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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동아시아 세계의 성립과 변화
역대 고려 왕 목록
高麗 · 역대 34대 국왕 · 복위 기록 포함
파일:WangGeon.jpg
왕건
국적신라 → 후고구려·태봉 → 고려
본관개성 왕씨
직업군주, 군인
능묘현릉(顯陵)
묘호태조(太祖)
추가 정보
사망943년 7월 4일 (양력), 향년 66세
시호신성대왕(神聖大王)
아버지왕륭 (추존 세조)
어머니위숙왕후 한씨
왕비신혜왕후, 장화왕후, 신명순성왕후 등 총 29명
왕조고려
자약천(若天)
자녀26남 9녀로 전함
재위918년 6월 ~ 943년 5월 (음력)
전임궁예 (태봉 국왕)
출생877년, 신라 송악군 (현 개성시)
한자王建
후임혜종 왕무
파일:WangGeon.jpg
동상
파일:Goryo Taejo Wangkun 2.jpg
초상화
“

뜬구름처럼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

”
 
— 죽기 직전 유언으로

개요

왕건(王建, 877~943)은 고려를 건국한 고려의 태조이다.

통일 신라 말기 신라 정부의 힘이 약해져서 각 지역에서 군웅할거 했다가 대충 삼국의 형상으로 갈렸고 왕건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 휘하의 세력으로 활약했으나 궁예가 폭정을 하자 여러 무장과 호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이후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특히 피 터지게 싸웠는데 끝내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후 왕씨의 고려가 470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하게 된다.

최초로 외세의 도움 없이 한반도를 통일한 사람 이라는 수식이 있다. 다만 미묘하게 이성계 보다는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 뭐 이성계랑은 좀 다르긴 하다(왕건은 원래 개성 명문집안에서 호족으로 태어나 중부지방 호족들의 도움으로 쉽게 왕이 되었고 이성계는 전주에서 이주한 친원파 귀족출신으로 1361년 아버지인 이자춘과 함께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자 전투에서 이겨 고려 공민왕에게 벼슬을 받아 고려에 귀순하고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해서 정권을 잡았으니 다른것이다

아무래도 고려사 자체가 조선조보다 사료가 적어서 인지도가 낮기 때문일수도 있다.

어느 정도 예지력은 있는 모양인지 궁예를 폐주로 만든 뒤에 뒤통수만큼은 낌새가 느껴지면 가차없이 처단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직계후손이 이씨들에 똑같이 당하는... 역사는 참 아리송하다.

ㄴ이 사람이 예지력이 있었다면 그렇게 함부로 좆질하고 다니지 않았겠지 그리고 누구를 가차없이 날려버렸다는 건지 모르겠네 이 사람 정치 스타일은 웬만하면 안 싸우고 말로 합시다. 로 정의 되는구만.

귓밥을 팔때 존나 큰게 나오면 그걸 보고 '왕건'이라한다.

고려의 태조(太祖, 재위 918~943)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한반도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왕조의 창업 군주이다.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이며, 877년 송악에서 태어나 943년 사망하였다. 918년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폐위하고 고려를 건국했으며, 이후 견훤의 후백제와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935년 신라의 항복을 받고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켜 후삼국 통일을 완성하였다.

왕건은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가 아니라 지방의 호족세력을 포섭하고, 혼인과 관직 하사, 사성(賜姓) 등의 정책으로 서로 다른 지역세력을 통합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특히 적대세력이라고 해서 무조건 제거하지 않고 협상과 귀부를 통해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능숙했으며, 실제로 후백제의 건국자였던 견훤과 신라의 마지막 국왕 경순왕까지 받아들였다. 이러한 포용적인 정치방식은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의 여러 지역을 비교적 빠르게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물론 왕건 역시 자신의 왕권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반란은 강경하게 진압하였다. 특히 918년 즉위 직후 발생한 환선길과 임춘길의 모반을 처벌했으며, 이흔암 등 궁예의 옛 신하 가운데 새로운 왕조에 저항하는 세력도 제거하였다. 따라서 그의 정치방식을 단순히 무조건적인 관용이나 잔혹한 숙청 가운데 하나로만 설명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세력은 적극적으로 포섭하되 왕권을 위협하는 무장세력에는 단호하게 대응한 실용적인 통치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특히 왕건은 국왕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모든 지방세력을 직접 통제할 수 있었던 절대군주가 아니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여러 지역의 호족들이 독자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왕건은 이들의 협력이 없으면 대규모 전쟁을 지속하거나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성공은 강력한 개인적인 권력보다는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새로운 왕조의 정치적 질서를 형성하는 능력에 상당 부분 의존하였다.[1]

