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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사}} | {{한국통사}} | ||
{{2015 개정 교육과정 동아시아사 4단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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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빛과어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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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obingsa.jpg]] | [[파일:Bobingsa.jpg]] | ||
== 개요 == | == 개요 == | ||
[[1883년]] [[조선|우리나라]]가 최초로 [[미국|서양국가]]에 파견한 사절단. | [[1883년]] [[조선|우리나라]]가 최초로 [[미국|서양국가]]에 파견한 사절단. | ||
정확히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가 조선에 부임한 것에 대한 답례로 보낸 외교 사절단이다. 그래서 이름도 報聘使, 즉 “초빙에 답례하는 사신”이라는 뜻이다. | |||
하지만 단순히 “미국이 왔으니 우리도 인사하러 감 ㅎㅎ” 수준은 아니었다. 조선은 이 사절단을 통해 미국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초거대 문명국가를 직접 보고, 청나라의 간섭을 견제하고,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교육·군사·외교적 도움을 얻어보려 했다. | |||
쉽게 말하면 조선 말기판 '''미국 벤치마킹 출장단'''이다. | |||
문제는 벤치마킹 대상이 너무 강했다. 조선은 아직도 성리학과 관료제, 수레도 제대로 못 굴리는 도로 사정에 묶여 있었는데, 미국은 대륙횡단철도, 전기, 공장, 박람회, 근대식 병원, 육군사관학교를 굴리고 있었다. 조선인 입장에서는 거의 외계 문명 견학이었다. | |||
== 한줄요약 == | |||
{{심플/빛과어둠}} | |||
'''조선 최초의 미국 공식 방문단. 미국 보고 눈 돌아간 건 맞는데, 돌아와서 조선 서버에 그 패치를 적용하기엔 나라가 너무 낡았다.''' | |||
== 기본 정보 == | |||
{| class="wikitable" | |||
! colspan="2" style="text-align:center; background:#E4C97E; color:white;" | 보빙사 | |||
|- | |||
| 한자 || 報聘使 | |||
|- | |||
| 파견 연도 || [[1883년]] | |||
|- | |||
| 파견 국가 || [[미국]] | |||
|- | |||
| 파견 배경 ||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및 미국 공사 푸트 부임에 대한 답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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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 인물 ||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 |||
|- | |||
| 수행 인물 || [[유길준]], 변수, 고영철 등 | |||
|- | |||
| 관련 외국인 || [[퍼시벌 로웰]], 미야오카 츠네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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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사건 || [[조미수호통상조약]], [[갑신정변]], [[우정총국]], [[제중원]] | |||
|- | |||
| 의의 || 조선 최초의 미국 공식 사절단, 초기 한미외교와 개화정책의 상징 | |||
|} | |||
== 배경 == | == 배경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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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 과정에서 [[미국]]은 외교 대사로 루시어스 푸트를 파견했고 조선도 이에 응대해서 주미조선공사를 미국에 보내야 했으나 조선에게 미국은 듣도보도 못한 나라였고 사정상 외교 대사고 뭐고 미국에 대해 뭘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한다. | 근데 이 과정에서 [[미국]]은 외교 대사로 루시어스 푸트를 파견했고 조선도 이에 응대해서 주미조선공사를 미국에 보내야 했으나 조선에게 미국은 듣도보도 못한 나라였고 사정상 외교 대사고 뭐고 미국에 대해 뭘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한다. | ||
여기에는 외교적 계산도 있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조선 간섭이 너무 심해졌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조선을 자기 속국처럼 다루려 했고, [[위안스카이]] 같은 인물들이 조선 내정에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
고종 입장에서는 청나라만 믿고 가기엔 불안했다. 그렇다고 일본을 믿자니 [[강화도 조약]]부터 이미 불평등조약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서 고종은 멀리 있는 미국을 일종의 견제 카드로 보려고 했다. | |||
즉 보빙사는 단순 친선 방문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진 사절단이었다. | |||
* 미국 공사 파견에 대한 답례 | |||
* 조선이 독립국임을 미국에 인식시키기 | |||
* 청나라의 간섭 견제 | |||
* 미국의 외교·교육·군사 고문 초빙 | |||
* 근대 문물과 제도 시찰 | |||
* 차관 및 기술 지원 가능성 탐색 | |||
이쯤 되면 조선판 “미국 IR 투어”라고 봐도 된다. 문제는 조선이라는 회사의 재무상태가 너무 구렸고, 경영진도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점이다. | |||
== 구성원 == | |||
{{정리}} | |||
보빙사의 핵심 구성은 다음과 같다. | |||
{| class="wikitable" | |||
! 직책 !! 인물 !! 설명 | |||
|- | |||
| 전권대신 || [[민영익]] || 명성황후 친정 쪽 인물. 민씨 척족 핵심이자 보빙사의 대표. | |||
|- | |||
| 전권부대신 || [[홍영식]] || 급진개화파 인물. 훗날 [[우정총국]] 총판, [[갑신정변]] 참여. | |||
|- | |||
