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 왕조 석씨 왕조 김씨 왕조
그 2가지 측면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똥수저 백성들의 편이니 모두 폐하에게 경배합시다.
통쾌한 대첩을 이끌었거나, 그에 준하는 쾌거를 이룬 세계 각국의 명장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인물은 의로움과 지혜, 문무까지도 겸비하여 진정한 군인, 무인(武人)이라 할 만한 인물이기에
가히 본받을 만한 행적은 본받는 게 좋습니다.
여러 대중매체에서 자주 거론되거나, 아니면 문화적, 세계적으로 거대한 영향을 끼쳤거나
확실히 그 무엇보다도 다른 우주명작급 작품이니 본문을 읽기 전 뇌를 비우시기 바랍니다.
이보시오 의사양반 제 멘탈은.. 끄어어얽!!
영웅을 향해 무례한 말은 삼가도록 합시다.
- ㄴ 신라 입장에서는 구국의 영웅.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 |
| 본명 | 김춘추(金春秋) |
|---|---|
| 골품 | 진골 |
| 국가 | 신라 |
| 능묘 | 경주 태종무열왕릉 |
| 모후 | 천명부인(天明夫人, 문정태후로 추존) |
| 신라의 역대 국왕 | ||||
|---|---|---|---|---|
| 27대 | 28대 | 29대 | 30대 | 31대 |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태종 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개요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603년~661년)은 신라의 제29대 국왕으로, 654년부터 661년까지 재위했다. 본명은 김춘추(金春秋)이며, 김유신과 함께 나당동맹을 추진하고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인물이다. 신라 역사상 최초로 진골 출신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신라 중대 왕실의 기반을 마련했다.
킹갓 그 자체이시다.
삼국통일은 분명한 업적이고 한민족의 형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다, 이 역알못들아. 무슨 거창한 삼국통일 대업은 개뿔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적어도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벌인 통일전쟁은 이후 한반도의 역사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태종 무열왕 자신이 삼국통일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이 양반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한 정도까지 진행되었으며, 백제의 부흥운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668년이고, 신라가 당나라와 전쟁을 벌여 한반도에서 당나라의 군사적 영향력을 밀어낸 것은 670~676년의 일이다. 따라서 삼국통일을 완성한 국왕은 아들인 문무왕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김춘추의 업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김춘추가 수십 년 동안 고구려와 백제에 대응하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어 백제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판을 깔고 아들이 마무리한 셈이다.
그러나 비판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기 딸을 죽인 백제에 복수하려고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당나라를 끌어들여 한민족 전체를 소멸시켜 버릴 뻔한 인간이라는 평가도 있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려고 외세의 군사력을 이용했으니, 그 결과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차지했더라면 도대체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신라·백제·고구려 사람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민과 동일한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했다고 볼 수는 없다. 세 나라는 각자의 왕실과 지배층, 국가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으며, 서로를 명백한 적국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따라서 김춘추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현대적인 의미의 민족 배반자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당나라의 지원을 받아 백제를 멸망시킨 선택이 아무런 부작용도 없는 완벽한 외교적 성공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없다.
결국 김춘추는 신라의 생존과 권력 강화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외교와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치가였다고 설명할 수 있다.
출생과 가문
폐위된 국왕의 손자
김춘추는 603년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과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용춘은 신라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천명부인은 제26대 진평왕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 쪽으로도 왕족이고 어머니 쪽으로도 왕족인, 그야말로 왕족 중의 왕족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은 579년 폐위되었고, 왕위는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진지왕의 형인 동륜태자의 아들 김백정이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바로 진평왕이다.
이 때문에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은 국왕이 되지 못했고, 김춘추 역시 왕위 계승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또한 당시 신라에서는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신분인 성골과 그 아래의 진골을 구분하는 관념이 존재했다.
김춘추는 진골 신분이었으므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살아 있던 시기에는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 어려웠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이 양반이 진골 가운데 처음으로 왕위에 올라 신라 왕실의 계승 원칙을 바꾸게 된다.[1]
왕족이지만 실권은 없었다?
