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역사 | ||||
|---|---|---|---|---|
| 진한시대 | → | 위진남북조시대 魏晉南北朝時代 |
→ | 수당시대 |
개요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는 220년부터 581년 또는 589년까지의 중국 역사 시대를 가리킨다.
한나라가 위나라로 교체된 시점부터 수나라가 등장할 때까지를 일컫는다. 또는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킨 시점까지.
위쪽은 위진국이 대빵이고 아래는 남조가 끝없이 펼쳐져서 붙은 이름이다.
정확히는 위진남북조시대라는 명칭이 삼국시대의 위나라(魏), 서진과 동진의 진나라(晉), 이후의 남북조(南北朝)를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위진국이라는 단일 국가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시대를 구분한다.
- 위진남북조시대 - 220~589년. 후한 멸망부터 수나라의 중국 재통일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시대 구분.
- 삼국시대 - 220~280년. 위·촉·오가 경쟁하던 시기.
- 서진 - 265~316년. 280년 중국을 재통일했지만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 동진·오호십육국시대 - 317~420년을 중심으로 남쪽의 동진과 북쪽의 여러 정권이 병존했다. 오호십육국시대는 보통 304~439년으로 구분한다.
- 남북조시대 - 420~589년. 남쪽의 송·제·양·진과 북쪽의 북위·동위·서위·북제·북주가 병립했다.
이러한 시대 구분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북위는 386년에 건국되었고 오호십육국시대가 끝나는 439년에도 이미 존재했으므로, 각 왕조의 시작과 종료를 서로 완전히 분리된 시대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좁은 의미의 남북조시대는 420년 유송 건국부터 589년 수나라의 남진 멸망까지를 가리킨다. 반면 위진남북조시대는 그보다 약 200년 앞선 삼국시대부터 포함한다.[1]
이 시대는 중국 역사상 대표적인 장기 분열기로, 수많은 왕조가 건국되고 멸망했다. 그러나 단순히 전쟁과 내란만 반복된 시기는 아니었다. 북방 민족과 한족의 융합, 강남 지역의 개발, 불교와 도교의 발전, 귀족문화와 문학의 성장 등 이후 수·당 제국의 성립에 영향을 준 변화들이 진행되었다.
ㄴ 왕조 이름은 존나 바뀌는데 수도는 장안, 낙양, 업, 건강 같은 도시가 계속 돌아가면서 나온다.
ㄴ 이 시대 황제들 족보를 읽다 보면 같은 성씨가 서로 죽이고 찬탈하는 일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시대별 왕조
| 시기 | 북쪽 | 남쪽 |
|---|---|---|
| 220~265년 | 위나라 | 촉한·오나라 |
| 265~280년 | 서진 | 촉한 멸망 이후 오나라 존속 |
| 280~304년 | 서진의 중국 통일 | |
| 304~317년 | 오호십육국 정권들의 등장 | 서진의 쇠퇴와 남하 |
| 317~420년 | 오호십육국시대 | 동진 |
| 420~439년 | 오호십육국 정권·북위 | 유송 |
| 439~479년 | 북위 | 유송 |
| 479~502년 | 북위 | 남제 |
| 502~534년 | 북위 | 양나라 |
| 534~550년 | 동위·서위 | 양나라 |
| 550~557년 | 북제·서위 및 이후 북주 | 양나라 |
| 557~577년 | 북제·북주 | 남진 |
| 577~581년 | 북주 | 남진 |
| 581~589년 | 수나라 | 남진 |
| 589년 | 수나라의 중국 재통일 | |
북조
서진의 통일과 붕괴
북쪽에선 삼국시대 때 부터 정통이 있는 조조 위나라가 대빵노릇을 했다.
그러나 삼국통일엔 실패하고 사마씨가 위나라 통수치고 사마염의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나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병크 중 하나인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 국가막장테크를 충실하게 타게 된다.
220년 조비가 후한 헌제의 황위를 넘겨받아 위나라를 건국했다. 이후 221년 유비가 촉한을 세우고, 229년 손권이 황제에 오르면서 위·촉·오의 삼국이 정립되었다.
그런데 위나라에서는 사마의와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가 차례로 실권을 장악했다. 263년에는 위나라가 촉한을 멸망시켰고, 265년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위나라의 황제 조환에게 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했다.
280년 서진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이로써 삼국시대는 끝났지만, 통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마염 사후 진 혜제가 즉위하면서 황족과 외척 사이의 권력투쟁이 격화되었다. 291년부터 306년까지 이어진 팔왕의 난으로 중앙정부의 권위와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내전이 계속되는 동안 북방과 변경 지역에서는 여러 세력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했다. 결국 311년에는 낙양이 함락되는 영가의 난이 발생했고, 316년에는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가 항복하면서 서진이 멸망했다.
오호십육국시대
팔내부에서 밥그릇 싸움을 벌이는 도중에 '한족 이놈들 직접보니 지들끼리 싸우느라 별거 없네.'라고 파악한 5호 부족들이 대규모로 치고들어와 화북지역을 점거한다.
여기서 말하는 5호는 선비, 흉노, 갈, 강, 저족을 뜻하는데 이들에 의해 서진은 좆망하고 남으로 대피하니 이를 동진이라고 한다.
오호(五胡)는 일반적으로 흉노, 선비, 갈족, 저족, 강족을 가리킨다. 여기서 강족(羌族)은 한자의 '강'(羌)을 사용하며, 저족은 저(氐)라는 글자를 쓴다.
다만 오호라는 이름이 실제로 북중국에 존재했던 모든 민족과 정치집단을 빠짐없이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북중국에는 여러 민족적·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거주했고, 오호 정권의 지배층도 서로 혼인하거나 한족 관료를 등용했다.
이들이 단순히 서진이 약해진 것을 보고 갑자기 외부에서 침입한 것만도 아니다. 흉노와 선비 등 여러 집단은 후한과 삼국시대부터 중국 북부와 변경 지역에 거주하거나 군사·행정체제에 참여하고 있었다.
서진의 내전이 이러한 세력들에게 정치적 독립과 군사적 확대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304년 흉노계 유연이 한나라를 건국하면서 오호십육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후 전조, 후조, 전연, 전진, 후진, 북량 등 여러 국가가 흥망을 거듭했다.
