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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홍영식은 조선 말기의 문신, 외교관, 개화파 정치인이다. 한자로는 洪英植. 본관은 남양, 자는 중육, 호는 금석이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급진개화파로 활동했고, 보빙사의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을 다녀왔으며, 귀국 후 우정총국 설치에 관여했다. 그리고 그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3일 만에 모든 것이 터졌다.
쉽게 말하면 조선 말기판 “근대화 실무형 엘리트”였다. 일본 군제도 보고 왔고, 미국도 보고 왔고, 우편제도도 만들려 했다. 문제는 그가 살던 조선이 구한말이라는 지옥 난이도 서버였다는 점이다.
특히 홍영식은 갑신정변 실패 후 다른 급진개화파 인물들처럼 일본으로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고종을 호위하다가 살해되었다. 그래서 평가가 꽤 묘하다.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인데, 마지막은 도망 안 치고 왕 곁에 있다 죽었다. 구한말답게 인간 이력서가 복잡하다.
기본 정보
| 홍영식 | |
|---|---|
| 한자 | 洪英植 |
| 생몰 | 1855년 ~ 1884년 |
| 본관 | 남양 홍씨 |
| 자 | 중육 |
| 호 | 금석 |
| 시호 | 충민 |
| 시대 | 조선 후기 |
| 성향 | 급진개화파 |
| 주요 관직 | 우정국총판, 병조참판, 좌의정 |
| 주요 활동 | 신사유람단 참여, 보빙사 전권부대신, 우정총국 설치, 갑신정변 주도 |
| 관련 인물 |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민영익, 고종, 홍순목 |
한줄요약
우정총국을 만든 개화파 엘리트였지만, 그 우정총국 잔칫날 정변을 터뜨리고 3일 만에 인생까지 같이 터진 사람.
출신과 성장
홍영식은 1855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홍순목이다.
여기서부터 캐릭터가 좀 특이하다. 홍순목은 보수적 척사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쉽게 말해 아버지는 “서양 오랑캐 꺼져라” 쪽인데, 아들은 “이대로 가면 조선 망한다, 일본이든 미국이든 보고 배워야 한다” 쪽이었다.
집안에서 정치 토론하면 분위기 살벌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성리학과 척사론, 아들은 개항과 근대화. 구한말판 명절 밥상 정치싸움인데 스케일이 나라 멸망급이다.
홍영식은 1873년 문과에 급제했다. 나이가 어렸는데도 관직 진출이 빨랐다. 규장각 대교, 직각, 사간원 헌납 등을 거치며 엘리트 관료 코스를 밟았다.
즉 홍영식은 그냥 거리에서 “개혁하자!” 외친 운동가가 아니라 조선 관료제 내부로 들어간 양반 엘리트였다. 그런데 그 관료제가 바로 조선 후기 관료제였다는 게 문제다. 좋은 머리로 들어갔는데 회사 ERP가 500년 전 버전인 셈이다.
개화사상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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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은 일찍부터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했다.
민영익,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같은 인물들과 가까웠고, 조선이 서양 문물과 근대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개화파가 된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은 이미 낡았다. 군대는 후졌고, 재정은 약했고, 행정은 부패했고, 밖에서는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털리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국가를 갈아엎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성리학이 있으니 괜찮다”는 소리는 솔직히 정신승리다. 홍영식은 적어도 그 정신승리에서 벗어난 사람 중 하나였다.
다만 개화파 전체의 문제도 같이 안고 있었다. 방향은 맞았는데 기반이 약했다. 백성 기반도 약하고, 군사력도 약하고, 외세와의 거리 조절도 서툴렀다.
신사유람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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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홍영식은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
신사유람단은 조선이 일본의 근대화 상황을 살피기 위해 파견한 시찰단이다. 홍영식은 주로 일본의 육군 제도를 조사했다.
이게 꽤 중요하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식 군대를 만들고 있었다. 조선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옛날에는 왜놈이라고 깔보던 나라가 어느새 근대식 군대, 학교, 공장, 행정제도를 갖춘 국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홍영식은 일본 육군을 시찰한 뒤 관련 보고서와 자료를 정리했다. 조선 군제 개혁과 국방 강화를 주장한 것도 이 경험과 연결된다.
쉽게 말하면, 홍영식은 “성리학으로 총알 못 막는다”는 걸 직접 보고 온 사람이다.
보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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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홍영식은 보빙사의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보빙사는 조선이 미국에 보낸 최초의 공식 사절단이다. 전권대신은 민영익, 전권부대신은 홍영식, 종사관은 서광범이었다. 수행원으로는 유길준 등이 있었다.
