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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憲德王) | |||||||||||||||||||||||||||||||||||||||||||
| 본명 | 김언승(金彦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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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경주 김씨 | ||||||||||||||||||||||||||||||||||||||||||
| 골품 | 진골 | ||||||||||||||||||||||||||||||||||||||||||
| 국가 | 신라 | ||||||||||||||||||||||||||||||||||||||||||
| 능묘 | 경주 헌덕왕릉 | ||||||||||||||||||||||||||||||||||||||||||
추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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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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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대 | 40대 | 41대 | 42대 | 43대 |
| 소성왕 | 애장왕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삼촌.
그런데 정작 왕이 되고 나서는 지방의 왕족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며 반란을 일으키고, 그 아들까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자신이 차지한 왕위를 지키기 위해 18년 동안 온갖 반란과 자연재해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살아남아 동생 흥덕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점에서는 이후의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개요
헌덕왕(憲德王, ?~826년)은 신라의 제41대 국왕으로, 809년부터 826년까지 재위했다. 본명은 김언승(金彦昇)이며, 제38대 원성왕의 손자이자 혜충태자 김인겸의 아들이다. 제39대 소성왕의 동생이자 제42대 흥덕왕의 형으로, 809년 조카인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신라 하대의 본격적인 왕위쟁탈전과 지방 반란을 상징하는 국왕 가운데 하나다.
헌덕왕은 국왕으로 즉위하기 이전부터 상당히 풍부한 정치적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원성왕 시대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제공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시중과 병부령을 비롯한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소성왕이 사망한 뒤 어린 애장왕이 즉위하자 섭정으로서 국정을 주도했고, 동생 김수종 등과 함께 중앙정부의 주요 관직을 장악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강화했다.
그러나 애장왕이 성장하면서 국왕과 김언승 사이의 정치적인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김언승이 어린 조카의 섭정으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왕위를 차지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결국 809년 동생 김제옹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애장왕과 그의 동생 김체명을 살해했으며, 자신이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다.
헌덕왕의 재위기간에는 왕실과 일부 진골 귀족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헌덕왕은 형제들과 가까운 왕족들을 중앙정부의 핵심적인 관직에 임명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이러한 정책은 다른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여기에 계속되는 가뭄과 홍수, 기근으로 지방 주민들의 생활까지 어려워지면서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확대되었다.
그 결과 822년에는 김헌창의 난이 발생했다. 웅천주도독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이 과거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며,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정하고 신라의 여러 지방을 장악했다. 이에 헌덕왕은 대규모 토벌군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했지만, 825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밖에도 헌덕왕은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826년에는 한산주 북쪽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300리 길이의 패강장성을 축조하도록 했다. 그러나 지방의 경제적 어려움과 진골 귀족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826년 사망한 뒤에는 동생 김수종이 왕위를 계승하여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출생과 가문
원성왕의 손자
헌덕왕의 본명은 김언승(金彦昇)이다. 할아버지는 제38대 원성왕이며, 아버지는 원성왕의 장남인 혜충태자 김인겸(金仁謙)이다.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로, 각간 김신술(金神述)의 딸이었다고 전한다.
김인겸은 원성왕의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따라서 원성왕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김인겸이 직접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고, 그의 아들인 김준옹이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 김준옹이 바로 제39대 소성왕이며, 헌덕왕의 형이다.
헌덕왕은 소성왕과 흥덕왕을 비롯한 여러 형제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김수종과 김충공, 김제옹은 신라 하대의 정치적인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이들 형제는 원성왕의 직계 후손이라는 혈통적인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앙정부의 고위 관직을 차지하면서 상당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헌덕왕은 갑자기 등장하여 왕위를 빼앗은 정체불명의 인물이 아니라, 원성왕 시대부터 정치적인 경력을 쌓아 온 신라 왕실의 핵심 인물이었다.
조카가 국왕이었다
헌덕왕의 형인 소성왕은 799년에 즉위했지만 이듬해인 800년에 사망했다. 이에 소성왕의 아들 김청명(金淸明)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그가 바로 제40대 애장왕이다.
그런데 애장왕은 즉위 당시 상당히 어린 나이였다. 일반적으로 열세 살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직접 국정을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숙부인 김언승이 섭정으로서 중요한 정치적인 역할을 맡았다.
헌덕왕과 애장왕의 관계는 단순한 숙부와 조카가 아니라 사실상 국왕과 섭정의 관계이기도 했다. 애장왕은 명목상의 최고 권력자였지만 실제 정치적인 의사결정에서는 김언승과 그를 지지하던 왕실 세력의 영향력이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인 관계가 결국 국왕을 살해하는 정변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왕비는 귀승부인
헌덕왕의 왕비는 귀승부인(貴勝夫人) 김씨다. 《삼국사기》에는 그녀가 원성왕의 아들인 김예영(金禮英)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예영은 헌덕왕의 아버지 김인겸과 형제 관계였으므로 이 기록을 따르면 헌덕왕은 가까운 왕족 여성과 혼인한 셈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귀승랑(貴勝娘)이 헌덕왕의 동생인 김충공의 딸이며, 황아왕후(皇娥王后)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사료에서 왕비의 가계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왕비 귀승부인의 정확한 부모와 혼인관계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도 논쟁이 존재한다. 특히 《삼국유사》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헌덕왕이 자신의 조카와 혼인했다는 뜻이 되므로, 왕실의 혼인관계를 해석할 때 사료의 차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원성왕 시대부터 실력자였다
김언승은 이미 원성왕 시대부터 중앙정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790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귀국한 뒤 대아찬의 관등을 받았다. 대아찬은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5등에 해당하는 높은 관등으로, 이러한 기록은 김언승이 젊은 시절부터 왕실의 중요한 정치적인 임무를 맡았음을 보여준다.