집안 내력

가계도가 상당히 애미없는 편인데 일단 이 사람의 증조 할배가 누구인지 모른다. 일단 원덕대왕이라는 좆간지 나게 왕으로 추존하긴 했으나 누군지는 모름. 훗날 당나라 선종 아니면 숙종이라고 구라를 치기도 했지만 당연히 말도 안되는 개씹소리.

할배는 작제건이라는 인물로 이 사람도 존나 애미없이 의문 투성이 새끼다.

대충 전설이나 이런저런 기록을 보면 가장 먼저 계보에 잡히는 인물이 강호경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신천 강씨[2] 의 시조이다. 편년등록에 따르면 강호경의 출신을 고구려계라 하였다. 고구려계 출신인 호경은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자칭하며, 혹은 성골장군이라 불렸다 하며 그가 백두산에서부터 유람을 시작해 송악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편년통록이 여기서부터 구라를 치는데 이후 손보육이라는 사람이 강씨 집안이랑 결혼해서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이 당숙종, 당선종이랑 원나잇해서 작제건을 낳았단다, 근데 씨발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오죽했으면 원나라 한림학사가 충선왕더러 '님 조상이 당숙종이라는데 이거 존나 말이 안되는거 아님?' 이라고 했는데 충선왕이 할말이 없어서 어버버 거렸다고 한다, 그래서 충선왕 옆에 있던 고려 역사가 민지가 대충 둘러 대서 "당숙종이 아니고 사실 당선종임 ㅇㅇㅋㅋ" 라고 했다. 당선종은 원래 당헌종이 절도사 반란 진압하면서 절도사 첩도 빼았아서 그 사이에 낳은 자식이라 황족이긴 하지만 황제랑은 거리가 먼 쩌리 개좁밥이었고 젊은 시절 존나 싸돌아다녀서 기록도 없고 나중에 황제 되고나서도 꼐임을 존나게 좋아하는 쎾쓰킹인지라 당장 그 자리에선 "뭐 씨발 당선종이면 그럴 수도 있겠군"하고 넘어가긴 넘어갔던 모양. 왕도 지네 조상 얘기를 제대로 모르고 옆에있던 꼬붕이 대충 둘러 댄거 보면 즉 왕씨 왕가 내부에서도 이거 구라인거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꽤나 높다.

오죽했으면 고려왕조의 신하인 이제현도 존나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아니 씨발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에 왕국조라는 인간이 왕건 증조부고 그 당숙종이랑 결혼했다는 딸이 왕국조랑 결혼한거라는데? 거기다 '성원록(聖源錄)'엔 보육성인(寶育聖人)이라는 자는 원덕대왕(왕국조)의 외조부라고 했는데 구라 존나 까네"라고 깠다. 하여간 족보가 하도 꼬여있어서 작제건 이상 계보를 세세히 찾는다는거 자체가 힘들다.

하여간 의문 투성이 가계도를 대충 뒤져보면 고구려계 유민 출신으로 어찌어찌 남쪽으로 흘러들어온 가문이라는걸 대충이나마 알 수 있다. 해서 지역 호족 대부분이 다 고구려 유민 출신이라는걸 생각하면 사실 이게 가장 신빙성 있다. 물론 제대로 된 성이나 족보가 없었으므로 그냥 선대에는 뭣도 없는 흙수저였다가 점점 세력을 키운 고구려계 신흥호족이라는게 가장 이 집안 내력에 부합한다.