그중 전진의 부견은 북중국의 상당 부분을 통일했고, 383년에는 동진을 정복하려고 대군을 남하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비수대전에서 동진군에게 패배하면서 전진의 지배체제가 급속히 붕괴했다.
이후 북중국은 다시 여러 정권으로 분열되었다.
오호십육국시대는 일반적으로 304년부터 439년까지로 구분하며, 439년 북위가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면서 막을 내렸다.
북위
이후 북조는 5호족의 투쟁 끝에 선비족 계통의 탁발씨가 북위를 세워 화북을 통일한다.
북위는 선비족 탁발부 출신의 탁발규가 386년 건국한 국가다. 이후 세력을 확대해 439년 태무제 탁발도의 통치기에 북중국을 통일했다.
북위의 초기 수도는 평성으로, 오늘날 중국 산서성의 다퉁에 해당한다. 당시 북위는 선비족의 군사적 전통과 중국식 관료제도를 결합한 통치체제를 발전시켰다.
북위는 5호 16국의 장기적인 혼란을 끝내고 북중국에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질서를 수립했다. 하지만 북방 출신 지배층과 한족 문벌귀족, 변경의 군사세력 사이에는 여전히 이해관계의 차이가 존재했다.
효문제의 한화 정책
북위는 이민족의 세가 강했던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유목민의 강건한 생활 양식을 버리고 한화 정책을 시도한다.
북위 효문제는 선비족의 전통적인 통치 방식에 중국식 제도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485년에는 균전제를 시행해 국가가 농민에게 일정한 토지를 지급하고 세금과 노동력을 확보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486년에는 삼장제를 실시하여 향촌의 주민을 조직하고 호적과 조세 징수체계를 정비했다. 이는 지역의 유력자가 주민을 통제하는 종래의 구조를 약화시키고 중앙정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
또한 493년부터 494년에 걸쳐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황실의 탁발씨를 원씨로 고치고, 중국식 의복과 언어, 관료제도와 혼인관계를 장려했다.
이러한 개혁은 흔히 한화 정책이라고 불린다.
다만 북위의 한화 정책을 유목민이 자신의 문화를 완전히 버리고 한족으로 변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북위의 지배층은 기존의 군사적 전통을 유지하면서 중국식 제도를 도입했고, 반대로 중국 북부의 사회와 문화 역시 북방 민족의 영향을 받았다.
즉 한족이 선비족을 일방적으로 동화시킨 것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와 정치제도가 결합하면서 새로운 사회가 형성된 과정이었다.
육진의 난과 동서 분열
이러한 한화 정책에 반발한 세럭과의 내분으로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서위와 업을 중심으로 하는 동위로 분열된다. 이들은 각각 북주와 북제로 계승된다.
북위는 낙양 천도 이후 중앙의 한화 정책에 참여한 귀족들과 북방 변경의 군사집단 사이에서 갈등이 깊어졌다.
특히 북방의 여섯 군사 거점인 육진(六鎭)에 주둔하던 군인들은 중앙정부의 정책 변화로 지위와 대우가 악화되었다고 느꼈다. 523년부터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북위의 정치적 혼란이 본격화되었다.
이것이 육진의 난이다.
육진의 난 이후 이주영과 고환, 우문태 등 군사적 실력자들이 등장했으며 북위 조정의 권력은 사실상 군벌들에게 넘어갔다.
534년에는 고환이 황제를 옹립하면서 동위가 성립했고, 535년에는 우문태가 다른 황제를 내세우면서 서위가 성립했다.
동위의 수도는 업, 서위의 수도는 장안이었다.
이후 550년 동위의 실권을 장악한 고씨 가문이 북제를 건국했고, 557년에는 서위의 우문씨 가문이 북주를 건국했다.
따라서 북위에서 동위·서위가 갈라지고 다시 북제·북주로 이어졌다는 원문의 설명은 대체로 맞다.
북제와 북주
영토상으로나 인구상으로나 경제력에서 열세였던 북주였지만 명군 무제의 균전제와 삼장제 폐불정책 등으로 국가의 기반을 다진 북주는 북제를 멸망시켰다.
정확히 구분하면 균전제와 삼장제는 북주 무제가 처음 시행한 제도가 아니라 북위 효문제 시기의 개혁이다. 북주 역시 이러한 제도적 전통을 이어받고 정비했지만, 최초 시행자를 북주 무제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북주 무제 우문옹은 560년에 즉위했으며, 572년 권신 우문호를 제거하고 직접 정치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재정 기반을 확충했으며, 574년에는 불교와 도교를 탄압하고 사찰의 재산과 인력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 정책은 일반적으로 북주 무제의 폐불이라고 불린다. 불교와 도교의 교단 조직을 해체하고 승려와 도사를 환속시켜 조세와 병역을 부담하는 인구를 확보하려는 정치·경제적 의도도 있었다.
이와 같은 탄압은 불교사에서 삼무일종의 법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북주는 577년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통일했다. 이는 439년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한 이후 다시 북방에 하나의 강력한 정권이 수립되었다는 의미가 있었다.
다만 북주 무제는 이듬해인 578년 사망했다.
수나라의 건국
그러나 북주는 이후 용렬한 군주만이 나타나었고 이를 알아챈 무슨총관이었더라 할튼 양견이 수를 세우고 남조를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북주 무제가 사망한 뒤 아들 우문윤이 선제로 즉위했으나 580년에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어린 정제가 즉위하면서 외척이었던 양견이 정권을 장악했다.
양견은 북주의 군사·관료조직을 장악하고 반대 세력을 제거한 뒤, 581년 정제로부터 황위를 넘겨받아 수나라를 건국했다.
이 양견이 바로 수문제다.
수문제는 북주가 북중국을 통일하면서 확보한 군사적 기반을 계승했고, 중앙집권적 통치제도를 정비하며 남쪽의 진나라 정복을 준비했다.
589년 수나라는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4세기 초 서진의 붕괴 이후 오랫동안 계속된 중국의 남북 분열이 끝났다.
