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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국왕 목록

박씨 왕조 석씨 왕조 김씨 왕조

초대박씨 왕조
박혁거세
(기원전 57년~4년)
제2대박씨 왕조
제3대박씨 왕조
제4대석씨 왕조
석탈해
제5대박씨 왕조
박파사
제6대박씨 왕조
제7대박씨 왕조
제8대박씨 왕조
제9대석씨 왕조
제10대석씨 왕조
제11대석씨 왕조
제12대석씨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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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김씨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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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憲安王)
본명김의정(金誼靖)
본관경주 김씨
골품진골
국가신라
능묘경주 헌안왕릉으로 전하나 실제 피장자에 논쟁 존재
추가 정보
다른 이름김우정(金祐靖)
딸영화부인(寧花夫人), 차비 김씨
모후조명부인(照明夫人) 김씨
부왕김균정(金均貞), 성덕대왕으로 추존
사망861년 음력 1월 29일
사위경문왕 김응렴
성씨김씨(金氏)
시호헌안대왕(憲安大王)
아들확실한 기록 없음. 궁예의 부왕이라는 설 존재
왕비이름 미상
왕조신라 김씨 왕조
외손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등
외조부김충공(金忠恭), 선강대왕으로 추존
이복형신무왕
재위857년 음력 9월 ~ 861년 음력 1월 29일
전임문성왕
조부김예영(金禮英)
조카문성왕
주요 사건860년 김응렴을 사위로 선택, 861년 사위에게 왕위 계승
주요 업적농업 진흥, 제방 정비, 기근 구휼, 선종 후원,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조성 관련 왕명
즉위 전 관직시중·병부령·상대등 등을 역임한 것으로 추정
증조부원성왕
지위신라 제47대 국왕
출생미상
후임경문왕
신라의 역대 국왕
45대 46대 47대 48대 49대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딸이 둘이나 있었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왕위를 안 물려주고 사위한테 넘겨준 왕.

그런데 그 사위의 자식들이 나중에 줄줄이 왕위에 오르더니, 결국 손녀인 진성여왕까지 국왕이 되었다.

“ 선덕이랑 진덕이도 여자였잖느냐고? 아, 그건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격이지. 우리 사위가 왕을 해야 된다니까? ”

물론 실제 《삼국사기》에 이와 비슷한 취지의 유언이 기록되어 있다.

더욱 웃긴 것은 훗날 헌안왕의 외손자인 정강왕이 바로 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선례를 내세워 여동생을 국왕으로 지명했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여왕이 싫다더니 외손자는 여왕도 괜찮다고 한 셈이다.

개요

헌안왕(憲安王, ?~861년)은 신라의 제47대 국왕으로, 857년부터 861년까지 재위했다. 본명은 김의정(金誼靖) 또는 김우정(金祐靖)이며, 신무왕의 이복동생이자 문성왕의 숙부다. 조카인 문성왕이 사망하기 전 후계자로 지명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후사가 될 아들이 없자 사위인 경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재위기간은 약 3년 4개월로 상당히 짧은 편이다. 하지만 이 기간에 가뭄과 기근에 대응하여 주민들을 구휼하고 제방을 정비했으며, 불교 승려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왕권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특히 선종 승려인 무염과 체징 등을 후원하면서 지방 불교세력과 관계를 맺은 것이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히 국왕 개인이 불교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지방의 유력세력과 연결된 사찰을 통해 정치적인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헌안왕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이러한 업적보다는 사위를 국왕으로 만들어 준 사건이다.

헌안왕에게는 두 딸이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860년 왕족이자 화랑 출신이었던 김응렴을 맏사위로 삼았고, 이듬해 병세가 위독해지자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김응렴이 바로 신라 제48대 경문왕이다.

흥미롭게도 김응렴은 헌안왕의 맏딸과 결혼하면서 왕위까지 차지했고, 나중에는 둘째 딸까지 차비로 맞이했다.

