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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910

1909년 무려 2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모든 일뽕의 아버지이자 매국노 이완용에게 칼빵으로 1킬을 먹이려 했으나 안타깝게 실패하여 돌아가신 분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찢재명과 동명이인이지만 한자가 같다. 행적 역시 정 반대로, 청년 독립투사 이재명 선생은 나라를 위해 이완용을 칼빵으로 찢으려고 한 반면 찢재명은 형수 보지를 찢으려던 새끼가 분수도 모르고 대선판에 나와 나라를 말아 처먹으려 한 것이 가장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ㄴ 찢으려고 했다는 건 똑같다.

사실 이완용이 그때 뒤질 뻔했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선진적인 외과 의학이 들어와서 수술[1] 받고 안 뒤졌다. 조금만 더 깊이 칼빵을 날리셨다면 이완용은 뒤졌겠지.

잡혀간 뒤 재판에서 왜놈 판사가 "이 짓에 동참한 공범이 있는가?"라고 묻자 "2000만 우리 동포가 전부 내 공범이다!"라고 패기롭게 일침을 가하고, 사형 집행 직전에도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라고 패기롭게 외치고 순국했다. 향년 23세.

ㄴ 이재명 의사가 오늘날 재매이햄이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려 하는 짓거리를 보면 그저 피눈물 흘릴듯

쪽바리 판새가 살인 및 살인미수로 사형 선고했다는데 살인미수는 두말할 것 없이 이완용이고, 사형은 이완용을 손님으로 태우려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이재명 의사의 습격을 막으려다 그대로 칼빵 맞아서 죽은 것을 반영했다. 즉, 이재명 의사에게 적용된 살인은 이완용의 살인 미수가 살인으로 뻥튀기된 게 아니고 박원문이 죽은 것을 적용한 것이다. 죄 없는 사람이 죽었다는 점은 공판 과정에서 이재명 의사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새파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칼빵맞은 대가로 이완용은 죽을 때까지 17년 동안이나 칼빵 맞은데 때문에 골골대고 병원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뒈졌다.

느그들은 스무 살 때 뭐했냐

ㄴ 디시질이나 하면서 욕받이로 산다.
ㄴ 자랑이다 ㅉㅉ
ㄴ 그래도 난 디시질만 하진 않았다
ㄴ 우리 민족의 얼 한복 만들고 있다
ㄴ 수능 끝난 고등학교때 동아리 후배한테 아다 뗌

백범일지에는 당시 상황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당시 황해도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김구가 같이 일하는 여교사의 젊은 남편이 권총으로 마누라를 위협하는 것을 보고 총을 빼앗아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버렸는데, 이 젊은이가 바로 이재명 의사였고, 이재명 의사는 포기하지 않고 서울에 도착해 칼빵을 날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정확히는 여편네가 무모한 짓이라고 만류했으나 이재명 의사가 "이 씨발년이 나라가 중요한 지를 모르는구나"하고 총으로 죽이려 위협했고, 킬구는 이재명을 헛된 열정에 들뜬 젊은이로 보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했단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어 현충원에 위패가 안장되었다.

여담이지만 독립운동가 이재명이 순국하신 12월 22일이 1964년생 찢재명의 호적상 생일이란다. 그래서 1964년생 찢재명이 이분을 언급하며 추모했지만 한쪽에서는 숟가락 얹기라고 욕했다.

개요

이재명
생년월일1887년 10월 16일
국적대한제국
출생지조선 평양
본관진안(鎭安)
학력평양 일신학교
추가 정보
직업독립운동가
소속공립협회
가족배우자 오인성
다른 이름이수길(李壽吉)
사망1910년 9월 30일
서훈건국훈장 대통령장(1962년)
주요 활동1909년 이완용 처단 의거
한자李在明

이재명(李在明, 1887년 10월 16일 ~ 1910년 9월 30일)은 대한제국 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처단하려다가 체포되어 순국한 인물이다. 본관은 진안(鎭安)이며, 이수길(李壽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1887년 평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생활했으며, 도산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1907년 귀국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핵심 인물들과 친일 정치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 했지만, 당시 순종 황제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안전을 우려한 안창호의 만류로 거사를 실행하지 않았다. 이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이완용과 이용구, 송병준 등 국내 친일 정치인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활동을 전환했다.

1909년 12월 22일에는 서울 종현천주교당, 오늘날의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장에서 의거를 실행했다. 당시 이재명은 이완용에게 중상을 입혔지만 결국 목숨을 빼앗는 데에는 실패했으며, 이 과정에서 인력거꾼 박원문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재명은 현장에서 체포된 뒤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10년 9월 30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당시 나이는 만 22세였고, 세는나이로는 24세였다.[2]

특히 그는 재판 과정에서도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거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완용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 협력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공범에 관한 질문에 2천만 동포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의거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국권회복을 위한 행동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행적을 인정받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한말의 대표적인 의열투쟁가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3]

특히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가 발생한 지 불과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을 직접 공격했다는 점에서, 이재명의 의거는 경술국치 직전에 발생한 대표적인 항일 의열투쟁으로 평가된다.