보빙사의 표면적 목적은 미국 공사 푸트의 조선 부임에 대한 답례였지만, 실제 목적은 더 컸다. 조선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고, 청나라의 간섭을 견제하며, 외교·교육·군사 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싶어 했다.
보빙사 일행은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를 만나고, 학교, 병원, 공장, 전신회사, 우체국, 육군사관학교, 정부 기관 등을 시찰했다.
조선 입장에서는 거의 미래 세계 구경이었다. 조선에서는 아직도 예법과 관직 서열로 세상이 굴러가는데, 미국에서는 전기, 전신, 철도, 우편, 근대 학교, 병원, 산업 시설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걸 보고 돌아온 홍영식이 우편제도에 꽂힌 건 매우 자연스럽다. 우편은 단순 편지 배달이 아니다. 근대국가의 신경망이다. 나라가 명령을 내리고, 정보를 모으고, 경제를 돌리는 기본 인프라다.
민영익과의 갈라짐
홍영식과 민영익은 보빙사로 함께 미국에 갔다. 그런데 귀국 후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갈라졌다.
민영익은 민씨 척족 권력의 핵심으로 남았고, 청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쪽으로 갔다. 반면 홍영식은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와 함께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을 빠르게 근대화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둘 다 미국을 봤다. 둘 다 조선이 뒤처졌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결론은 달랐다.
민영익은 “현실 권력 안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자”에 가까웠고, 홍영식은 “이대로는 답 없으니 판을 갈자”에 가까웠다. 결국 둘은 갑신정변 현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쪽으로 갈라진다.
같이 해외출장 갔다 온 동료가 1년 뒤 정변 현장에서 서로 칼 맞고 죽는 관계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구한말 정치판이다.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 진짜.
우정총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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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의 대표 업적은 우정총국 설치다.
1884년, 그는 우정국총판이 되어 조선의 근대 우편제도를 만들려 했다. 우정총국은 한국 근대 우편제도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이건 진짜 중요한 일이다. 근대국가는 정보 전달 속도로 굴러간다. 군대 명령, 외교 문서, 상업 거래, 행정 보고, 민간 통신이 모두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우편제도 없이 근대국가를 만들겠다는 건 인터넷 없이 스타트업 하겠다는 소리와 비슷하다.
홍영식은 일본과 미국에서 본 근대 통신·우편 시스템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그래서 우정총국 설치에 힘을 쏟았다.
문제는 바로 그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이 갑신정변의 무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정총국은 조선 근대 우편제도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갑신정변의 폭발 지점이다. 스타트업 런칭파티 하다가 쿠데타가 터진 꼴이다.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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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0월, 홍영식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의 계기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이었다. 이 자리에는 민씨 척족과 외국 사절들이 참석했다. 급진개화파는 이 기회를 이용해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민영익은 이 과정에서 습격을 받아 큰 부상을 입었다. 이후 미국인 의사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했고, 이 사건이 제중원 설립의 계기가 된다. 역사가 진짜 이상하게 굴러간다. 개화파가 민영익을 제거하려다 실패했는데, 그 바람에 조선 근대의학사가 열렸다.
정변 직후 홍영식은 새 정부에서 중요한 자리에 올랐다. 한때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젊은 나이에 조선 최고위 관직에 오른 셈이다. 물론 이 정부는 3일짜리였다.
급진개화파는 다음과 같은 개혁을 꿈꿨다.
-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 청산
- 문벌 폐지
- 신분제 개혁
- 재정 일원화
- 근대적 내각 구성
- 군사제도 개혁
- 외교 자주성 강화
말만 보면 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쿠데타로 이걸 하려 했고, 일본 공사관 병력에 기대었다는 점이다.
방향은 근대화였는데, 방식은 외세 의존 쿠데타였다. 여기서 갑신정변의 평가가 영원히 꼬인다.
삼일천하와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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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은 3일 만에 실패했다.
청나라 군대가 개입했고, 일본군은 제대로 버티지 못했다. 급진개화파 지도부 대부분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홍영식은 일본으로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박영교와 함께 고종을 호위하다가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이 부분 때문에 홍영식은 갑신정변 인물 중에서도 독특하게 평가된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다. 그런데 실패하자 왕을 버리고 도망간 것이 아니라, 끝까지 왕 곁에 남았다. 이게 충성인지, 책임감인지, 상황판단 실패인지는 해석이 갈린다.
어쨌든 결과는 죽음이었다.