| 종사관 || [[서광범]] || 급진개화파 인물. 훗날 갑신정변 참여, 미국 망명, 갑오개혁 때 법부대신. | |||
|- | |||
| 수행원 || [[유길준]] || 훗날 [[서유견문]] 저자. 미국 유학. | |||
|- | |||
| 수행원 || 변수 || 훗날 미국 유학. | |||
|- | |||
| 역관 || 고영철 || 통역 담당. | |||
|- | |||
| 고문 || [[퍼시벌 로웰]] || 미국 천문학자. 조선 정부로부터 보빙사 서기관 겸 고문 직함을 받음. | |||
|- | |||
| 통역 || 미야오카 츠네지로 || 로웰과 함께 이동한 일본인 통역관. | |||
|} | |||
인물 구성을 보면 재밌다. 민영익은 민씨 척족 핵심이고, 홍영식과 서광범은 급진개화파다. 유길준은 훗날 서양 문명을 소개하는 대표 지식인이 된다. | |||
즉 보빙사는 단순 외교 사절단이 아니라, 훗날 구한말 정치판을 뒤흔들 인물들이 한 배를 탄 사건이었다. | |||
그리고 이 사람들이 미국을 같이 보고 돌아온 뒤 서로 같은 길을 갔냐? 전혀 아니다. | |||
민영익은 친청·왕당파 쪽으로 가고, 홍영식과 서광범은 급진개화파로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같이 미국 가서 신문물 보고 온 사람들이 1년 뒤에는 서로 칼 들고 죽이려 한다. 구한말 정치판은 진짜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 | |||
== 일정 == | == 일정 == | ||
| 28번째 줄: | 123번째 줄: | ||
[[홍영식]]은 [[퍼시벌 로웰]]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했는데 이때 로웰은 조선에서 국빈대접을 받는다. 한편 유럽으로 간 [[민영익]] 일행은 조선인 최초로 세계일주를 하며 [[포르투갈]], [[프랑스]], [[이탈리아]]를 둘러보고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를 거치면서 [[인도]], [[싱가포르]], [[일본]]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온다. 참고로 [[이집트]]에서는 조선인 최초로 [[피라미드]]를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유학자 출신이기에 민영익에게 피라미드는 신성한 [[왕릉]]이었고 피라미드에 들어가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 [[홍영식]]은 [[퍼시벌 로웰]]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했는데 이때 로웰은 조선에서 국빈대접을 받는다. 한편 유럽으로 간 [[민영익]] 일행은 조선인 최초로 세계일주를 하며 [[포르투갈]], [[프랑스]], [[이탈리아]]를 둘러보고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를 거치면서 [[인도]], [[싱가포르]], [[일본]]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온다. 참고로 [[이집트]]에서는 조선인 최초로 [[피라미드]]를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유학자 출신이기에 민영익에게 피라미드는 신성한 [[왕릉]]이었고 피라미드에 들어가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 ||
== 시찰한 것들 == | |||
{{빛}} | |||
보빙사 일행은 미국에서 꽤 많은 것을 보았다. | |||
그냥 백악관 앞에서 인증샷 찍고 온 게 아니라, 당시 미국의 근대 문명 인프라를 여러모로 둘러봤다. 이들이 본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 |||
* 세계박람회 | |||
* 시범농장 | |||
* 방직공장 | |||
* 의약품 제조 회사 | |||
* 병원 | |||
* 전기회사 | |||
* 철도회사 | |||
* 소방서 | |||
* 해군 관련 시설 | |||
* 육군사관학교 | |||
* 우체국 | |||
* 학교와 공공기관 | |||
* 공장과 산업시설 | |||
조선 입장에서는 하나하나가 충격이었다. 전기, 철도, 우편, 소방, 공장, 병원은 근대국가의 기본 인프라다. 그런데 조선은 아직도 관료가 말 타고 문서 들고 가는 나라였다. | |||
특히 [[홍영식]]은 미국 우편제도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귀국 후 [[우정총국]] 설치를 추진했다. 이건 보빙사의 직접적인 성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 |||
문제는 그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이 터졌다는 것. 조선 근대 우편제도 오픈식이 나라 뒤집기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스타트업 런칭파티 하다가 쿠데타 터진 꼴이다. | |||
== 보빙사와 개화파 == | |||
{{개화파}} | |||
{{토론}} | |||
보빙사는 [[개화파]] 역사에서 꽤 중요한 사건이다. | |||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모두 보빙사를 통해 미국을 직접 보았다. 이들은 미국의 힘과 문물을 보고 조선이 얼마나 뒤처졌는지 체감했다. | |||
하지만 같은 것을 보았다고 같은 결론을 낸 것은 아니다. | |||
{| class="wikitable" | |||
! 인물 !! 이후 노선 | |||
|- | |||
| [[민영익]] || 민씨 척족 핵심, 친청·왕당파 성향 강화 | |||
|- | |||
| [[홍영식]] || 급진개화파, 우정총국 설치, 갑신정변 참여 | |||
|- | |||
| [[서광범]] || 급진개화파, 갑신정변 참여, 미국 망명, 갑오개혁 참여 | |||
|- | |||
| [[유길준]] || 미국 유학, [[서유견문]] 저술, 근대 사상 소개 | |||
|} | |||
이게 보빙사의 가장 흥미로운 점이다. 같은 미국을 봤는데, 한쪽은 청나라와 왕권 중심의 현실정치로 갔고, 한쪽은 일본을 끌어들여 급진정변을 벌였다. 또 다른 쪽은 미국에 남아 공부했다. | |||
즉 보빙사는 개화파를 하나로 묶은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개화파 내부의 갈라짐을 촉진한 사건이기도 했다. | |||
== 보빙사와 민영익 == | |||
{{재평가}} | |||
[[민영익]]은 보빙사의 전권대신이었다. | |||
그는 조선 대표로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유럽까지 돌아보며 조선인 최초의 세계일주급 경험을 한 인물이 되었다. 이 정도면 당시 조선 엘리트 중에서도 세계를 가장 많이 본 축이다. | |||
하지만 귀국 후 민영익은 급진개화파와 멀어졌다. 그는 [[갑신정변]] 때 습격을 받아 죽을 뻔했고, 미국인 의사 [[알렌]]에게 치료받아 살아났다. 이 사건은 [[제중원]]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 |||
민영익은 보빙사의 대표였고, 개화 문물을 직접 본 인물이었지만, 훗날에는 민씨 척족 권력과 친청 노선의 핵심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단순히 “개화파”라고 부르기 애매하다. 정확히는 '''개화 경험을 가진 민씨 척족 권력자'''에 가깝다. | |||