남조
동진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을 면한 낭야왕 사마예(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주의 손자)가 강동 지방을 근거지로 삼아 동진을 세웠으나 100년 조금 넘기고는 사마염이 찬탈하여 건국된 사마씨의 진나라는 똑같이 유유에게 찬탈당하여 멸망한다.
그야말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그대로 보여줬다. 이후 송-제-양-진이 건국되었는데 하나같이 죄다 단명했고, 기괴할 정도로 폭군과 암군들이 넘쳐난다.
동진은 서진의 황족이었던 낭야왕 사마예가 강남의 건강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다. 사마예는 317년 진왕으로 즉위했고 318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사마의의 아들 사마주의 후손이므로 서진의 황실과 같은 사마씨 가문에 속했다.
동진은 북중국을 상실한 뒤 강남을 기반으로 존속했으며, 강남으로 이주한 북방의 문벌귀족과 기존 강남의 유력 가문들이 정치적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황제의 권력이 강하지 못했고, 왕씨·유씨·환씨·사씨 등 문벌귀족과 군사 실력자의 영향력이 컸다.
383년에는 비수대전에서 사현 등이 지휘한 동진군이 전진의 대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는 동진이 북중국의 강력한 정권에 정복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동진 말기에는 손은의 난과 여러 군사적 반란으로 혼란이 심해졌다.
이 과정에서 장군 유유가 등장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했다. 유유는 북벌을 통해 남연과 후진을 멸망시키고 낙양·장안 등지를 일시적으로 확보했으며, 420년 동진의 마지막 황제 공제로부터 황위를 넘겨받아 유송을 건국했다.
사마씨가 조씨의 위나라를 찬탈해 서진을 건국했는데, 결국 사마씨의 동진도 유씨에게 찬탈당한 것이다.
ㄴ 남의 왕조를 먹고 세웠더니 후손들이 똑같이 남에게 왕조를 먹혔다.
남조의 공통적인 특징
남조의 왕조는 유송, 남제, 양나라, 진나라 순으로 이어졌다.
네 왕조는 모두 건강, 오늘날의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황실의 성씨와 왕조 이름은 계속 바뀌었지만, 강남의 정치·경제적 기반과 문벌귀족 사회는 상당 부분 이어졌다.
남조의 정치에서는 군사적 실력자가 황제의 권력을 장악한 뒤 선양을 받아 새 왕조를 세우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모든 남조 군주가 폭군이었던 것은 아니며, 유송 문제나 양 무제처럼 장기간 통치한 군주도 존재했다.
강남 지역에서는 북방의 전란을 피해 이주한 인구와 기술, 농업 생산의 확대를 바탕으로 경제적 발전이 진행되었다.
다만 후대의 남송 시대에 강남 경제가 북중국을 능가할 정도로 성장한 상황과 5~6세기의 남조를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유송
첫 타자인 유송부터 정상적인 왕조라면 한 명 있을까 말까한 폐제가 둘이고(전,후폐제), 그 뒤를 이은 제는 30년도 못 채우고 왕조가 망했는데 폐제가 3명이나 있다. 양은 건국자인 소연이 원맨쇼로 지탱하다가 죽으니 거짓말같이 8년만에 무너져 내렸다.
원래는 시조 유유가 건국 이전에 북벌을 통해 황하 이남의 상당한 영토를 획득했지만 자손들이 거의 대부분 막장들이라서 북위에게 대다수의 영토를 날려먹는다.
그 실체는 창업 군주 유유와 3대 황제 유의륭 마지막 군주 유준 이외에는 모두 막장이었던 왕조다. 이들을 뺀 나머지는 개막장이냐 그냥 평범한(?) 막장이냐의 차이일뿐(...).
괴담 기네스 책에나 나올 법한 아니 막장 이야기 책에 나오는 것 이상으로 왕실사가 막장 of 막장이었던 유례 없는 희대의 호러 엽기 판타스틱 병맛 왕조로, 바로 뒤를 이은 제 왕조와 함께 어지간한 막장 드라마 시나리오나 막장 에로게 설정 따위는 그냥 쌈싸먹는 콩가루 집안 내지 인간 도살장을 보여줬다.
이 왕조의 행적을 축약하자면 남자 친척(형제)은 모두 죽이고, 여자 친척은 예쁘면 겁탈한다.
웬만한 왕조에서 한 두명 나올까 하는 폭군들과 암군들이 연속해서 등장했다. 그나마 장수한 무제를 제외하면 소제, 문제, 전폐제, 후폐제, 순제는 젊은 나이에 살해당했고 효무제와 명제는 비록 병사했지만 오래 살지 못했다. 안습. 게다가 이 둘의 대는 후대에 모두 끊긴다.
유씨가 사마씨를 거꾸러트렸기 때문에 '이것은 유비의 후손인 유유가 사마씨를 물리치고 촉한을 부흥시킨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비는 한경제의 아들 중산정왕의 후손이고 유유는 한고조 유방의 동생인 초왕 유교의 먼 방계 후손이기 때문에 관계가 전혀 없다. 애시당초 국호부터도 한이 아니라 송이었다.
유송(劉宋)은 420년부터 479년까지 존속한 남조의 첫 번째 왕조다. 창건자인 유유의 성씨가 유(劉)이기 때문에 훗날의 송나라와 구분하여 유송이라고 부른다.
유송은 건국 직후 강남을 중심으로 상당한 영토를 확보했고, 3대 황제인 유의륭의 통치기에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위와의 전쟁, 황실의 권력투쟁, 군사 실력자의 등장으로 점차 쇠퇴했다.
유송 황실에는 폐위·암살·친족 살해 등 심각한 권력투쟁이 반복되었다. 다만 고대 정사에서 기록한 기괴한 일화들은 황실의 폭정을 강조하는 서술과 후대의 정치적 평가가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모든 세부 내용이 현대적인 의미에서 독립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원문의 '마지막 군주 유준'은 유준(劉準)이며, 뒤에서 등장하는 효무제 유준(劉駿)과는 다른 인물이다.
