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만약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 같이 떠들 사람? 노바위키 디스코드

高句麗
고구려 관련 문서
이 문서는 고구려의 인물, 사건, 제도, 문화 및 기타 관련 내용을 다룹니다.

개요

해씨 고구려설(解氏高句麗說)은 고구려 초기의 왕실이 본래 해씨(解氏) 계통이었으며, 이후 고씨(高氏) 계통으로 왕계가 변화했다는 역사학적 가설이다. 일반적으로 제2대 유리명왕부터 제5대 모본왕까지의 왕들을 해씨 왕계로 보고, 제6대 태조대왕의 즉위를 계기로 고씨 왕계가 등장했다고 해석한다.

이 학설의 근거는 《삼국유사》에서 고구려 초기 국왕들의 성을 해씨라고 기록한 사실과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여러 왕과 왕족의 이름에 해(解)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유리명왕과 대무신왕, 민중왕의 성을 명시적으로 해씨라고 기록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대무신왕을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 부르고, 민중왕의 이름을 해색주(解色朱), 모본왕의 이름을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解愛婁)라고 기록했다.

반면 제6대 태조대왕은 고궁(高宮)이라는 이름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국조왕(國祖王)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일부 연구자들은 태조대왕의 즉위가 단순한 왕위 계승이 아니라 고구려 왕실 내부의 중요한 정치적 변화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여기에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고구려의 왕권을 본래 소노부 또는 연노부가 가지고 있었으나, 이후 계루부가 차지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따라서 초기의 해씨 왕실이 소노부에 속했고 태조대왕 때 계루부 고씨 왕실이 등장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학설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견해가 많다.

일부 연구자들은 해씨 왕계에서 고씨 왕계로의 변화 자체는 인정하더라도, 이것이 서로 다른 부족집단 사이의 왕권 교체가 아니라 계루부 내부의 방계 왕족이 왕위를 계승한 사건이었다고 해석한다.

또한 해씨와 고씨가 실제로 서로 다른 혈통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고유한 이름이나 칭호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차이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고구려 초기에는 현대적인 의미의 성씨제도가 확립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해씨와 고씨를 오늘날의 서로 다른 성씨 가문과 완전히 동일하게 이해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특히 이러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해씨 왕계의 존재 가능성과 고구려가 해씨 왕조에서 고씨 왕조로 바뀌는 역성혁명을 겪었다는 주장이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왕계가 달라졌더라도 같은 왕실 내부의 방계에서 새로운 국왕이 등장했을 수 있으며, 해씨와 고씨의 표기가 서로 다른 이유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삼국사기》 주석은 고구려 초기 왕들의 해씨 표기와 태조대왕 이후의 고씨 왕계를 둘러싼 여러 연구를 소개하면서, 왕실 내부에서 새로운 방계가 등장했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설명한다.[1]

동북아역사재단의 《고구려통사》 역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교체와 해씨에서 고씨로의 왕계 변화를 서로 다른 문제로 구분하면서, 계루부 내부의 변화로 이해하는 연구가 다수설로 자리 잡았다고 정리한다.[2]

결국 해씨 고구려설은 단순히 고구려 왕들의 성이 무엇이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고구려 초기의 여러 정치세력이 어떻게 결합했고 왕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려는 학설이다.

기본 정보

해씨 고구려설
한자 解氏高句麗說
분야 한국 고대사, 고구려 정치사, 왕실 계보 연구
연구 대상 고구려 초기 왕실의 성씨와 왕위 계승
주요 쟁점 해씨 왕계와 고씨 왕계의 관계
해씨 왕계로 추정하는 시기 유리명왕 ~ 모본왕
왕계 변화의 분기점 태조대왕 즉위
사료상 즉위 연도 53년 (태조대왕 원년)
초기 왕계의 대표적인 성씨 표기 解氏
태조대왕 이후 대표적인 성씨 표기 高氏
관련 정치집단 계루부, 소노부, 연노부
주요 사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지》, 《후한서》, 《위서》
주요 연구자 김철준, 김용선, 노태돈, 김현숙 등
학계의 주요 논점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교체설, 계루부 내부의 왕계 교체설, 성씨 표기 차이설
학설의 성격 확정된 역사적 사실이 아닌 사료 해석에 따른 가설

학설의 배경

고구려 왕실의 성씨

오늘날 고구려의 왕실은 일반적으로 고씨 왕실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은 고주몽(高朱蒙)이라고도 불리며, 후대의 고구려 국왕들도 대체로 고씨 왕실에 속한 것으로 설명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역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면서 국호를 고구려라고 정하고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고 기록한다.