여튼 설화에 따르면 작제건은 당나라 황제라는 애비 찾으러 서해바다 건너는 길에 우연히 서해용왕을 만나서 부탁하나 들어주고 그 덕으로 서해용왕의 딸이랑 결혼했는데, 생각해 보니 어짜피 당나라 가봤자 원나잇스탠드로 생긴 자식을 당나라 황제가 기억이나 할 까 해서 그냥 한반도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장인인 서해용왕 빨로 서해바다 해적일 시작함. 여튼 작제건 부인이 용왕의 딸=용이라 고려 왕씨는 용의 후손이라는 개드립을 500년동안 치고 다녔다. 그래서 나중에 우왕이 이성계한테 죽을 때 난 용의 후손이라 비늘이 있다. 드립과 일반 칼로 안죽어서 이성계 아버지가 전해준 전어도로 댕강 했다는 드립이 나왔다.

그리고 서해 용왕이 작제건한테 니 이름이 마침 건(建)인데, 자식들 이름을 계속 건으로 지으면 언젠가 왕이 나올 수 있다고 하니까 아들 이름을 마누라 종족인 용(龍)과 자기이름 건을 합쳐서 용건(龍建)이라고 지었다. 근데 나중에 이름을 왕륭으로 바꿈. 이 사람이 왕건 애비인데 역시 아들한테도 건이라는 이름 지어준다. 결국 이 왕씨라는 것도 왕건이 고려를 세운 후 왕이 되고 나서 정한 것으로 쉽게 말해서 왕건이 씨발 내가 왕인데 성씨도 왕으로 해야지 데헷~ - 이랬을것이다. 실제 왕륭도 살아있을 땐 그냥 용건으로 살다가 나중에 추봉했을 가능성이 존나 높다.

이는 당시 개성의 위치가 신라 경주를 기준으로 봤을때 존나 애미없이 미-개한 지역이라서 (통일신라 최대 영토가 대동강까지였다. 그나마도 점점 중앙정권이 약해져서 통일신라 하대로 가면 소백산맥 너머로는 통치권이 못 미쳤다. 그니까 말로만 신라 땅이고 실제로는 권력공백지역) 이곳 호족들도 성씨 따윈 없거나 지 꼴리는대로 썼거나 둘중 하나다. 쉽게 말해 말로만 호족이라는 말이지 실상은 도적떼나 다름없었다는 말. 작제건 때 부터 예성강, 임진강, 한강 부근에서 교역으로 부자가 됐다는데, 해적질로 먹고살았을 가능성도 존나 높다. 뭐 솔까 두개다 했겠지. 애초에 신라 정권의 지배력이 없는 치안 공백지역인데 순수하게 상업으로 세력이 유지 되겠냐? 물건 실으면 무역선, 무장 병력 태우고 다니면 군함, 그러다가 다른 무역선 만나서 털어먹으면 해적선. 나중에 이게 기반이 돼서 수달이도 좆바르는 동시대 최강 해군참모총장이 된다. 그리고 후백제 뒤치기 ㄱㄱ. 그래도 나름 그 지방에서는 잘 나갔던 모양으로 도읍 정할 곳이 없어서 빌빌대던 궁예가 송악에 도읍을 정했다.

고려 왕실의 실제 계보와 전설

왕건의 가계에서 역사적으로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되는 인물은 아버지 왕륭과 어머니 한씨, 그리고 조부로 전해지는 작제건 등이다. 왕륭은 송악을 기반으로 한 유력한 호족으로, 궁예에게 귀부한 이후 금성태수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작제건 이전의 계보는 여러 역사서와 족보의 기록이 서로 다르며, 특히 강호경과 손보육, 당나라 황제 등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계보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혈연관계라기보다 왕실의 권위를 설명하기 위해 형성된 전승의 성격이 강하다.