유의륭
유송의 정치 체제를 안정시키고 '원가의 치'를 이룩했으며 유송 존속 기간의 반을 통치한 명군이다. 치세는 항목 참조. 이 사람이 그나마 내부 정치는 제대로 한지라 이런 막장 왕조가 60년이나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46세의 나이에 비명횡사했으니 중국 황제 역사상 최초로 아버지를 태자 아들이 죽여버리는 패륜이 발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셋째 유준이 아버지를 죽인 형 둘을 주살하고 황제로 오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역시 아버지 유유처럼 첫째, 둘째가 막장이었다는 것이다. 그 딜레마를 피하려고 했는지 몰라도, 그는 무능한 태자 유소(劉劭)를 폐하고 둘째 시흥왕 유준(劉濬)을 주살하려 했지만, 역으로 그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역시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은 무릉왕 유준(劉駿)이었다.
유의륭(劉義隆, 407~453)은 유송의 제3대 황제인 송 문제다. 424년 즉위하여 453년까지 약 29년간 통치했다.
그의 통치기는 연호를 따서 원가의 치라고 불리며, 남조의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유의륭은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행정과 농업 생산의 안정을 추구했다. 그러나 북위에 대한 북벌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450년의 북벌 실패 이후 북위의 반격을 받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453년에는 황태자 유소가 동생인 시흥왕 유준(劉濬)과 모의해 아버지를 살해하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후 유의륭의 또 다른 아들인 무릉왕 유준(劉駿)이 유소를 토벌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이 인물이 바로 유송의 제4대 황제 효무제다.
따라서 이 사건에는 한글 이름이 같은 유준이 둘 등장한다.
- 시흥왕 유준(劉濬) - 황태자 유소와 함께 부친 유의륭을 살해한 인물.
- 무릉왕 유준(劉駿) - 유소를 토벌하고 효무제로 즉위한 인물.
또한 아들이 황제를 살해한 일이 중국 역사상 처음이라는 원문의 표현은 역사적 사례와 비교할 필요가 있는 과장이다. 유의륭의 죽음은 확실히 유송 역사에서 중요한 부자간 권력투쟁이었지만, 이를 중국 역사 전체의 최초 사건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유자업
중국 남북조시대 유송(劉宋)의 제5대 황제로 전폐제라 한다.
효무제 유준의 장남으로 후폐제 유욱과 더불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약 1년여 동안 가감없는 막장을 부렸다. 폐위됐기 때문에 묘호는 없으며 시호는 없다.
황제가 된 후 보복심에 아버지의 묘를 파헤치려고 하다가 신하들의 강력한 간언으로 그것은 관두고 결국 찌질하게 아버지를 코주부라고 욕하며 똥을 묘에 뿌리고 돌아갔다. 뜻(?)을 이루지 못한 유자업은 고모이자 효무제의 총애를 받던 계모 은귀비의 묘를 파헤쳐 버렸다.
그런 다음 자신의 이복 동생이자 사촌 동생이기도 한 효무제 유준의 8남 유자란을 사약을 내려 죽였는데, 이유는 유준이 사랑하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10살도 안 된 어린아이였던 유자란은 내세에는 황가에서 태어나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비감 섞인 유언을 남기고 죽었는데 훗날 유송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가 남긴 말과 똑같은 의미였다.
그러면 유자업이 생모인 태후에게 효도했냐하면 그것도 아닌 게,즉위하고 몇 달 뒤에 친어머니 왕씨(왕헌원)가 아파서 불렀는데 환자들이 있는 방에는 귀신들 천지라는데 내가 어떻게 가겠는가? 라면서 가지 않자 왕씨는 내 배를 가르거라. 내가 어떻게 저런 비린내나는 짐승을 낳았는지!라며 분통을 터뜨리다가 얼마 뒤인 464년 음력 8월 23일에 죽었다.
일찍이 친누나 산음공주(유초옥)와 근친상간을 했는데, 어느 날 폐하는 육궁에 후궁이 많으면서 신은 겨우 부마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는 매우 불공평합니다라는 식으로 산음 공주가 불만을 가지자, 유자업은 산음 공주에게 면수, 즉 아름다운 남첩 30명을 선물했다.
산음 공주는 남편 하집이 미남이었고, 30명의 남첩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했다. 하집은 하언의 아들이었으며 첩으로 송씨가 있었다.
산음 공주는 의원을 유혹해 음욕을 채우고 거기에 당대의 미남이었던 이부랑 저연을 유혹했다. 문제는 저연은 산음 공주의 고모부였던 것이다. 산음 공주는 동생 전폐제에게 허락을 구했는데 차마 고모부에게 목적을 설명하기가 그랬는지 조서를 내려 무조건 산음 공주 집에 가도록 했다.
산음 공주는 저연이 오자 끊임없이 유혹하고 온갖 추태와 교태를 다 부렸지만 저연은 당대의 인재답게 유혹을 거부했고 산음공주는 결국 포기했다. 그녀가 얼마 간가 죽자 남첩들은 같이 순장되었다.
누나와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효무제 유준의 친여동생인 고모 신채 공주(유영미)를 겁탈하고, 궁중의 한 여종을 살해해서 신채 공주가 죽었다고 소문내고 장사까지 치뤘다. 물론 진짜 신채 공주는 귀빈으로 삼아 성을 사씨로 고쳤으며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덤으로 고모부 하매는 죽였다. 신채공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유자업은 이상하게도 자기 삼촌들을 매우 미워해서 자기가 보기에 만만하거나 의심스러운 삼촌들에게 계속 굴욕을 줬다. 벌거벗긴 다음에 참대 나무로 만든 우리에 가두고 머리만 내밀게 하거나 가축 마냥 무게를 재기도 하고 곤장을 쳤으며 나무 그릇에 여물을 담아주고 먹으라고 했다.
이 삼촌들은 유의륭의 11남인 유욱, 12남 유후인, 13남 유후우, 8남 유의로 유자업은 이들을 각각 돼지왕, 살인왕, 도적왕, 나귀왕으로 봉했는데 왕명도 그렇고 그 이유도 가관인데 돼지왕 유욱은 가장 뚱뚱해서, 살인왕 유후인은 인상이 가장 험악해서, 유후우는 가장 욕심이 많아서, 유의는 가장 멍청해서였다. (실제로 유의는 평상시에도 어리석어서 다른 황족들에게도 무시당했다)
이 자의 최후도 매우 황당했는데 계속된 폭정에 버티지 못한 삼촌 유욱과 신하들이 몰래 손을 잡고 유자업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이 당시 유자업은 죽림당에서 궁녀들과 나체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는데(거부한 궁녀 1명을 참수한 건 덤이다), 유욱과 신하들의 지시를 받은 환관 수적지와 그 일당들이 호위병들이 없는 틈을 노려 살해당했다.