791년에는 이찬 제공(悌恭)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결과 김언승은 잡찬의 관등을 받았다. 이후 794년에는 시중에 임명되었고, 795년에는 이찬의 관등을 가진 재상이 되었으며, 796년에는 병부령으로 임명되었다.
시중은 국왕의 행정업무를 보좌하는 중요한 관직이었으며, 병부령은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병부의 장관이었다. 따라서 김언승은 외교와 행정, 군사 분야에서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나중에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긴 하지만, 국왕이 되기 전부터 국가의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했던 실력자이기는 했던 것이다.
제공의 난을 진압하다
791년 발생한 제공의 난은 김언승이 중앙정치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제공은 이찬의 관등을 가진 유력한 진골 귀족이었다. 그러나 그가 반란을 일으킨 구체적인 배경과 목적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김언승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 뿐, 실제 전투의 규모와 진행 과정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김언승이 반란 진압에 참여한 뒤 높은 관등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 왕실의 유력한 왕족이었던 김언승은 이러한 사건을 통해 군사적인 경험을 쌓고 국왕의 신임까지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정치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애장왕의 섭정
800년 소성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애장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애장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직접 국정을 운영할 만한 정치적인 경험이 부족했다. 이에 숙부 김언승이 국정을 보좌하면서 사실상 섭정의 역할을 맡았다.
김언승은 애장왕 시대에 어룡성(御龍省)의 사신(私臣)과 상대등을 역임했다. 어룡성은 국왕의 근시조직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사신은 국왕의 가까운 곳에서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관직이었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위 귀족 관직이었으므로 김언승은 국왕의 측근조직과 진골 귀족사회 양쪽에서 상당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보한 셈이었다.
더욱이 동생 김수종 역시 시중으로 활동하면서 중앙정부의 행정업무를 담당했다. 따라서 애장왕 시대에는 김언승과 그의 형제들이 주요 정치적인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애장왕 시대의 개혁정치
애장왕 시대에는 여러 행정제도를 정비하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805년에는 공식(公式) 20여 조가 반포되었으며, 806년에는 새로운 불교 사찰의 건립을 금지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또한 808년에는 군과 읍의 경계를 정비하여 지방 행정체계를 정리하려 했다.
이러한 정책은 일반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높이기 위한 개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애장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고 실제 정치적 권한을 김언승이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개혁정책의 상당 부분이 김언승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의 주도로 추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불교 사찰의 건립을 제한하는 정책은 귀족들이 사찰에 토지와 재산을 기증하면서 경제적인 기반을 확대하는 현상을 억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 당시 일부 진골 귀족들은 불교 사찰을 후원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언승은 애장왕의 섭정으로서 중앙정부의 행정체계를 정비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도 강화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개혁이 모두 김언승 개인의 지시에 따라 추진되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부족하다. 따라서 애장왕의 정치적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모든 정책을 김언승의 업적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809년 애장왕을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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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의 생애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809년 음력 7월 김언승은 동생인 이찬 김제옹(金悌邕)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갔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켜 국왕이었던 애장왕을 살해했다.
그런데 애장왕은 단순히 정치적인 경쟁자가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친형 소성왕의 아들이었다.
즉 김언승은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것이다.
조카를 살해하다
애장왕은 800년부터 국왕으로 재위했으며, 즉위 초기에는 숙부 김언승의 도움을 받아 국정을 운영했다. 그러나 809년에 이르러 김언승은 직접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적인 정변을 일으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언승과 김제옹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 애장왕을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애장왕의 동생인 김체명(金體明)도 형을 보호하다가 함께 살해당했다.
그러니까 김언승은 형의 아들 가운데 국왕이었던 애장왕뿐 아니라 그 동생까지 죽인 것이다.
형이 죽자 어린 조카 대신 정치를 해 주던 삼촌이, 조카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아예 군대를 끌고 와서 형제를 모두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셈이다.
다만 김언승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이유 때문에 809년에 정변을 일으켰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애장왕이 성장하면서 섭정이었던 김언승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를 입증할 직접적인 기록은 부족하다.
김제옹은 누구인가?
정변에 참여한 김제옹은 김언승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김제옹과 훗날 제42대 국왕이 되는 김수종을 반드시 같은 인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김언승의 동생으로 김제옹이 등장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김수종을 별개의 형제로 설명한다.
따라서 809년 정변에 흥덕왕 김수종이 직접 참여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김수종 역시 애장왕 시대에 중요한 관직을 역임했고, 헌덕왕이 즉위한 뒤에도 중앙정치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했다. 따라서 김언승의 정치적인 기반을 공유했던 왕족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헌덕왕으로 즉위하다
애장왕과 김체명이 살해당한 뒤 김언승은 직접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신라 제41대 헌덕왕이다.
헌덕왕은 즉위한 뒤 대사면을 실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 했다. 또한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로 애장왕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국왕이 다른 왕족에게 살해당하거나 군사적인 압박으로 왕위를 빼앗기는 사건이 반복되었는데, 헌덕왕의 즉위 역시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나라에는 어떻게 설명했는가?