이러한 서술에 따르면 고구려 왕실은 건국 초기부터 고씨였으며 이후에도 그 계보가 계속 이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역사자료에서는 이와 다른 기록이 나타난다.

《삼국유사》에서는 주몽이 본래 해씨였다고 설명하며, 유리명왕과 대무신왕, 민중왕의 성을 해씨라고 기록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도 초기 국왕들의 이름에 해(解)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고구려 왕실이 처음부터 일관되게 고씨였다고 설명하는 전승과 초기의 해씨 왕계를 보여주는 전승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

고구려 초기의 왕위 계승

고구려 초기의 왕위 계승은 후대의 부자상속과 동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제3대 대무신왕이 사망한 뒤에는 어린 태자를 대신하여 그의 동생인 민중왕이 즉위했다고 전해진다.

민중왕이 사망한 뒤에는 대무신왕의 아들인 모본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왕위 계승이 국왕의 아들에게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만으로 운영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모본왕이 암살된 뒤에는 기존 태자가 아니라 다른 왕족인 태조대왕이 즉위했다.

이러한 왕위 계승의 변화는 고구려 초기의 정치적인 권력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삼국유사》의 기록

해씨 고구려설을 뒷받침하는 가장 직접적인 사료 가운데 하나는 《삼국유사》다.

《삼국유사》는 일연이 13세기에 편찬한 역사서로, 《삼국사기》에 실리지 않은 여러 건국설화와 전승을 수록하고 있다.

주몽의 본래 성씨

《삼국유사》 권1 기이편의 고구려 관련 주석에는 주몽이 본래 해씨였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이는 본래의 성은 해씨였으나 천제의 아들로서 햇빛을 받아 태어났다고 하여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는 의미다.

이 기록은 주몽이 처음부터 고씨였던 것이 아니라 해씨에서 고씨로 성을 변경했다는 전승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해당 내용은 《삼국유사》의 주석 형태로 전해지는 설명이므로 실제 주몽이 특정한 시점에 법적인 성씨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국사편찬위원회도 《삼국사기》의 고씨 성씨 관련 주석에서 해당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3]

유리명왕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제2대 유리명왕의 성을 해씨라고 기록했다.

유리명왕은 일반적으로 주몽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주몽이 고씨였다는 전승과 그의 아들이 해씨였다는 기록을 함께 살펴보면 성씨의 표기에 차이가 나타난다.

이러한 차이는 초기 고구려 왕실에서 해씨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씨와 해씨가 실제로 서로 다른 혈통을 의미했는지, 아니면 서로 다른 표기방식이었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대무신왕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제3대 대무신왕의 성도 해씨라고 기록했다.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아들로, 18년부터 44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다른 왕호를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 기록한다.

따라서 대무신왕의 성이 해씨였다는 전승과 실제 왕호에 해(解)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함께 확인된다.

민중왕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제4대 민중왕 역시 해씨라고 기록했다.

민중왕의 이름은 색주(色朱)로 전하며, 《삼국사기》에서는 해색주(解色朱)라고 표기한다.

이러한 기록도 초기 고구려 왕실에서 해씨라는 표기가 사용되었다는 견해의 근거가 된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민중왕을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기록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대무신왕의 아들로 기록한다.

이처럼 왕실의 친족관계에도 서로 다른 전승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초기 왕계의 복원에 어려움이 있음을 보여준다.

초기 국왕의 이름

해씨 고구려설에서는 초기 고구려 국왕과 왕족의 이름에 해(解)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물 기록된 이름·왕호 관련 내용
동명성왕 주몽(朱蒙), 본래 해씨였다는 전승 《삼국유사》에서 본성을 해씨라고 설명
유리명왕 유리(琉璃), 해씨 《삼국유사》 왕력에서 해씨로 표기
대무신왕 무휼(無恤),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해(解)자가 포함된 왕호
민중왕 해색주(解色朱), 해읍주(解邑朱) 해(解)자가 포함된 이름
모본왕 해우(解憂), 해애루(解愛婁) 해(解)자가 포함된 이름
해명태자 해명(解明) 유리명왕의 아들, 왕태자
태조대왕 궁(宮), 고궁(高宮) 고씨 왕계의 시작으로 해석하기도 함
소수림왕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해미류왕(解味留王) 후대 왕호에도 해(解)자가 등장

대해주류왕

대무신왕은 《삼국사기》에서 대해주류왕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해(解)라는 글자가 왕호에 직접 등장한다는 점에서 초기 해씨 왕계의 존재를 추정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그러나 대해주류왕이라는 왕호에 해자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글자가 반드시 현대적인 성씨를 의미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고구려 초기의 왕명과 왕호는 본래의 고유한 언어를 한자로 기록한 경우가 많았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해색주

민중왕의 이름은 해색주다.