~~어떤 사람들은 스물두 살에 취업을 걱정하는데 이 사람은 스물두 살에 나라를 팔아먹는 총리대신을 제거하겠다고 나섰다. 시대가 달랐다고 해도 참으로 대단한 결단력이다.~~

시대적 배경

대한제국이 무너지던 시절

이재명이 활동했던 1900년대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해 가던 시기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으며, 대한제국 정부에 여러 불평등 조약을 강요했다. 특히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이후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에도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으며,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독립국가로서 외교권과 군사적인 자위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도 계속되었다. 전국에서는 의병들이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국내외의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은 교육과 언론, 정치활동 등을 통해 국권회복을 추진했다.

특히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력한 핵심 인물들을 직접 제거함으로써 국권침탈을 저지하려 했으며, 이러한 활동은 후대에 의열투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재명 역시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일본의 침략에 협력한 정치인들을 제거하는 것이 국권회복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이완용이 표적이 된 이유

이완용은 대한제국 말기의 대표적인 친일 정치인으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협력했던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이다.

특히 그는 1907년부터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으로 활동했으며, 일본 통감부와 협력하면서 대한제국의 여러 정치적인 권한을 일본에 넘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 여러 사건에도 관여했다는 이유로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1909년에는 일진회의 회장 이용구가 일본과의 병합을 주장하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이 더욱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이완용과 이용구는 모두 일본의 침략에 협력했지만, 일본과의 병합을 추진하는 방법과 자신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보하는 문제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재명은 이완용과 이용구 등을 제거하면 일본의 병합정책에 협력하는 국내 정치세력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당시 이완용은 대한제국 정부의 최고위 관료였으므로 그를 처단하려는 행동은 단순한 개인에 대한 공격을 넘어 일본의 국권침탈에 협력하던 정치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4]

생애

평양에서 태어나다

이재명은 1887년 10월 16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독립기념관의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과 국가보훈부가 소개하는 판결문 기반 자료에서는 평양 성내를 출생지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일부 신문과 오래된 안내자료에서는 평안북도 선천 출생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이러한 차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출생지와 정확한 성장 과정에 관한 혼동이 존재한다.

특히 국가보훈부는 당시 판결문을 근거로 1887년 10월 16일 평양에서 태어났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독립기념관 역시 같은 생몰일을 사용하고 있다.

본관은 진안 이씨이며, 다른 이름으로 이수길을 사용한 기록도 존재한다.

1895년에는 평양의 아청리로 이주했으며, 이후 일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당시 평양은 기독교 선교활동과 근대적인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지역 가운데 하나였으며, 여러 학교와 종교단체들이 새로운 교육을 통해 근대적인 지식과 민족의식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이재명 역시 이러한 환경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회적인 변화를 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평양은 이후 안창호와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교육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던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이재명의 성장 배경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3]

하와이로 건너가다

1904년 이재명은 미국 노동이민회사의 모집에 응하여 해외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적인 변화로 인해 새로운 생활의 기회를 찾아 해외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미국 하와이에서는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모집했으며, 상당수의 한인들이 하와이로 건너갔다.

이재명 역시 이러한 이민의 흐름에 참여하여 하와이로 이동했으며, 1905년에는 현지 농장에서 노동자로 생활했다.

당시 하와이의 한인 노동자들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 열악한 노동환경, 경제적인 어려움 등 여러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한인 사회는 서로 협력하면서 학교와 교회, 민족운동단체 등을 조직했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모으고 관련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재명은 이러한 해외 한인 사회에서 생활하면서 대한제국의 정치적인 상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미국 본토로 이동해 더욱 적극적인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했다.

공립협회에 가입하다

1906년 3월 이재명은 미국 본토로 이동하여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사회에서 활동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안창호와 여러 한인들이 1905년 공립협회를 설립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공립협회는 미국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서로 협력하고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였으며, 이후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이 강화되면서 국권회복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공립협회는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행하면서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해외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재명은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일본에 협력한 국내 정치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되자 해외 한인 사회에서도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분노가 커졌다.

공립협회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협력한 정치인들을 제거하는 방안이 논의되었으며, 이재명은 이러한 활동의 실행자로 자원했다.

1907년 10월 9일 그는 일본을 거쳐 귀국했으며, 이후 국내와 연해주 등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2]

~~하와이에 돈 벌러 갔다가 미국 본토에서 독립운동을 배우고 돌아왔다. 바다 건너갔다가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심만 더 강해진 셈이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

1909년 평양역에서의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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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은 처음부터 이완용만을 목표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1909년 1월 그는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일본의 정치인이었으며, 1905년 을사늑약 체결과 통감부 설치 등 여러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1909년 1월에는 순종 황제가 평안도 지역을 순행할 예정이었으며, 이토 히로부미 역시 황제와 함께 이동할 계획이었다.

이재명은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뒤 동지들과 함께 평양역 부근에서 기다리면서 이토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실제로 의거가 실행되지는 않았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 황제의 가까운 곳에 머물렀으며, 이재명이 이토를 공격하면 황제까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안창호는 황제의 안전을 고려하여 계획을 실행하지 말라고 만류했다.