헌덕왕은 애장왕을 살해하고 즉위했지만,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는 계속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신라 국왕이 자신의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이 당나라에 알려진다면 새로운 국왕의 정통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이 809년 즉위 직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애장왕의 사망을 알리고 책봉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 등에는 당나라가 헌덕왕을 책봉한 사건이 812년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809년 책봉 기록에는 연대상의 오류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카를 죽였다는 사실을 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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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연구에서는 헌덕왕이 실제로 왕위에 오른 뒤 몇 년이 지나서야 당나라에 공식적으로 국왕 교체를 알렸다고 해석한다.
특히 《삼국사절요》에는 신라가 당나라에 애장왕이 병으로 사망했다고 설명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헌덕왕은 자신이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당나라에 그대로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는데 외국에는 조카가 병으로 죽었다고 설명한 셈이다.
다만 실제로 신라 조정이 어떤 외교문서를 작성했으며 당나라 측이 애장왕의 죽음을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애장왕의 죽음을 다르게 설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1][2]
즉위 이후의 정치
헌덕왕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형제들과 가까운 왕족들을 중앙정부의 핵심적인 관직에 임명했다. 특히 김수종과 김충공 등은 헌덕왕의 재위기간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인사정책은 국왕의 정치적인 기반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신라 하대에는 진골 귀족들이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국왕이 귀족들의 협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정치적인 도전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헌덕왕은 자신과 가까운 왕족들을 중심으로 중앙정부의 권력을 집중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국왕과 가까운 사람들만 높은 관직을 차지할수록 정치적인 경쟁에서 밀려난 다른 귀족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헌덕왕의 재위기간에는 왕권 강화에 반대하는 귀족세력의 움직임이 이어졌다. 특히 기존 정치체제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던 일부 귀족들은 지방의 군사적·경제적인 기반을 확보하면서 중앙정부에 도전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갈등은 결국 822년 김헌창의 난으로 폭발하게 된다.
녹진의 인사개혁 건의
헌덕왕 시대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 가운데 하나가 바로 녹진(祿眞)의 인사개혁 건의다.
822년 무렵 상대등 김충공은 중앙정부의 인사 업무를 처리하다가 병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여러 관직에 적절한 사람을 임명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으며, 특히 귀족들의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집사시랑 녹진이 김충공을 찾아와 인재를 등용하는 원칙에 관해 조언했다.
사람도 나무처럼 쓰임새가 다르다
녹진은 인재를 등용하는 일을 목재를 사용하는 것에 비유했다.
큰 나무는 큰 기둥으로 사용하고 작은 나무는 작은 서까래로 사용하는 것처럼 사람 역시 각자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자리에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재를 등용할 때에는 개인적인 친분이나 정치적인 관계만을 고려해서는 안 되며, 실제 능력에 따라 관직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충공은 녹진의 조언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김충공은 동생인 김수종에게도 녹진의 의견을 전달했고, 김수종은 다시 헌덕왕에게 이를 보고했다.
헌덕왕 역시 녹진의 의견을 높이 평가했다.
이 일화는 신라 하대의 중앙정부가 관료의 능력과 실제 행정업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인사개혁이 기존 귀족들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이라는 원칙이 실제로는 국왕과 가까운 세력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다면 정치적인 경쟁에서 밀려난 귀족들의 불만이 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6두품과 왕권 강화
녹진은 일반적으로 6두품 출신의 관료로 이해된다.
당시 신라에서는 골품제에 따라 개인이 차지할 수 있는 관직과 정치적인 지위에 제한이 존재했다. 특히 진골 귀족들은 높은 관직을 독점하면서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했지만, 6두품 출신의 지식인들은 상당한 학문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일정한 관등 이상으로 승진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왕이 6두품 출신 관료들을 활용한다면 진골 귀족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일정 부분 견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헌덕왕과 김수종, 김충공이 녹진의 조언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은 왕실이 새로운 관료세력을 통해 국정을 운영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실제로 이러한 정책이 골품제의 구조적인 차별을 완화하거나 6두품 출신에게 높은 관직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기록은 없다.
자연재해와 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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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의 재위기간에는 자연재해와 기근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814년에는 신라 서쪽 지방에 큰 홍수가 발생했으며, 815년에는 서쪽 변경의 주와 군에서 기근이 발생했다. 이후 816년과 817년에도 식량 부족과 자연재해가 기록되었고, 820년과 821년에는 다시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다.
당시 신라는 농업을 중심으로 국가경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가뭄과 홍수는 주민들의 생계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지방 주민들이 농작물을 충분히 생산하지 못하면 조세를 납부하기 어려워지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해지면 농경지를 떠나거나 유랑하는 사람들이 증가할 수도 있었다.
헌덕왕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 사신을 보내 주민들을 구휼하고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만으로 농민들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안정시키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도적들이 들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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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이 반복되면서 지방에서는 도적들이 발생했다.
