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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위정척사파는 조선 말기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서양 세력, 천주교, 개화정책, 그리고 서양화된 일본을 배척한 유생 중심의 정치·사상 세력이다.
척사위정파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바른 것은 성리학 중심의 조선 전통 질서이고, 사악한 것은 서학, 천주교, 서양 세력, 개항, 개화정책, 일본과의 통상 같은 것들이었다.
쉽게 말하면 "조선은 성리학 질서를 지켜야 하고, 오랑캐 문물 들이면 나라 망한다"는 쪽이다.
다만 위정척사파를 그냥 "신식 문물 싫어하는 꼰대 유생들"로만 보면 반만 맞다. 이들은 실제로 서양 열강과 일본의 침략성을 경계했고,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문제의식도 있었다. 특히 일본에 대한 경계는 훗날 역사를 보면 마냥 헛소리가 아니었다.
문제는 처방이었다. 외세가 위험하다는 진단은 어느 정도 맞았는데, 해결책이 "성리학 지키고 문 닫자"에 가까웠다. 대포 들고 오는 놈을 상소문으로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명칭
위정척사는 한자로 衛正斥邪이다.
- 위정: 바른 것을 지킴
- 척사: 사악한 것을 물리침
위정척사파는 자신들이 조선의 바른 도, 즉 성리학적 질서와 유교 문명을 지키는 세력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서양 문물과 천주교, 외국과의 통상, 개화정책은 조선의 도덕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악한 것으로 보았다.
이들이 말한 "정"은 단순히 좋은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유교적 세계관에서의 올바른 질서였다. 왕은 왕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백성은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전근대적 질서다.
그래서 위정척사파의 주장은 단순한 외교정책이 아니었다. 외국과 수교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였다.
사상적 배경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배경에는 성리학, 화이론, 소중화 의식이 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나라였다. 특히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뒤, 조선 유생들은 조선이 중화 문명의 정통을 이어받았다는 의식을 강하게 가졌다. 이것이 소중화 의식이다.
이런 세계관에서 서양은 단순한 외국이 아니라 예의와 도덕을 모르는 오랑캐였다. 천주교는 조상 제사와 유교 윤리를 부정하는 이단이었고, 서양과 통상하는 것은 사악한 문물을 들여오는 일로 보였다.
또한 일본도 문제가 되었다. 일본은 원래 동양 국가였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식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다. 위정척사파는 이런 일본을 서양과 한통속으로 보았다. 이것이 왜양일체론이다.
결국 위정척사파에게 세상은 단순했다. 조선의 성리학 질서는 지켜야 할 것이고, 서양과 일본의 문물은 배척해야 할 것이었다. 문제는 현실 세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형성
위정척사파의 뿌리는 조선 후기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배척에서 찾을 수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오자, 유생들은 이를 유교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사상으로 보았다.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신분질서와 국가질서를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천주교는 기존 지배층에게 매우 불편한 존재였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양 세력의 접근이 본격화되었다. 프랑스, 미국 등의 서양 세력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고,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병인양요, 신미양요 같은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위정척사파는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서양과 화친하지 말고 싸워야 한다는 척화주전론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일본에 문호를 열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이제 문제는 서양뿐 아니라 일본, 개화정책, 조선 내부의 개화파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대표 인물
이항로
이항로는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사상가다. 호는 화서이다.
그는 성리학적 질서와 춘추대의를 중시했고, 서양 세력과 천주교를 강하게 배척했다. 병인양요 시기에는 서양과 싸워야 한다는 주전척화론을 주장했다.
이항로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훗날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기정진
기정진도 위정척사파의 중요한 사상가다. 호는 노사이다.
그는 서양인을 인륜을 모르는 오랑캐로 보았고, 천주교와 서양 세력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에도 주목했다.
기정진은 단순히 "오랑캐 싫다" 수준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외세가 조선 경제와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이 부분만 보면 꽤 날카로운 감각이 있었다.
김평묵
김평묵은 이항로의 제자로, 화서학파의 위정척사론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개항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일본과의 통상에 강하게 반대했다. 김평묵은 위정척사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항로가 사상적 원류라면, 김평묵은 그 사상을 제자들과 현실 정치 속으로 이어간 연결고리라고 볼 수 있다.
최익현
최익현은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실천가다.