대표적인 자료로는 《편년통록》과 《왕대종족기》, 《성원록》 등이 있으며, 이들 자료에는 왕건의 선조가 고구려계 유민이었다는 이야기부터 당나라 황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등장한다. 특히 《편년통록》에는 고려 왕실의 선조가 당나라 숙종과 관련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실제로 당나라 숙종의 생애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대조하면 이러한 이야기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고려 후기에는 왕건의 선조가 숙종이 아니라 당나라 선종이었다는 주장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정 역시 실제 혈연관계를 입증하는 자료에 근거했다기보다는 기존 계보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해석에 가까웠다. 특히 고려 후기의 문신 이제현은 왕실의 가계에 관해 서로 다른 기록이 전해진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계보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신흥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건의 가문은 본래 송악을 기반으로 성장한 지역 호족이었지만, 고려를 건국한 이후에는 한반도의 여러 지역세력을 지배하는 왕실이 되었다. 따라서 과거의 지역 호족 집안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특별한 혈통과 운명을 가진 가문이었다는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있었으며, 당나라 황실과 용왕의 혈통을 연결하는 전승은 이러한 목적에 부합했을 것이다.

또한 왕건의 조상이 고구려계 유민이었다는 견해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을 국가적인 정체성으로 삼았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왕건의 가문이 실제로 고구려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는지, 단순히 고구려계 주민이었던 것인지, 또는 신라 말기에 새롭게 성장한 토착 호족이었는지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구려계의 지역적·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과 구체적인 혈통을 확정하는 문제는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3]

작제건과 용왕의 딸

왕건의 조부로 알려진 작제건은 고려 왕실의 건국설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전승에 따르면 작제건은 당나라 황제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가려 했으며, 항해 도중 서해의 용왕과 관련된 신비로운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후 용왕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용건을 낳았으며, 이 용건이 훗날 왕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간과 초자연적인 존재가 혼인하여 뛰어난 영웅을 낳는다는 전형적인 건국설화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고려 왕실의 선조가 바다의 용왕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정은 송악을 중심으로 성장한 왕건 가문의 해상활동과도 상징적으로 연결된다. 당시 송악과 예성강 일대는 서해의 무역항과 해상교통을 이용하기에 유리한 지역이었으며, 왕건의 가문 역시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통해 성장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작제건이 실제로 서해의 용왕과 만났거나 용왕의 딸과 혼인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설화이다. 특히 왕륭이 용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기록과 용왕의 딸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별개의 문제이며, 동일한 이름에 용이라는 글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신비로운 혈통을 주장할 수는 없다.

또한 왕건의 가문이 실제로 해적활동을 통해 재산을 축적했다는 주장도 직접적인 사료를 통해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당시 서해안의 해상세력은 무역과 군사활동, 항구의 지배권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확대했으며, 이러한 활동과 약탈이 서로 완전히 구분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왕건의 선조가 실제로 다른 상선을 약탈하거나 해적집단을 운영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만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이를 확정된 사실로 서술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왕씨 성의 기원

왕건의 성씨인 왕(王)은 후대의 건국설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왕건이 왕위에 오른 뒤 스스로 왕이라는 성씨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이러한 설명을 역사적으로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실제로 《고려사》에는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의 이름이 등장하며, 왕씨 가문이 고려 건국 이전부터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후대의 기록에서 왕륭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가 생전에 반드시 동일한 성명을 사용했다는 사실까지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고려 왕조가 건국된 이후 왕실의 선조들을 왕씨 성으로 정리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건이 단순히 왕이 되고 싶다는 이유로 왕이라는 성씨를 처음 만들었다는 설명 역시 뒷받침할 만한 직접적인 사료가 부족하다.

중요한 점은 신라 말기의 지방 호족들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성씨와 족보 체계를 완전히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지역적 기반과 정치적 지위에 따라 성씨 사용의 양상이 달랐으며, 고려 왕조의 건국 이후 지방의 유력자들이 왕씨 성을 하사받는 등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성씨와 본관의 질서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왕건 가문의 초기 성씨와 계보는 고려 건국 이전의 실제 가계와 건국 이후 정리된 왕실 계보가 서로 뒤섞여 있는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왕씨라는 성씨를 처음 사용한 시점을 정확하게 특정하는 것보다, 송악의 호족 가문이 고려의 왕실로 성장하면서 자신의 혈통과 정통성을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역사적으로 더욱 중요하다.