《삼국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閔中王, 諱解色朱, 大武神王之弟也.

이는 민중왕의 이름이 해색주이며 대무신왕의 동생이라는 의미다.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민중왕의 성을 해씨, 이름을 색주로 구분하여 기록했다.

따라서 민중왕에 관해서는 해(解)를 성씨로 명시한 전승과 이름의 일부로 기록한 전승이 함께 존재한다.[4]

해우와 해애루

모본왕의 이름은 해우 또는 해애루로 전해진다.

《삼국사기》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慕本王, 諱解憂, 一云解愛婁.

이는 모본왕의 이름이 해우이며 해애루라고도 한다는 뜻이다.

이 기록은 해씨 왕계가 모본왕까지 이어졌다는 견해의 중요한 근거다.[5]

해명태자

해명태자는 유리명왕의 아들로, 4년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그의 이름 역시 해명(解明)으로 표기된다.

《삼국사기》에는 해명태자가 황룡국에서 보낸 강한 활을 꺾어 상대를 모욕한 사건과, 이후 부왕의 명령에 따라 자결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해명태자의 이름은 해(解)라는 글자가 국왕뿐 아니라 왕자들에게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해명이라는 이름이 실제 성과 이름으로 구분된 것인지, 하나의 개인적인 이름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6]

태조대왕의 즉위

해씨 고구려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제6대 태조대왕의 즉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모본왕은 53년 시종인 두로에게 살해되었다.

모본왕에게는 왕자 익(翊)이 있었으며, 이미 태자로 책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본왕이 죽은 뒤에는 익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궁(宮)이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모본왕의 암살

《삼국사기》에서는 모본왕이 성격이 포악하고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그는 신하들에게 잔혹하게 행동했으며, 결국 자신의 시종인 두로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두로의 암살이 실제로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인 세력의 갈등과 관련되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부 연구에서는 모본왕의 죽음과 태조대왕의 즉위를 기존 왕계의 몰락과 새로운 왕계의 등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태조대왕이 직접 암살을 지시했다는 사실은 사료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모본왕의 암살을 곧바로 태조대왕의 계획적인 쿠데타로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모본왕의 태자

모본왕은 즉위 원년인 48년에 왕자 익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모본왕이 사망하자 익은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익의 자질이 부족하여 국가를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궁을 추대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기존의 태자를 제치고 다른 왕족이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는 당시 왕실 내부에 중요한 정치적인 변화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태조대왕의 즉위

53년 태조대왕이 즉위했다.

그의 이름은 궁(宮)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태조대왕을 유리명왕의 아들인 재사의 아들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계보에는 연대와 세대의 문제가 존재한다.

태조대왕이 실제로 유리명왕의 손자였다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기간의 재위와 생애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연구에서는 태조대왕가의 계보가 후대에 기존 왕실의 계보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태조대왕의 즉위를 해씨 왕계에서 고씨 왕계로의 변화와 연결하는 견해들을 소개하고 있다.[1]

태조대왕이라는 왕호

태조대왕은 고구려 제6대 국왕인데도 태조(太祖) 또는 국조(國祖)라고 불린다.

일반적으로 태조라는 칭호는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인물이나 왕실의 시조를 기리는 데 사용된다.

따라서 제6대 국왕에게 태조라는 칭호가 붙었다는 사실은 그가 단순한 왕위 계승자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왕계의 시조

해씨 고구려설에서는 태조대왕이 고씨 왕계의 시조였기 때문에 태조 또는 국조라고 불렸다고 해석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주몽부터 모본왕까지의 왕실과 태조대왕 이후의 왕실 사이에는 정치적·계보적인 단절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해동고기》를 인용한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태조대왕을 고구려 국조왕 고궁(高句麗國祖王高宮)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태조대왕을 새로운 왕계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이해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다.[7]

왕실의 재건자라는 해석

그러나 태조라는 칭호가 반드시 새로운 혈통의 왕조를 창건했다는 의미인 것은 아니다.