== 보빙사와 홍영식 == | |||
{{빛}} | |||
[[홍영식]]은 보빙사의 전권부대신이었다. | |||
그는 미국의 우편제도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귀국 후 [[우정총국]] 설치를 추진했다. 이 점에서 보빙사의 가장 직접적인 성과를 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 |||
하지만 그는 곧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은 3일 만에 실패했고, 홍영식은 고종을 호위하다 살해되었다. | |||
홍영식은 보빙사를 통해 근대국가의 시스템을 보았고, 그것을 조선에 적용하려 했다. 그러나 적용 방식이 쿠데타였다는 점에서 평가가 꼬인다. | |||
== 보빙사와 서광범 == | |||
[[서광범]]은 보빙사의 종사관이었다. | |||
그는 미국과 유럽을 직접 보고 돌아온 급진개화파 인물이었다. 이후 갑신정변에 참여했고, 실패 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훗날 [[갑오개혁]] 때 귀국해 법부대신으로 사법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 |||
서광범은 보빙사 경험을 통해 근대 제도와 법치의 중요성을 더 체감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귀국 후 그가 추진한 사법제도 개혁은 근대국가 건설에서 꽤 의미 있는 시도였다. | |||
물론 그 역시 일본 의존, 갑신정변, 을미사변 이후 행적 등으로 평가가 깔끔하진 않다. | |||
== 보빙사와 유길준 == | |||
{{빛}} | |||
[[유길준]]은 보빙사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그대로 남아 유학했다. | |||
그는 훗날 [[서유견문]]을 저술해 서양 문명과 근대 제도를 조선 지식인들에게 소개했다. 이 점에서 보빙사는 유길준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기도 하다. | |||
유길준은 조선에서 드물게 일본과 미국을 모두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물론 그의 정치 행보도 복잡하지만, 서구 근대 문명 소개라는 측면에서는 큰 의미가 있다. | |||
보빙사가 없었다면 유길준의 미국 유학도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 |||
== 빛 == | |||
{{빛}} | |||
{{사이다}} | |||
=== 최초의 미국 공식 사절단 === | |||
보빙사는 조선이 최초로 미국에 보낸 공식 사절단이다. | |||
이것만으로도 의의가 크다.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 중심 세계관에 갇혀 있었고, 서양과의 직접 외교 경험은 거의 없었다. 보빙사는 조선이 본격적으로 태평양 너머 세계를 직접 본 사건이다. | |||
=== 근대 문물 직접 시찰 === | |||
보빙사는 미국의 산업, 교육, 의료, 군사, 통신, 교통 제도를 직접 둘러봤다. | |||
이건 단순 관광이 아니라 근대국가 운영 시스템을 관찰한 것이다. 조선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세계가 얼마나 앞서 있는지 확인한 계기였다. | |||
=== 우정총국 설치에 영향 === | |||
홍영식이 미국 우편제도에 자극을 받아 귀국 후 우정총국 설치를 추진했다. | |||
우정총국은 한국 근대 우편제도의 출발점이다. 비록 갑신정변 때문에 바로 제대로 굴러가지는 못했지만, 보빙사의 직접적인 성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 |||
=== 유길준 유학과 서유견문으로 연결 === | |||
보빙사 수행원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유학했고, 훗날 [[서유견문]]을 썼다. | |||
서유견문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서양의 정치, 사회, 문화, 제도를 소개한 중요한 책이다. 보빙사는 조선 근대 지식사와도 연결된다. | |||
=== 미국과의 외교 관계 강화 시도 === | |||
조선은 보빙사를 통해 미국과 우호 관계를 강화하려 했다. | |||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외교적 숨구멍을 찾고 있었다. 미국을 통해 청의 간섭을 견제하고 자주독립국으로 인정받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 |||
물론 미국이 조선을 끝까지 지켜준 건 아니다. 국제정치는 동화책이 아니다. | |||
== 어둠 == | |||
{{어둠}} | |||
{{재평가/거꾸로}} | |||
=== 미국에 대한 과한 기대 === | |||
조선은 미국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고 기대했다. | |||
하지만 미국은 조선의 보호자가 아니었다. 미국은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나라였고, 조선은 동아시아 변방의 약소국이었다. 나중에 가면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 묵인하는 방향으로 간다. | |||
즉 보빙사는 미국을 보는 눈을 열어줬지만, 동시에 미국에 대한 환상도 만들었다. | |||
=== 내부 분열의 씨앗 === | |||
보빙사 일행은 미국을 함께 보았지만, 귀국 후 갈라졌다. | |||
민영익은 친청·왕당파 쪽으로, 홍영식과 서광범은 급진개화파 쪽으로 갔다. 이 갈등은 [[갑신정변]]에서 폭발한다. | |||
같은 문명을 보고도 결론이 달랐다는 점이 중요하다. 신문물을 본다고 자동으로 같은 정치 노선이 나오는 건 아니다. | |||
=== 성과가 제도화되지 못함 === | |||
보빙사는 많은 것을 보고 왔다. 그런데 조선은 그것을 제대로 제도화하지 못했다. | |||
우정총국은 시작하자마자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고, 군사·교육·산업 개혁은 계속 삐걱거렸다. 보고 온 것은 많았지만 조선 정부의 실행력은 약했다. | |||
출장 보고서는 좋았는데 회사가 실행을 못 하는 상황이다. 구한말 조선은 이런 경우가 너무 많다. | |||
=== 갑신정변으로 기록이 박살남 === | |||
보빙사 일행 중 상당수가 갑신정변과 연결되면서 이후 조선 내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았다. | |||
정변이 실패한 뒤 급진개화파 인물들은 역적으로 몰렸고, 관련 기록도 지워지거나 축소되었다. 그래서 보빙사 활동은 미국 측 신문과 외국 기록을 통해 많이 복원된다. | |||
조선은 자기 근대외교사의 중요한 장면을 스스로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기록도 같이 망가진다. | |||
== 평가 == | |||
{{심플/빛과어둠}} | |||