생애

여하튼 작제건은 진짜로 서해 용왕 빽인지 송악(개성)을 중심으로 경기도-황해도 쪽 서해바다 칠무해급 대해적이 되었기에 왕륭도 무난히 세력을 물려 받아 황해도 칠무해로 활동했고 왕건은 태어날때부터 금수저의 생활을 만끽 하던 와중 사황급이던 견훤이 대국적으로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양길에게 독립해 신라정부를 뒤엎을려는 혁명군을 만들어 강릉으로가 신라정부에 반항하던 신라왕족 김순식의 도움을 받고 그대로 서쪽으로 쭉 진출해서 홍천-춘천-철원까지 점령 했다. 그리고 궁예혁명군은 경기도-황해도 일대 까지 왔고 혁명군의 기세가 너무 강해 차례차례 경기 북부, 황해도, 평양 지역 호족들과 그 중 하나인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래서 왕건도 자연스럽게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다른 동네 호족들은 자기 나와바리 인정 받으면서 대충 궁예 산하 세력 정도로 끝낸 데 비해 왕륭은 자기 나와바리 송악을 궁예한테 넘기면서 자기 세력을 궁예 직속으로 넣는다. 궁예도 일단 강릉에서 후원 좀 받긴 했지만 원래 자기 지역기반이 없던 상태라 송악을 중심으로 삼고 자연스럽게 원래 송악 나와바리 관리하던 왕건은 리더인 궁예에 이은 2인자 참모총장이 된다. 그리고 왕륭 본인은 철원 인근의 금성(개성이랑 철원사이)태수로 임명되며, 궁예에게 굽힌지 1년 만인 897년에 병으로 죽는다. 훗날 고려가 건국되자 왕륭은 세조로 추존된다. 나중에 조카를 때려죽이고, 동생을 죽인 조선의 세조와 한자가 똑같다.

여튼 2인자가 된 왕건이는 칠무해급이라 원래 가지고 있던 병력으로도 쌈질도 좀 했던 모양으로 궁예가 강원도 원주 및 충북, 경기남부 일대의 양길 연합군과 한바탕 할 때에 활약을 엄청나게 해서 명실상부한 궁예 혁명군의 2인자가 된다.

더불어 해적질로 단련된 해상 전투력은 존나게 짱이었던지 해상전투로 수차례 견훤을 엿먹이고 심지어는 견훤군 해군참모총장인 전남 칠무해 수달이를 좆바르고 후백제의 뒷 멀티인 나주를 점령하기도 했다. 거기서 나주호족 오다련의 딸인 오씨와 결혼하였다. 오씨는 태조왕건의 둘째부인이 되며, 훗날 신혜왕후 유씨(패서지역 호족 유천궁의 딸)가 병약하여 일찍죽자 뒤를 이어 장화왕후가 되며, 고려 2대 임금인 혜종의 모후가 되시겠다.

양길연합을 이기고 강원도랑 충청도 까지 먹은 혁명군은 나라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궁예가 왕 노릇을 해먹는다. 고려라고 지은 이유는 이미 궁예 세력에서 고구려계 호족이 존나 대세가 됐기 때문. 왕권강화를 해야 하는데 2인자인 왕건을 중심으로 고구려계가 말을 안들어 쳐먹자 궁예는 각종 무리수를 두며 기침 소리를 내던가, 웃음 소리를 내면 철퇴로 머가리를 빠개는 짓을 하고, 원래 자기 나와바리도 아닌 송악에서 왕노릇 하려니 기존 박힌돌들인 고구려계 일찐들이 계속 쿠사리를 주자 궁예는 스스로 고구려 계승의식을 내던져버리고 나라이름을 '마진'으로 바꾼다음 태봉으로 바꾸었다. 도읍지 또한 철원으로 옮기는 바람에 씨발 눈 치우다가 개빡친 군바리들이 궁예 통수를 치고 당시 2인자 였던 왕건이 왕이 되었으며 고려를 건국했다. 왕건은 즉위 하자 마자 좆같은 철원 대신 자기 집인 송악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고 이름을 개경으로 바꾸었다. 다만 1인자긴 하지만 즉위 초기라서 존나 중앙집권적인 짱쎈 왕은 아니고 그냥 동시대 일찐 중에 가장 잘나가서 1인자 대우를 받을 뿐이었다. 그래서 궁예를 후원하던 강원도나 동해쪽은 왕건이 나~~중에 되서야 자기 산하로 넣을 수 있었다.