태조대왕이 고구려의 정치제도를 정비하고 주변의 여러 집단을 통합하여 국가의 기반을 강화했기 때문에 이러한 칭호를 받았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또한 국조라는 표현이 국가의 창업자가 아니라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국왕이라는 의미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도 있다.

따라서 태조대왕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 해씨 왕실이 멸망하고 완전히 다른 고씨 왕실이 등장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왕호의 성립 시기

태조대왕이라는 칭호가 실제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일부 연구에서는 태조대왕의 재위 당시부터 사용되었다고 보지만, 다른 견해에서는 후대의 역사편찬 과정에서 국조왕이라는 이름이 태조대왕으로 변경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사실은 왕호를 특정한 정치적 사건의 직접적인 증거로 사용하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소노부와 계루부

해씨 고구려설은 고구려의 5부족 또는 고구려 5부 체제에 관한 연구와도 연결된다.

고구려 초기에는 여러 정치집단이 결합하여 국가를 형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고구려에 다섯 주요 집단이 존재했다고 기록했다.

부 한자 특징
소노부·연노부 消奴部·涓奴部 본래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됨
절노부 絶奴部 전통적으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었던 집단
순노부 順奴部 고구려의 주요 정치집단 가운데 하나
관노부 灌奴部 고구려의 주요 정치집단 가운데 하나
계루부 桂婁部 이후 고구려의 왕권을 장악한 중심 집단

《삼국지》의 기록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존재한다.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이는 본래 연노부가 왕을 배출했지만 점차 세력이 약해지자 계루부가 대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후한서》에서는 연노부를 소노부라고 표기했다.

두 명칭은 일반적으로 동일하거나 밀접하게 관련된 집단의 다른 표기로 이해된다.

이 기록은 고구려의 왕권이 역사적인 어느 시점에 다른 정치집단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8]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교체

일부 연구에서는 초기의 해씨 왕실이 소노부에 속했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유리명왕부터 모본왕까지 해씨 계통의 국왕들이 왕위를 차지했고, 태조대왕이 즉위하면서 계루부 고씨 왕실이 권력을 장악했다.

따라서 《삼국지》의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권 교체가 바로 태조대왕의 즉위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오늘날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주몽 시대의 교체라는 해석

다른 연구에서는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변화가 태조대왕 시대가 아니라 주몽의 고구려 건국과 관련된 사건이었다고 본다.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비류국의 송양과 경쟁하다가 승리하고 그 집단을 자신의 지배 아래에 편입시켰다고 기록한다.

일부 연구에서는 송양을 기존의 소노부 세력과 연결하여 해석한다.

이 경우 주몽을 중심으로 한 계루부가 기존의 소노부 세력을 대신하여 새로운 왕권을 형성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권력 이동은 이미 고구려의 건국 과정에서 일어났고, 태조대왕의 즉위는 그보다 후대의 계루부 내부에서 발생한 변화일 수 있다.[9]

해씨 왕계와 고씨 왕계의 관계

해씨 왕계에서 고씨 왕계로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들 견해는 모두 해씨와 고씨의 기록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정치적인 변화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1. 서로 다른 왕실의 교체설

이 견해에서는 초기의 해씨 왕실과 태조대왕 이후의 고씨 왕실을 서로 다른 계통으로 이해한다.

모본왕의 죽음을 계기로 해씨 왕실이 권력을 잃고, 새로운 고씨 왕실이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태조대왕이라는 왕호는 새로운 왕실의 창업자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반드시 고구려라는 국가 자체가 멸망했다가 다시 건국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국가의 정치체제와 주민, 영토가 유지되는 상황에서도 왕위에 오르는 지배가문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계루부 내부의 왕계 교체설

이 견해는 해씨 왕계와 고씨 왕계 사이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두 세력이 모두 계루부 내부에 속했다고 본다.

따라서 고구려의 왕권을 가진 정치집단 자체가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계루부 안에서 서로 다른 왕족 계통 사이에 왕위가 이동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리명왕부터 모본왕까지의 왕계가 해씨 계통이었다면 태조대왕 이후에는 같은 계루부에 속한 다른 계통의 고씨 왕족이 왕위를 차지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견해는 왕실의 변화와 부족단위의 지배권 교체를 구분한다는 특징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러한 해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한다.[2]

3. 동일 계통의 성씨 표기설

다른 견해에서는 해씨와 고씨가 실제로 서로 다른 혈통을 의미했는지부터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구려 초기의 인명과 왕호는 한자가 완전히 정착되기 이전의 고유어를 기록한 형태였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나 칭호를 서로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 일이 발생했을 수 있다.