장가 한번 잘 갔다가 왕도 되고 처제까지 아내로 맞이한 기막힌 인생 역전의 주인공을 만들어 준 사람이 헌안왕이다.

다만 이러한 왕위 계승은 단순히 장인이 사위를 마음에 들어 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신라 하대의 복잡한 왕실 혈통과 귀족들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출생과 가문

김균정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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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은 원성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균정(金均貞)이다.

김균정은 원성왕의 손자이며, 신라 하대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헌안왕의 할아버지는 김예영(金禮英)으로, 원성왕의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 김씨다. 《삼국유사》에는 흔명부인(昕明夫人)이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조명부인의 아버지는 김충공(金忠恭)으로, 훗날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존되었다.

김충공 역시 원성왕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헌안왕은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 모두 원성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전형적인 신라 진골 왕족이었다.

이러한 혼인관계는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가까운 친족 사이의 결혼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당시 신라 왕실에서는 왕족과 진골 귀족들이 자신들의 혈통과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혼인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신무왕의 이복동생

헌안왕의 이복형은 제45대 신무왕이다.

신무왕은 839년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이 즉위했다.

따라서 헌안왕에게 문성왕은 조카가 된다.

그런데 문성왕이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숙부인 헌안왕이었다.

즉 신라의 왕위가 형 → 조카 → 숙부가 아니라, 헌안왕 기준으로 이복형 → 조카 → 본인 순서로 계승된 것이다.

이러한 왕위 계승은 당시 신라 왕실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피로 얼룩진 왕위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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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신라는 이미 여러 차례의 왕위쟁탈전을 겪었다.

특히 836년 흥덕왕이 사망하면서 발생한 왕위 계승 분쟁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신라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

836년 왕위쟁탈전

836년 흥덕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를 두고 귀족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당시 주요 후보는 김균정(金均貞)과 김제륭(金悌隆)이었다.

김균정은 헌안왕의 아버지다.

반면 김제륭은 훗날 제43대 국왕이 되는 희강왕이다.

양측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적인 충돌까지 벌였다.

그 과정에서 김균정은 사망했고, 김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했다.

헌안왕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왕위를 차지하려다가 정치적 싸움에 휘말려 죽은 것이다.

그러나 희강왕의 통치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838년 김명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희강왕은 왕위를 잃고 사망했다.

김명은 이후 민애왕으로 즉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균정의 아들이었던 김우징이 반격에 나섰다.

이 김우징이 바로 헌안왕의 이복형인 신무왕이다.

신무왕의 집권

신무왕은 장보고와 김양 등의 지원을 받아 민애왕을 몰아내고 839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신무왕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아들인 문성왕이 즉위했다.

문성왕은 839년부터 857년까지 재위하면서 왕실의 정치적 기반을 안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귀족들의 권력투쟁과 지방세력의 성장은 계속되었다.

특히 장보고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실과 정치적 갈등이 발생했고, 결국 장보고는 846년 염장에게 암살당했다.

문성왕은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면서 신무왕계 왕통을 유지했다.

헌안왕도 이러한 과정에서 왕실의 유력한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헌안왕의 정치 경력

헌안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신라의 고위 관직을 역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연구에서는 문성왕 초기에 시중으로 활동한 의종(義琮)과 헌안왕을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문성왕 시대에 병부령을 역임하고 849년에는 상대등에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시중은 국왕의 행정업무를 보좌하는 중요한 관직이며, 병부령은 신라의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병부의 장관이었다.

상대등은 신라 귀족회의를 주재하는 최고위 관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헌안왕은 즉위하기 전부터 상당한 행정적·군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다만 당시 문헌에는 이름의 한자 표기가 서로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므로, 이들이 모두 헌안왕 김의정과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857년 즉위

857년 음력 9월 문성왕이 사망했다.