처음에 수적지가 바로 숨겨놓은 칼을 꺼내 유자업을 죽이러 했으나 유자업이 도망쳤는데 수적지의 부하들이 붙잡았고, 칼 들고 쫓아온 수적지에게 죽었다.
유자업(劉子業, 449~465)은 유송의 제5대 황제로, 일반적으로 전폐제라고 부른다. 464년 즉위했고 465년 살해되었다.
그의 폭정과 황실 친족들에 대한 학대는 《송서》 「전폐제기」와 《자치통감》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3]
다만 위에 등장하는 일화들은 사료에 등장하는 기록과 후대의 해석, 인터넷식 과장이 혼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유자란(劉子鸞)은 효무제 유준의 아들이므로 유자업에게는 이복동생이지 사촌동생은 아니다.
산음공주에게 남첩 30명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송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부랑 저연(褚淵)을 불러들였으나 그가 끝까지 거부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그러나 남첩들이 공주와 함께 순장되었다는 원문의 설명은 같은 사료에서 명확하게 확인되는 사실로 단정하기 어렵다.
신채공주 사건이나 황족들에 대한 모욕도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황실 내부에서 벌어진 사적인 사건의 세부 내용을 모두 독립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자업의 폭정은 황실과 관료집단의 반발을 불러왔고, 465년 숙부인 상동왕 유욱(劉彧)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그를 제거했다.
유자업은 당시 1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록된다. 이는 동아시아 전통의 세는나이를 기준으로 한 수치이며, 오늘날의 만나이와는 차이가 있다.
ㄴ 사료 그대로만 읽어도 충분히 막장인데 인터넷에서는 거기서 더 과장된다.
ㄴ 《송서》가 역사서인지 막장 드라마 대본인지 헷갈리는 부분이다.
유욱
후폐제 유욱. 아버지인 유욱과는 동명이인. 전폐제인 유자업이 패륜과 근친상간으로 막장드라마를 찍었다면, 후폐제 유욱은 인간 코스프레도 안 될 정도로 중국 전체 역사를 통틀어도 독보적인 살인광 군주였다.
제위에 올랐을 때는 겨우 9살이었는데 자신이 쓸 톱, 끌, 송곳 같은 다양한 수제 도구를 만들었다.
여기까지만 했다면 그냥 덕후끼가 있는 암군이었을텐데....문제는 이 연장으로 산 사람을 썰고 분해하면서 노는 쾌락살인을 계속 저질렀다.
어린 시절부터 멀쩡한 사람을 두들겨패는 걸 좋아해서 싹수가 노랬는데 관례를 치른 12살 이후로는 도저히 통제가 안 되는 망나니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흉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가 저녁에 나가면 새벽에 들어오고 새벽에 나가면 저녁 때 돌아왔으며, 불행하게도 거리에서 유욱과 마주친 생명체는 전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이런 사건이 계속 터지니 수도에선 상인들이 낮에도 장사를 하지 않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으며 항상 무기를 자기 곁에 두었다고 한다.
궁궐 안도 살벌하긴 마찬가지였는 유욱이 이렇게 밖에 나가 하루에 1명이라도 안 죽이면 즐거워하질 않아서 숨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막장 행각에 친어머니가 계속 그런 짓 하지말라고 잔소리를 하자 독주를 먹여 죽이려고 했으나 신하들이 뜯어말려서 그만두었다.
그만두게 만든 충고의 내용도 판타스틱한 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복잡한 상례를 치뤄야 하는데, 그러면 놀러나갈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친아버지가 명제 유욱이라고 하지만, 유욱이 어느 순간에 고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피를 이은 친자식이 아니었다.
명제 유욱은 자신의 아내를 친애하는 부하인 이도아에게 하사해서 임신한 뒤 돌려받았다고 하는데 고자라서 일종의 씨내리로 사용한 듯 보이며(사이가 가까운 남동생이 있었으니 태제로 삼는 게 원래는 맞았다), 이런 행각 때문에 세간에서는 이도아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파다했고 사이코패스 아들은 '짐은 이장군이다!'고 커밍아웃 해버리는 또라이 짓을 했다. (전제군주제에서 군주의 혈통이 의심받는다는 건 아주 좋은 반란의 명분이니 자기 입으로 밝히는 건 자살하는 것과 똑같은데 유욱은 이 짓을 했다)
제위 초부터 막장 짓거리를 계속 벌이니 신하들 중 유경문, 심발, 손초가 유욱을 제거하고자 반란 모의를 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런데 확실한 증거도 없고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았는데, 유욱은 바로 직접 그들의 집으로 행차해서 말 못하는 젖먹이 아기들까지 빠짐없이 손수 전부 죽이고 시신을 해체했다.
이 중 심발은 아버지 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유욱이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들자 빰을 때리고는 '너는 걸주보다 더한 놈이니 며칠을 못 가 도륙을 면치 못하리라!'고 저주했는데 그대로 실현되었다.
황족이 연루된 반란이 2번 터졌는데, 이걸 전부 소도성이 진압하면서 친위군 내에서 명성이 높아졌다.
사이코패스 유욱은 처음에는 두려워했으나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소도성과 비슷하게 깎은 목상에 화살을 쏜다든지, 아예 낮잠을 자는 소도성의 배에 과녁을 그려놓고 촉 없는 화살을 쐈는데 이것도 주변 사람들이 말려서 그런거지, 처음에는 진짜 화살을 쏴서 죽이려 했다.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소도성은 유욱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그 수하 10여명과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
결국 14세 되는 해 칠석에 부하에게 '견우랑 직녀가 오작교 건너는 거 보이면 바로 보고해라. 안 하면 니가 죽는다.'고 명령한 뒤 잠들었는데 이미 소도성에게 포섭된 그 부하는 유욱의 살인도구를 꺼내 목을 베었다.
유욱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백성들이 전부 만세를 외쳤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미친 놈이었다.