이재명은 이러한 만류를 받아들이면서 평양역에서의 계획을 포기했지만, 이후에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동지 김병록과 함께 서울과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면서 다시 이토를 공격할 기회를 찾았다.[3]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 사건은 대한제국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으며, 일본의 한반도 침략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재명은 이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인물이었으므로 안중근의 의거는 자신의 활동 방향을 다시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면서 이재명은 다른 친일 정치인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특히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진회 회장 이용구 등이 주요 표적으로 떠올랐으며, 이후 이재명은 동지들과 함께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안중근과 이재명의 의거 사이에 불과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과 통감부는 안중근의 의거 이후 경계태세를 강화했지만, 이재명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대한제국 정부의 최고위 관료를 공격하려 했다.

따라서 이재명의 의거는 안중근의 활동과 함께 경술국치 직전 항일 의열투쟁의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백범 김구와의 인연

아내 오인성과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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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막장드라마 이지만 의외로 제대로 된 드라마가 있지만 이외에는 존나 자극적이니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드라마를 존나 까 주세요.
대표적으로 김순옥 작가의 작품들이 있습니다.
와! 순옥킴을 아시는구나! 존나 좆같습니다!

이재명과 관련된 일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당시 김구는 황해도 재령 지역에서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이재명의 아내였던 오인성은 해당 지역의 진초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1909년 겨울 김구는 노백린과 함께 서울로 이동하던 중 황해도 재령의 여물평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이재명이 아내 오인성을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소동이 발생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재명은 자신의 행동을 말리는 아내와 갈등을 겪었으며, 마을에서 권총을 발사하면서 매국노들을 제거하겠다고 외쳤다.

이에 주변 사람들이 놀라 김구와 노백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구와 노백린은 이재명을 불러 그의 과거 경력과 앞으로 하려는 일을 물었으며, 이재명은 일본의 국권침탈에 협력한 정치인들을 제거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재명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도와 권총, 이완용 등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김구와 노백린은 이재명이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 무모한 행동을 하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이재명을 설득하여 권총과 단도를 맡기도록 했으며, 이후 서울로 이동했다.[5]

이러한 일화는 이재명이 독립운동에 매우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아내에게도 폭력적인 위협을 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과 배우자를 권총으로 위협한 행동을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특히 당시에도 김구와 노백린은 이러한 행동을 문제로 판단했으며, 이재명의 무기를 맡아 보관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수습했다.

김구가 나중에 후회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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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의 이완용 처단 의거가 발생하자 김구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김구는 당시 자신이 만났던 젊은이가 실제로 이완용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백범일지》에는 김구가 당시 이재명의 무기를 맡아 보관했던 일을 후회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구는 이재명이 권총을 사용했다면 이완용을 처단하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르는데 자신과 노백린이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일화는 이후 이재명의 의거가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반전이 존재한다.

사실은 의거 당일에도 권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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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가 2021년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이재명은 1909년 12월 22일 의거 당시에도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특히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작성된 판결문과 당시의 신문 보도에는 이재명이 의거 당시 단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10년 5월 13일 공판에서 재판장이 권총을 가지고 있었는지 묻자 이재명은 이를 인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김구와 노백린이 과거에 이재명의 권총을 맡아 보관했던 사실과 의거 당일 이재명이 권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주장은 서로 구분해야 한다.

실제로 이재명은 김태선 등 동지들로부터 새로운 무기를 제공받았으며, 의거 당일에는 권총과 단도를 모두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이재명은 권총을 사용하지 않고 단도로 이완용을 공격했다.

이러한 선택의 이유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근거리에서 갑작스럽게 공격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도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실제로 왜 권총을 사용하지 않았는지는 별도의 기록이 없어 확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재명의 의거가 실패한 원인을 단순히 김구가 권총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5]

~~김구는 자기가 총을 빼앗아서 실패한 줄 알고 평생 후회했는데, 알고 보니 이재명은 의거 당일 다른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왜 총 대신 칼을 썼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이완용 처단 계획

동지들과의 비밀회의

이재명은 1909년 11월부터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이완용과 이용구 등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평양의 경흥학교에는 서적종람소와 야학당 등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이재명은 이러한 장소를 이용하여 동지들과 비밀회의를 진행했다.

특히 1909년 11월 말에는 김정익과 박태은 등 여러 인물이 모여 일진회 회장 이용구를 제거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재명은 이용구보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완용은 대한제국 정부의 최고위 관료였으며, 일본의 국권침탈에 협력하는 정치적인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견 차이로 동지들 사이에 논쟁이 발생했지만, 결국 이완용과 이용구를 모두 처단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였다.

1909년 12월 4일에는 일진회가 일본과의 병합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에 대한 위기감이 더욱 커졌다.

이에 이재명과 동지들은 계획을 서둘러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역할 분담

이재명을 중심으로 한 거사조직은 여러 인물에게 각각의 임무를 맡겼다.

이재명과 이동수, 김병록은 이완용을 처단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김정익과 조창호는 이용구를 처단하기 위한 계획에 참여했다.

또한 박태은과 오복원, 이응삼 등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고, 조창호와 전태선 등은 권총과 단도 등 무기를 확보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김용문은 서울에서 이완용과 이용구의 동향을 조사하면서 이들의 이동 경로와 행사 참석 일정 등을 파악했다.