당시 기록에서는 이러한 도적집단을 초적(草賊)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초적은 일반적으로 지방에서 발생한 도적이나 무장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농민들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지방사회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결합하면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모든 초적이 굶주린 농민들로 구성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부는 지방의 유력세력과 연결된 무장집단이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기존의 행정체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집단들도 포함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연재해와 기근이 반복되던 시기에 도적들이 증가했다는 기록은 당시 신라 지방사회의 불안정성이 심각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러한 상황에서 진골 귀족들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까지 계속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지방에는 도적들이 들끓는데, 중앙에서는 왕족과 귀족들이 관직과 권력을 놓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문제는 훗날 김헌창의 난과 같은 대규모 반란이 발생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나라에 군사 3만 명을 보내다
819년에는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서 상당히 특이한 군사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지방의 절도사들이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면서 중앙정부에 반발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운주절도사 이사도(李師道)는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당나라 황실에 도전했다.
이사도는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고구려계 인물인 이정기(李正己)의 손자로, 집안 대대로 산둥반도의 군사적·경제적인 기반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 황제인 헌종은 이사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신라에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신라군 3만 명 동원
《삼국사기》에는 819년 음력 7월 당나라가 신라에 원군을 요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헌덕왕은 김웅원(金雄元)을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으로 임명하고 갑병 3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를 돕도록 명령했다.
당나라의 요청을 받아 외국의 반란 진압에 신라군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당시 신라는 여러 차례의 자연재해와 지방사회의 경제적인 문제를 겪고 있었지만, 기록상으로는 군사 3만 명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적인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실제로 3만 명의 군대가 모두 당나라에 도착했는지, 실제로 전투에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중요한 문제가 존재한다.
그런데 적장은 이미 죽었다
문제는 이사도가 819년 음력 2월에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당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이사도는 부하인 유오(劉悟)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그보다 몇 개월 뒤인 819년 음력 7월 당나라가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헌덕왕이 군사 3만 명을 보내도록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토벌 대상이 이미 죽었는데 몇 개월 뒤에 신라군이 그를 잡으러 출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사에는 사건의 연대가 잘못 배치되었거나, 실제 군사 파견의 과정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삼국사기》 주석에서도 이사도가 이미 819년 2월에 사망했으므로 신라군이 실제로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헌덕왕이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군사 3만 명을 동원하도록 명령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만, 신라군이 실제로 이사도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3]
822년 김헌창의 난
마치 소행성이 떨어져 지구가 폭발하는 것과 같은 노답력을 가졌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대상을 마주친다면 당장 도망가시기 바랍니다.
헌덕왕의 재위기간에 발생한 최대의 정치적 위기.
822년 음력 3월 웅천주도독이었던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김헌창은 단순히 지방에서 활동하던 무장이나 도적이 아니었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의 아들로, 신라 왕실의 유력한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과거에는 중앙정부의 시중을 역임했으며, 이후 무진주와 청주, 웅천주 등 여러 지방의 도독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김헌창은 중앙정치의 경험과 지방에서의 군사적·행정적인 기반을 모두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단순히 조정의 정책에 반대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국가를 세우겠다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아버지가 왕이 못 된 게 억울하다
이보시오 의사양반 제 멘탈은.. 끄어어얽!!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은 785년 선덕왕이 사망했을 당시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상황이 변화하면서 김주원 대신 김경신(金敬信)이 왕위에 올랐다.
그 김경신이 바로 제38대 원성왕이다.
김주원은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뒤 명주(溟州)로 물러났으며, 이후 그의 후손들은 태종무열왕계 왕족으로서 독자적인 정치적인 기반을 유지했다.
그런데 원성왕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신라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동안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정치적인 불만을 쌓아 갔다.
특히 헌덕왕 시대에는 중앙의 시중직에서 물러난 뒤 여러 지방의 도독으로 활동했다.
일부 연구에서는 헌덕왕과 그의 형제들이 중앙정부의 핵심 관직을 장악하면서 김헌창을 비롯한 다른 진골 귀족들이 정치적인 경쟁에서 밀려났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이 과거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일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원한을 아들이 수십 년 뒤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반란으로 터뜨린 것이다.
그러나 김헌창의 난을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극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왕실의 권력 독점과 지방사회의 경제적인 어려움, 귀족들의 정치적인 갈등이 함께 작용한 대규모 반란이었기 때문이다.
장안국을 세우다
김헌창은 반란을 일으킨 뒤 국호를 장안(長安)으로 정했다.
그리고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정했다.
이는 단순히 기존 신라 국왕에게 반대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국가의 통치권을 주장한 행위였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국호와 연호는 국가의 정치적인 정통성과 통치권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특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신라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정치적인 질서를 세우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김헌창의 난은 단순한 지방 귀족의 군사적인 반란을 넘어 신라의 기존 왕조 자체에 도전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신라의 지방 절반 가까이가 흔들리다
김헌창의 반란은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신라는 지방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헌창은 이 가운데 4주와 3소경을 장악하거나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였다.
| 구분 | 김헌창 세력에 가담한 지역 |
|---|---|
| 주 | 무진주(오늘날 광주 일대), 완산주(전주 일대), 청주(진주 일대), 사벌주(상주 일대) |
| 소경 | 국원경(충주), 서원경(청주), 금관경(김해) |
| 중심지 | 웅천주(공주 일대) |
이 정도면 단순한 지방의 반란이라고 보기 어려운 규모다.
실제로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일부 지역이 김헌창의 세력권에 들어갔으며, 신라 중앙정부가 통제하던 지방행정체계의 상당 부분이 흔들렸다.
반면 한산주와 우두주, 삽량주 등의 지역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기존 신라 조정의 편에 섰다.