보빙사는 조선 근대외교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 |||
좋게 보면 조선이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직접 보고, 근대 문물과 제도를 배우려 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 조선이 청나라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 세계 외교로 나아가려 한 첫걸음 중 하나였다. | |||
나쁘게 보면 보빙사는 조선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미국을 보고 왔지만 제대로 따라잡지 못했고, 미국에 기대했지만 미국은 조선을 구해주지 않았다. 사절단 내부 인물들은 귀국 후 갈라져 갑신정변과 정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결국 보빙사는 '''조선이 세계를 본 사건'''이면서 동시에 '''조선이 세계를 보고도 제대로 바뀌지 못한 사건'''이다. | |||
== 보빙사는 성공했나 == | |||
{{토론}} | |||
부분적으로는 성공했다. | |||
외교 사절로서 미국 대통령을 만났고, 미국 각지를 시찰했으며, 조선의 존재를 미국에 알렸다. 미국의 근대 시설을 직접 보고, 일부 인물들은 이후 우정총국 설치나 유학, 서구 문물 소개로 이어졌다. | |||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한계가 컸다. | |||
조선은 미국의 지원을 크게 기대했지만, 미국은 조선의 독립을 끝까지 보장하지 않았다. 보빙사 일행이 보고 온 근대 문명도 조선 내부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절단 핵심 인물들은 귀국 후 정치적으로 갈라져 정변과 망명, 암살, 실각의 길을 걸었다. | |||
즉 보빙사는 “시찰 자체는 성공, 국가 개조는 실패”라고 볼 수 있다. | |||
== 관련 사건 == | |||
* [[조미수호통상조약]] | |||
* [[수신사]] | |||
* [[조선책략]] | |||
* [[임오군란]] | |||
* [[신사유람단]] | |||
* [[영선사]] | |||
* [[갑신정변]] | |||
* [[우정총국]] | |||
* [[제중원]] | |||
* [[갑오개혁]] | |||
* [[을사조약]] | |||
== 관련 인물 == | |||
* [[민영익]] | |||
* [[홍영식]] | |||
* [[서광범]] | |||
* [[유길준]] | |||
* [[김옥균]] | |||
* [[박영효]] | |||
* [[고종]] | |||
* [[명성황후]] | |||
* [[루시어스 푸트]] | |||
* [[체스터 A. 아서]] | |||
* [[퍼시벌 로웰]] | |||
* [[알렌]] | |||
* [[위안스카이]] | |||
== 관련 문서 == | |||
* [[개화파]] | |||
* [[급진개화파]] | |||
* [[온건개화파]] | |||
* [[조미수호통상조약]] | |||
* [[미국]] | |||
* [[조선]] | |||
* [[구한말]] | |||
* [[근대화]] | |||
* [[우정총국]] | |||
* [[서유견문]] | |||
* [[제중원]] | |||
* [[친청파]] | |||
* [[친일파]] | |||
* [[친미파]] | |||
== 여담 == | == 여담 == | ||
| 35번째 줄: | 356번째 줄: | ||
*[[홍영식]]은 미국의 미국의 [[우체국]] 제도에 큰 감명을 받았고 조선에도 이 우체국을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조선에 귀국하자마자 [[우정국]]을 세운다. 근데 잘 알다시피 [[갑신정변|이 우정국 연회때 폭동이 일어나서...]] 홍영식도 여기에 가담했다가 역적으로 낙인찍히고 이후 광화문에 효수된다. | *[[홍영식]]은 미국의 미국의 [[우체국]] 제도에 큰 감명을 받았고 조선에도 이 우체국을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조선에 귀국하자마자 [[우정국]]을 세운다. 근데 잘 알다시피 [[갑신정변|이 우정국 연회때 폭동이 일어나서...]] 홍영식도 여기에 가담했다가 역적으로 낙인찍히고 이후 광화문에 효수된다. | ||
*[[유길준]]은 보빙사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그대로 남아 유학했다. 이후 [[서유견문]]을 써서 조선 지식인들에게 서양 문명을 소개했다. 말하자면 보빙사가 낳은 조선 근대 지식인의 대표 사례다. | |||
*[[퍼시벌 로웰]]은 보빙사와 함께 조선에 왔고, 이후 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훗날 화성 운하설로도 유명해지는 그 로웰 맞다. 조선과 화성 운하가 한 인물로 연결되는 기묘한 역사 버그다. | |||
*보빙사 일행은 미국 대통령을 만날 때 큰절을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서양식 외교예법을 배웠다고는 해도, 막상 천조국 머통령이 갑자기 들어오니 조선식 황제 접견 본능이 발동한 듯하다. 그래도 이후 악수도 했으니 외교 참사는 아니고 문화충돌 정도로 봐주자. | |||
== 결론 == | |||
{{정리}} | |||
보빙사는 조선이 처음으로 미국이라는 거대한 서양국가를 직접 본 사건이다. | |||
그들은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공장과 병원과 철도와 전기시설과 우체국과 군사시설을 보았다. 조선이 얼마나 뒤처졌는지 확인했고, 근대국가가 무엇인지 눈으로 보았다. | |||
그러나 조선은 그 충격을 국가 개조로 충분히 연결하지 못했다. 보빙사 인물들은 돌아와서 서로 갈라졌고, 일부는 갑신정변으로 죽거나 망명했고, 일부는 친청파가 되었고, 일부는 유학과 저술의 길을 갔다. | |||
그래서 보빙사는 빛과 어둠이 함께 있다. | |||
'''조선이 세계를 향해 눈을 뜬 순간이었지만, 눈을 뜬 뒤 몸을 움직이기엔 조선이라는 몸뚱이가 너무 늙고 병들어 있었다.''' | |||
{{주석}} | |||
2026년 5월 27일 (수) 05:47 기준 최신판
| 조선 말기의 개화파 | |||
|---|---|---|---|
| 사상·노선 | 개화파 · 개화사상 · 온건개화파 · 급진개화파 · 동도서기론 · 위정척사파 · 통상수교 거부정책 | ||
| 주요 인물 | 김옥균 · 박영효 · 서광범 · 홍영식 · 서재필 · 유길준 · 민영익 · 김윤식 · 어윤중 · 박규수 · 오경석 · 유홍기 | ||
| 관련 사건 | 강화도 조약 · 수신사 · 영선사 · 조사시찰단 · 보빙사 · 별기군 · 임오군란 · 갑신정변 · 갑오개혁 · 을미사변 · 아관파천 | ||
| 관련 국가·세력 | 조선 · 청나라 · 일본 제국 · 미국 · 러시아 제국 · 민씨 척족 · 흥선대원군 · 명성황후 | ||
| 관련 개념 | 개항 · 근대화 · 제국주의 · 불평등조약 · 친청파 · 친일파 · 친러파 · 대한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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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883년 우리나라가 최초로 서양국가에 파견한 사절단.