그의 아버지 홍순목도 갑신정변의 여파 속에서 자살했다. 홍영식 본인뿐 아니라 집안 전체가 박살났다. 급진개화파가 3일 동안 나라를 바꾸려 했지만, 실패의 대가는 개인과 가문이 통째로 치렀다.
사후 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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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은 갑신정변 직후에는 대역죄인으로 취급받았다.
그의 과거 급제 기록에서도 이름이 먹으로 지워졌다고 한다. 조선 왕조 입장에서 그는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신원되었다. 이후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대제학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충민으로 내려졌다.
이 변화가 참 구한말스럽다. 어제는 역적, 오늘은 개혁 선각자. 정권과 시대가 바뀌면 평가도 뒤집힌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더니, 조선 말기는 승자가 자주 바뀌어서 기록도 롤러코스터다.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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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우편제도의 선구자
홍영식의 가장 큰 업적은 우정총국 설치다.
우편제도는 근대국가의 핵심 인프라다. 정보가 빨리 움직여야 행정도 돌아가고 경제도 움직인다. 홍영식은 이 점을 이해했다.
조선에서 우정총국을 만들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단순한 관념적 개화파가 아니라 실무형 개혁가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 군제 시찰과 군사개혁 구상
홍영식은 신사유람단으로 일본 육군을 시찰했다.
그는 일본의 근대식 군사제도를 보고 조선 군제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조선 군대는 너무 낡아 있었다. 성리학 명분론으로 근대 군대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군사제도 개혁을 주장한 것은 시대를 제대로 읽은 것이다.
보빙사로 미국 방문
보빙사 부대신으로 미국을 다녀온 것도 중요한 경력이다.
홍영식은 미국의 근대 시설을 직접 보고 왔다. 병원, 학교, 우체국, 전신회사, 정부 기관 등을 보며 조선과 세계의 격차를 체감했다.
이 경험은 그의 개화사상을 강화했고, 우정총국 설치 같은 실무 개혁으로 이어졌다.
실패 후 도망가지 않음
갑신정변 실패 후 홍영식은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았다.
그가 고종을 호위하다 죽은 것은 비극이지만, 적어도 책임감 없는 도피는 아니었다. 그래서 홍영식은 갑신정변 주역 중에서도 “끝까지 남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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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무모함
홍영식은 갑신정변의 핵심 인물이었다.
갑신정변의 개혁안은 꽤 선진적이었다. 하지만 방식은 쿠데타였고, 기반은 너무 약했다. 백성의 지지도 없고, 군사력도 부족하고, 외교적 준비도 허술했다.
정변을 일으킬 거면 성공할 준비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급진개화파는 일본 공사관 병력에 기대었다. 이건 너무 위험한 선택이었다.
결국 정변은 3일 만에 실패했고, 조선은 더 큰 외세 개입의 장으로 끌려갔다.
일본 의존
급진개화파 전체의 문제지만, 홍영식도 일본 의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청나라 간섭을 벗어나려는 목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도 조선의 순수한 친구가 아니었다. 일본은 자기 이익을 위해 조선을 이용하려 했다.
개화파는 일본을 모델로 삼는 것과 일본의 힘을 빌리는 것 사이의 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그 결과 개혁의 명분이 외세 의존 쿠데타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민영익 습격 문제
갑신정변 과정에서 민영익이 습격당해 큰 부상을 입었다.
민영익은 민씨 척족의 핵심이었고 급진개화파 입장에서는 제거해야 할 정치적 장애물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 반대파를 칼로 처리하는 방식은 명백히 폭력적이다.
조선 정치가 이미 썩고 막혀 있었다고 해도, 칼로 길을 열면 그 길은 피바다가 된다. 갑신정변이 이 점에서 비판받는 것은 당연하다.
근대화가 오히려 지연됨
아이러니하게도, 우정총국을 무대로 한 갑신정변은 조선 근대 우편제도의 발전을 오히려 늦췄다.
우정총국은 정변 이후 폐쇄되었고, 우편 업무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근대화하려고 정변을 일으켰는데, 그 정변 때문에 근대화 프로젝트가 멈춘 셈이다.
이건 진짜 구한말식 블랙코미디다. 배포하다 서버 터뜨린 개발자 느낌이다.
홍영식과 김옥균
홍영식과 김옥균은 급진개화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의 대표 얼굴이라면, 홍영식은 우정총국과 외교·군사 시찰 경험을 가진 실무형 인물에 가깝다.
둘 다 조선을 빠르게 근대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둘 다 청나라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 다 일본을 활용하려 했다. 그리고 둘 다 실패했다.