유욱(劉昱, 463~477)은 유송의 제8대 황제로, 472년 즉위하여 477년까지 통치했다. 일반적으로 후폐제라고 부른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후폐제 유욱(劉昱)과 그의 아버지인 명제 유욱(劉彧)은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점이다.
한글 발음이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 명제 유욱(劉彧) - 유의륭의 아들로, 465년 전폐제 유자업이 제거된 뒤 황제가 된 인물.
- 후폐제 유욱(劉昱) - 명제 유욱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아들로, 477년 살해되었다.
후폐제의 폭정과 살인 행위는 《송서》와 《자치통감》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수도 건강에서는 황제가 무기를 들고 돌아다니며 사람을 해치는 일이 발생했다는 내용도 전한다.
다만 위의 친부 관련 이야기는 당시 황실에서 유포되었던 소문을 포함한다. 생물학적 친자관계를 현대적인 방법으로 확인할 수 없으므로, 이도아가 실제로 후폐제의 친아버지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원문에서 후폐제가 소도성의 배에 과녁을 그려놓고 화살을 쏘려 했다는 일화는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소도성이 자신의 신변을 위협받는다고 판단하게 된 사건 가운데 하나로 전해진다.
477년 후폐제는 측근들에게 살해되었으며, 이후 소도성은 어린 황제 유준을 즉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4]
당시 후폐제의 나이는 전통적인 세는나이로 15세 정도였으므로, 원문의 '14세 되는 해'라는 표현은 나이 계산 방식과 실제 연도를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유준
소도성이 유욱을 죽인 후 선양을 받기 위해 꼭두각시로 앉힌 황제. 시호는 선선히 순양을 해줬다는 의미에서 순황제. 너무 어린 아이라 (즉위시 8살, 사망시 10살) 뭘 해볼 수도 없는 처지였으며 선양을 해줄 때는 불상 밑에 숨어있다가 병사들이 수색한 끝에 발견되어 끌려나왔다.
이 때 나를 죽일 거냐고 묻자 병사들을 인솔하던 자가 '죽이진 않을 겁니다. 폐하의 조상도 사마씨에게 이러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자 '아니, 너희들은 분명히 날 죽일 거다. 내세에 다시 태어나면 천자의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니, 궁중의 사람들 중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 말대로 선양한지 한 달도 안 되어 죽었다.
훗날 남송의 마지막 황제인 소제도 유준처럼 9살 어린애였는데, '내 다시는 제왕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겠다.'는 비슷한 말을 남기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유준(劉準, 469~479)은 유송의 제9대이자 마지막 황제로, 순제라고 불린다.
477년 후폐제 유욱이 살해된 뒤 즉위했으나 실제 권력은 소도성에게 있었다.
479년 소도성이 유준에게 선양을 요구하면서 유송은 멸망했다. 순제는 황위에서 물러난 뒤 여음왕으로 봉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되었다.
유준이 황제의 가문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남사》와 《자치통감》 등에 전한다.
이 일화는 왕조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어린 황제가 처했던 무력한 상황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자주 인용된다.
다만 시호인 '순'(順)을 단순히 '선양을 순순히 해주었다'는 뜻으로만 풀이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시호는 정치적 평가와 왕조 교체의 정통성을 반영하여 부여되는 명칭이다.
한편 뒤에서 언급된 남송의 마지막 황제는 1279년 애산 전투 당시 어린 나이에 바다로 뛰어든 조병이다. 그는 유송의 유준보다 약 800년 뒤의 인물이므로 서로 다른 시대와 왕조의 사건이다.
제
일명 남제. 소도성이 건국했다. 한 세대(30년)도 못 넘긴 단명 왕조로서 꼴랑 24년 갔다. 그래도 통치 시스템은 그럭저럭 굴러갔던 유송과 달리 남제때는 싸그리 막장테크를 탔다.
유송보다 존속 기간이 짧지만 군주들의 막장짓거리는 유송보다 더한 수준이었으며 친족끼리 서로 죽고 죽이다가 양무제 소연이 황위를 접수하여 멸망했다.
남제 건국 당시 북위는 전성기로 명군인 효문제 초반이었는데 왕조 교체를 알리기 위해 남제에서 사신을 보내자 '제가 송을 섬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선양했냐.'고 비웃었을 정도로 코미디 그 자체였다.
남제(南齊)는 479년부터 502년까지 존속한 남조의 두 번째 왕조다. 창건자는 소도성으로, 유송의 순제에게서 황위를 넘겨받아 건국했다.
소도성은 유송 후기에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그는 전폐제와 후폐제 시기의 혼란을 거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고, 결국 황제가 되었다.
남제는 건국 초기 고제 소도성과 무제 소색의 통치 아래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무제 사후 황족 간 권력투쟁이 심해졌고, 소란이 권력을 장악한 뒤 대규모 숙청이 벌어졌다.
이후 왕조 내부의 갈등이 계속되면서 502년 소연이 황위를 차지하여 양나라를 건국했다.
남제가 약 23년간 존속했다는 점은 정확하지만, 건국부터 멸망까지 모든 시기에 국가 운영이 완전히 마비되었던 것은 아니다.
양
일명 소량. 소연이 건국했으며 제나라 방계 왕조로 걍 연장선이다. 양무제 소연이 원맨쇼로 지탱했던 왕조인데 그가 죽자 사실상 국가 자체가 붕괴해버렸기 때문.
다행히 이 시기의 북조도 맛탱이가 가서 위협을 받진 않았지만 건국 초기부터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막장성은 남조다웠던 국가.
양나라(梁)는 502년부터 557년까지 존속한 남조의 세 번째 왕조다. 창건자 양무제 소연은 남제 황실과 혈연관계가 있는 인물로, 남제의 군주를 폐위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양무제는 502년부터 549년까지 장기간 통치했다. 그는 학문과 문학,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남조의 문화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통치기에는 귀족문화와 불교문화가 발전했으며, 사찰 건립과 불교 경전 연구 등이 활발했다.
그러나 양무제의 장기 통치 후반에는 황실과 귀족사회에 내부 문제가 누적되었다. 특히 북방에서 넘어온 장군 후경을 받아들인 결정은 왕조의 운명을 크게 바꾸었다.