김춘추는 신라의 유력한 왕족이었지만 출생과 동시에 왕위가 보장된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가문은 폐위된 진지왕의 후손이었고, 왕실의 중심은 진평왕의 직계로 옮겨진 상태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뛰어난 외모와 능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정치적인 감각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의표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의
과
드립에 사료적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당시 역사서가 왕의 위엄과 능력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김춘추는 왕족으로서의 혈통을 바탕으로 여러 귀족 세력과 관계를 맺었고, 그 과정에서 김유신이라는 중요한 동맹자를 얻게 된다.
김유신과의 관계
김춘추에게 김유신은 처남 겸 사위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여동생과 결혼했는데, 그 뒤 자신의 딸을 김유신에게 시집보냈다.
응?
- ㄴ 누가 생각나면 그것은 눈의 착각이다.
이 관계는 실제 사료에서도 확인된다.
| 관계 | 설명 |
|---|---|
| 김유신 → 김춘추 | 여동생 문희의 남편, 즉 매부 |
| 김춘추 → 김유신 | 아내의 오빠, 즉 처남 |
| 김춘추 → 김유신 | 딸 지소부인의 남편, 즉 사위 |
| 김유신 → 김춘추 | 지소부인의 아버지, 즉 장인 |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복잡한 혼인관계지만, 당시 신라의 왕족과 귀족사회에서는 유력한 가문 사이의 혼인을 통해 정치적인 관계를 강화하는 일이 흔했다.
김춘추는 폐위된 진지왕의 후손으로 왕실 내에서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 출신으로, 군사적인 능력은 뛰어났지만 신라의 전통적인 왕족 가문과는 배경이 달랐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김춘추에게는 김유신의 군사적 역량과 가야계 세력의 지원이 필요했고, 김유신에게는 왕족인 김춘추와의 정치적인 관계가 중요했다.
따라서 둘의 관계는 단순히 친구끼리 잘 지낸 수준이 아니라 신라 왕실의 권력구조를 바꾼 정치적 동맹이었다.
문희와의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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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김유신이 지 여동생 따묵으라고 간잽이질하는 거 덥석 물고 따먹었다가 걔가 임신하자, 김유신이 선덕여왕 산책 나온 날을 노려서 화형 코스프레하면서 동네방네 떠들어 제껴서 꼼짝없이 코 꿰여 강제결혼 테크를 탔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실제로 등장하는 유명한 설화다.
김유신에게는 보희와 문희라는 두 여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보희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서악산에 올라가 소변을 보자 서라벌이 전부 잠겼다는 내용이었다.
동생 문희는 언니에게 그 꿈을 자신에게 팔라고 요청했고, 보희는 비단치마를 받고 꿈을 팔았다.
이후 김유신은 김춘추와 축국을 하다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김유신은 문희를 불러 김춘추의 옷을 수선하도록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문희는 김춘추와 관계를 맺고 임신했는데, 김춘추가 혼인을 바로 진행하지 않자 김유신이 나섰다.
김유신은 부모의 허락 없이 임신한 여동생을 불태워 죽이겠다고 소문을 냈고, 마당에 장작을 쌓아 불을 붙였다.
마침 선덕여왕이 남산으로 행차하던 날이었다.
여왕이 무슨 연기냐고 묻자 주변 사람들이 김유신이 여동생을 태워 죽이려 한다고 보고했고, 사정을 들은 여왕은 김춘추에게 문희를 구하도록 했다.
결국 김춘추는 문희와 혼인했다.
김유신의 결혼식 주선 방법이 거의 협박 수준이다.
이 이야기 때문에 김유신은 정치적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여동생의 목숨까지 이용한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다만 이 일화는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이며, 김유신이 실제로 여동생을 불태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독립적인 기록은 없다.
중요한 것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결혼했다는 사실이며, 그 결과 두 가문이 긴밀한 정치적 관계를 형성했다는 점이다.[2]
처남이자 사위가 되다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는 훗날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과 김인문 등 여러 자녀가 태어났다.