이러한 역할 분담은 이재명의 의거가 단순히 한 청년이 우발적으로 이완용을 공격한 사건이 아니라 여러 동지들이 사전에 계획하고 준비한 조직적인 항일투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당시 일본의 통감부와 경찰은 반일활동을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주요 친일 정치인들의 동선을 파악하고 무기를 확보하는 일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랐다.[3]

12월 22일의 기회

1909년 12월 17일 이재명과 동지들은 마지막 비밀회의를 열고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점검했다.

당시에는 이완용을 먼저 제거한 뒤 이용구를 제거하는 순서로 계획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후 김용문은 이완용이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2세는 1909년 12월 17일 사망했으며, 당시 대한제국 정부와 외국 외교관들은 그의 사망을 추모하는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특히 이완용은 내각총리대신이었으므로 이러한 외교적인 행사에 참석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재명은 이완용이 공개적인 행사에 참석한 뒤 성당을 나올 때를 공격할 기회로 판단했다.

특히 공식적인 행사는 날짜와 장소가 미리 정해져 있으므로 평소 이동 경로를 알기 어려운 고위 정치인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재명은 동지들과 함께 준비를 마친 뒤 12월 22일 오전 성당 주변에서 이완용을 기다렸다.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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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밤장수로 변장하다

1909년 12월 22일 오전, 이재명은 서울 종현천주교당 앞에서 이완용이 행사장을 떠나기를 기다렸다.

당시 일부 기록에는 이재명이 군밤장수로 변장했다고 전해지며, 《대한매일신보》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다른 신문에서는 서양식 양복이나 검은 두루마기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기록하는 등 복장에 관한 설명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군밤장수로 변장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 복장의 세부적인 모습은 당시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오전 11시 30분 무렵 이완용은 벨기에 국왕의 추도식에 참석한 뒤 성당을 나와 인력거에 올라탔다.

이재명은 이완용이 자신의 앞을 지나갈 때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 들고 공격했다.

이완용에게 중상을 입히다

이재명은 인력거에 타고 있던 이완용에게 접근하여 단도로 공격했다.

당시 이완용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고 인력거에서 떨어지거나 피하려 했으며, 이재명은 그를 향해 여러 차례 공격을 이어갔다.

이완용은 어깨와 등, 허리 부근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며, 당시의 기록에서는 세 군데에 중상을 입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완용은 공격 직후 의식을 잃거나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재명은 일본 경찰의 제지를 받으면서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하지 못했고 결국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경찰은 이재명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그의 왼쪽 넓적다리를 찔렀으며, 이재명 역시 중상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재명은 현장에서 체포된 뒤에도 자신의 행동이 국권회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일부 기록에는 그가 현장에서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는 내용도 전해진다.[2]

인력거꾼 박원문의 죽음

틀:비극

그러나 이재명의 의거 과정에서는 의도했던 표적인 이완용이 아니라 인력거꾼 박원문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박원문은 당시 이완용을 태운 인력거를 몰고 있던 사람으로, 갑작스러운 공격이 발생하자 이를 제지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재명은 공격을 방해하던 박원문을 칼로 찔렀으며, 박원문은 이 과정에서 입은 상처로 사망했다.

특히 박원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에 넘기는 정치적인 결정을 내린 인물이 아니라 당시 인력거 운전이라는 자신의 일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재명의 의거가 항일 독립운동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한 인력거꾼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모두 역사적인 기록으로 인정해야 한다.

특히 이재명의 사형 판결에서도 박원문의 사망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졌다.

당시 이완용은 살아남았으므로 이재명에게 적용된 혐의 가운데 이완용에 대한 것은 살인미수에 해당했다.

반면 박원문은 실제로 사망했으므로 별도의 살인 혐의가 적용되었다.

따라서 이재명이 이완용을 죽이지 못했는데도 살인죄가 적용된 이유는 이완용에 대한 살인미수를 살인으로 처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박원문의 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재판에서는 박원문의 죽음이 미리 계획된 고의적인 살인이었는가, 아니면 이완용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인가라는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6]

이재명의 독립운동을 평가할 때는 항일투쟁의 목적과 함께 실제로 발생한 무고한 인명피해도 구분하여 기록할 필요가 있다.

의거는 실패했지만

이재명의 의거는 이완용을 제거한다는 목표에서는 실패했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격당했다는 사실은 상당한 정치적인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일본의 통감부와 친일 정치인들은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후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지만, 불과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중요한 정치인이 공격을 당한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재명은 현장에서 체포된 이후에도 자신의 행동을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이라고 설명했으며, 재판 과정에서도 이완용이 저지른 여러 정치적인 행위를 비판했다.

따라서 의거 자체는 실패했지만 이후 독립운동사에서는 경술국치 직전의 대표적인 의열투쟁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었다.