정확히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가 조선에 부임한 것에 대한 답례로 보낸 외교 사절단이다. 그래서 이름도 報聘使, 즉 “초빙에 답례하는 사신”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단순히 “미국이 왔으니 우리도 인사하러 감 ㅎㅎ” 수준은 아니었다. 조선은 이 사절단을 통해 미국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초거대 문명국가를 직접 보고, 청나라의 간섭을 견제하고,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교육·군사·외교적 도움을 얻어보려 했다.
쉽게 말하면 조선 말기판 미국 벤치마킹 출장단이다.
문제는 벤치마킹 대상이 너무 강했다. 조선은 아직도 성리학과 관료제, 수레도 제대로 못 굴리는 도로 사정에 묶여 있었는데, 미국은 대륙횡단철도, 전기, 공장, 박람회, 근대식 병원, 육군사관학교를 굴리고 있었다. 조선인 입장에서는 거의 외계 문명 견학이었다.
한줄요약
조선 최초의 미국 공식 방문단. 미국 보고 눈 돌아간 건 맞는데, 돌아와서 조선 서버에 그 패치를 적용하기엔 나라가 너무 낡았다.
기본 정보
| 보빙사 | |
|---|---|
| 한자 | 報聘使 |
| 파견 연도 | 1883년 |
| 파견 국가 | 미국 |
| 파견 배경 |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및 미국 공사 푸트 부임에 대한 답례 |
| 대표 인물 |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
| 수행 인물 | 유길준, 변수, 고영철 등 |
| 관련 외국인 | 퍼시벌 로웰, 미야오카 츠네지로 |
| 관련 사건 | 조미수호통상조약, 갑신정변, 우정총국, 제중원 |
| 의의 | 조선 최초의 미국 공식 사절단, 초기 한미외교와 개화정책의 상징 |
배경
1880년 수신사로 간 김홍집이 <조선책략>이라는 라노벨을 조선으로 가져오게 되고 이걸 읽은 고종이 미국과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근데 이 과정에서 미국은 외교 대사로 루시어스 푸트를 파견했고 조선도 이에 응대해서 주미조선공사를 미국에 보내야 했으나 조선에게 미국은 듣도보도 못한 나라였고 사정상 외교 대사고 뭐고 미국에 대해 뭘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한다.
여기에는 외교적 계산도 있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조선 간섭이 너무 심해졌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조선을 자기 속국처럼 다루려 했고, 위안스카이 같은 인물들이 조선 내정에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종 입장에서는 청나라만 믿고 가기엔 불안했다. 그렇다고 일본을 믿자니 강화도 조약부터 이미 불평등조약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서 고종은 멀리 있는 미국을 일종의 견제 카드로 보려고 했다.
즉 보빙사는 단순 친선 방문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진 사절단이었다.
- 미국 공사 파견에 대한 답례
- 조선이 독립국임을 미국에 인식시키기
- 청나라의 간섭 견제
- 미국의 외교·교육·군사 고문 초빙
- 근대 문물과 제도 시찰
- 차관 및 기술 지원 가능성 탐색
이쯤 되면 조선판 “미국 IR 투어”라고 봐도 된다. 문제는 조선이라는 회사의 재무상태가 너무 구렸고, 경영진도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점이다.
구성원
보빙사의 핵심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직책 | 인물 | 설명 |
|---|---|---|
| 전권대신 | 민영익 | 명성황후 친정 쪽 인물. 민씨 척족 핵심이자 보빙사의 대표. |
| 전권부대신 | 홍영식 | 급진개화파 인물. 훗날 우정총국 총판, 갑신정변 참여. |
| 종사관 | 서광범 | 급진개화파 인물. 훗날 갑신정변 참여, 미국 망명, 갑오개혁 때 법부대신. |
| 수행원 | 유길준 | 훗날 서유견문 저자. 미국 유학. |
| 수행원 | 변수 | 훗날 미국 유학. |
| 역관 | 고영철 | 통역 담당. |
| 고문 | 퍼시벌 로웰 | 미국 천문학자. 조선 정부로부터 보빙사 서기관 겸 고문 직함을 받음. |
| 통역 | 미야오카 츠네지로 | 로웰과 함께 이동한 일본인 통역관. |
인물 구성을 보면 재밌다. 민영익은 민씨 척족 핵심이고, 홍영식과 서광범은 급진개화파다. 유길준은 훗날 서양 문명을 소개하는 대표 지식인이 된다.