이 경우 해씨와 고씨라는 글자의 차이만으로 서로 다른 혈통의 왕실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또한 후대의 편찬자가 고구려 초기 왕실의 이름을 중국식 성씨 체계에 따라 정리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 역시 두 글자가 실제로 동일한 고유어를 가리켰다는 사실이 직접 확인된 것은 아니다.

주요 학설 비교

구분 핵심 주장 주요 쟁점
소노부 해씨 → 계루부 고씨 태조대왕 때 서로 다른 정치집단 사이의 왕권 교체 《삼국지》의 소노부·계루부 기록을 어느 시기에 적용할 것인가
계루부 해씨 → 계루부 고씨 태조대왕 때 계루부 내부의 방계 왕족이 왕위를 계승 왕계의 차이와 부족단위의 교체를 구분해야 한다는 견해
해씨와 고씨의 표기 차이 두 표기가 같은 왕실의 고유어 이름이나 칭호를 달리 나타냈을 가능성 고구려 초기의 한자 사용과 성씨제도의 성격

이들 견해는 서로 다른 사료와 해석을 바탕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사료만으로 하나의 견해를 확정된 역사적 사실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연구사의 전개

해씨 고구려설과 관련된 연구는 고구려 초기 왕실의 계보와 정치적인 지배집단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

김철준

김철준은 고구려 초기의 정치집단과 왕실의 성립과정을 연구한 역사학자다.

그는 태조대왕의 즉위가 초기 고구려의 왕실 계보에서 중요한 변화를 나타낼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러한 연구는 태조대왕을 주몽의 후손으로 설명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여러 계통의 전승이 결합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하는 데 기여했다.

김용선

김용선은 유리명왕과 고구려 초기 왕실에 관한 연구에서 해씨 왕계와 소노부·계루부의 관계를 검토했다.

그는 해씨 왕계가 먼저 왕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태조대왕 시대에 새로운 왕실이 등장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러한 견해는 《삼국지》의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권 이동을 태조대왕의 즉위와 연결하는 연구와 관련된다.

노태돈

노태돈은 고구려 초기 왕계와 건국전승의 성립과정을 연구하면서 주몽에서 모본왕으로 이어지는 기록과 태조대왕 이후의 기록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초기의 기록과 태조대왕 이후의 기록이 서로 다른 계통의 전승을 반영할 가능성에 주목했다.

또한 후대의 소수림왕이 초기 왕실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소해주류왕이라는 왕호를 사용한 사실을 중요하게 보았다.

이는 후대 고구려 왕실이 초기의 건국전승과 왕실의 정통성을 다시 정리했을 가능성을 검토하는 근거가 된다.

김현숙

김현숙은 1994년의 연구에서 해씨 왕계와 고씨 왕계의 관계를 계루부 내부의 변화로 이해하는 견해를 제시했다.

이 견해에서는 주몽과 초기 왕실이 계루부의 형성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태조대왕의 즉위는 계루부 내부의 다른 계통이 왕권을 차지한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변화는 태조대왕 시대가 아니라 주몽의 건국과정에 해당할 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고구려통사》는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계루부 내부의 해씨·고씨 왕계 변화설이 다수설로 발전했다고 정리한다.[2]

소수림왕의 왕호 문제

해씨 고구려설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 가운데 하나는 제17대 소수림왕이다.

소수림왕은 371년부터 384년까지 재위했으며, 고구려의 불교 수용과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소수림왕을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이라고도 기록했다.

또한 《해동고승전》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는 이름도 등장한다.

대해주류왕과 소해주류왕

대무신왕의 다른 왕호는 대해주류왕이다.

반면 소수림왕의 다른 왕호는 소해주류왕이다.

이러한 두 왕호는 서로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일부 연구에서는 소수림왕이 대무신왕의 왕호를 계승하거나 그를 존숭하는 의미에서 비슷한 이름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고구려 왕실에서 초기의 국왕과 후대의 국왕을 연결하는 전승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줄 수 있다.[10]

후대에도 남아 있는 해자

만약 해씨와 고씨가 완전히 다른 혈통이었고, 태조대왕 이후의 고씨 왕실이 해씨 왕실의 흔적을 없애려 했다면 소수림왕에게 해자가 포함된 왕호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해씨와 고씨가 처음부터 동일하거나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계통이었을 수 있다.