문성왕은 사망하기 전에 숙부인 김의정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렇게 해서 헌안왕이 신라 제47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삼국사기》에는 문성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헌안왕은 이미 왕실의 유력한 정치인이었으며, 김균정과 신무왕으로 이어지는 왕통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즉위가 갑작스럽게 왕실 밖의 인물이 왕위를 차지한 사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기존 왕실의 정치적 기반을 이어받은 왕위 계승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상대등 김안 임명

헌안왕은 즉위한 뒤 이찬 김안(金安)을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상대등은 신라 귀족사회의 최고위 관직으로, 국왕과 귀족들 사이의 정치적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헌안왕이 즉위 직후 상대등을 임명했다는 사실은 새로운 왕실의 정치적 기반을 정비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김안의 구체적인 가계와 이후 활동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문성왕의 아들이었다는 후대의 전승도 있지만, 이를 직접 입증할 확실한 자료는 부족하다.

따라서 김안을 특정 왕실 계통의 대표자로 단정하기는 어렵다.[1]

가뭄과 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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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 시대에는 심각한 자연재해와 식량 부족이 발생했다.

특히 858년의 가뭄과 859년의 기근은 그의 통치기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 신라는 농업을 중심으로 국가경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기후와 농작물의 생산량은 국가재정과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858년의 가뭄

858년에는 심한 가뭄이 발생했다.

같은 해 음력 4월에는 서리가 내렸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가뭄으로 농업생산에 피해가 발생하면 그해의 수확량이 줄어들 뿐 아니라 이듬해 봄에 사용할 종자와 식량까지 부족해질 수 있었다.

특히 주민들이 먹을 곡식이 부족해지면 다음 농사에 사용해야 할 종자까지 식량으로 소비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 해의 가뭄은 이듬해까지 경제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실제로 헌안왕 시대에는 858년의 가뭄에 이어 859년 봄에 기근이 발생했다.

859년 춘궁기

859년 봄에는 곡식이 귀해지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헌안왕은 여러 지역에 사신을 파견하여 주민들을 구휼하도록 했다.

《삼국사기》에는 곡식이 귀해 백성들이 굶주리자 국왕이 사신을 보내 진휼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봄은 전년도의 수확물이 대부분 소비되고 새로운 농작물이 아직 수확되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식량이 부족해지기 쉬웠다.

이 시기를 춘궁기라고 부른다.

현대와 달리 식량의 대규모 수입이나 신속한 운송이 어려웠던 고대에는 이러한 식량 부족이 주민들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었다.

헌안왕이 사신을 보내 구휼을 실시한 것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다만 실제로 얼마만큼의 곡식이 지급되었으며 몇 명의 주민이 구제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구휼정책이 기근을 완전히 해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2]

제방을 정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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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은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단순히 곡식을 나눠 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859년 음력 4월에는 전국의 제방을 수리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농사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제방과 저수지는 농경지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가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에서는 물을 저장하고 공급하는 시설이 농업생산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제방을 정비하는 것은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라 국가의 식량생산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경제정책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비교적 합리적인 대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니 당장 곡식을 나눠 주면서 다음에는 가뭄에 덜 시달리도록 제방까지 고친 것이다.

물론 고대의 기록만으로 헌안왕이 실제로 전국의 모든 제방을 수리했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제방 정비사업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구휼과 농업 기반의 정비를 함께 추진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정책적 특징이다.[3]

40보짜리 거대한 물고기

주의! 이 글이 다루는 대상은 존나 미스터리합니다.
씨ㅡ발 뭐가 뭔지 몰?루겟소요. 무섭습니다. ㅠㅠ

858년에는 상당히 기괴한 기록도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성군(唐城郡) 남쪽의 강가에서 거대한 물고기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크기가 무려 길이 40보, 높이 6장이었다고 한다.

현대의 기준으로 환산할 때에도 상당히 거대한 크기다.

도대체 무슨 물고기이길래 길이가 40보나 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당성군은 오늘날 경기도 화성시 일대에 위치했던 지역이다.