문희는 김춘추가 국왕이 된 뒤 문명왕후(文明王后)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655년에는 김춘추의 딸인 지소부인(智炤夫人)이 김유신과 결혼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여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보낸 김유신이 이번에는 김춘추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김춘추에게 김유신은 처남이면서 사위이고, 김유신에게 김춘추는 매부이면서 장인이다.
현대의 가족관계도를 그리면 상당히 복잡한 그림이 나온다.
하지만 당시 신라 왕족과 귀족사회에서는 가까운 혈족이나 인척 사이의 혼인이 현대와는 다른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오늘날의 가족관계 관념만으로 당시의 혼인을 그대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 중첩된 혼인관계는 두 가문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긴밀하게 결합했는지를 보여준다.[3]
선덕여왕 시기의 실권자
당신의 나라의 지도자에게 이런 인간들이 꼬이지 않기를 빕니다.
선덕여왕 시기 김유신과 함께 신라의 실권을 쥐고 있던 비선실세였다.
다만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신라의 모든 정치를 마음대로 결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선덕여왕 재위기에는 왕실과 유력 귀족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으며, 김춘추와 김유신도 이러한 권력구조 속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김춘추는 왕실 혈통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김유신은 군사적인 공적을 통해 입지를 강화했다.
이들의 결합은 훗날 신라의 정치질서를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도 김유신과의 협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비담의 난
647년에는 비담의 난이 발생했다.
당시 신라의 상대등인 비담과 염종 등은 선덕여왕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배경에는 기존 귀족 세력과 김춘추·김유신 등이 주도한 세력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김유신은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덕여왕은 반란이 진행되는 와중에 사망했고, 이후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다.
비담의 난이 진압되면서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이후 김춘추는 신라의 대외정책을 주도하며 여러 국가에 외교적 지원을 요청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대야성 함락과 딸의 죽음
이 개시발 놈들아! 네가 좆 되냐 내가 좆 되냐 한 번 해보자! 이 ㅅㅂ 놈들아!
642년의 참사
김춘추의 정치적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642년 대야성 전투다.
당시 백제의 의자왕은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통해 신라의 서쪽 국경을 공격하고 있었다.
백제군은 대야성을 포함한 40여 성을 공격하거나 점령하면서 신라를 압박했다.
대야성은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 일대에 위치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대야성을 방어하던 신라의 지휘관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그리고 김품석의 아내는 김춘추의 딸 김고타소였다.
백제 장군 윤충이 이끄는 군대가 대야성을 공격하자 성 안에서는 내부적인 배신까지 발생했다.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김품석과 고타소도 사망했다.
김춘추 입장에서는 적국과의 전쟁에서 단순히 성을 빼앗긴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딸과 사위까지 잃은 것이다.
사위 김품석의 병크
그런데 원문에서 지적했듯이 이 참사는 김품석 자신의 행동과도 상당한 관계가 있다.
김품석은 자기 부하인 검일(黔日)의 아내를 빼앗았다고 전한다.
당연히 검일은 김품석에게 원한을 품었다.
이후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하자 검일은 성 안의 창고에 불을 지르고 적군과 내통했다.
성주가 부하의 아내를 빼앗았다가 원한을 사서, 결국 성까지 날려 먹은 것이다.
그러니 원문에서 김품석을 유부녀 NTR하다가 성을 빼앗긴 희대의 로맨티스트라고 표현한 것도 완전히 근거 없는 드립은 아니다.
다만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김품석이 부하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았다는 것이므로, 단순한 연애사로 미화할 일은 아니다.
검일과 함께 백제군에 협력한 모척(毛尺) 역시 대야성 함락과 관련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김품석과 고타소는 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삼국사기》에는 김품석이 아내와 자식들을 죽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이 사건은 김춘추가 백제를 상대로 복수심을 품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키려 한 이유를 오직 딸의 죽음 하나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당시 백제의 군사적 압박은 신라 전체의 존립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했기 때문이다.[4]
외교의 달인인가, 외교 병신인가?
그 2가지 측면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새끼 외교술도 존나 개병신이었는데 마지막으로 갔던 당나라가 마침 신라가 필요했던 터라 끗발 오지게 붙어서 동맹을 결성한 거지, 이때는 이 나라 저 나라 쏘다니다 보니까 그나마 외교술이 늘은 것으로 사료된다.