즉 보빙사는 단순 외교 사절단이 아니라, 훗날 구한말 정치판을 뒤흔들 인물들이 한 배를 탄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미국을 같이 보고 돌아온 뒤 서로 같은 길을 갔냐? 전혀 아니다.
민영익은 친청·왕당파 쪽으로 가고, 홍영식과 서광범은 급진개화파로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같이 미국 가서 신문물 보고 온 사람들이 1년 뒤에는 서로 칼 들고 죽이려 한다. 구한말 정치판은 진짜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
일정
당연히 조선에서 미국으로 가는 직항은 없던 시절이라 1883년 7월 15일 출항하여 일본에 들렀는데 여기서 듣도보도 못한 나라에 얘들만 보냈다간 무조건 길을 잃을 것 같았는지 당시 주일미국공사의 주선으로 퍼시벌 로웰이라는 미국 천문학자와 그의 통역관인 미야오카 츠네지로를 같이 보낸다. 이에 고마웠는지 조선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퍼시벌 로웰에게 보빙사 서기관 겸 고문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그렇게 8월 15일 일본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향했고 태평양을 건너 9월 2일 드디어 최초로 조선인이 미국땅에 발을 밟는 역사적 순간이 일어났다!
근데 좆빠지게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와싱톤에 도착하니까 정작 미국 대통령은 뉴욕에 가 있었다... 결국 사절단은 도로 거꾸로 돌아가서 뉴욕을 향했다.
아무튼 그렇게 다시 9월 18일 뉴욕에 도착해서 천조국 황제가 머무르는 호텔에서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사실 보빙사 일행은 서양식 예법에서는 절을 하지 않는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서양의 황제에게는 어떻게 예법을 표해야 하는지 몰라서 의논하던 중에 천조국 머통령이 생각보다 빨리 들어와서 너무 놀라 조건반사적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하듯 절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후 서양식으로 악수도 하긴 했다. 그래도 절을 한건 사실이다.
그래도 이 사절단 멤버들은 미국에서 국빈대접을 받았고 나름 중국과 일본을 왔다갔다 하면서 신문물을 많이 접해보던 사람들이라 서양식 예법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기에 윾교탈레반처럼 난동을 피우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도 당시 끽해야 자금성이 세상에서 제일 큰 건물인줄 알았던 조선인들이 천조국의 빌딩과 마천루를 보고 자동차와 기차를 보자 질질 싸버린다. 당시 제대로 된 포장도로 하나 없던 조선에게 천조국의 도시는 마치 외계인들이 사는 별천지와도 같은 엄청난 충격이었따.
아무튼 이렇게 보빙사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백악관도 구경하고 박람회도 가보고 기술도 배우고 차관도 요청하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러던 중 천조국 머통령이 돌아갈때 타고가라고 군함 한척을 내줬는데 유길준은 남아서 미국 유학을 하기로 하고 홍영식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돌아가서 그대로 조선으로 귀국하기로 하고 민영익, 서광범 등등은 이 군함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을 거쳐 귀국하기로 한다.
홍영식은 퍼시벌 로웰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했는데 이때 로웰은 조선에서 국빈대접을 받는다. 한편 유럽으로 간 민영익 일행은 조선인 최초로 세계일주를 하며 포르투갈, 프랑스, 이탈리아를 둘러보고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를 거치면서 인도, 싱가포르, 일본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온다. 참고로 이집트에서는 조선인 최초로 피라미드를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유학자 출신이기에 민영익에게 피라미드는 신성한 왕릉이었고 피라미드에 들어가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시찰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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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빙사 일행은 미국에서 꽤 많은 것을 보았다.
그냥 백악관 앞에서 인증샷 찍고 온 게 아니라, 당시 미국의 근대 문명 인프라를 여러모로 둘러봤다. 이들이 본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 세계박람회
- 시범농장
- 방직공장
- 의약품 제조 회사
- 병원
- 전기회사
- 철도회사
- 소방서
- 해군 관련 시설
- 육군사관학교
- 우체국
- 학교와 공공기관
- 공장과 산업시설
조선 입장에서는 하나하나가 충격이었다. 전기, 철도, 우편, 소방, 공장, 병원은 근대국가의 기본 인프라다. 그런데 조선은 아직도 관료가 말 타고 문서 들고 가는 나라였다.
특히 홍영식은 미국 우편제도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귀국 후 우정총국 설치를 추진했다. 이건 보빙사의 직접적인 성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이 터졌다는 것. 조선 근대 우편제도 오픈식이 나라 뒤집기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스타트업 런칭파티 하다가 쿠데타 터진 꼴이다.
보빙사와 개화파
| 조선 말기의 개화파 | |||
|---|---|---|---|
| 사상·노선 | 개화파 · 개화사상 · 온건개화파 · 급진개화파 · 동도서기론 · 위정척사파 · 통상수교 거부정책 | ||
| 주요 인물 | 김옥균 · 박영효 · 서광범 · 홍영식 · 서재필 · 유길준 · 민영익 · 김윤식 · 어윤중 · 박규수 · 오경석 · 유홍기 | ||
| 관련 사건 | 강화도 조약 · 수신사 · 영선사 · 조사시찰단 · 보빙사 · 별기군 · 임오군란 · 갑신정변 · 갑오개혁 · 을미사변 · 아관파천 | ||
| 관련 국가·세력 | 조선 · 청나라 · 일본 제국 · 미국 · 러시아 제국 · 민씨 척족 · 흥선대원군 · 명성황후 | ||
| 관련 개념 | 개항 · 근대화 · 제국주의 · 불평등조약 · 친청파 · 친일파 · 친러파 · 대한제국 | ||
보빙사는 개화파 역사에서 꽤 중요한 사건이다.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모두 보빙사를 통해 미국을 직접 보았다. 이들은 미국의 힘과 문물을 보고 조선이 얼마나 뒤처졌는지 체감했다.