따라서 전국의 모든 지방이 김헌창에게 가담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규모가 매우 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어 10년 넘게 나라를 다스렸더니 이번에는 지방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며 신라 땅의 상당 부분을 가져가 버린 것이다.
김헌창의 난 진압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헌덕왕은 즉시 군사적인 대응에 나섰다.
특히 완산주에서 탈출한 관리 최웅과 영충 등이 수도 서라벌로 도망쳐 와 반란에 관한 소식을 전달했다.
헌덕왕은 이들에게 관등과 관직을 내리며 공로를 인정했다.
이후 장수 여덟 명을 선발하여 수도를 방어하도록 하고, 별도로 토벌군을 편성하여 반란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신라의 토벌군에는 상당히 중요한 왕족과 무장들이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김균정과 김우징, 김웅원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김균정은 훗날 희강왕과 왕위를 놓고 싸우다가 죽는 인물이며, 김우징은 그 아들로 훗날 신무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 822년에는 헌덕왕의 명령을 받아 같은 편에서 반란을 진압하던 인물들이, 836년 이후에는 서로 왕위를 놓고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삼년산성을 함락하다
토벌군은 반란군이 장악한 여러 지역을 공격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삼년산성이다.
삼년산성은 오늘날 충청북도 보은군에 위치한 산성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부터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김헌창의 반란군은 여러 지역의 주요 교통로와 산성을 확보하면서 중앙정부의 토벌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신라군은 삼년산성을 비롯한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공격하면서 반란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결국 김헌창은 자신의 중심지였던 웅진성으로 물러나 마지막 저항을 준비했다.
웅진성을 포위하다
헌덕왕의 토벌군은 김헌창이 있는 웅진성을 포위했다.
김헌창은 성 안에서 저항했지만 반란군의 상황은 점점 불리해졌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군이 웅진성을 10일 동안 공격했으며, 성이 함락되기 직전 김헌창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김헌창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부하들은 시신의 목을 베어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다.
그러나 신라군이 성을 함락한 뒤 시신을 찾아내 다시 처벌했다고 한다.
이처럼 김헌창은 자신이 새로운 국가를 세우겠다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불과 한 달 남짓한 기간에 토벌군에게 패배하여 사망한 것이다.
반란 주동자 239명 처형
만일 참교육을 거부할 시 성적은 개좆망행이니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헤이, 영쑤!! 돈 두 댓!"
헌덕왕은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뒤 반란에 참여한 핵심 인물들을 처벌했다.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의 친족과 추종자 등 239명이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반란이 발생한 지역의 모든 주민들을 무조건 처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란군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일반 주민들은 풀어 주었으며,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지역에는 세금을 면제하는 등의 보상도 시행했다.
특히 반란군과 가까운 지역에 있었으면서도 신라 조정에 충성했던 굴자군에는 7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반란군을 군사적으로 진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방 주민들의 민심을 안정시키려 했던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핵심 주동자 239명을 처형했다는 사실은 헌덕왕이 왕실의 권위에 도전한 귀족세력에 상당히 강경하게 대응했음을 보여준다.
나라를 따로 세우겠다며 반란을 일으킨 놈들은 잡아 죽이되, 그 지역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백성들까지 전부 죽이지는 않은 것이다.[4][5]
825년 김범문의 난
마치 소행성이 떨어져 지구가 폭발하는 것과 같은 노답력을 가졌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대상을 마주친다면 당장 도망가시기 바랍니다.
김헌창의 난이 진압된 지 3년 뒤인 825년에는 또 다른 반란이 발생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었다.
김범문은 아버지의 반란이 실패한 뒤에도 살아남았으며, 새로운 세력을 모아 다시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헌창의 난처럼 여러 지방의 행정기관을 장악하는 대규모 반란은 아니었다.
김범문은 고달산(高達山)의 도적 수신(壽神) 등 약 100명의 무장세력과 함께 반란을 계획했다.
그는 새로운 도읍을 세우기 위해 북한산주를 공격하려 했다.
평양에 도읍을 세우겠다?
《삼국사기》에는 김범문이 평양(平壤)에 도읍을 세우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평양을 오늘날 북한의 수도인 평양으로 바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삼국사기》의 주석에서는 이 평양을 지금의 양주 일대와 연결하여 설명한다.
따라서 김범문이 실제로 대동강 유역의 평양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으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쨌든 김범문은 북한산주를 공격하여 새로운 정치적 거점을 확보하려 했지만 계획은 실패했다.
북한산주도독 총명(聰明)이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범문은 붙잡혀 살해당했다.
아버지가 나라를 새로 만들겠다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는데, 이번에는 아들이 도적 100명쯤 끌고 와서 또 나라를 세우겠다고 했다가 죽은 것이다.
그러나 두 반란의 규모는 상당히 달랐다.
김헌창의 난은 신라의 4주와 3소경을 장악한 대규모 정치적 반란이었지만, 김범문의 난은 비교적 소규모의 무장세력이 참여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두 사건을 같은 규모의 반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무열왕계의 몰락
김헌창과 김범문은 모두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 계통의 왕족이었다.
그런데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이 잇따라 실패하면서 이 계통의 왕족들이 신라 중앙정치에서 왕위 계승을 주장할 가능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반면 원성왕계 왕족들은 계속해서 신라의 왕위를 차지했다.