~~이완용을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한제국 총리대신이라는 인간이 경호까지 받으면서 돌아다니다가 스물두 살 청년에게 기습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에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완용이 살아남은 이유

당시 의료기술의 발전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것은 기적 그 자체입니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현상은 기적입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엄청난 일에 대해 다룹니다. 그렇지만 그 기적은 너한테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이재명에게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대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대한의원은 대한제국 말기에 설립된 근대적인 의료기관으로, 이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어지는 의료기관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당시 이완용은 대한제국 정부의 최고위 관료였으므로 의료진의 집중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1910년 1월 작성된 상해감정서에 따르면 이완용은 어깨와 등 부근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며, 갈비뼈 사이의 혈관 손상과 폐 주변의 출혈 등으로 인해 생명이 위험한 상태였다.

의료진은 이러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흉부에 고인 혈액 등을 제거하는 시술을 시행했으며, 이후 이완용은 상당한 기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2008년 서울대학교병원 흉부외과의 김원곤 교수는 당시 작성된 상해감정서를 조사하면서 이 사건과 관련된 의료기록을 발견했다.

특히 이 기록에는 흉부의 외상과 출혈, 치료 과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으며, 한국에서 확인된 초기 흉부외과 진료 및 시술 기록 가운데 중요한 자료로 소개되었다.[7]

따라서 원문에서 이완용이 한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을 받았다고 설명한 부분은 실제로 발표된 의학사 연구와 관련이 있다.

다만 정확하게는 현재까지 발견된 한국의 초기 흉부외과 치료 기록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라고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며, 그 이전에는 누구도 흉부에 대한 외과적 처치를 받은 적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53일 만에 퇴원

의료기록에 따르면 이완용은 중상을 입은 뒤 약 53일 동안 치료를 받았으며, 1910년 2월 14일 병원에서 퇴원했다.

특히 당시 의료진은 이완용의 흉부 손상과 외상성 늑막염 등을 치료했으며, 퇴원 시점에는 상태가 상당히 호전된 것으로 기록했다.

따라서 원문에서 이완용이 이후 17년 동안 병원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는 설명은 확인된 의료기록과 차이가 있다.

물론 흉부 외상을 입은 사람이 이후에도 만성적인 통증이나 후유증을 겪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완용이 실제로 1909년부터 1926년까지 계속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이완용은 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의 체결 과정에 참여했으며, 이후에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 아래에서 귀족 작위와 여러 특권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이재명의 공격 이후 이완용이 정치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사망했으며, 당시의 사망 원인과 1909년에 입은 상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서로 다른 설명이 나타난다.

일부에서는 당시의 상처와 폐 관련 후유증이 건강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사망의 유일하고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다.

~~1909년에 칼을 맞고 겨우 살아났는데 이듬해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참여했다.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막고 싶었던 일을 결국 저질러버린 것이다.~~

상해감정서에 나타난 상처의 차이

흥미로운 점은 이완용의 상처에 관한 설명이 자료에 따라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일부 역사적인 기록에서는 이완용이 허리와 어깨 등 세 군데에 중상을 입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2008년 발견된 상해감정서에서는 왼쪽 어깨와 오른쪽 등 아래 등 두 군데의 자상이 중심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작성한 신문 보도와 실제 의료진이 작성한 감정서의 관찰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의학적인 기록에서는 상처의 위치와 깊이, 혈관과 폐의 손상 여부 등이 중요한 반면, 당시의 신문 보도에서는 공격 횟수와 전체적인 사건의 상황에 더욱 관심을 가졌을 수 있다.

따라서 의거 당시의 정확한 상처 개수와 의학적인 손상 정도를 설명할 때는 신문 보도와 의료감정서를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체포와 재판

경성지방재판소의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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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은 의거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대한제국은 형식적으로 독립국가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법권을 비롯한 여러 국가권한이 일본에 넘어간 상태였다.

특히 1909년 기유각서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사법권까지 장악했으며,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판에서도 일본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재명은 이러한 상황에서 경성지방재판소의 재판을 받게 되었다.

당시 재판에서는 이완용에 대한 살인미수와 박원문의 사망에 관한 혐의가 주요 쟁점이 되었다.

또한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에 참여했던 여러 동지들 역시 체포되어 함께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재명은 자신이 의거를 실행한 책임을 다른 동지들에게 떠넘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는 재판 과정에서 이완용을 제거하려 했던 이유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 협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완용의 여덟 가지 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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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은 재판 과정에서 이완용의 친일행위를 비판하면서 여러 정치적인 죄목을 제시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에 정리된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재명은 다음과 같은 행위들을 문제로 지적했다.

  • 을사늑약 체결에 협력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고 통감부 설치를 가능하게 한 일
  •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데 협력한 일
  • 한일신협약 체결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관여한 일
  •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을 일본에 보내 일본 황실과 혼인하도록 하는 정책에 관여한 일
  • 고종의 일본 방문을 추진하려 했다는 일
  • 순종 황제의 서북지방 순행을 강행하도록 했다는 일
  •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일본에 넘겨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의 통제를 받게 만든 일
  • 일진회의 병합운동과 관련하여 겉으로는 반대하는 듯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일본과의 병합을 추진했다는 일

이러한 주장은 이재명이 단순히 이완용이라는 인물을 개인적으로 미워했기 때문에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이완용의 정치적인 행위가 국권침탈에 협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판단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위의 내용은 재판에서 이재명이 제기했던 역사적·정치적 비판을 정리한 것으로, 모든 항목이 당시 재판에서 별도의 범죄로 인정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4]

2천만 동포가 공범이라는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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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대통령께서는 인터넷에 떠도는 명언 대다수가 사실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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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재판 과정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는 공범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당시 일본인 재판장과 수사관들은 이완용에 대한 공격을 준비한 인물들이 누구인지 확인하려 했으며, 이재명에게 관련자들의 이름과 역할을 밝히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이재명은 자신의 행동이 개인적인 원한이나 일부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음모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의거에 찬성한 사람은 대한제국의 2천만 동포 전체라는 취지로 답변했으며, 이러한 발언은 이후 독립운동사에서 널리 알려졌다.