이곳은 신라가 중국과 해상 교류를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고래였던 것 아닌가?

주의! 이 글이 다루는 대상은 존나 미스터리합니다.
씨ㅡ발 뭐가 뭔지 몰?루겟소요. 무섭습니다. ㅠㅠ

일반적인 강물고기가 그렇게까지 커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바다에 살던 고래나 대형 해양동물이 강가에 밀려왔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실제로 어떤 동물이 발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사람들이 물고기라고 기록한 대상이 오늘날 생물학적인 분류에서도 물고기에 해당하는 동물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고대 역사서에서는 비정상적으로 큰 동물이 나타나는 현상을 국가의 운명과 연결해 기록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실제 크기가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어쨌든 헌안왕 시대에는 가뭄과 기근뿐 아니라 이러한 기괴한 자연 현상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다.

백성들은 굶주리는데 강가에는 무슨 괴수급 물고기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는 셈이다.[4]

불교를 이용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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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은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당시 지방에서 성장하고 있던 선종 승려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신라 하대에는 왕실과 진골 귀족들의 정치적인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방에서 독자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세력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방세력들은 사찰과 승려들을 후원하면서 종교적인 권위를 활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왕실이 지방의 유력한 승려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헌안왕은 이러한 상황에서 선종 승려들을 후원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통치에 활용하려 했다.

낭혜화상 무염

헌안왕과 관계가 깊었던 대표적인 승려는 무염(無染, 800~888)이다.

무염은 낭혜화상(朗慧和尙)으로 알려진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선종 승려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해 불교를 공부한 뒤 신라로 돌아왔다.

이후 오늘날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 위치한 성주사(聖住寺)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성주사는 신라 말기에 중요한 불교사찰로 성장했으며, 여러 지방 유력세력의 후원을 받았다.

헌안왕은 즉위하기 전부터 무염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향과 차를 보내고 제자의 예를 갖추는 등 승려에게 상당한 존경을 표시했다.

그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무염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이 될 만한 가르침을 요청했다.

그리고 무염의 조언을 자신의 통치와 생활의 지침으로 삼으려 했다고 한다.

국왕이 승려에게 정치와 생활에 관한 조언을 구한 셈이다.

물론 이를 근거로 헌안왕이 무염에게 모든 정치를 맡겼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승려의 종교적 권위를 활용하면서 왕권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려 했다고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성주사와 지방세력

당시 성주사가 위치한 웅천주 지역에는 여러 지방의 유력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신라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던 김주원 계통의 세력과 관련하여 이 지역을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헌안왕이 무염을 후원한 것은 이러한 지방세력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의 국왕이 직접 지방의 모든 세력을 군사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종교적인 영향력을 가진 승려들을 통해 협력관계를 구축하려 한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불경을 읽고 복을 빌기 위해 승려를 후원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중앙정부가 지방의 유력세력들을 통제하기 위해 종교적인 네트워크까지 활용했던 것이다.

다만 헌안왕이 실제로 어떤 지방 호족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가지산문의 후원

헌안왕이 후원했던 또 다른 중요한 승려는 체징(體澄, 804~880)이다.

체징은 신라 하대의 선종 승려로, 중국 당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한 뒤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오늘날 전라남도 장흥 지역의 보림사와 관련된 인물이다.

헌안왕은 체징의 활동을 후원하면서 불교적인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체징과 보림사

체징은 837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840년에 귀국했다.

그는 이후 여러 지역에서 수행하다가 무주 지역의 보림사에 머물며 선종을 전파했다.

859년에는 헌안왕의 후원을 받아 보림사를 중심으로 가지산문(迦智山門)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고 전한다.

가지산문은 신라 말기에 형성된 선종의 중요한 종파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선종 사찰들은 지방의 유력세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헌안왕이 체징과 보림사를 후원한 것은 단순한 종교적인 활동을 넘어 지방세력과 정치적인 관계를 형성하려는 시도로도 해석된다.