따라서 두 반란의 실패는 단순히 지방에서 발생한 무장봉기의 진압에 그치지 않고 신라 왕실 내부의 정치적인 경쟁구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부 연구에서는 이러한 과정에서 중앙정치에서 배제된 귀족들이 지방의 독자적인 군사세력으로 성장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고 평가한다.
826년 패강장성 축조
헌덕왕이 사망하기 직전에 추진한 중요한 국가사업 가운데 하나는 패강장성(浿江長城)의 축조다.
826년 음력 7월 헌덕왕은 우잠군 태수 백영(白永)에게 명령하여 한산주 북쪽의 여러 주와 군에서 주민 1만 명을 징발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을 동원하여 300리 길이의 장성을 쌓도록 명령했다.
패강은 일반적으로 대동강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지만, 고대 신라의 패강진과 그 주변 지역의 정확한 행정적 범위를 오늘날의 지리적 개념과 완전히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당시 신라는 한반도 북부에서 발해와 접하고 있었으며, 북방의 여러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군사적인 시설을 확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패강장성의 축조는 신라 북방의 방어체계를 강화하려는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300리짜리 장성
300리라는 길이는 상당한 규모다.
다만 고대의 리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실제 길이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이를 오늘날의 특정한 킬로미터 수치로 정확하게 환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어쨌든 주민 1만 명을 징발하여 장성을 축조하도록 명령했다는 사실은 당시 신라 중앙정부가 대규모 토목공사에 필요한 인력을 동원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헌덕왕은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을 진압하면서 지방의 군사적인 통제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방의 장성을 축조했다는 것은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지방사회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에 동시에 대응하려 했던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장성이 정확히 어느 구간에 축조되었으며 어느 정도까지 완성되었는지는 충분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신라가 한반도 북부 전체를 가로지르는 완전한 장성을 건설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백성들에게는 또 다른 부담
그 2가지 측면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패강장성의 축조는 국가안보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사업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민 1만 명을 동원했다는 사실은 당시 백성들에게 상당한 노동 부담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헌덕왕 시대에는 자연재해와 기근이 반복되었으며, 농업생산이 불안정했던 지역도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을 대규모 토목공사에 동원하면 농사에 사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 감소할 가능성도 있었다.
따라서 패강장성의 축조는 북방 방어를 위한 국가적인 사업이면서도 주민들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장성 축조 때문에 어느 지역에서 농업생산이 감소했거나 주민들의 불만이 증가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부족하다.
따라서 국가안보상의 필요성과 주민들의 노동 부담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적절하다.[7]
왕위 계승
헌덕왕은 822년 동생 김수종을 부군(副君)으로 책봉했다.
부군은 국왕을 보좌하면서 왕위 계승과 관련된 특별한 지위를 가지는 칭호로 이해된다.
김수종은 이전부터 중앙정부에서 중요한 관직을 역임했으며, 헌덕왕의 왕권 강화정책을 뒷받침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헌덕왕은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함께 형성했던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헌덕왕에게 정말 아들이 없었는가?
아들이 없었다는 기록
《삼국사기》 녹진열전에는 헌덕왕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취지의 기록이 등장한다.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헌덕왕은 자신에게 직접적인 남성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동생 김수종을 후계자로 선택한 셈이 된다.
그러나 다른 사료에는 헌덕왕의 아들이 등장한다.
810년에는 왕자 김헌장(金憲章)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승려 심지(心地)가 헌덕왕의 아들이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따라서 헌덕왕에게 아들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렵다.
일부 연구에서는 헌덕왕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왕위를 계승하기 어려운 정치적인 상황이었거나, 왕실의 다른 인물들이 더 유력한 후계자로 인정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또한 822년에 김충공의 딸 정교(貞嬌)를 태자비로 삼았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태자비가 누구의 배우자였는지, 당시 태자가 실제로 누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헌덕왕의 후계자 문제는 여러 사료를 종합하여 신중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동생 흥덕왕이 즉위하다
826년 헌덕왕이 사망하자 동생 김수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바로 제42대 흥덕왕이다.
흥덕왕은 헌덕왕 시대에 상대등을 비롯한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했으며, 822년에는 부군으로 책봉되어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상태였다.
따라서 헌덕왕이 사망했을 때 새로운 대규모 왕위쟁탈전이 발생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러한 점에서 헌덕왕은 자신이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던 방식과는 달리, 자신의 후계자 문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자기는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지만, 죽을 때에는 동생에게 정상적으로 왕위를 넘겨준 것이다.
다만 이러한 왕위 계승이 이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흥덕왕이 836년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면서 신라는 다시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에 빠지게 된다.
826년 사망
헌덕왕은 826년 음력 10월 사망했다.
809년 음력 7월에 즉위했으므로 실제 재위기간은 약 17년 3개월이며, 당시의 재위 연수로는 18년째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사망 당시 나이도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이 어떤 병이나 사고 때문에 사망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사망 연도에 관한 다른 문헌의 기록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일부 고기에는 826년 음력 4월에 사망했다고 전하지만, 《삼국사기》 본문에서는 음력 10월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일부 중국 사료에서는 헌덕왕의 사망 시기를 831년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사에서는 《삼국사기》 본기의 기록에 따라 826년 음력 10월 사망한 것으로 정리한다.
천림사 북쪽에 장사지내다
헌덕왕은 사망한 뒤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에는 헌덕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 헌덕왕릉이 존재한다.
