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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왜양일체론은 조선 말기 위정척사파가 주장한 논리로, 일본과 서양은 본질적으로 한통속이라는 주장이다. 한자로는 倭洋一體論.
쉽게 말하면 "왜놈이나 서양 오랑캐나 똑같다"는 소리다.
여기서 왜는 일본, 양은 서양을 뜻한다. 즉 일본은 원래 동양 국가이긴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으므로 더 이상 전통적인 이웃 나라가 아니라 서양 오랑캐와 같은 세력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다.
이 주장은 강화도 조약 체결을 둘러싼 논쟁에서 특히 중요하게 등장했다. 조선 조정의 개항 추진 세력은 일본과 서양을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위정척사파는 일본도 이미 서양화된 침략 세력이므로 일본과의 개항도 서양과의 개항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지금 보면 표현은 많이 구식이고 화이론 냄새가 진하게 나지만, 일본의 침략성을 경계했다는 점에서는 결과적으로 꽤 날카로운 부분도 있었다. 문제는 역시나 대안이었다. 일본이 위험하다는 건 맞았는데, 그러면 일본을 막기 위해 조선이 어떻게 강해질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약했다.
뜻
왜양일체론은 말 그대로 왜와 양이 하나의 몸이다라는 뜻이다.
위정척사파는 일본이 서양과 교류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으므로 일본도 서양 세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일본과 통상하거나 조약을 맺는 것은 서양 오랑캐와 문호를 여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리는 왜양분리론과 대립했다. 왜양분리론은 일본과 서양은 다르며, 일본과의 교류는 기존의 교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일 뿐 서양과 수교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쉽게 말하면 조정 쪽은 "일본은 그래도 옛날부터 알던 이웃이잖아"라고 했고, 위정척사파는 "쟤 이미 서양물 먹은 놈이라 똑같이 위험함"이라고 한 것이다.
배경
19세기 후반 조선은 서양 세력과 일본의 압박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흥선대원군 시기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으며 서양 세력과 충돌했다. 이때 위정척사파는 서양과 화친하지 말고 싸워야 한다는 척화주전론을 주장했다.
그런데 1870년대에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서양뿐만 아니라 일본이 조선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식 제도와 군사력을 받아들이며 빠르게 근대국가로 변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 일부는 일본과 서양을 구분하려 했다. 일본은 서양 국가가 아니라 동양의 이웃 나라이고, 과거에도 조선과 외교 관계가 있었으므로 일본과의 교류는 서양과의 수교와 다르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위정척사파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일본은 이미 서양식 군함과 무기, 제도를 갖춘 나라였다. 겉모습은 일본이지만 속은 서양화된 침략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주장이 왜양일체론이다.
강화도 조약과 왜양일체론
왜양일체론이 본격적으로 중요해진 계기는 강화도 조약이다.
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을 압박했고,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일본에 문호를 연 불평등 조약이었다.
개항 추진 세력은 일본과의 조약을 정당화하려 했다. 일본은 서양 오랑캐가 아니라 과거부터 조선과 교린 관계를 맺어 온 나라라는 논리였다. 즉 일본과의 조약은 새로운 서양식 수교가 아니라 옛 외교 관계의 회복이라는 식이었다.
위정척사파는 이에 반대했다. 일본은 더 이상 옛날의 일본이 아니라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나라이고, 서양 세력과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 그러니 일본과의 조약도 서양과의 조약처럼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최익현 등은 강화도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대했다. 왜양일체론은 개항 반대 논리의 핵심 무기였다.
왜양분리론과의 대립
왜양일체론의 반대편에는 왜양분리론이 있었다.
왜양분리론은 일본과 서양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은 서양 국가가 아니며, 조선과 오랫동안 외교 관계를 맺어 온 나라였으므로 일본과의 교류는 서양과의 통상과는 다르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조선 정부가 일본과 조약을 맺기 위해 필요했다. 만약 일본도 서양 오랑캐와 같다고 인정하면, 그동안 서양과 통상을 거부해 온 조선의 명분이 무너진다. 그래서 조정은 일본과 서양을 분리해서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위정척사파 입장에서는 말장난에 가까웠다. 일본이 서양식 군함을 끌고 와서 조선을 위협하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옛날의 교린 관계냐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개항 추진 세력은 "일본은 서양이 아니니 조약을 맺어도 된다"고 했고, 위정척사파는 "일본은 이미 서양화됐으니 서양과 똑같이 위험하다"고 했다.
지금 와서 보면 둘 다 일리가 있었다. 일본은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서양 국가는 아니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식 제국주의 국가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익현과 왜양일체론
왜양일체론과 관련해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인물은 최익현이다.
최익현은 위정척사파의 대표 인물로, 강화도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일본과의 개항이 결국 서양 세력과의 개항으로 이어질 것이며, 조선의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보았다.
최익현에게 일본은 단순한 이웃 나라가 아니었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뒤 조선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일본과 서양을 분리해서 보는 것은 위험한 착각이라고 판단했다.
최익현의 왜양일체론은 이후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의 중요한 논리로 이어졌다. 일본을 단순한 외교 상대가 아니라 척결해야 할 외세로 보는 관점이 강화된 것이다.