“

공범이 있다면 2천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

”
 
— 이재명의 재판 관련 발언

이러한 표현은 실제로 2천만 명이 모두 거사에 직접 참여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국권침탈에 대한 저항이 자신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정치적인 발언이었다.

특히 이재명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을 흉행이 아니라 의행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완용을 공격한 행동이 국가를 위한 것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후대에 이재명을 대표하는 중요한 일화로 기억되었다.[2]

박원문 사망에 대한 법적 논쟁

이재명의 재판에서는 이완용을 제거하려던 정치적인 목적뿐 아니라 인력거꾼 박원문의 사망에 대한 법적 책임도 문제가 되었다.

특히 박원문은 이재명이 사전에 제거하려던 대상이 아니었으며, 의거 과정에서 공격을 제지하려다가 사망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당시 재판에서는 박원문의 죽음을 사전에 계획된 고의적인 살인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중요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이재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려는 검사의 주장과 이에 반대했던 변호인들의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변호인들은 박원문의 사망이 미리 계획된 살인이 아니라 의거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결국 이재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재판이 단순히 독립운동가의 정치적인 행위를 처벌하는 문제뿐 아니라 실제로 발생한 인명피해에 대한 법적 판단까지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6]

1910년 사형 선고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재판소는 이재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이재명에게 적용된 혐의는 이완용에 대한 살인미수와 박원문의 사망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함께 체포된 여러 동지들에게도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특히 김정익과 김병록, 조창호 등 주요 관련자들은 중형을 선고받았으며, 거사 준비 과정에서 자금과 무기를 마련했던 다른 인물들도 처벌을 받았다.

이재명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으며, 일본의 법률이 자신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심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항소와 상고가 제기되었지만 1910년 7월 12일 경성공소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고, 같은 해 9월 15일 고등법원에서도 상고가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었다.[3]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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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9월 30일

이재명은 1910년 9월 30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에 병합되어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특히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이루어진 지 불과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이었으며, 10월 1일에는 조선총독부가 정식으로 출범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이재명은 자신이 국권을 지키려고 했던 대한제국이 결국 일본에 병합된 뒤 사형을 당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이재명의 나이는 만 22세였으며, 세는나이로는 24세였다.

특히 의거를 실행했던 1909년 12월 22일에도 만 22세였으므로, 원문에서 단순히 스무 살이라고 설명한 것은 젊은 나이를 강조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재명의 생몰일은 일부 오래된 자료에서 차이가 있지만,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은 판결문과 당시의 신문 기록 등을 근거로 1887년 10월 16일부터 1910년 9월 30일까지로 정리하고 있다.

마지막 발언

이재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남긴 것으로 알려진 발언 가운데 특히 유명한 내용은 자신의 목숨을 빼앗더라도 충성된 정신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는 표현이다.

또한 자신이 죽은 뒤에도 수십만 명의 이재명이 다시 나타나 일본의 침략에 저항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도 전해진다.

“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

”
 
— 이재명의 재판 관련 발언으로 전해지는 문구

이러한 표현은 독립기념관의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도 소개되어 있다.

다만 원문에서 이 발언을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외쳤다고 설명한 부분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관련 자료에서는 이 표현을 주로 재판 과정에서의 발언으로 소개하고 있으므로, 실제 형 집행 직전에 동일한 문장을 외쳤는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남긴 발언이 후대에 전해지는 동안 마지막 유언이나 순국 직전의 외침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사료에서 확인되는 시점과 후대의 전승을 구분하는 것이 적절하다.

유해의 행방

이재명이 순국한 이후 그의 시신이 정확히 어디에 매장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시신을 가족들에게 인도하지 않거나 매장 장소에 관한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이재명 역시 실제 유해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은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원문에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가 안장되었다고 설명한 부분은 실제 유해의 안장 여부와 구분해야 한다.

국가보훈부의 공훈전자사료관에는 이재명의 묘소정보와 관련하여 국립서울현충원이 기재되어 있지만, 이는 반드시 실제 유해가 확인되어 그곳에 매장되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특히 직계 후손과 유해의 소재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후대의 추모와 선양사업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는 보도가 존재한다.[8]

아내 오인성

여교사이자 독립운동가의 아내

이재명의 배우자는 오인성이다.

오인성은 평양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근대적인 여성교육을 받은 뒤 황해도 재령의 진초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여성들에게 근대교육을 제공하는 학교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지만 여전히 여성의 교육기회는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오인성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그가 당시의 새로운 교육운동에 참여했던 여성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인성은 1908년 무렵 이재명과 결혼했으며, 이후 남편의 국권회복운동과 관련된 여러 사건을 경험했다.