그는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했고, 일본과의 통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엎드려 상소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최익현은 이후 항일 의병운동에도 참여했다. 보수적 유생이었지만, 일본의 침략에는 끝까지 저항한 인물이다. 그래서 위정척사파의 한계와 의의를 동시에 보여준다.
사상은 전근대적이었지만, 일본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분명했다.
이만손
1881년 영남 유생들은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에 반대하며 대규모 상소를 올렸다. 이때 이만손이 대표 역할을 했다.
조선책략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청나라와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대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위정척사파 입장에서는 그냥 외세 초대장이었다.
이만손과 영남 유생들은 조선책략을 강하게 비판했고, 이는 신사척사운동의 대표 사례가 되었다.
유인석
유인석은 위정척사사상을 의병운동으로 이어간 대표 인물이다.
그는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일어난 을미의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위정척사파가 단순히 상소만 올리는 세력에서 무장투쟁으로 나아가는 흐름을 보여준다.
유인석은 성리학적 명분론을 바탕으로 일본에 저항했다. 현대적 민족주의와는 결이 다르지만, 항일투쟁의 한 흐름으로 평가된다.
주장
위정척사파의 주장은 시기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기본 방향은 비슷했다.
첫째, 서양 세력과의 통상을 반대했다. 서양과 무역을 시작하면 서양 물건과 사상이 들어오고, 조선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 천주교를 배척했다. 천주교는 조상 제사를 부정하고 유교 윤리를 흔드는 사악한 사상으로 여겨졌다.
셋째, 일본과의 개항도 반대했다. 특히 일본이 서양화된 뒤에는 일본도 서양 오랑캐와 같다고 보았다.
넷째, 개화정책에 반대했다. 개화파가 주장한 서양 기술과 제도의 수용도 위정척사파에게는 위험한 일이었다.
다섯째, 기존 성리학 질서와 왕조 체제를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새 제도 도입이 아니라, 유교적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유생들의 세계관 안에서는 일관성이 있었다. 문제는 그 세계관이 이미 바뀐 국제질서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개화파와의 대립
위정척사파는 개화파와 강하게 대립했다.
개화파는 조선이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위정척사파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순간 조선의 도덕 질서와 국가 정체성이 무너진다고 보았다.
온건개화파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양 기술과 외교제도를 받아들이려 했다. 급진개화파는 일본식 근대화를 본받아 조선을 빠르게 바꾸려 했다.
위정척사파는 둘 다 위험하다고 보았다. 온건개화파는 오랑캐와 손잡으려는 세력으로 보였고, 급진개화파는 아예 일본에 나라를 넘길 위험한 세력으로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개화파에도 외세 의존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 역시 현실적 대안이 부족했다. 개화파는 문을 너무 위험하게 열려고 했고, 위정척사파는 문을 닫아걸고 불난 집 안에서 버티려 했다.
조선책략 반대
위정척사파가 강하게 반발한 사건 중 하나가 조선책략 문제다.
1880년 김홍집은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쓴 사의조선책략을 가져왔다. 이 책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이 청나라와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화파 입장에서는 꽤 현실적인 외교전략이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 입장에서는 청나라, 일본, 미국을 다 끌어들이자는 소리였다.
특히 미국과 수교하자는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유생들에게 미국은 정체도 잘 모르는 서양 오랑캐였고, 일본은 이미 서양화된 위험한 나라였다.
결국 영남 유생들은 이만손을 대표로 영남만인소를 올려 조선책략과 김홍집을 비판했다. 이 사건은 위정척사파가 개화정책에 집단적으로 반발한 대표 사례다.
왜양일체론
왜양일체론은 일본과 서양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주장이다.
위정척사파는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더 이상 예전의 일본이 아니라고 보았다. 일본은 동양 국가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서양 오랑캐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 주장은 어느 정도 맞는 부분도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양식 군대와 제도를 받아들였고, 조선에 침략적으로 접근했다. 일본이 단순한 이웃 나라가 아니라 위험한 제국주의 국가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대안이었다. 일본이 위험하다면 조선도 군사력과 경제력과 외교력을 키워야 했다. 그런데 위정척사파는 일본을 배척해야 한다는 말은 강하게 했지만, 조선을 어떻게 근대적으로 강하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는 약했다.
결국 왜양일체론은 경고로는 의미가 있었지만, 생존 전략으로는 부족했다.
의병운동과의 관계
위정척사파는 훗날 의병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처음 위정척사파는 주로 상소와 여론 형성을 통해 활동했다.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고, 조정의 개화정책이나 외국과의 조약에 반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일부 위정척사파는 무장투쟁으로 나아갔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을사늑약 이후에도 의병항쟁이 이어졌다.
