.

《삼국사기》에서는 제37대 선덕왕부터 신라 하대가 시작된 것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선덕왕의 후손들은 왕위를 계속 계승하지 못했다.

반면 원성왕의 후손들은 798년 원성왕이 사망한 뒤에도 계속해서 국왕을 배출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역사학자들은 원성왕을 신라 하대의 실질적인 개창자로 평가한다.

120년 넘게 이어진 원성왕계

원성왕의 후손들은 제39대 소성왕부터 제52대 효공왕까지 계속해서 왕위를 계승했다.

이 기간은 798년부터 912년까지로, 약 114년에 해당한다. 원성왕 자신의 즉위 연도인 785년부터 계산하면 원성왕계의 왕권은 120년 이상 지속되었다.

따라서 원성왕계는 신라 하대의 정치적인 중심을 이루었던 왕실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모두 같은 가문의 후손이면서도 서로 협력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원성왕의 장남 김인겸 계통과 셋째 아들 김예영 계통은 여러 차례 왕위쟁탈전을 벌였다.

836년에는 김예영의 후손인 김균정과 김제륭이 왕위를 놓고 싸웠고, 김균정은 전투 과정에서 죽었다.

이후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다시 왕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독점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같은 가문 내부의 정치적인 갈등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김경신이 왕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그의 후손들이 많아지면서 각자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서로 죽이고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왕통의 역설

원성왕은 무열왕계와의 왕위계승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새로운 왕통의 정치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후손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여러 가문이 서로 다른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새로운 갈등이 발생했다.

특히 김인겸 계통과 김예영 계통의 왕족들은 모두 원성왕의 후손이라는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경쟁이 발생하면 서로 자신이 더 적합한 국왕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왕실의 혈통만으로 후계자를 확정하기 어려웠으며, 실제로 어느 귀족들의 정치적인 지원과 군사력을 확보하느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국 원성왕이 새롭게 수립한 왕통은 오랫동안 유지되었지만 그 내부에서는 정치적인 안정성이 점차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신라 하대의 구조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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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은 신라 하대의 여러 국왕 가운데 상당히 중요한 정치적인 성과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무열왕계의 유력한 왕족인 김주원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자신의 직계 후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통을 형성했다. 또한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여 유교적인 학문을 관리 선발에 반영하려 했고, 벽골제 증축과 발해 외교 등 여러 분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 과정에서는 정치적인 경쟁과 갈등이 존재했으며, 집권 이후에도 자신의 가문에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진골 귀족사회 내부의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을 남겼다.

따라서 원성왕을 단순히 성군이나 권력욕에 사로잡힌 찬탈자로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긍정적인 평가

원성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신라 하대의 정치적인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조상들을 왕으로 추존하고 아들과 손자들을 중심으로 왕위 계승을 정비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새로운 왕통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중앙정부의 정치적인 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또한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여 유교적인 학문과 행정적인 능력을 관리 선발에 반영하려 했다는 점도 중요한 업적이다.

특히 골품제에 따라 정치적인 권력이 독점되던 상황에서 학문적인 능력을 평가하는 제도를 마련했다는 사실은 신라의 관료제 발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울러 벽골제를 증축하고 기근에 대응하여 구휼정책을 시행하는 등 경제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왕위 찬탈에 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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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은 원래 왕으로 추대될 가능성이 높았던 김주원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서는 김주원이 폭우 때문에 알천을 건너지 못하면서 김경신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을 실제 정치적인 권력투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서술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특히 김경신은 이미 상대등으로서 중앙정부의 최고위 관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선덕왕의 즉위에 참여했던 공신이었다.

따라서 김경신이 국왕으로 즉위한 것을 단순히 하늘의 뜻이나 폭우라는 우연에 따른 결과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반면 김경신이 실제로 군사적인 쿠데타를 계획하고 김주원의 궁궐 진입을 막았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부족하다.

따라서 원성왕의 즉위가 정치적인 경쟁의 결과였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왕위 쟁탈의 과정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

독서삼품과의 한계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통해 학문적인 능력을 관리 선발에 반영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가 신라의 골품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진골 귀족들은 여전히 중앙정부의 최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6두품 이하의 신분은 관등과 관직의 승진에서 제약을 받았다.