특히 《백범일지》에는 이재명이 오인성을 권총으로 위협하자 김구와 노백린이 이를 제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따라서 오인성은 단순히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배우자라는 사실뿐 아니라 당시의 복잡하고 위험한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인물이었다.

남편의 순국 이후

오인성은 이재명이 순국한 이후에도 교육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전기자료에서는 그가 함경도 성진의 보신여학교와 북간도 일대의 교육기관에서 교사로 활동했으며, 이후 연해주와 중국 등 여러 지역에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활동에 참여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오인성의 구체적인 활동과 사망 경위에 관해서는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 여러 설명이 존재한다.

특히 일부 자료에서는 3·1운동 이후 귀국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고 설명하지만, 정확한 사망일과 원인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사료 확인이 필요하다.

따라서 오인성 역시 독립운동가의 배우자로서 겪었던 어려움과 교육활동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9]

서훈과 추모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재명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국가 수립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훈장으로, 대통령장은 건국훈장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이다.

특히 이재명은 1909년 이완용 처단 의거를 실행하고 1910년 사형으로 순국했다는 점에서 한말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며, 이후 이재명의 행적을 여러 독립운동 관련 자료와 전시, 교육 등을 통해 소개해 왔다.

또한 국가보훈부는 이재명을 2001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그의 의거와 순국을 기념했다.[2]

명동성당 앞 의거 터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성당 부근에는 이재명의 의거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이 장소는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이 이완용을 공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시민들이 관련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도록 안내되어 있다.

국가보훈부의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역시 이곳을 이재명의거지라는 이름으로 등록하고 있다.

다만 1909년 당시의 신문자료와 지도 등을 검토한 연구에서는 실제 의거가 시작된 위치와 박원문이 사망한 위치가 서로 달랐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에서는 당시 명동성당 주변의 도로와 건물 배치, 신문기사 등을 비교하여 의거가 진행된 장소를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오늘날의 표지석은 의거가 발생한 지역을 기념하는 시설로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 공격이 시작된 정확한 지점을 완벽하게 표시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10][5]

진안의 이재명 의사 기념시설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의 마이산 일대에도 이재명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이 시설은 이재명의 출생지가 진안이라는 뜻에서 조성된 것은 아니며, 이재명의 본관이 진안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특히 이재명은 평양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본관과 출생지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진안의 기념시설에는 이재명의 의거를 기리는 동상과 관련 시설이 마련되었으며, 후대에 그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장소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2019년에는 시설의 관리 상태가 좋지 않고 일반 방문객들의 이용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8]

이러한 사례는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시설을 조성하는 것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하는 작업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치인 이재명과의 관계

同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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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같고 한자도 같다

이재명 의사는 오늘날의 정치인 이재명과 이름이 같다.

특히 단순히 한글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한자도 李在明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며, 역사적 활동과 직업, 정치적인 환경도 완전히 다르다.

독립운동가 이재명은 1887년에 태어나 1910년에 순국했으며, 당시 일본의 국권침탈에 반대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반면 정치인 이재명은 1960년대에 태어나 변호사와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2025년 6월부터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다.

따라서 두 인물은 이름과 한자가 같다는 사실 이외에 직접적인 역사적 관계가 확인되지 않는다.[11]

원문에서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사용한 여러 표현은 작성자의 정치적인 풍자와 비판을 담고 있다. 다만 이러한 풍자적인 표현을 역사적인 사실관계에 관한 확정적인 설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행적과 현대 정치인에 관한 논란은 별도의 자료를 통해 구분해서 판단해야 한다.

12월 22일의 우연

더욱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 모두 12월 22일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운동가 이재명은 1909년 12월 22일 이완용 처단 의거를 실행했다.

반면 정치인 이재명의 공식적인 주민등록상 생년월일은 1964년 12월 22일이다.

따라서 두 사람은 이름과 한자가 같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의거일과 정치인의 법적 생일이 일치하는 우연까지 가지고 있다.

특히 정치인 이재명은 과거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행적을 언급하면서 명동성당 앞에서 있었던 의거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12월 22일이라는 날짜가 일치한다는 사실만으로 두 사람 사이에 역사적·정치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볼 근거는 없다.

또한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순국일은 12월 22일이 아니라 1910년 9월 30일이므로, 원문에서 12월 22일을 순국일이라고 서술한 부분은 정정이 필요하다.

정확하게는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의거일과 정치인 이재명의 법적 생일이 같은 날이다.[2][11]

~~이름도 똑같고 한자도 똑같은데 한 사람의 의거일이 다른 사람의 호적상 생일이다. 역사적인 인연이라기보다는 상당히 기묘한 우연이다.~~

평가

한말의 대표적인 의열투쟁가

이재명은 대한제국 말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의열투쟁가 가운데 한 명이다.

특히 그는 미국에서 생활하던 시절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했으며, 1907년 귀국한 이후에는 일본의 침략에 협력하는 정치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외교권과 군사권, 사법권 등을 차례로 상실하고 있었던 시대적 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1909년 12월 22일 이완용 처단 의거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 협력한 최고위 관료를 직접 공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의거는 이완용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으며, 이 과정에서 인력거꾼 박원문이 사망하는 인명피해도 발생했다.