특히 당시 무주 지역은 신라 중앙정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여러 지방 유력세력들이 활동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왕이 선종 승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지방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9산선문과의 관계

틀:불교

신라 하대에는 여러 지역에서 선종 사찰이 성장했다.

후대에는 이를 통틀어 구산선문이라고 부른다.

가지산문은 그 가운데 하나로, 체징의 활동을 통해 중요한 종파로 발전했다.

이러한 선종 사찰들은 지방 호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 말기의 정치적·사회적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던 9세기 후반에는 지방의 호족들이 선종 사찰을 후원하면서 정치적인 권위와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헌안왕은 이처럼 변화하는 지방사회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불교세력과 협력하려 했던 국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틀:문화재

헌안왕 시대에는 신라 불교미술사에서 중요한 문화유산도 제작되었다.

바로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이 불상은 오늘날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의 보림사에 있는 거대한 철제 불상이다.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이 불상에는 제작 시기와 관련된 명문이 남아 있어 신라 하대의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김수종의 건의

858년 무주 장사현의 부관이었던 김수종(金遂宗)이 국왕에게 불상 제작을 건의했다.

헌안왕은 이를 받아들여 불상 조성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고 전한다.

이후 거대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제작되었다.

불상에는 제작 시기와 국왕의 명령, 불교적인 발원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명문에는 헌안왕 즉위 3년이라는 기록과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함께 등장한다.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불상의 제작 연도가 858년인지 859년인지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다.

일부 연구에서는 858년에 제작을 시작하고 859년에 완성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명문을 새긴 시기와 실제 불상 제작의 완료 시기를 구분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9세기 중엽, 헌안왕 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철로 만든 거대한 불상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높이가 약 2.5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이다.

특히 돌이나 청동이 아니라 철을 이용해 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거대한 철제 불상을 제작하려면 상당한 양의 철과 고도의 주조기술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당시 신라의 금속공예와 불교미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지방의 사찰에서도 이러한 규모의 문화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지방사회의 경제적 기반과 불교의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불상의 모든 제작비를 헌안왕이 개인적으로 부담했다는 기록은 없다.

지방 관리와 불교세력, 여러 후원자의 협력 속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헌안왕의 왕명이 조성과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문화적 업적으로 볼 수 있다.[5]

경문왕을 사위로 선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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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의 치세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바로 김응렴을 사위로 선택한 일이다.

860년 음력 9월 헌안왕은 임해전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다.

그 자리에는 왕족이었던 김응렴(金膺廉)도 참석했다.

김응렴은 훗날 신라 제48대 국왕이 되는 경문왕이다.

그런데 당시 김응렴은 아직 상당히 어린 나이였다.

《삼국사기》에는 15세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약관인 20세였다고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의 정확한 나이는 사료에 차이가 있다.

인성면접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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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은 김응렴에게 어떤 사람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에 김응렴은 세 가지 사례를 들었다.

“ 첫째, 지위가 높은 집안의 자제이면서도 다른 사람보다 앞서려 하지 않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재산이 많아 사치할 수 있는데도 검소하게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큰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권력을 이용해 남을 억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

헌안왕은 이 대답을 듣고 상당히 감동했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왕비에게 김응렴만큼 훌륭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기록까지 존재한다.

왕실의 젊은이가 겸손하고 검소하며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사람의 조건이라고 대답하니 국왕이 아주 마음에 들어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대화가 실제로 한 글자도 다르지 않게 이루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역사서에서 국왕과 후계자의 인품을 강조하기 위해 이상적인 대화를 기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경문왕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는 데 이러한 이야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내 딸과 결혼해라

헌안왕은 김응렴을 마음에 들어 한 나머지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헌안왕에게는 딸이 두 명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맏딸의 나이가 20세, 둘째 딸의 나이가 19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응렴에게 두 딸 가운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하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왕의 두 딸은 외모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맏딸보다는 둘째 딸이 더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응렴의 부모는 둘째 딸과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김응렴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했다.