따라서 독서삼품과는 능력에 따른 관리 선발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도입했지만 기존의 신분질서를 완전히 바꾸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왕실의 권력 집중과 골품제의 유지라는 정치적인 현실 속에서 제한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후손들의 왕위쟁탈전

원성왕은 자신의 후손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여러 차례 군사적인 정변과 왕위쟁탈전을 벌였다.

특히 희강왕과 민애왕, 신무왕으로 이어지는 836~839년의 정치적인 혼란은 모두 원성왕의 후손들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원성왕이 새로운 왕통을 형성했다는 사실과 그 왕통이 정치적인 안정을 영구적으로 유지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그는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여러 왕족들이 서로 다른 정치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왕위 계승의 갈등이 확대되었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원성왕 개인의 정책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신라 하대에는 골품제에 따른 정치적인 특권과 진골 귀족들의 권력 경쟁, 지방세력의 성장 등 여러 구조적인 문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종합

원성왕은 신라 하대의 정치적인 질서를 형성한 핵심적인 국왕이었다.

그는 왕위 계승 경쟁에서 승리하여 새로운 왕통을 세웠으며, 자신의 직계 후손들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권력을 재편했다. 또한 독서삼품과를 시행하고 지방행정과 농업시설을 정비하면서 유교적인 통치이념과 행정적인 제도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골품제에 따른 신분적인 제약과 진골 귀족들 사이의 정치적인 경쟁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그의 후손들은 오랫동안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정변과 왕위쟁탈전을 벌였다.

알천에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신라 하대의 왕실 계보와 정치적인 질서를 120년 넘게 좌우하게 만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원성왕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자신이 김주원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뒤 후손들에게 계속 왕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나중에는 그 후손들이 서로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끝없이 싸웠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가 차지한 왕위를 후손들이 대대로 이어받기는 했지만, 그 후손들이 서로 죽이고 죽이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 것이다.

여담

  • 본명은 김경신(金敬信)이며, 신라 제38대 국왕이다.
  • 내물 마립간의 12세손으로 전한다.
  • 아버지는 김효양이며, 즉위 후 명덕대왕으로 추존되었다.
  • 어머니는 계오부인 박씨로, 소문태후로 추존되었다.
  • 왕비는 숙정부인 김씨로, 각간 김신술의 딸이다.
  • 780년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한 뒤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 785년 선덕왕이 사망하자 김주원과 왕위를 놓고 경쟁했다.
  • 《삼국사기》에는 김주원이 알천의 홍수 때문에 궁궐로 들어오지 못하자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 《삼국유사》에는 왕이 될 것을 예언하는 꿈과 해몽 이야기가 등장한다.
  • 김주원은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뒤 명주 지역으로 물러나 명주군왕이 되었다.
  •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822년 헌덕왕 시대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 785년 자신의 아버지와 조상들을 왕으로 추존했다.
  • 같은 해 장남 김인겸을 태자로 책봉했다.
  • 785년 9주의 총관을 도독으로 바꾸었다.
  • 788년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유교경전에 관한 학문적인 능력을 관리 선발에 반영하도록 했다.
  • 789년에는 자옥을 지방관으로 임명하는 문제를 놓고 문적 출신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발생했다.
  • 790년 벽골제를 증축하기 위해 전주 등 7주의 주민들을 동원했다.
  • 같은 해 일길찬 백어를 발해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 791년 이찬 제공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 791년 장남 김인겸이 사망했다.
  • 792년에는 김정란이라는 여성을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 792년 차남 김의영을 새로운 태자로 책봉했으나 794년에 사망했다.
  • 795년 장남 김인겸의 아들인 김준옹을 태자로 책봉했다.
  • 김준옹은 원성왕의 사망 이후 소성왕으로 즉위했다.
  • 798년 음력 12월 29일 사망했으며,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 원성왕의 후손들은 제52대 효공왕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국왕을 배출했다.
  • 경주 외동읍에는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괘릉이 존재한다.
  • 원성왕릉에는 서역풍의 외모를 가진 무인석이 남아 있다.
  • 대숭복사비의 기록은 현재 괘릉을 원성왕릉으로 비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같이 보기

관련 자료

각주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