후경의 난
548년 후경이 반란을 일으켜 양나라의 수도 건강을 공격했다.
이 사건을 후경의 난이라고 한다.
후경은 원래 북방에서 활동하던 군사 실력자였으며, 동위와 북제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양나라에 투항했다. 그러나 양나라 조정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후경의 군대는 건강을 포위했고, 549년 수도가 함락되었다. 당시 양무제는 궁궐에 갇힌 상태에서 사망했다.
이후 후경은 양나라 황실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한나라를 자칭했으나, 552년 양나라의 반격으로 패배했다.
문제는 후경의 난이 끝났다고 해서 양나라의 혼란도 끝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황족들 사이에서 다시 권력투쟁이 벌어졌고, 서위와 북제의 개입까지 겹치면서 양나라의 영토와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557년 진패선이 양나라의 황위를 이어받아 남진을 건국하면서 양나라는 멸망했다.
양무제가 죽은 뒤 약 8년 만에 왕조가 끝났다는 원문의 설명은 맞지만, 국가의 쇠퇴는 그의 사망 이전부터 진행된 후경의 난과 관련이 깊었다.
ㄴ 양무제는 47년이나 황제를 했는데 나라가 망하는 데는 8년이면 충분했다.
ㄴ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나라가 내전 한 번에 무너졌다.
진
일명 남진. 진씨가 세운 진나라라고 해서 진진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라 이름과 왕족 성이 같은 사례다. 진패선이 건국했다.
양나라 말기의 대규모 내전으로 인해 지배계층의 물갈이가 이루어져서 영역이 많이 축소되었지만 내부 단속은 오히려 더 잘 됐다.
거기다가 건국자인 진패선이 양나라 말기에 등장한 여러 집단들을 청소했고 진패선의 뒤를 이은 진욱 때는 북제가 맛이 간 틈을 타서 장강 이북의 영토를 일시 회복한다.
하지만 북제를 낼름 집어 먹은 북주의 관롱 집단을 상대하기에는 체급에서 밀렸고 (강남 지방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경제력에서 화북 지방을 앞선 게 남송 때라 본격적으로 삽을 뜨기 시작한 이 시대에는 아직 게임이 성립 안 됬다.) 거기다가 북주가 수로 교체된 후 등장한 황제는 역사상 손꼽힐 정도의 먼치킨인 수 문제였는데 당시 진의 황제는 역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어리석인 군주의 전형인 막장군주인 진숙보였다.
진숙보는 매일 같이 술 마시고 놀기만 하다가 수의 군대가 대규모로 침공해 온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장군들이 여러 번 싸우자고 건의했으나 울기만 하면서 아무 짓도 안 했다.
결국 훗날 수 양제가 되는 양광이 총지휘관으로 51만 8천명의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진을 멸망시켜 400년 동안 이어진 분열 시대를 끝내고 통일 왕조를 이룬다.
남진(南陳)은 557년부터 589년까지 존속한 남조의 마지막 왕조다. 창건자는 진패선이며, 국호와 황실의 성씨가 모두 진(陳)으로 일치했다.
남진은 양나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건국되었지만, 이전 남조 왕조들에 비해 지배 영역이 축소된 상태였다.
진패선과 후계 군주들은 내부 질서를 회복하고 군사력을 정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북방에서는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이후 수나라가 건국되면서 남진을 압도하는 강력한 통일정권이 등장했다.
남진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는 궁정의 향락과 문학 활동에 몰두하고 군사적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군주로 전해진다.
다만 진숙보 개인의 무능이나 향락만으로 남진의 멸망을 설명할 수는 없다. 수나라와 남진 사이에는 이미 군사력과 영토, 인구 및 국가 동원능력의 차이가 존재했다.
수나라의 남진 정복
588년 수문제 양견은 남진 정복을 위한 대규모 군사작전을 준비했다.
원문에서 언급한 51만 8천 명은 《자치통감》 등의 기록에 등장하는 수나라 원정군의 규모다. 실제 동원 병력의 정확한 숫자는 사료 해석과 연구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작전의 총지휘는 수문제의 아들 양광이 맡았다. 양광은 훗날 수양제로 즉위하는 인물이다.
589년 수나라 군대는 장강을 건너 남진의 수도 건강을 함락시켰다. 진숙보는 체포되었고 남진은 멸망했다.
이로써 서진 붕괴 이후 장기간 지속되었던 중국의 남북 분열이 끝났으며, 중국은 다시 하나의 통일 왕조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수나라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618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면서 중국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사회와 문화
문벌귀족 사회
위진남북조시대의 정치와 사회를 이해할 때 중요한 요소는 문벌귀족이다.
이 시대에는 오래된 명문가들이 관직과 토지, 교육 기회를 독점하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서진과 동진, 남조에서는 유력 가문들이 서로 혼인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귀족의 가문과 혈통은 관료 선발과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제도가 구품중정제다.
위나라에서 시작된 이 제도는 인물을 여러 등급으로 평가하여 관직 진출에 활용하는 방식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문의 지위가 인물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러한 문벌귀족 체제는 이후 수·당 시대에 과거제와 중앙집권적 관료체제가 확대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북방 민족과 한족의 융합
위진남북조시대는 여러 민족이 정치적·문화적으로 접촉하고 융합한 시기였다.
북방에서는 흉노·선비·갈·저·강 등 여러 집단이 국가를 세웠고, 중국식 관료제도와 문화를 도입했다. 반대로 한족 사회에서도 북방 민족의 군사제도와 생활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북위의 한화 정책은 이러한 변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이 과정을 단순히 한족 문화가 다른 민족을 흡수하는 일방적인 과정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당나라 황실과 북방의 군사귀족 사회 역시 이러한 다민족적 교류와 혼인관계의 영향을 받았다.
강남의 개발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북중국의 전란을 피해 많은 사람이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가지고 온 노동력과 기술, 자본과 문화는 강남 지역의 경제적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장강 하류와 주변 지역에서는 농업 생산이 확대되었고, 수로를 통한 교통과 물자 유통도 활발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 수·당과 송나라 시대에 강남 지역이 중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기반이 되었다.