다만 천림사의 정확한 위치와 현재의 왕릉을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자료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전통적으로 헌덕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의 실제 피장자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8]
경주 헌덕왕릉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에는 경주 헌덕왕릉이 존재한다.
이 무덤은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왕릉으로 전해지며,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왕릉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6m, 높이 약 6m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매장주체부는 굴식돌방무덤이며, 봉분의 아래쪽에는 판석과 탱석으로 구성된 둘레돌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탱석에는 무덤을 지키는 방위신으로서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신라 왕릉의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다.
십이지신상이 남아 있다
경주 헌덕왕릉의 둘레돌에는 본래 열두 방향에 십이지신상을 배치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십이지신상 가운데 다섯 개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돼지와 쥐, 소, 호랑이, 토끼에 해당하는 조각이다.
이들은 각각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헌덕왕릉은 십이지신상이 조각된 신라 왕릉 가운데에서도 상당히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홍수로 무덤이 훼손되었다
그런데 헌덕왕릉은 후대에 심각한 자연재해를 겪었다.
1742년 영조 시대에 경주의 북천이 크게 범람하면서 왕릉의 일부가 유실된 것이다.
당시 좌의정 송인명은 이러한 사실을 영조에게 보고했고, 경상도관찰사가 왕릉을 수리하도록 했다.
이 사건은 헌덕왕릉의 일부 석조물이 사라진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특히 현재 십이지신상 가운데 일부만 남아 있는 것도 이러한 홍수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사라진 석조물들이 모두 1742년의 홍수 때문에 유실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오랜 세월 동안 발생한 자연적인 훼손과 다른 인위적인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
어쨌든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왕릉이 조선시대까지 관리의 대상이었으며, 홍수로 훼손되자 중앙정부에 보고하여 수리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실제 헌덕왕의 무덤인가?
현재의 경주 헌덕왕릉은 오랫동안 헌덕왕의 무덤으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신라의 왕릉 가운데 상당수는 후대의 문헌과 전승을 바탕으로 위치가 추정되었으며, 실제 피장자를 확인할 수 있는 비문이나 결정적인 유물이 없는 경우가 많다.
헌덕왕릉 역시 역사서에 기록된 천림사 북쪽이라는 장지와 현재의 위치를 대조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만 무덤의 규모와 구조, 십이지신상의 조각 양식 등을 고려하면 신라 하대의 유력한 왕족이나 국왕급 인물이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현재의 왕릉이 실제 헌덕왕의 무덤이라는 전통적인 비정을 뒷받침하는 요소도 존재하지만, 피장자를 직접 확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헌덕왕릉은 신라 하대의 왕릉 건축과 장례문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9]
평가
그 2가지 측면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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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은 신라 하대의 국왕 가운데 정치적으로 상당히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는 원성왕 시대부터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한 유능한 정치인이었으며, 애장왕 시대에는 섭정으로서 중앙정부의 행정개혁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결국 어린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 때문에 정치적인 정통성과 도덕성에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재위기간에는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귀족들의 반발이 확대되었다.
결국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이 발생했으며, 신라의 지방사회는 상당한 정치적·군사적 혼란을 겪었다.
긍정적인 평가
헌덕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국왕으로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유지하고 대규모 반란을 진압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김헌창의 난은 신라의 4주와 3소경이 반란에 가담할 정도로 규모가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헌덕왕은 군대를 신속하게 동원하여 반란군의 주요 거점을 공격했고, 결국 김헌창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김범문의 난 역시 진압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유지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가 이미 여러 정치적인 문제를 겪고 있었지만 중앙정부가 대규모 군사작전을 수행할 만한 능력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김헌창의 난이 발생한 뒤 수도를 방어하고 지방으로 토벌군을 파견하는 등 비교적 조직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아울러 826년 패강장성을 축조하여 북방의 군사적인 방어체계를 강화하려 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애장왕 살해에 대한 평가
이보시오 의사양반 제 멘탈은.. 끄어어얽!!
헌덕왕의 정치적인 정통성을 평가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애장왕의 시해다.
애장왕은 헌덕왕의 친형 소성왕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헌덕왕은 가까운 왕족이자 자신이 섭정으로서 보좌하던 조카를 살해하고 국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이러한 정변은 신라 왕위 계승의 안정성을 훼손했으며, 국왕이 유력한 진골 귀족의 군사적인 지원에 의해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다만 당시의 왕위 계승은 현대적인 법률과 헌법에 따라 결정되는 체제가 아니었다. 진골 귀족들의 정치적인 지지와 군사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왕실 내부의 권력투쟁 역시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따라서 헌덕왕의 즉위를 단순히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만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당시 신라의 정치적인 구조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정치적 배경이 존재했더라도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왕권 강화의 역효과
헌덕왕은 자신의 형제들과 가까운 왕족들을 중앙정부의 핵심적인 관직에 임명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다른 귀족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약화시켰다.
특히 김헌창은 과거 중앙정부의 시중을 역임했지만 이후 여러 지방의 도독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일부 연구에서는 이를 헌덕왕계의 권력 집중으로 인해 정치적인 경쟁에서 밀려난 결과로 해석한다.
결국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원한을 명분으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점에서 김헌창의 난은 헌덕왕의 정치적인 권력 집중에 대한 반발이라는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김헌창의 난이 발생한 원인을 헌덕왕의 인사정책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지방세력의 성장과 농민들의 경제적인 어려움, 무열왕계와 원성왕계의 정치적인 경쟁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이 지방과 귀족사회의 반발을 불러왔다는 사실은 중요한 문제다.