다만 최후는 달랐다.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훗날 상하이에서 암살당했다. 홍영식은 정변 직후 조선에서 살해되었다.
한쪽은 망명객으로 오래 떠돌다 죽었고, 한쪽은 바로 현장에서 죽었다. 둘 다 구한말다운 결말이다.
홍영식과 민영익
홍영식과 민영익의 관계는 구한말 개화파 분열의 상징이다.
두 사람은 보빙사로 함께 미국에 갔다. 미국 문물을 함께 봤고, 조선이 뒤처졌다는 것도 함께 체감했다. 그런데 귀국 후 정치 노선이 갈라졌다.
민영익은 민씨 척족 권력과 친청적 현실정치 쪽으로 갔고, 홍영식은 급진개화파와 함께 반청 자주와 빠른 개혁을 선택했다.
결국 갑신정변 때 민영익은 습격당했고, 홍영식은 정변 실패 후 죽었다.
같은 배를 타고 미국까지 갔던 사람들이, 1년 뒤 조선 정치판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가 되었다. 구한말은 정말 인간관계도 나라처럼 망가졌다.
홍영식과 서광범
서광범과 홍영식은 보빙사와 갑신정변으로 연결된다.
둘 다 미국을 다녀온 급진개화파였고, 둘 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하지만 정변 실패 후 서광범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고, 홍영식은 조선에 남아 죽었다.
서광범이 “망명 후 다시 돌아온 개화 관료”라면, 홍영식은 “정변 실패 현장에서 끝난 개화파”다.
홍영식과 우정총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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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을 이야기할 때 우정총국은 빠질 수 없다.
우정총국은 한국 근대 우편제도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홍영식은 이를 설치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우정총국은 갑신정변의 무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홍영식과 우정총국의 관계는 빛과 어둠이 함께 있다.
- 빛: 근대 우편제도의 시작
- 어둠: 갑신정변의 폭발 지점
- 결과: 우편제도는 중단되고, 홍영식은 죽음
이 정도면 거의 역사적 아이러니 종합세트다.
평가
홍영식은 구한말 개화파 중에서도 꽤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본과 미국을 직접 보고 조선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사제도와 우편제도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실제로 우정총국 설치에 힘썼다. 이 점에서는 분명히 선각자였다.
하지만 갑신정변이라는 방식은 무모했다. 일본에 기대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큰 한계였다. 개혁의 필요성은 맞았지만, 실행 방식이 너무 위험했다.
그럼에도 홍영식은 다른 갑신정변 주역들과 달리 도망가지 않고 고종을 호위하다 죽었다. 그래서 그의 최후는 단순한 반역자의 도주 실패라기보다, 책임과 비극이 섞인 결말로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홍영식은 조선을 근대화하려던 실무형 개화파였지만, 너무 약한 기반으로 너무 큰 판을 뒤집으려다 죽은 인물이다.
관련 사건
관련 인물
관련 문서
여담
홍영식의 아버지 홍순목은 보수 척사파에 가까웠다. 그런데 아들은 급진개화파였다. 조선 말기 사상 갈등이 한 집안 안에서도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홍영식의 집은 갑신정변 이후 몰수되었고, 훗날 광혜원 또는 제중원과 연결되는 공간으로 언급된다. 민영익을 치료한 알렌, 갑신정변, 제중원, 홍영식의 집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구한말 역사의 묘한 꼬임을 보여준다.
갑신정변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시작되었는데, 우정총국은 원래 근대 우편제도라는 문명적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그 문명적 프로젝트의 첫 잔칫날 칼부림과 쿠데타가 터졌다. 조선 말기답다. 새 시스템 오픈식에서 서버가 아니라 나라가 터졌다.
결론
홍영식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급진개화파 인물이다.
그는 일본과 미국을 직접 보고 근대화의 필요성을 깨달았고, 우정총국을 통해 조선의 근대 우편제도를 만들려 했다. 이 점에서는 분명히 시대를 앞서간 실무형 개혁가였다.
하지만 그는 갑신정변이라는 무모한 방식으로 정권을 뒤집으려 했다. 일본에 기대었고, 대중 기반은 약했고, 군사적 준비도 부족했다. 그래서 정변은 3일 만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그는 실패 후 도망가지 않고 고종을 호위하다 죽었다. 그래서 홍영식은 단순한 쿠데타 주모자로만 보기 어렵다.
근대화를 봤고, 실무를 알았고, 판을 뒤집으려 했지만, 구한말이라는 시대의 벽에 그대로 들이받고 죽은 사람.
이게 홍영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