둘째, 새로운 왕실이 이전 왕실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해 해씨 계통의 왕호를 의도적으로 사용했을 수 있다.

셋째, 해자가 현대적인 의미의 성씨가 아니라 고유어의 특정한 표현을 한자로 기록한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소수림왕의 왕호만으로 어느 해석이 정확한지 확정할 수는 없다.

해모수와 해부루

고구려의 건국설화에는 해씨로 보이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해모수(解慕漱)와 해부루(解夫婁)가 있다.

해모수

해모수는 일부 건국전승에서 주몽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천제와 관련된 신성한 존재로 설명되며, 북부여의 건국과 연결되는 전승도 가지고 있다.

해모수의 이름에 해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여와 고구려의 왕실 계보에서 해라는 표현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건국전승에서 해모수가 동일한 위치와 역할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해모수가 현대적인 의미의 해씨 성을 가진 실존 인물이었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해부루

해부루는 부여와 관련된 건국전승에 등장하는 국왕이다.

《삼국유사》에서는 해모수와 해부루를 연결하는 북부여의 전승이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부여계 인물들의 이름에도 해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해씨라는 표현이 고구려 왕실만의 독립적인 성씨가 아니라 부여계 정치집단의 이름이나 칭호와 관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백제와의 관계

《삼국유사》에서는 백제의 왕실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해씨를 사용했다는 취지의 내용을 기록했다.

그러나 후대의 백제 왕실은 일반적으로 부여씨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초기 왕실의 성씨나 계보를 이해할 때 특정한 한자 표기가 항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해씨라는 표현이 여러 정치집단의 부여계 출자와 정통성을 나타내는 명칭이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자 표기의 문제

고구려 초기의 이름과 지명은 고구려의 고유한 언어를 한자로 기록한 형태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어에 관한 자료는 매우 제한적이다.

따라서 현재 전해지는 한자 표기만으로 실제 고구려인들이 사용했던 이름의 발음과 의미를 완전히 복원하기는 어렵다.

음차

음차(音借)는 한자의 발음을 빌려 고유어를 표기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인명이나 지명을 한자로 기록할 때 그 이름의 발음과 비슷한 한자를 선택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용된 한자의 본래 뜻이 실제 이름의 의미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훈차

훈차(訓借)는 한자의 뜻을 빌려 고유어를 표기하는 방법이다.

어떤 고유어가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 의미와 비슷한 뜻을 가진 한자를 사용하여 기록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동일한 고유어가 음차와 훈차에 따라 서로 다른 한자로 표현될 가능성이 있다.

해씨와 고씨의 관계

일부에서는 해(解)와 고(高)가 고구려의 왕실과 관련된 동일한 고유어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록한 것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해라는 표현을 태양이나 하늘에 관한 고유한 관념과 연결하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해(解)가 반드시 현대 한국어의 '해'와 같은 의미였으며, 고(高)가 그와 동일한 고유어를 훈차한 글자라는 사실은 확정되지 않았다.

특히 한자의 뜻이 비슷하거나 발음이 유사하다는 사실만으로 두 표기가 완전히 같은 명칭이었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따라서 해씨와 고씨의 동일성은 설명 가능한 가설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야 한다.

초기 왕실 계보의 문제

고구려 초기의 왕실 계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뿐 아니라 중국의 역사서에서도 서로 다르게 전해진다.

이러한 차이는 해씨 고구려설의 중요한 연구 배경이다.

《위서》의 왕계

《위서》 동이 고구려전에는 주몽에서 여달(閭達), 여율(如栗), 막래(莫來) 등으로 이어지는 초기 왕계가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 전하는 주몽·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의 계보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왕명이 실제로 동일한 인물을 가리키는지 검토해 왔다.

그러나 각 왕명의 대응관계를 확정할 만큼 충분한 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다.

《후한서》의 기록

《후한서》에는 태조대왕과 관련된 왕의 이름과 즉위·사망 시기에 관한 기록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삼국사기》의 재위기간 및 왕실 계보와 차이가 있다.

따라서 태조대왕의 실제 즉위 시기와 왕위 계승관계에 관해서도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다.

태조대왕의 장기간 재위

《삼국사기》에서는 태조대왕이 53년에 즉위하여 146년에 왕위를 양보했다고 기록한다.

이는 약 94년의 매우 긴 재위기간에 해당한다.