최익현, 유인석 같은 인물들은 위정척사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에 맞섰다. 이들은 근대적 시민혁명가라기보다는 성리학적 명분을 지키려 한 유생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항일투쟁의 한 축을 형성했다.
이 부분 때문에 위정척사파 평가는 단순하지 않다. 반개화·보수 세력이면서 동시에 반일 의병항쟁의 뿌리이기도 했다.
의의
위정척사파의 의의는 외세의 침략성을 경계했다는 점이다.
서양 열강과 일본은 조선을 자선사업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통상, 이권, 군사적 영향력, 정치적 지배를 노리고 있었다. 위정척사파는 이 위험을 비교적 일찍 감지했다.
특히 일본에 대한 경계는 결과적으로 타당한 부분이 많았다. 일본은 결국 조선을 침략했고,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했다. 위정척사파가 일본을 믿으면 안 된다고 본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또 위정척사파는 훗날 의병운동으로 이어지며 항일투쟁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유교적 명분론을 바탕으로 했지만, 외세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분명했다.
즉 위정척사파는 조선 말기 반외세 자주운동의 한 흐름이었다. 이 점은 무시하기 어렵다.
한계
하지만 위정척사파의 한계도 매우 크다.
첫째, 근대화의 필요성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조선이 외세에 맞서려면 군사, 재정, 행정, 외교, 과학기술을 개혁해야 했다. 그런데 위정척사파는 서양 문물 자체를 사악한 것으로 보며 배척했다.
둘째, 성리학 질서에 너무 집착했다. 조선 후기 사회는 이미 내부적으로도 썩어 있었다. 세도정치, 수탈, 신분제 모순, 농민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다. 그런데 위정척사파는 기존 질서를 바로 세우면 된다고 보았다.
셋째, 현실적 대안이 부족했다. 서양과 일본이 위험하다는 말은 맞았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막을 것인가? 대포, 군함, 근대식 군대, 산업, 외교망 없이 어떻게 버틸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답이 약했다.
넷째, 개화파를 지나치게 매국으로 몰았다. 물론 개화파도 외세 의존 문제가 있었지만, 조선이 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자체는 필요했다. 위정척사파의 강한 반개화 여론은 조선의 개혁 가능성을 좁히는 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위정척사파는 경고음은 잘 울렸지만, 소방차를 만들지는 못했다. 불났다고 외치는 건 맞는데, 물은 안 뿌리고 예법책만 들고 있으면 집은 탄다.
평가
위정척사파는 평가가 갈리는 세력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외세 침략에 맞서 조선의 자주성과 전통을 지키려 한 세력이다. 일본과 서양이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을 경계했고, 실제로 일부 인물들은 의병항쟁에 나섰다.
부정적으로 보면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보수 유생 세력이다. 근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서양 기술과 제도 수용을 반대했고, 조선을 성리학 질서 안에 계속 묶어두려 했다.
가장 균형 잡힌 평가는 둘 다 맞다는 것이다. 위정척사파는 외세의 위험을 정확히 본 부분이 있었지만, 외세를 이길 방법은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개화파는 외세를 이용하려다 외세에 휘둘렸고, 위정척사파는 외세를 막으려다 근대화까지 막았다. 조선 말기의 비극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양쪽 다 일리가 있었고, 양쪽 다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위정척사파는 조선을 사랑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를 살리는 능력은 별개다. 이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위정척사파다.
여담
- 위정척사파는 위정척사운동의 주체 세력이다.
- 대표 인물로는 이항로, 기정진, 김평묵, 최익현, 이만손, 유인석 등이 있다.
- 조선책략 반대, 영남만인소, 왜양일체론과 연결해서 외우면 된다.
- 개화파와 반대되는 세력으로 자주 설명된다.
-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 모두 위정척사파에게는 위험한 개화세력으로 보였다.
- 위정척사파는 반개화 세력이면서 동시에 반외세 세력이다. 그래서 평가가 단순하지 않다.
- 후기로 갈수록 일부 위정척사파는 의병운동으로 이어졌다.
- 지금 보면 답답한 면이 많지만, 일본의 위험성을 경계한 부분은 결과적으로 꽤 맞았다.
- 문제는 위험을 아는 것과 그 위험을 막을 힘을 갖추는 것은 다르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