실제로 김춘추는 처음부터 외교적으로 연전연승한 인물이 아니었다.
고구려에 갔다가 억류되었고, 왜와의 교섭에서도 확실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당나라에 대한 외교 역시 처음에는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차례 실패했다고 해서 김춘추에게 외교적 능력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당시 신라의 외교적 입지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리고 648년에는 왜 당나라가 김춘추의 제안을 받아들였는지까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고구려에 갔다가 잡히다
이보시오 의사양반 제 멘탈은.. 끄어어얽!!
642년 대야성 함락 이후 김춘추는 백제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러 갔다.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는 연개소문이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면 백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신라가 과거 빼앗아 간 한강 유역과 죽령 이북의 영토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신라 입장에서는 그렇게 쉽게 반환할 수 있는 영토가 아니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의 요구를 거부했고, 결국 억류되는 상황에 놓였다.
외교하러 갔다가 감옥에 갇힌 것이다.
이 새끼가 고구려에서 연개소문한테 칼빵 맞아 뒤졌으면 나당동맹도 없었을 것이고 신라는 의자왕과 연개소문의 군대에 의해 멸ㅋ망ㅋ했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이 새끼가 살아 돌아온 게 역사의 나비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다만 김춘추가 실제로 고구려에서 처형될 예정이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사료에는 그가 억류되었다는 내용이 등장하지만, 연개소문이 직접 칼로 죽이려 했다는 식의 구체적인 장면이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은 정예병 3,000명을 모아 구출하려고 했다고 한다.
김춘추 역시 고구려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취지로 답하며 위기를 모면했다.
결국 고구려는 김춘추를 석방했고, 김춘추는 신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그가 약속한 영토 반환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김춘추가 돌아간 뒤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제대로 통수 맞은 셈이다.
반면 신라 입장에서는 국가의 핵심적인 영토를 넘겨주지 않고 중요한 정치지도자를 무사히 귀환시킨 결과였다.
왜나라와의 교섭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외교가 실패한 뒤에도 다른 국가와의 협력을 모색했다.
647년에는 왜에 건너가 외교 교섭을 벌였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 있다.
당시 왜는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의 입장에서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놓거나 최소한 신라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중요한 목표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방문을 통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동맹이 성립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결국 왜와의 교섭에서도 뚜렷한 군사적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것 역시 김춘추가 무능했다는 증거라기보다는 당시 왜가 백제와 유지하던 관계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648년 당나라 방문
김춘추는 마침내 당나라에 직접 찾아갔다.
648년 그는 아들 김문왕과 함께 당나라를 방문하여 당태종을 만났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645년 당태종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안시성 전투 등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정복에 실패한 상황이었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김춘추는 바로 이 점을 이용했다.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강력한 지원군이 필요했고, 당나라는 고구려를 압박할 수 있는 한반도 남쪽의 동맹국이 필요했다.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김춘추는 당태종을 직접 만나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당태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성립된 것이 나당동맹이다.
물론 외교라는 것이 자기 혼자 말을 잘한다고 상대가 무조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은 아니다.
당나라가 신라의 도움이 필요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맹이 가능했다는 해석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김춘추의 외교적 성과가 우연이었다고만 볼 수도 없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왜를 상대로 외교를 시도하면서 상황을 파악했고, 당나라의 전략적 필요가 변화한 시점에 직접 방문하여 군사동맹을 성사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상대방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시점을 찾아 협상을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외교적 역량을 인정할 수 있다.[5]
당나라에 땅을 가져다 바쳤는가?
너무 편향적인 내용만 쓸 경우 이 문서가 놀라서 관리자들에게 그 자식을 죽창으로 찔러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도 땅 가져다 바친 건 이해가 된다. 그 개좆만한 신라 땅에서 살다가 대동강 유역까지 다 먹는다고 생각해 봐라. 그것만으로도 오오미하면서 질질 쌌겠지.