다만 이 시대에 강남이 북중국보다 모든 면에서 경제적으로 우세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강남의 경제적 발전은 여러 세기에 걸쳐 진행된 장기적인 과정이었다.
불교와 도교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불교가 중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불교는 후한 시대부터 중국에 전해졌지만, 이 시대에는 황제와 귀족, 일반 백성들에게 더욱 널리 받아들여졌다.
북위와 북제 등 북방 왕조들은 불교 사찰과 석굴을 조성했으며, 남조의 황제와 귀족들도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는 윈강 석굴과 룽먼 석굴이 있다.
윈강 석굴은 북위가 평성을 수도로 삼았던 시기에 조성되었고, 룽먼 석굴은 북위의 낙양 천도 이후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항상 국가의 후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446년 북위 태무제와 574년 북주 무제는 불교를 탄압하고 사찰을 폐쇄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불교 탄압은 종교적인 대립뿐 아니라 사찰의 토지와 재산, 승려의 조세·병역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한편 도교도 교단 조직과 경전 체계를 정비하면서 발전했다.
불교와 도교, 유교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중국의 사상과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문학과 예술
위진남북조시대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지만 문학과 예술에서는 중요한 성과가 나타났다.
삼국시대 위나라의 조조, 조비, 조식은 건안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서진과 동진 시기에는 죽림칠현으로 대표되는 청담사상이 유행했고, 왕희지와 같은 서예가가 활동했다.
동진 말기에는 도연명이 전원생활과 자연을 소재로 한 시를 남겼다.
남조에서는 화려한 문장과 시가 발전했으며, 소통이 편찬한 《문선》은 후대 동아시아 문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대에는 귀족 사회의 미적 취향과 불교미술, 북방 민족의 문화가 서로 결합하면서 다양한 예술적 표현이 발전했다.
과학과 기술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수학과 천문학, 의학과 기술 분야에서도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남조 유송과 남제 시대에 활동한 조충지다.
조충지는 원주율을 매우 정밀하게 계산한 수학자로 유명하며, 역법과 천문학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원주율의 값을 소수점 이하 일곱 자리 수준으로 계산하여 3.1415926과 3.1415927 사이에 있다는 값을 제시했다.
이러한 연구는 중국 수학사에서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한반도와의 관계
위진남북조시대는 중국 내부의 분열기였지만,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와도 활발하게 교류한 시기다.
이 시대 한반도에서는 삼국이 경쟁하면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발전시켰고, 중국의 여러 왕조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고구려
고구려는 북중국의 여러 정권과 접촉하며 군사적·외교적 관계를 유지했다.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고구려는 독립적인 국가로 존속했으며, 북위와 사신을 교환했다.
고구려는 남조에도 사신을 보내는 등 북방과 남방의 여러 정권을 상대로 외교를 전개했다.
이러한 외교는 중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던 상황을 활용해 자국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전략과도 관련이 있었다.
백제
백제 역시 남조와의 외교 및 문화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유송과 양나라 등 남조 왕조와의 교류는 불교와 문물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조 양나라의 《양직공도》는 당시 중국에 사신을 보낸 여러 나라의 인물과 풍속을 기록한 자료로, 백제의 대외관계를 연구할 때 자주 활용된다.
백제는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중국의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였으며, 이를 일본 열도에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신라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초기에는 중국 왕조와의 직접적인 외교관계가 제한적이었지만, 6세기 이후 점차 교류를 확대했다.
신라는 북조와 남조의 여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했고, 불교를 공인한 뒤 사찰과 불교문화를 발전시켰다.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가 등장하면서 신라의 대중국 외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최종승자
북조 승
왜?결국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거든 존나게 멋지게 나오는 놈이 이기는겨
그래도 내가 잘못 말한건 부끄러우니까 일단은 수정해드림
결론은 선비족 즉 당나라의 이세민이 승리.
정확히 말하면 위진남북조시대의 최종적인 중국 통일은 581년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이 589년 남진을 정복하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북조 계열의 정치·군사 세력이 남조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재통일했다는 점에서는 '북조 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통일을 직접 완성한 왕조는 북주도 북제도 아닌 수나라다.
또한 이세민은 수나라를 건국한 인물이 아니라, 618년 건국된 당나라의 제2대 황제 당태종이다. 그는 626년에 황제로 즉위했으므로 위진남북조시대가 끝난 뒤에 활동한 군주다.
당나라 황실은 북주·수나라로 이어지는 관롱 귀족집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선비족을 비롯한 북방 세력과의 혼인 및 문화적 교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세민을 단순히 '선비족'이라고만 규정하는 것도 부정확하다. 당 황실은 중국식 황제체제와 귀족문화의 전통을 계승했으며, 다양한 민족적·문화적 요소가 결합한 지배집단의 일부였다.
결국 수나라가 통일을 완성하고 당나라가 그 기반을 이어받았다는 것이 정확한 역사적 흐름이다.
ㄴ 북주가 북제를 이기고, 양견이 북주를 먹고, 수나라가 남진을 먹고, 이연이 수나라를 먹었다.
ㄴ 그래서 최종승자는 누구냐고 물으면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고 당나라가 그 뒤의 통일제국을 계승했다고 답해야 한다.
ㄴ 결국 역사는 승자가 기록한다고 하지만, 수나라가 남긴 제도와 당나라가 발전시킨 제도에는 북조와 남조 양쪽의 영향이 모두 남아 있다.
역사적 의의
위진남북조시대는 장기간의 분열과 전쟁, 정치적 혼란이 계속된 시기였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사회·문화가 정체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방에서는 선비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과 한족의 융합이 진행되었고, 남쪽에서는 강남의 경제적 발전이 이어졌다.
북위의 균전제와 삼장제, 서위·북주의 부병제적 군사체제 등은 이후 수·당의 국가제도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불교와 도교, 귀족문화와 문학, 수학과 천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도 발전이 이루어졌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것은 단순히 분열된 영토를 다시 합친 사건이 아니라, 위진남북조시대에 축적된 정치·제도·문화적 변화가 새로운 통일국가의 기반으로 이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위진남북조시대는 중국사에서 단순한 암흑기라기보다, 이전의 진한 제국과 이후의 수당 제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전환기로 평가된다.[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