범교사의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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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렴은 흥륜사의 승려인 범교사(範敎師)에게 조언을 구했다.

범교사는 둘째 딸이 아니라 맏딸을 선택하라고 권했다.

그 이유가 상당히 현실적이었다.

맏딸과 결혼하면 세 가지 이로움이 있고, 둘째 딸과 결혼하면 오히려 손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김응렴은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헌안왕에게 자신의 뜻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 국왕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결국 헌안왕은 맏딸을 김응렴에게 시집보냈다.

맏딸이 바로 영화부인(寧花夫人)이다.

그런데 범교사의 예언은 정말로 맞아떨어졌다.

불과 몇 개월 뒤 헌안왕이 사망하면서 김응렴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왕실의 딸 가운데 누가 더 예쁜지 따지다가 정치적인 계산을 제대로 해서 장가를 갔더니 왕까지 되어 버린 것이다.[6]

결국 둘째 딸까지 아내로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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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김응렴이 왕위에 올라 경문왕이 된 뒤인 863년, 헌안왕의 둘째 딸도 차비(次妃)로 맞이했다.

처음에는 맏딸과 결혼해서 왕위를 얻었고, 나중에는 원래 아름답다고 알려졌던 둘째 딸까지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그러니까 범교사가 이야기한 세 가지 이로움이 모두 실현된 셈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경문왕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해 설화적으로 꾸며졌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경문왕이 헌안왕의 맏딸과 결혼했고, 즉위한 뒤 둘째 딸도 차비로 맞이했다는 사실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헌안왕의 두 딸이 모두 같은 사람과 혼인했다는 점 자체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여왕은 절대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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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은 861년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상당히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헌안왕에게는 두 딸이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과거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라는 여성 국왕이 즉위한 사례가 있었다.

따라서 두 딸 가운데 한 명을 왕위에 올리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헌안왕은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했다.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격

“ 과인은 불행하게도 아들은 없고 딸만 있다. 우리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의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에 가까우니 본받을 수 없다. ”

《삼국사기》에 기록된 헌안왕의 유언 가운데 일부다.

여기서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는 표현은 여성이 남성의 정치적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노골적인 여성 차별적 표현이다.

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여성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는 정치적인 논리로 사용되었다.

헌안왕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 사례를 따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딸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대신 사위 김응렴을 후계자로 선택했다.

손녀는 결국 여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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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 발생했다.

헌안왕의 사위였던 경문왕은 이후 세 자녀를 국왕으로 배출했다.

장남 헌강왕, 차남 정강왕, 그리고 딸 진성여왕이다.

그런데 정강왕이 887년에 사망하면서 여동생을 후계자로 지정했다.

이때 정강왕은 여동생이 총명하고 골격이 장부와 같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선례까지 언급했다.

외할아버지는 선덕과 진덕의 사례를 따라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외손자는 바로 그 사례를 근거로 여동생을 왕위에 올린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왕실에서 한 세대 사이에 완전히 반대되는 논리가 사용되었다.

이는 신라의 왕위 계승에서 남성과 여성의 지위에 관한 원칙이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성의 왕위 계승이 무조건 금지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모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결국 왕실의 혈통과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궁예의 아버지라는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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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과 관련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바로 궁예와의 관계다.

《삼국사기》 궁예열전에는 궁예가 신라의 왕족이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런데 궁예의 아버지가 바로 헌안왕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다른 기록에서는 경문왕의 아들이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따라서 궁예가 실제로 헌안왕의 아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왕족 출신 궁예?

궁예는 훗날 후고구려를 건국한 인물이다.

그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이용해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했고, 901년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이후 국호를 마진과 태봉으로 바꾸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정치질서를 구축했다.

그런데 그가 신라 왕실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 된다.

신라 국왕의 아들이라고 전해지는 인물이 훗날 신라를 멸망시키려는 새로운 국가의 국왕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궁예는 신라에 상당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신라에 대한 복수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궁예가 실제로 신라의 왕자였다는 기록 자체에도 논쟁이 존재한다.