김헌창의 난을 진압했지만
마치 소행성이 떨어져 지구가 폭발하는 것과 같은 노답력을 가졌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대상을 마주친다면 당장 도망가시기 바랍니다.
헌덕왕은 김헌창의 난을 군사적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반란을 진압했다는 사실이 신라의 정치적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김헌창의 난은 중앙정부에 불만을 가진 여러 지방과 귀족들이 동시에 반란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는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상당히 약화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김헌창이 새로운 국호와 연호를 선포했다는 점은 일부 지방세력이 기존 신라 왕조 자체를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인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헌덕왕은 반란을 진압하면서 국왕의 권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지방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종합
헌덕왕은 정치적인 경험이 풍부했고, 중앙정부의 행정체계를 정비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어린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정치적인 정통성에 상당한 문제를 남겼다. 또한 자신의 형제들과 가까운 왕족들에게 정치적인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다른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김헌창의 난과 같은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헌덕왕은 이러한 반란을 모두 진압하면서 18년 동안 왕위를 유지했다. 특히 후계자인 동생 흥덕왕에게 왕위를 넘기는 과정에서는 새로운 대규모 왕위쟁탈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헌덕왕을 단순히 무능한 국왕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의 정치적인 성과는 상당 부분 왕실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진압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으며, 당시 신라의 지방사회가 겪고 있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 18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반란을 일으키는 놈들은 죄다 진압했지만, 정작 그런 반란이 왜 계속 발생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국왕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가 사망한 뒤 동생 흥덕왕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했지만, 흥덕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신라는 다시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헌덕왕의 재위기간은 신라 중앙정부가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시기이면서도, 지방사회에서는 기존 왕조의 정치적인 기반이 점차 흔들리고 있던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담
- 본명은 김언승(金彦昇)이며, 신라 제41대 국왕이다.
- 제38대 원성왕의 손자이자 혜충태자 김인겸의 아들이다.
- 제39대 소성왕의 동생이며, 제42대 흥덕왕의 형이다.
- 제40대 애장왕은 헌덕왕의 친조카다.
- 790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귀국 후 대아찬의 관등을 받았다.
- 791년 제공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 794년 시중에 임명되었고, 796년에는 병부령이 되었다.
- 소성왕이 사망한 뒤 어린 애장왕을 대신해 섭정으로 활동했다.
- 805년 애장왕 시대의 공식 20여 조 반포와 행정개혁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 809년 동생 김제옹과 함께 군사적인 정변을 일으켜 애장왕과 그의 동생 김체명을 살해했다.
- 애장왕이 사망하자 직접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 《삼국사기》에는 즉위 직후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책봉은 812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 당나라에 애장왕이 병으로 사망했다고 알렸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 재위기간에는 김수종과 김충공 등 가까운 왕족들이 중앙정부의 핵심적인 관직을 차지했다.
- 814년부터 여러 해 동안 홍수와 기근이 반복되었다.
- 819년에는 당나라 이사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김웅원에게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가도록 명령했다.
- 다만 이사도가 이미 같은 해 2월에 사망했으므로 실제로 신라군이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 822년에는 상대등 김충공이 녹진의 인재 등용에 관한 조언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 822년 김헌창의 난이 발생하여 신라의 4주와 3소경이 반란에 가담했다.
- 김헌창은 장안이라는 국호와 경운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 헌덕왕은 김균정과 김우징, 김웅원 등에게 토벌군을 지휘하도록 명령했다.
- 김헌창의 난은 진압되었으며, 반란 주동자 239명이 처형되었다.
- 825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 826년에는 주민 1만 명을 동원해 300리 길이의 패강장성을 축조하도록 명령했다.
- 826년 음력 10월 사망했으며,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 사망한 뒤 천림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 경주 동천동에는 헌덕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이 존재한다.
- 헌덕왕릉은 1742년 홍수로 일부가 훼손되어 조선 정부가 수리한 기록이 남아 있다.
- 헌덕왕의 뒤를 이어 동생 흥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같이 보기
관련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헌덕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경주 헌덕왕릉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헌창의 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헌창
- 우리역사넷 - 헌덕왕
- 우리역사넷 - 김헌창의 난
- 국사편찬위원회 - 애장왕의 피살
- 국사편찬위원회 - 헌덕왕 즉위
- 국사편찬위원회 - 헌덕왕의 사면과 당나라 책봉
- 국사편찬위원회 - 왕자 김헌장을 당나라에 파견하다
- 국사편찬위원회 - 이사도의 반란에 원군을 보내다
- 국사편찬위원회 -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다
- 국사편찬위원회 - 김범문의 난
- 국사편찬위원회 - 패강장성 축조
- 국사편찬위원회 - 헌덕왕 사망
- 국사편찬위원회 - 신라 하대의 반란과 왕위쟁탈전
- 김동수, 〈신라 헌덕·흥덕왕대의 개혁정치〉, 《한국사연구》 제39집, 1982.
- 최홍조, 〈신라 애장왕대의 정치변동과 김언승〉, 《한국고대사연구》 제34집, 2004.
- 주보돈, 〈신라 하대 김헌창 난의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제51집, 2008.
- 이상훈, 〈김헌창의 난과 신라군의 대응〉, 《군사연구》 제138집,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