만주 다 먹었어도 행정병신인 신라에서 제대로 관리나 됐을려나?ㅋㅋ
- ㄴ 사실 신라 꼬라지는 당나라 아니었으면 멸망 직전이라 본토만 유지해도 감지덕지였다.
김춘추와 당태종의 협상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어느 지역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했다.
후대의 기록에는 김춘추가 당태종으로부터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김춘추가 고구려의 북쪽 영토를 당나라에 넘기고 한반도 남부의 영토만 확보하려 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당나라와 신라가 실제로 어떤 문서에 어떤 조건을 명시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평양 이남을 신라에 주기로 했다는 설명은 후대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 내용이므로, 648년 회담에서 현대적인 국경선처럼 정확한 영토 분할 협정이 체결되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또한 김춘추가 고구려와 백제를 아직 정복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실제로 그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정확히는 미래에 정복할 지역의 지배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협상으로 보아야 한다.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까지 영향력 아래에 두려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동맹의 조건에 상당한 위험성이 존재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다만 당시 신라의 국력만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동시에 정복하기 어려웠다는 사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왕위에 오르다
진덕여왕의 사망
654년 진덕여왕이 사망했다.
이로써 신라의 성골 왕통이 단절되었고, 새로운 국왕을 선출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 귀족들은 먼저 상대등인 알천(閼川)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알천은 자신이 나이가 많고 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왕위를 사양하면서 김춘추를 추천했다.
결국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 역사상 최초의 진골 출신 국왕이 탄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신라의 왕위 계승 체제가 변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기존에는 성골 왕족을 중심으로 왕위가 계승되었지만, 김춘추의 즉위 이후에는 진골 출신 국왕이 왕위를 계승하는 체제가 정착했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귀족들의 추대와 함께 오랫동안 구축한 정치적 기반, 김유신과의 동맹, 비담의 난 이후 강화된 영향력 등이 있었다.
다만 알천이 왕위를 사양했다는 기록을 곧바로 김춘추가 아무런 경쟁 없이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귀족들 사이의 정치적 협상과 권력관계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왕실의 시작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면서 신라의 중대 왕실이 시작되었다.
그는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존했다.
이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655년에는 아들 김법민을 태자로 책봉했다.
이 김법민이 바로 훗날의 문무왕이다.
김춘추는 자신의 친족과 정치적 동맹자를 중요한 관직에 임명하면서 왕권을 강화했다.
김유신은 660년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다른 아들들도 중앙정부의 주요 관직을 맡았다.
이를 통해 김춘추는 이전의 유력 귀족 세력 중심 정치에서 왕실의 권한이 강화된 체제로 발전시키려 했다.
내정 개혁
김춘추는 왕위에 오른 뒤 기존의 법률과 정치제도를 정비했다.
즉위 직후에는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개정하여 법률과 형벌에 관한 제도를 정비했다고 한다.
또한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당나라의 정치제도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649년에는 중국식 의관제도를 도입했고, 650년에는 신라가 사용하던 독자적인 연호를 폐지하고 당나라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했다.
이러한 정책은 사대주의의 사례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수용하는 것이 반드시 정치적인 독립을 포기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시 신라의 지배층은 당나라의 선진적인 행정·의례 제도를 도입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려 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당나라에 대한 외교적인 의존이 커졌다는 문제 역시 존재했다.
백제 멸망
펄럭-
백제 정벌을 준비하다
김춘추가 오랫동안 추진한 정책의 최종 목표 가운데 하나는 백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642년 대야성 함락 이후 신라는 백제의 군사적 압박에 시달렸고, 김춘추 역시 딸과 사위를 잃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654년 왕위에 오른 뒤에는 당나라와의 동맹을 바탕으로 백제 공격을 준비했다.
65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본격적인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당나라의 당고종은 이를 받아들여 소정방을 지휘관으로 하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660년 당나라군 약 13만 명이 해로를 통해 백제를 공격했고,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직접 정예병 약 5만 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다만 김춘추 자신이 전투의 최전선에 서서 모든 병력을 직접 지휘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군의 실질적인 야전 지휘에는 김유신과 태자 김법민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황산벌 전투
660년 신라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진격했다.