또한 그가 165년에 사망했으며 119세까지 살았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위기간과 생애는 다른 중국 사서의 기록과 차이가 있으며, 초기의 왕실 계보와 결합하면 연대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일부 연구자들은 후대에 서로 다른 계보와 전승을 연결하면서 태조대왕의 재위기간이 과도하게 길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태조대왕이 실제로 2세기 전반에 활동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중국 사서와 비교하여 확인할 수 있지만, 정확한 계보와 재위기간에는 논쟁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1]

반론과 한계

해씨 고구려설은 고구려 초기 왕실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지만, 모든 주장이 직접적인 사료로 입증된 것은 아니다.

성씨와 이름의 구분

해자가 들어간 이름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해당 인물이 반드시 해씨 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해명(解明)이라는 이름의 첫 글자인 해가 성씨인지, 아니면 하나의 이름을 구성하는 글자인지에 관한 문제는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일부 국왕의 성을 직접 해씨라고 기록하므로 모든 해자 표기를 단순한 우연이나 이름의 일부로만 설명하는 것 역시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성씨라고 명시한 기록과 이름에 해자가 포함된 기록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왕계 교체와 역성혁명

해씨에서 고씨로의 왕계 변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반드시 무력에 의한 역성혁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존 국왕에게 적합한 후계자가 없거나 정치적인 지지가 부족한 경우 방계 왕족이 추대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다른 한자 성씨를 사용한 두 집단이 실제로 동일한 정치적·혈연적 계통에 속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왕계의 변화와 국가의 멸망, 외부세력의 왕위 찬탈 등은 구분하여 검토해야 한다.

태조대왕의 왕호

태조대왕이 제6대 국왕인데도 태조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문제다.

그러나 그러한 왕호가 반드시 새로운 왕실의 출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태조대왕이 국가의 체제를 재정비했기 때문에 특별한 칭호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으며, 국조라는 이름의 원래 의미에 대해서도 논쟁이 존재한다.

따라서 태조라는 명칭 자체를 해씨 왕실 교체설의 결정적인 증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당대 사료의 부족

해씨와 고씨의 왕계 차이를 다루는 기록은 대부분 후대에 편찬된 문헌에 전해진다.

《삼국사기》는 12세기에, 《삼국유사》는 13세기에 편찬되었다.

반면 고구려의 초기 왕계와 관련된 사건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역사서의 편찬 시기와 실제 사건 사이에는 긴 시간적인 간격이 존재한다.

또한 현재까지 해당 시기의 왕계가 해씨에서 고씨로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고구려 당대의 비문이나 문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러 문헌의 왕명과 계보, 정치적인 사건을 비교하여 가능한 설명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적 의미

고구려의 건국과정

해씨 고구려설은 고구려의 건국이 한 명의 시조와 그의 직계 후손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과정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여러 정치집단이 결합하여 성장한 국가로 이해된다.

따라서 건국 이후에도 여러 집단 사이에서 왕권과 정치적인 주도권을 둘러싼 변화가 발생했을 수 있다.

해씨와 고씨의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인 변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자료 가운데 하나다.

계루부의 성장

해씨 왕계와 고씨 왕계의 관계를 연구하면 계루부가 어떻게 고구려의 왕실 중심집단으로 발전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권 교체와 계루부 내부의 왕위 계승 변화를 구분해야 한다는 문제는 고구려 초기 정치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관점이다.

왕실 계보의 형성

고대 국가의 왕실은 자신의 정통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전 국왕들과 건국 시조의 계보를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계통의 전승이 하나의 왕실 계보로 결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실 계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실제 각 국왕 사이의 혈연관계가 모두 정확하게 확인되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계보가 후대에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초기 국왕을 허구의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주요 쟁점 정리

쟁점 확인되는 사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부분
초기 국왕의 해씨 표기 《삼국유사》 왕력에 유리왕·대무신왕·민중왕을 해씨로 기록 현대적 의미의 동일한 성씨 가문이었는지
주몽의 성씨 《삼국유사》에는 본래 해씨였다는 주석 존재 실제 생전에 성씨를 변경했는지
해자가 포함된 왕명 대해주류왕·해색주·해우 등 기록 존재 해자가 모두 성씨를 의미하는지
태조대왕 즉위 《삼국사기》에 53년 즉위 기록 왕계 교체가 실제로 이루어진 시기와 방식
소노부·계루부 교체 《삼국지》에 왕권 이동 기록 존재 주몽 시대인지 태조대왕 시대인지
계루부 내부의 왕계 변화 여러 연구자가 가능성을 제시 실제 두 왕계의 혈연·정치적 관계
소수림왕의 왕호 소해주류왕이라는 별칭이 존재 초기 해씨 왕호를 계승한 이유
성씨 표기 해(解)와 고(高)가 문헌에 등장 동일한 고유어를 다르게 적은 것인지