하지만 같은 것을 보았다고 같은 결론을 낸 것은 아니다.
| 인물 | 이후 노선 |
|---|---|
| 민영익 | 민씨 척족 핵심, 친청·왕당파 성향 강화 |
| 홍영식 | 급진개화파, 우정총국 설치, 갑신정변 참여 |
| 서광범 | 급진개화파, 갑신정변 참여, 미국 망명, 갑오개혁 참여 |
| 유길준 | 미국 유학, 서유견문 저술, 근대 사상 소개 |
이게 보빙사의 가장 흥미로운 점이다. 같은 미국을 봤는데, 한쪽은 청나라와 왕권 중심의 현실정치로 갔고, 한쪽은 일본을 끌어들여 급진정변을 벌였다. 또 다른 쪽은 미국에 남아 공부했다.
즉 보빙사는 개화파를 하나로 묶은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개화파 내부의 갈라짐을 촉진한 사건이기도 했다.
보빙사와 민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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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은 보빙사의 전권대신이었다.
그는 조선 대표로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유럽까지 돌아보며 조선인 최초의 세계일주급 경험을 한 인물이 되었다. 이 정도면 당시 조선 엘리트 중에서도 세계를 가장 많이 본 축이다.
하지만 귀국 후 민영익은 급진개화파와 멀어졌다. 그는 갑신정변 때 습격을 받아 죽을 뻔했고, 미국인 의사 알렌에게 치료받아 살아났다. 이 사건은 제중원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민영익은 보빙사의 대표였고, 개화 문물을 직접 본 인물이었지만, 훗날에는 민씨 척족 권력과 친청 노선의 핵심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단순히 “개화파”라고 부르기 애매하다. 정확히는 개화 경험을 가진 민씨 척족 권력자에 가깝다.
보빙사와 홍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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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은 보빙사의 전권부대신이었다.
그는 미국의 우편제도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귀국 후 우정총국 설치를 추진했다. 이 점에서 보빙사의 가장 직접적인 성과를 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곧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은 3일 만에 실패했고, 홍영식은 고종을 호위하다 살해되었다.
홍영식은 보빙사를 통해 근대국가의 시스템을 보았고, 그것을 조선에 적용하려 했다. 그러나 적용 방식이 쿠데타였다는 점에서 평가가 꼬인다.
보빙사와 서광범
서광범은 보빙사의 종사관이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직접 보고 돌아온 급진개화파 인물이었다. 이후 갑신정변에 참여했고, 실패 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훗날 갑오개혁 때 귀국해 법부대신으로 사법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서광범은 보빙사 경험을 통해 근대 제도와 법치의 중요성을 더 체감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귀국 후 그가 추진한 사법제도 개혁은 근대국가 건설에서 꽤 의미 있는 시도였다.
물론 그 역시 일본 의존, 갑신정변, 을미사변 이후 행적 등으로 평가가 깔끔하진 않다.
보빙사와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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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은 보빙사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그대로 남아 유학했다.
그는 훗날 서유견문을 저술해 서양 문명과 근대 제도를 조선 지식인들에게 소개했다. 이 점에서 보빙사는 유길준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기도 하다.
유길준은 조선에서 드물게 일본과 미국을 모두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물론 그의 정치 행보도 복잡하지만, 서구 근대 문명 소개라는 측면에서는 큰 의미가 있다.
보빙사가 없었다면 유길준의 미국 유학도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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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미국 공식 사절단
보빙사는 조선이 최초로 미국에 보낸 공식 사절단이다.
이것만으로도 의의가 크다.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 중심 세계관에 갇혀 있었고, 서양과의 직접 외교 경험은 거의 없었다. 보빙사는 조선이 본격적으로 태평양 너머 세계를 직접 본 사건이다.
근대 문물 직접 시찰
보빙사는 미국의 산업, 교육, 의료, 군사, 통신, 교통 제도를 직접 둘러봤다.
이건 단순 관광이 아니라 근대국가 운영 시스템을 관찰한 것이다. 조선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세계가 얼마나 앞서 있는지 확인한 계기였다.
우정총국 설치에 영향
홍영식이 미국 우편제도에 자극을 받아 귀국 후 우정총국 설치를 추진했다.
우정총국은 한국 근대 우편제도의 출발점이다. 비록 갑신정변 때문에 바로 제대로 굴러가지는 못했지만, 보빙사의 직접적인 성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유길준 유학과 서유견문으로 연결
보빙사 수행원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유학했고, 훗날 서유견문을 썼다.
서유견문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서양의 정치, 사회, 문화, 제도를 소개한 중요한 책이다. 보빙사는 조선 근대 지식사와도 연결된다.
미국과의 외교 관계 강화 시도
조선은 보빙사를 통해 미국과 우호 관계를 강화하려 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외교적 숨구멍을 찾고 있었다. 미국을 통해 청의 간섭을 견제하고 자주독립국으로 인정받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물론 미국이 조선을 끝까지 지켜준 건 아니다. 국제정치는 동화책이 아니다.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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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대한 과한 기대
조선은 미국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은 조선의 보호자가 아니었다. 미국은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나라였고, 조선은 동아시아 변방의 약소국이었다. 나중에 가면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 묵인하는 방향으로 간다.
즉 보빙사는 미국을 보는 눈을 열어줬지만, 동시에 미국에 대한 환상도 만들었다.