왜 기록이 서로 다른가?

《삼국사기》와 후대 문헌에는 궁예의 출생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헌안왕의 서자였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경문왕의 서자였다는 설이다.

일부에서는 궁예가 실제 왕족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인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왕족 출신이라는 주장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당시에는 왕실의 혈통이 중요한 정치적인 권위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또한 궁예의 실제 출생 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헌안왕의 아들이었는지 경문왕의 아들이었는지를 연대만으로 정확히 판별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궁예의 아버지를 헌안왕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

다만 헌안왕이 궁예의 아버지였다는 설이 실제 역사 문헌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문제다.[7]

사망과 왕위 계승

861년 음력 1월 헌안왕은 병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침상에 누워 있었으며 다시 일어나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전한다.

결국 신하들을 불러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했다.

그 인물이 바로 사위 김응렴이었다.

사위에게 왕위를 넘기다

헌안왕은 김응렴이 나이는 어리지만 덕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뒤를 이을 국왕으로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신하들에게 김응렴을 국왕으로 세워 섬기라고 명령했다.

이는 왕위 계승의 혼란을 막기 위한 정치적인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헌안왕이 생전에 정식으로 양위한 뒤 사망했는지, 후계자를 유언으로 지정하고 사망한 뒤 김응렴이 즉위했는지에 대해서는 문헌의 표현에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후계자를 지명하는 유언의 성격이 강하다.

어쨌든 헌안왕의 뜻에 따라 김응렴이 다음 국왕으로 즉위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861년 사망

헌안왕은 861년 음력 1월 29일 사망했다.

시호는 헌안(憲安)으로 결정되었다.

재위기간은 857년 음력 9월부터 861년 음력 1월까지로 약 3년 4개월이다.

당시의 재위 연수로는 5년째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사망 당시 나이도 확인할 수 없다.

사망 원인 역시 구체적인 병명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병이 심각해져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헌안왕이 사망하자 사위 김응렴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신라 제48대 경문왕이다.

경주 헌안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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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은 사망한 뒤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러나 공작지가 실제로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는 헌안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 헌안왕릉이 존재한다.

이 무덤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서악동의 왕릉

경주 헌안왕릉은 선도산 남쪽의 구릉에 위치한 원형 봉토분이다.

무덤의 지름은 약 15.3m, 높이는 약 4.3m다.

다른 신라 왕릉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규모가 작은 편이며, 특별한 석조 장식이 많지 않은 단순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무덤의 아래쪽에는 봉분의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설치한 자연석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주변에는 경주 문성왕릉, 경주 진흥왕릉, 경주 진지왕릉 등으로 알려진 무덤들도 존재한다.

따라서 이 지역은 신라의 여러 국왕과 왕족의 무덤이 모여 있는 중요한 유적지다.

실제 헌안왕의 무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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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재의 헌안왕릉이 실제로 헌안왕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존재한다.

《삼국사기》에는 공작지에 매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공작지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의 무덤이 헌안왕릉으로 알려진 것은 후대의 문헌과 전승에 근거한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 김정희는 서악동 일대의 고분들을 신라의 여러 국왕의 무덤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이 실제 피장자를 직접 확인한 결과는 아니었다.

일부 고고학 연구에서는 현재의 헌안왕릉이 실제로 다른 국왕이나 왕족의 무덤일 가능성도 제기한다.

또한 경주 남산 동쪽에 있는 다른 고분이 헌안왕의 무덤일 가능성을 검토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따라서 현재의 경주 헌안왕릉은 전통적으로 헌안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유적이지만, 실제 피장자를 확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부족하다.[8]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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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은 신라 하대에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한 국왕이다.