따라서 이재명의 독립운동을 평가할 때는 일본의 국권침탈에 저항했던 목적과 함께 실제 의거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도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재명은 자신이 의거에 참여했던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에 있다고 설명했으며, 재판 과정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유지했다.

이러한 행적은 후대에 그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안중근 의거와의 비교

이재명의 의거는 1909년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함께 자주 언급된다.

특히 두 사건은 불과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에 발생했으며, 모두 대한제국의 국권침탈과 관련된 핵심 인물들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사건의 결과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사망하게 했지만, 이재명은 이완용에게 중상을 입혔음에도 목숨을 빼앗는 데 실패했다.

또한 안중근의 의거는 국제적인 외교무대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일본과 대한제국의 정치적인 상황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반면 이재명의 의거는 대한제국 내부의 친일 정치인들을 직접 공격했다는 점에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완용은 의거 이후에도 살아남아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체결에 관여했으므로, 이재명의 정치적인 목표는 결과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재명의 의거는 대한제국 말기에도 일본의 국권침탈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젊은 나이에 남긴 역사적 흔적

이재명의 생애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 가운데 하나는 그가 매우 젊은 나이에 이러한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는 1904년부터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생활했고, 1907년 귀국한 뒤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1909년에는 이완용 처단 의거를 실행했다.

당시 나이는 만 22세였으며,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도 만 23세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약 3년 동안 국권회복운동과 의열투쟁에 참여했으며, 결국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된 직후 순국했다.

이러한 생애는 대한제국 말기에 국권침탈에 저항했던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재명은 대한제국의 국권침탈에 협력하던 고위 정치인을 처단하기 위해 의열투쟁을 전개했으며, 젊은 나이에 순국한 한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명이다.

여담

  • 1887년 10월 16일 태어나 1910년 9월 30일 순국했다. 당시 나이는 만 22세였다.
  • 본관은 진안 이씨이며, 다른 이름으로 이수길을 사용한 기록이 있다.
  • 평양 출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라고 설명한다.
  • 어린 시절 평양 일신학교에서 공부했다.
  • 1904년 해외 이민을 결심하고 하와이로 건너갔다.
  • 1906년 3월 미국 본토로 이동했으며,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 공립협회는 안창호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해외 한인 민족운동단체였다.
  • 1907년 10월 9일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 1909년 1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 했지만 순종 황제의 안전을 우려한 안창호의 만류로 실행하지 않았다.
  • 이후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활동 방향을 변경했다.
  • 1909년 11월부터 동지들과 함께 이완용과 이용구 등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 김정익과 이동수, 박태은, 조창호, 김병록 등 여러 인물이 의거 준비에 참여했다.
  •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공격했다.
  • 당시 명동성당에서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이 열리고 있었다.
  • 일부 자료에서는 군밤장수로 변장했다고 전해지지만, 당시 신문마다 복장에 대한 설명이 다르다.
  • 이완용에게 중상을 입혔지만 결국 처단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 의거 과정에서 이완용의 인력거꾼 박원문이 사망했다.
  • 일본 경찰에게 제압되는 과정에서 이재명도 다리에 중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 《백범일지》에는 김구와 노백린이 이재명의 무기를 맡아 보관했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 그러나 실제 의거 당일에도 이재명은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 이재명이 권총 대신 단도를 사용한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 이완용은 당시 대한의원에서 치료받았으며, 53일 동안 입원한 뒤 퇴원했다.
  • 이완용의 치료기록은 한국 흉부외과의 초기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 재판 과정에서 이완용의 국권침탈 행위를 비판하며 여러 정치적인 죄목을 제시했다.
  • 공범에 관한 질문에 2천만 동포를 언급하는 발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 1910년 7월 12일 항소가 기각되었으며, 같은 해 9월 15일 상고도 기각되었다.
  • 1910년 9월 30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2001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 명동성당 부근에는 이재명의 의거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에도 이재명을 기리는 기념시설이 있다.
  • 아내 오인성은 교육활동을 했던 여성으로, 이후에도 독립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이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 정치인 이재명과 한글 이름뿐 아니라 한자까지 같다.
  •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의거일인 12월 22일은 정치인 이재명의 법적 생일과도 같다.
  • 그러나 이재명 의사의 순국일은 12월 22일이 아니라 9월 30일이다.
  • 이재명의 생애와 의거에 관한 주요 자료는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신편 한국사》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요 연표

날짜 주요 사건
1887년 10월 16일 평양에서 출생
1904년 해외 이민 준비 및 하와이행
1905년 하와이에서 노동자로 생활
1906년 3월 미국 본토로 이동 및 공립협회 가입
1907년 10월 9일 일본을 거쳐 귀국
1909년 1월 평양에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909년 11~12월 이완용 및 이용구 처단 계획 준비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 앞 이완용 처단 의거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재판소 사형선고
1910년 7월 12일 항소 기각
1910년 9월 15일 상고 기각 및 사형 확정
1910년 9월 30일 교수형으로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2001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같이 보기

참고 자료

각주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