물론 최익현의 논리가 현대적 국제정치 분석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의 사고방식은 성리학적 화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적 성격을 경계했다는 점에서는 결과적으로 꽤 정확한 감각을 보여주었다.
조선책략과의 관계
왜양일체론은 조선책략 반대와도 연결된다.
1880년 김홍집은 일본에서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쓴 사의조선책략을 가져왔다. 이 책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조선이 청나라와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책략의 핵심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이었다.
개화파 입장에서는 국제정세를 고려한 현실적 외교 전략이었다. 하지만 위정척사파 입장에서는 일본과 미국을 끌어들이자는 위험한 책이었다.
왜양일체론에 따르면 일본은 이미 서양과 같은 세력이다. 그런데 조선책략은 그런 일본과 손잡고, 여기에 미국까지 연결하자고 했다. 위정척사파 눈에는 그냥 오랑캐 단체 입국 허가서였다.
이 때문에 이만손을 비롯한 영남 유생들은 영남만인소를 올려 조선책략과 김홍집을 비판했다. 왜양일체론은 이 반대 논리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의의
왜양일체론의 의의는 일본의 변화와 침략성을 비교적 일찍 경계했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식 제도와 군사력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선에 대한 태도도 점점 강압적으로 바뀌었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은 일본이 이미 조선을 평등한 이웃으로만 대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을 단순히 전통적인 교린 관계의 상대로만 보는 것은 위험했다. 왜양일체론은 일본이 서양식 제국주의 논리를 따라가는 세력으로 변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점에서는 꽤 날카로운 판단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훗날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조선을 병합했다. 위정척사파가 일본을 경계한 것은 결과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또 왜양일체론은 조선이 외세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싼 중요한 논쟁을 만들었다. 일본과 서양을 구분할 것인가, 아니면 모두 침략 세력으로 볼 것인가. 이 논쟁은 조선의 개항정책과 위정척사운동의 핵심 갈등 중 하나였다.
한계
하지만 왜양일체론의 한계도 크다.
첫째, 일본의 침략성을 경계한 것은 맞았지만, 일본을 막기 위한 현실적 전략은 부족했다. 일본이 위험하다는 말만으로 일본을 막을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군사력, 경제력, 외교력, 기술력이다.
둘째, 서양 문물 전체를 사악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위정척사파는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보았지만, 사실 조선도 외세에 맞서려면 일부 서양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셋째, 화이론적 세계관에 갇혀 있었다. 일본과 서양을 오랑캐로 보는 도덕적 구분은 유생들에게는 명확했지만, 근대 국제정치에서는 그런 구분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라를 지키려면 감정적 배척보다 현실적 역량 강화가 필요했다.
넷째, 개항과 개화를 모두 위험한 것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은 이미 세계질서에 끌려 들어가고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양일체론은 개항 반대의 명분으로 작동하며 조선의 개혁 공간을 좁히기도 했다.
결국 왜양일체론은 경고로서는 의미가 있었지만, 해법으로서는 부족했다. "저놈 위험하다"는 말은 맞았는데, "그럼 어떻게 이길 건데?"라는 질문에는 약했다.
평가
왜양일체론은 조선 후기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반개항 논리다.
긍정적으로 보면 일본의 침략성을 일찍 파악한 주장이다. 일본이 서양식 근대화를 받아들인 뒤 조선을 압박하고 있었던 만큼, 일본을 단순한 이웃 나라로 보는 것은 위험했다. 이 점에서 왜양일체론은 현실을 꽤 정확히 찌른 부분이 있다.
부정적으로 보면 근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성리학적 반개화 논리였다.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조선이 서양 문물과 기술을 모두 거부하면 더 약해질 뿐이었다.
가장 균형 잡힌 평가는 이렇다. 왜양일체론은 일본을 경계하는 데에는 맞았지만, 조선의 생존전략으로는 부족했다.
일본은 정말 위험했다. 하지만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이 배운 서양식 군사·행정·산업 시스템을 조선도 자기 방식으로 흡수해야 했다. 그런데 위정척사파는 그 흡수 자체를 거부했다.
그래서 왜양일체론은 조선 말기의 비극을 잘 보여준다. 위험 신호는 봤다. 그런데 그 위험을 막을 도구는 거부했다. 경보는 울렸지만, 방화복은 안 입겠다는 꼴이었다.
여담
- 왜양일체론은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개항 반대 논리다.
- 주로 강화도 조약 반대와 연결해서 나온다.
- 대표 인물은 최익현이다.
- 반대 논리는 왜양분리론이다.
- 왜양일체론은 "일본도 서양 오랑캐와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다.
- 일본의 침략성을 경계했다는 점에서는 결과적으로 꽤 맞았다.
- 하지만 일본을 막기 위한 현실적 근대화 방안은 부족했다.
- 조선책략 반대, 영남만인소, 위정척사운동과 연결해서 보면 이해하기 쉽다.
- 표현은 낡았지만 문제의식은 완전히 틀리지 않았고, 처방은 많이 낡았다.
- 조선 말기 논쟁은 대체로 이랬다. 맞는 말 반, 망하는 선택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