그런데 백제에서는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가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을 막아섰다.
《삼국사기》에는 계백이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김유신이 지휘한 신라군에 맞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군은 불리한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강하게 저항했다.
신라군도 여러 차례 공격에 실패했으며, 화랑 관창의 전사와 관련된 일화가 이 전투에 등장한다.
결국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군을 격파했고, 계백은 전사했다.
백제는 수도를 방어하는 데 필요한 마지막 주요 전력을 잃었다.
사비성 함락
신라군이 황산벌에서 승리한 뒤 당나라군과 합류하면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은 사실상 포위되었다.
660년 7월 13일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7월 18일 항복했다.
이로써 약 700년 동안 존속했던 백제 왕조가 멸망했다.
김춘추는 마침내 자신의 최대 목표 가운데 하나를 달성했다.
대야성에서 딸과 사위를 잃은 뒤 백제를 무너뜨리겠다는 목표를 추구해 온 지 약 18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백제의 모든 성과 백성들이 즉시 신라의 지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왕실과 중앙정부가 항복한 뒤에도 여러 지역에서 백제 부흥세력이 활동했으며, 백제의 옛 영토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도 계속되었다.
따라서 660년 백제의 멸망은 백제 왕조가 무너졌다는 의미이며, 백제의 모든 저항이 즉시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드디어 딸의 원수를 갚다
만일 참교육을 거부할 시 성적은 개좆망행이니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헤이, 영쑤!! 돈 두 댓!"
백제가 멸망하자 김춘추는 642년 대야성 함락과 관련된 배신자들도 처벌했다.
대야성을 백제에 넘기는 데 관여했던 모척과 검일이 붙잡혔고, 이들은 처형되었다.
김춘추 입장에서는 자신의 딸과 사위가 죽게 된 사건에 대한 복수도 이룬 것이다.
이때 태자 김법민은 백제의 왕자 부여융에게 자신의 누이를 죽인 원한을 언급하며 분노를 드러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결국 김춘추는 딸의 원수인 백제를 멸망시켰고, 대야성 함락의 원인을 제공했던 배신자들도 처벌했다.
하지만 이 복수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백제의 멸망은 신라의 오랜 군사적 목표이기도 했으며, 당나라와의 동맹과 신라 내부의 정치적 변화가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6]
삼국통일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 2가지 측면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김춘추가 보고 죽은 것은 그나마 사비성 함락뿐이고, 백제 영토의 수많은 다른 성들은 아직 건재한 채 부흥운동이 계속 전개되었다.
아버지가 대책 없이 싸 놓은 똥을 치우며 백제부흥운동 진압, 고구려 멸망, 나당전쟁을 모두 수행한 것은 그의 아들 문무왕이다.
이러한 비판에는 역사적인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김춘추가 살아 있을 때 이루어진 가장 큰 군사적 성과는 660년 백제의 왕조를 멸망시킨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백제의 옛 영토에서는 부흥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또한 당나라 역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가 해당 영토를 모두 차지하는 것을 그대로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당나라는 백제의 옛 영토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이후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신라까지 당나라의 통제 아래 두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김춘추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당나라가 언제든 신라의 새로운 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셈이다.
문무왕의 뒷수습
김춘추가 사망한 뒤 문무왕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문무왕 시기에는 백제 부흥세력을 진압했고, 668년에는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런데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결국 신라는 나당전쟁을 벌여 당나라의 군대를 한반도에서 밀어내고 자신들의 지배 영역을 확보했다.
676년 신라는 기벌포 전투 등을 거쳐 당나라군을 격퇴했고, 한반도 중남부에서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옛 고구려의 만주 지역 전체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모든 영토를 완전히 통일한 것은 아니며, 후대에 발해가 등장하면서 남북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구도가 형성되었다.
원문의 표현대로 다행히 아들래미가 뒷수습을 잘 해서 우리가 아직도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를 쓰면서 살고 있다는 식의 드립은 가능하다.