그러나 재위기간에 몇 가지 중요한 정치적·경제적 정책을 추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가뭄과 기근에 대응하여 주민들을 구휼하고 제방을 정비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지방의 선종 사찰과 승려들을 후원하면서 왕실과 지방세력 사이의 관계를 안정시키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긍정적인 평가

헌안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농업 진흥정책이다.

그는 기근이 발생하자 사신을 보내 주민들을 구휼했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생산을 안정시키려 했다.

또한 무염과 체징 등 유력한 선종 승려들을 후원하면서 지방의 불교세력과 관계를 강화했다.

이러한 정책은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후계자 문제를 미리 정리하여 왕위 계승 과정에서 새로운 대규모 반란이 발생하는 것을 막았다는 점도 중요한 정치적인 판단으로 볼 수 있다.

한계

반면 헌안왕이 신라의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당시 신라에서는 이미 9세기 초부터 귀족들의 권력투쟁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유력한 세력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헌안왕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교세력과 협력했지만 실제로 지방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얼마나 해소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재위기간이 약 3년 4개월에 불과하여 장기적인 개혁을 추진할 만한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그의 정책적인 성과와 한계를 정확하게 평가하기에는 남아 있는 기록이 부족하다.

여성 왕위 계승에 대한 인식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헌안왕의 여성 왕위 계승에 관한 발언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는 두 딸이 있었지만 과거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딸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다.

대신 사위인 경문왕을 후계자로 선택했다.

이러한 발언은 당시 왕실에서 여성의 정치적인 지위에 관해 어떠한 인식이 존재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손녀인 진성여왕이 훗날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보면 신라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에 관한 원칙이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헌안왕의 발언을 당시 신라 사회의 모든 사람이 동의한 절대적인 정치원칙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종합

헌안왕은 신라 하대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서 왕위에 올라 농업과 불교 진흥을 통해 국가의 기반을 안정시키려 했던 군주였다.

그는 가뭄과 기근에 대응하고 지방 불교세력과의 관계를 강화했으며, 사위인 경문왕을 후계자로 지정하여 왕위 계승의 혼란을 막았다.

그러나 재위기간이 짧았으며 신라의 정치적·경제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농업과 민생에 관심을 기울였고 왕위 계승까지 정리한 국왕이지만, 훗날의 사람들에게는 딸 둘을 놔두고 사위를 왕으로 세운 장인으로 더 유명해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담

  • 본명은 김의정(金誼靖) 또는 김우정(金祐靖)이다.
  • 신라 제47대 국왕으로 857년부터 861년까지 재위했다.
  • 원성왕의 증손자이며, 김균정의 아들이다.
  • 신무왕의 이복동생이자 문성왕의 숙부다.
  • 어머니 조명부인은 선강대왕으로 추존된 김충공의 딸이다.
  • 문성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 즉위한 뒤 이찬 김안을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 858년에는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 같은 해 서리가 내리고 가뭄이 발생했다.
  • 당성군에서 길이 40보에 달하는 거대한 물고기가 발견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859년에는 식량이 부족해지자 사신을 보내 주민들을 구휼했다.
  • 같은 해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장려하도록 명령했다.
  • 낭혜화상 무염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 선종 승려 체징과 가지산문의 활동을 후원했다.
  • 헌안왕 시대에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조성되었다.
  • 860년 임해전에서 김응렴의 인품을 시험한 뒤 맏사위로 삼았다.
  • 두 딸 가운데 맏딸은 영화부인으로, 훗날 경문왕의 왕비가 되었다.
  • 경문왕은 즉위한 뒤 헌안왕의 둘째 딸까지 차비로 맞이했다.
  • 861년 병세가 위독해지자 사위 김응렴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 딸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으면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사례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 그러나 외손녀인 진성여왕이 훗날 신라의 마지막 여왕이 되었다.
  • 궁예의 아버지였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 861년 음력 1월 29일 사망했다.
  • 공작지에 장사지냈다고 전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 경주 서악동에는 헌안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이 존재하지만 실제 피장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같이 보기

관련 자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