주요 연혁

연도 관련 사건
기원전 37년 《삼국사기》에 기록된 주몽의 고구려 건국
기원전 19년 유리명왕 즉위
4년 유리명왕의 아들 해명이 태자로 책봉됨
18년 대무신왕 즉위
44년 민중왕 즉위
48년 모본왕 즉위, 왕자 익을 태자로 책봉
53년 모본왕이 암살된 뒤 태조대왕이 즉위했다고 기록됨
53~146년 《삼국사기》에 기록된 태조대왕의 재위기간. 실제 연대에는 논쟁 존재
371년 소해주류왕이라는 별칭을 가진 소수림왕 즉위
12세기 《삼국사기》 편찬, 초기 왕계와 관련된 전승 수록
13세기 《삼국유사》 편찬, 해씨 왕명과 주몽의 본성 관련 전승 수록
20세기 초기 왕계와 소노부·계루부의 교체를 연결하는 연구 발전
1990년대 계루부 내부의 해씨·고씨 왕계 변화와 건국전승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심화
현대 초기 왕실의 계보와 정치집단의 관계, 성씨 표기에 관한 연구 지속

여담

  • 해씨 고구려설은 고구려 초기 국왕들이 해씨였다가 태조대왕 이후 고씨 왕계로 변화했다는 가설이다.
  •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유리명왕과 대무신왕, 민중왕의 성을 해씨라고 기록했다.
  • 《삼국유사》의 다른 주석에서는 주몽 역시 본래 해씨였다고 설명한다.
  • 대무신왕의 다른 왕호는 대해주류왕이다.
  • 민중왕의 이름은 해색주이며, 모본왕의 이름은 해우 또는 해애루다.
  • 유리명왕의 아들인 해명태자의 이름에도 해자가 포함되어 있다.
  • 그러나 이름에 해자가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현대적인 의미의 해씨 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 제6대 태조대왕은 고궁이라는 이름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 태조대왕이 제6대 국왕인데도 태조 또는 국조라는 칭호를 가진다는 사실은 초기 왕계 연구에서 중요한 쟁점이다.
  • 그러나 태조라는 칭호만으로 새로운 왕조가 탄생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 《삼국지》에는 본래 소노부 또는 연노부가 왕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계루부가 대신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 이 기록을 태조대왕의 즉위와 연결하는 견해도 있지만 주몽의 건국과정에 연결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 오늘날에는 해씨에서 고씨로의 변화를 계루부 내부의 왕계 변화로 이해하는 연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따라서 해씨 왕계의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소노부 해씨 왕실이 계루부 고씨에게 멸망당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 부여의 건국전승에 등장하는 해모수와 해부루의 이름에도 해자가 포함되어 있다.
  • 백제 왕실에 대해서도 본래 해씨와 관련되었다는 전승이 존재한다.
  • 일부에서는 해씨와 고씨가 서로 다른 성씨가 아니라 동일한 고유어를 다른 한자로 기록한 것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 그러나 두 글자가 실제로 동일한 고구려어를 가리켰다는 사실은 확정되지 않았다.
  • 소수림왕은 태조대왕 이후 훨씬 후대의 국왕이지만 소해주류왕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 이는 고구려의 왕실이 초기의 왕호와 정통성을 후대에도 기억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 태조대왕의 즉위가 기록된 53년과 그의 94년 재위기간은 다른 사료들과 비교할 때 연대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 따라서 왕계 교체가 실제로 53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정하기는 어렵다.
  •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의 초기 왕계에도 차이가 존재한다.
  • 이 때문에 초기 왕실의 계보가 후대의 역사편찬 과정에서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 해씨 고구려설의 핵심은 단순히 국왕의 성씨를 잘못 기록했다는 문제가 아니라, 고구려 초기의 정치집단과 왕실의 형성과정에 대한 문제다.
  • 초기 해씨 왕계의 존재 가능성, 계루부 내부의 왕계 변화,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지배권 교체는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반드시 같은 사건을 뜻하지는 않는다.

관련 문서

참고 자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