다만 신라가 당나라를 격퇴하지 못했더라면 한반도 주민들이 모두 중국어를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
언어와 문화의 변화는 정치적 지배뿐 아니라 인구 이동과 사회적 관계, 장기간의 문화적 교류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김춘추가 없었다면 신라는 멸망했을까?
너는 지금 갑자기 세상에 대격변이 일어나서 북한놈들이 미군만큼 세져서 쳐들어오고 헬조선이 김정은 꺼가 될 판인데 중국이 도와준다고 하면, 이 새끼들이 나중에 통수를 칠 각이 살살 보이지만 바로 지금은 살아날 수 있는데 일단 지원을 받겠냐 말겠냐?
이러한 비유는 신라가 당시 처한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려는 드립이다.
7세기 중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상당한 군사적 압박을 받았다.
백제는 대야성을 포함한 여러 성을 점령했고, 고구려 역시 신라의 북쪽 국경을 압박했다.
따라서 신라가 독자적인 국력만으로 두 나라를 동시에 상대하기 어려웠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김춘추가 없었다면 신라가 반드시 멸망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도 정치적·군사적인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었고, 당나라와의 관계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김춘추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과 이후 나당동맹이 성립했다는 사실 사이에는 명확한 역사적인 연관성이 존재한다.
그가 642년 고구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면 이후 신라의 외교정책과 정치적 권력구조가 상당히 달라졌을 가능성은 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가정이며, 실제로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지는 알 수 없다.
삼국통일과 한민족 형성 논쟁
너무 편향적인 내용만 쓸 경우 이 문서가 놀라서 관리자들에게 그 자식을 죽창으로 찔러 달라고 할 것입니다.
삼국통일은 분명한 업적이고 한민족의 형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역알못들아.
반대로 무슨 거창한 삼국통일 대업이냐며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결과로만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신라의 삼국통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논쟁과 연결된다.
- 긍정적인 평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서로 전쟁을 벌이던 여러 나라가 신라의 지배 아래 통합되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본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흡수하고 정치적·사회적인 통합을 추진하면서 이후 한반도의 역사적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의 지배 영역은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중심의 정치적·문화적 질서 형성에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김춘추와 문무왕의 통일전쟁을 한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 부정적인 평가
반대로 부정적인 평가에서는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였지만, 신라의 통일 이후 그 지역 대부분이 신라의 직접 지배 아래 들어오지 못했다.
또한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그 영토를 직접 통치하려 하면서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새로운 전쟁이 발생했다.
따라서 나당동맹을 무조건 민족통일을 위한 숭고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는 지적이 있다.
- 당시에도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이 있었을까?
신라 백제 고구려 시대에는 같은 민족 개념도 없었고 맨날 서로 죽이고 싸우니 우리가 북괴 보듯이 서로를 봤을걸?
- ㄴ 실제로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이 고려 중기 대몽항쟁을 거치면서 강화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다만 현대적인 민족 개념과 고대의 종족·혈연·문화적 동질성 인식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는 각각 독자적인 국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언어와 문화, 역사적 기원 등에서 일정한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서로를 적국으로 인식했다고 해서 오늘날의 다른 민족 집단처럼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이해했는지도 확정하기 어렵다.
고려 시대에 삼국과 발해의 역사를 계승하는 인식이 강화되었고, 조선과 근대에 이르러 오늘날의 민족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도 이어졌다.
따라서 김춘추가 현대적인 한민족 전체를 통일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했다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의 행동이 후대의 역사적·문화적 통합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사망
661년 6월 김춘추가 사망했다.
당시 김춘추의 나이는 59세였으며, 왕위에 오른 지 약 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생전에 백제를 멸망시키는 성과를 이루었지만 고구려를 멸망시키거나 당나라와의 영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왕위는 태자인 김법민이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문무왕이다.
김춘추에게는 무열(武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도 붙었다.
태종은 중국 왕조에서 왕조의 기반을 마련하거나 중요한 업적을 이룬 군주에게 붙이는 경우가 많은 묘호다.
신라에서는 김춘추에게 이러한 칭호를 붙여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태종이라는 묘호 논쟁
너무 편향적인 내용만 쓸 경우 이 문서가 놀라서 관리자들에게 그 자식을 죽창으로 찔러 달라고 할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김춘추의 묘호인 태종은 당태종의 묘호와 동일했다.