내부 분열의 씨앗
보빙사 일행은 미국을 함께 보았지만, 귀국 후 갈라졌다.
민영익은 친청·왕당파 쪽으로, 홍영식과 서광범은 급진개화파 쪽으로 갔다. 이 갈등은 갑신정변에서 폭발한다.
같은 문명을 보고도 결론이 달랐다는 점이 중요하다. 신문물을 본다고 자동으로 같은 정치 노선이 나오는 건 아니다.
성과가 제도화되지 못함
보빙사는 많은 것을 보고 왔다. 그런데 조선은 그것을 제대로 제도화하지 못했다.
우정총국은 시작하자마자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고, 군사·교육·산업 개혁은 계속 삐걱거렸다. 보고 온 것은 많았지만 조선 정부의 실행력은 약했다.
출장 보고서는 좋았는데 회사가 실행을 못 하는 상황이다. 구한말 조선은 이런 경우가 너무 많다.
갑신정변으로 기록이 박살남
보빙사 일행 중 상당수가 갑신정변과 연결되면서 이후 조선 내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았다.
정변이 실패한 뒤 급진개화파 인물들은 역적으로 몰렸고, 관련 기록도 지워지거나 축소되었다. 그래서 보빙사 활동은 미국 측 신문과 외국 기록을 통해 많이 복원된다.
조선은 자기 근대외교사의 중요한 장면을 스스로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기록도 같이 망가진다.
평가
보빙사는 조선 근대외교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좋게 보면 조선이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직접 보고, 근대 문물과 제도를 배우려 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 조선이 청나라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 세계 외교로 나아가려 한 첫걸음 중 하나였다.
나쁘게 보면 보빙사는 조선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미국을 보고 왔지만 제대로 따라잡지 못했고, 미국에 기대했지만 미국은 조선을 구해주지 않았다. 사절단 내부 인물들은 귀국 후 갈라져 갑신정변과 정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결국 보빙사는 조선이 세계를 본 사건이면서 동시에 조선이 세계를 보고도 제대로 바뀌지 못한 사건이다.
보빙사는 성공했나
부분적으로는 성공했다.
외교 사절로서 미국 대통령을 만났고, 미국 각지를 시찰했으며, 조선의 존재를 미국에 알렸다. 미국의 근대 시설을 직접 보고, 일부 인물들은 이후 우정총국 설치나 유학, 서구 문물 소개로 이어졌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한계가 컸다.
조선은 미국의 지원을 크게 기대했지만, 미국은 조선의 독립을 끝까지 보장하지 않았다. 보빙사 일행이 보고 온 근대 문명도 조선 내부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절단 핵심 인물들은 귀국 후 정치적으로 갈라져 정변과 망명, 암살, 실각의 길을 걸었다.
즉 보빙사는 “시찰 자체는 성공, 국가 개조는 실패”라고 볼 수 있다.
관련 사건
관련 인물
관련 문서
여담
- 참고로 보빙사 일행들의 기록은 조선에서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 이유는 여기 갔다온놈들이 이후 폭동을 일으켜 역적으로 몰려 기록말살형을 당했기 때문. 그래도 미국 신문에 보빙사 일행들의 일정이 대서특필되어서 미국 측에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 민영익은 온건 개화파를 고수했으나 급진개화파들이 폭동을 일으켜 자신이 죽을뻔한 이후 친청파가 된 동시에 왕당파가 되었다. 근데 이후 친청파로 흑화해서 고종이 친러거청 정책을 밀고있다는걸 위안스카이한테 꼰질렀고 이걸 또 고종한테 들켜서 홍콩으로 망명했다. 이후 대한제국이 되자 다시 귀국하였으나 을사늑약이 맺어져서 친일내각이 세워지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했고 거기서 사망한다.
- 홍영식은 미국의 미국의 우체국 제도에 큰 감명을 받았고 조선에도 이 우체국을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조선에 귀국하자마자 우정국을 세운다. 근데 잘 알다시피 이 우정국 연회때 폭동이 일어나서... 홍영식도 여기에 가담했다가 역적으로 낙인찍히고 이후 광화문에 효수된다.
- 유길준은 보빙사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그대로 남아 유학했다. 이후 서유견문을 써서 조선 지식인들에게 서양 문명을 소개했다. 말하자면 보빙사가 낳은 조선 근대 지식인의 대표 사례다.
- 퍼시벌 로웰은 보빙사와 함께 조선에 왔고, 이후 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훗날 화성 운하설로도 유명해지는 그 로웰 맞다. 조선과 화성 운하가 한 인물로 연결되는 기묘한 역사 버그다.
- 보빙사 일행은 미국 대통령을 만날 때 큰절을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서양식 외교예법을 배웠다고는 해도, 막상 천조국 머통령이 갑자기 들어오니 조선식 황제 접견 본능이 발동한 듯하다. 그래도 이후 악수도 했으니 외교 참사는 아니고 문화충돌 정도로 봐주자.
결론
보빙사는 조선이 처음으로 미국이라는 거대한 서양국가를 직접 본 사건이다.
그들은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공장과 병원과 철도와 전기시설과 우체국과 군사시설을 보았다. 조선이 얼마나 뒤처졌는지 확인했고, 근대국가가 무엇인지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조선은 그 충격을 국가 개조로 충분히 연결하지 못했다. 보빙사 인물들은 돌아와서 서로 갈라졌고, 일부는 갑신정변으로 죽거나 망명했고, 일부는 친청파가 되었고, 일부는 유학과 저술의 길을 갔다.
그래서 보빙사는 빛과 어둠이 함께 있다.
조선이 세계를 향해 눈을 뜬 순간이었지만, 눈을 뜬 뒤 몸을 움직이기엔 조선이라는 몸뚱이가 너무 늙고 병들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