그런데 692년 당나라에서는 신라가 당태종과 같은 묘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당나라 측은 신라의 태종이라는 묘호를 바꾸라고 요구했다.
이에 신문왕은 무열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큰 공적이 있으므로 태종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신라는 당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태종이라는 묘호를 계속 사용했다.
이 사건은 신라가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왕실의 권위와 독자적인 정치적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생각해 보면 김춘추는 살아 있을 때 당태종과 동맹을 맺은 인물이었는데, 죽은 뒤에는 자기 묘호 때문에 당나라와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한 셈이다.[7]
무열왕릉

김춘추의 무덤은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한 경주 태종무열왕릉이다.
이 왕릉은 신라 왕릉 가운데 피장자가 비교적 명확하게 확인되는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 앞에는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다.
비문의 본체는 사라졌지만 머릿돌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무덤의 주인을 확인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태종무열왕릉비의 글씨는 김춘추의 아들인 김인문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무덤과 비석은 신라 중대 왕실의 권위와 장례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8]
평가
그 2가지 측면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김춘추는 한국사에서 상당히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신라의 입장에서 그는 나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받던 상황에서 국제적인 군사동맹을 확보하고, 결국 오랜 적국인 백제를 멸망시킨 국왕이다.
또한 최초의 진골 출신 국왕으로 왕위에 올라 왕실의 계승체제를 변화시켰으며, 김유신을 비롯한 새로운 정치적 동맹 세력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이러한 업적은 신라 중대의 정치적 발전과 삼국통일전쟁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반면 김춘추는 당나라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 결과 당나라가 한반도에서 직접 지배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신라는 이후 당나라와 전쟁을 벌여야 했다.
또한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킨 동기에는 딸과 사위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를 유일한 원인으로 볼 수는 없다. 당시 신라의 국가적 위기와 왕실의 정치적 이해관계, 당나라의 대외전략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춘추를 단순히 신라를 구한 영웅으로만 묘사하거나, 반대로 민족을 배반한 매국노로만 설명하는 것은 그의 역사적인 행동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은 김춘추가 김유신과 함께 신라의 정치·군사·외교 전략을 이끌었고, 그 결과 백제를 멸망시키며 한반도의 정치적 지형을 크게 바꾸었다는 점이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구국의 영웅이었고, 고구려와 백제의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간 적국의 정치지도자였다.
어느 쪽으로 평가하든 7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를 뒤바꾼 인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담
- 본명은 김춘추(金春秋)이며, 시호가 무열(武烈), 묘호가 태종(太宗)이다.
- 신라 제29대 국왕으로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 최초의 진골 출신 국왕으로, 신라 중대 왕실을 연 인물이다.
- 아버지는 김용춘이고 어머니는 천명부인이다. 할아버지는 진지왕, 외할아버지는 진평왕이다.
- 선덕여왕은 김춘추의 이모에 해당한다.
-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결혼했고, 훗날 자신의 딸 지소부인을 김유신에게 시집보냈다.
- 김유신이 여동생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화형 소동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딸 김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이 사망했다.
- 백제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에 외교사절로 갔다가 억류되는 일을 겪었다.
- 647년에는 왜에 방문해 외교 교섭을 벌였으며, 648년에는 직접 당나라에 가서 군사동맹을 성사시켰다.
-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 김춘추가 사망한 뒤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왕은 문무왕이다.
- 묘호가 당태종과 같다는 이유로 692년 당나라가 신라에 개정을 요구했지만, 신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경주 태종무열왕릉에는 무열왕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비석의 일부가 남아 있다.
같이 보기
관련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태종무열왕
- 우리역사넷 - 태종무열왕 김춘추
- 우리역사넷 - 김춘추와 김유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유신
- 국사편찬위원회 - 《삼국유사》 김유신과 문희 관련 기록
- 경주 태종무열왕릉과 태종무열왕릉비
-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 주보돈,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정비과정과 촌락》, 신서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