그 후 견훤과 적당히 탐색전을 벌이다가 결국 조물성 전투를 시작으로 존나게 치고박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물성전투에서는 고려가 패배한다. 또한 몇 년후 공산전투에서도 패배한다. 고려가 후백제를 역전하기 시작한 전투는 고창전투부터다. 또한 신라 경애왕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경순왕을 바지로 앉힌 후 귀환하던 견훤 통수를 치려다가 되려 머구 팔공산 부근에서 벌어진 공산전투에서 1만명 넘게 뒤지는 대패를 당하고 왕건 자신도 하마터면 뒤질뻔 했다.이때 부하장수인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입고 자신이 왕건 행세를 하면서 시간을 벌다가 결국 견훤에게 잡혀 죽었다. 이때 왕건은 후백제 군대의 포위망을 단신으로 피해 달아나면서 1달 넘게 생사 불명 상태였다.

어찌저찌 해서 가까스로 살아남긴 했으나 이번엔 견훤이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던 해상전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수군을 이끌고 개경과 황해도 해안가가 몽땅 줘 털렸다.

존나게 똥쭐이 타는 상황이었으나 결국 안동 고창전투에서 후백제군 8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며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 결과로 개쌍도 지역 신라계 호족들이 전부 왕건에게 돌아섰으며 경순왕 또한 몇가지 옵션을 조건으로 내걸어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항복했다.

한편 하필이면 이때 견훤은 장남인 신검에게 통수를 처 맞고 금산사에 감금되었는데 간신히 탈출하여 이 사람도 왕건에게 투항했다. 신라의 왕과 백제의 왕이 전부 자신에게 투항했고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이때쯔음 발해가 멸망하는 바람에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쏟아져 들어왔고 이사람들을 몽땅 군대에 쑤셔박아 전력상으로 신검의 후백제를 완전히 압도하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일리천 전투(선산지역인데 현재로 치면 경북 구미시)에서 후백제군을 물리친 후 하필이면 또 황산벌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아내며 후삼국을 통일했다.

통일 후 왕건은 자신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고구려 고토 회복을 모토로 북진정책을 실시하려 했으나 뭐 씨발 집안 단속도 안되는 마당에 하는듯 마는듯 하면서 통일신라시절 대동강보다 좀 더 위로 올라가서 청천강 까진 알박기 하고 마무리 지었다. 그나마 신라처럼 중앙정부랑 존나 멀어서 관리가 안되던 거랑 달리 대충 평양까진 완전히 지배력을 뻗을 수 있었다.

한편 견훤이 장남 왕으로 안 삼았다가 나라가 망하는 꼬라지를 봐서인지 장남인 왕무, 혜종을 후계자로 찍고 이것저것 뒷배경을 마련한다고 했으나 다 노-쓸모.

애초부터 꼐임을 좋아하는 새끼였는지 귀족의 딸이라면 건든게 아니라 그냥 보지만 보면 냅다 꽂은 레알 쎾쓰머신이었다. 기록된 마누라만 29명인데 그 중 보면 레알 애비가 뭐하는 새끼인지도 모르는 년들도 꽤 많다. 쉽게 말해서 그냥 지 꼴리는대로 박아 댔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선 결혼 동맹이라는게 의미가 없어졌고 장남이고 차남이고 삼남이고 나발이고 그냥 왕자들 외가쪽 세력 강한놈이 왕 되는 상황. 외가 쪽 배경이 흙수저인 혜종은 당연히 좆밥으로 상대가 되질 못했고 결국 이 사람이 죽자 마자 바로 호족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혜종-정종-광종대 까지의 혼란을 낳았다. 그나마 광종이 도살자마냥 싸그리 죽이면서 어느정도 안정화됐다.

또한 애새끼를 워낙 많이 싸질러 대서인지 왕씨끼리 규합하기 위해서 자식들끼리 되도록이면 근친상간을 하도록 했다. 참 씨발.

일단 이 근친상간이 현대에서 보면 좆같은거 맞다. 현대에 저지랄로 말하면 그 새끼가 ㅂㅅ 이다. 하지만 중세의 왕족이나 귀족은 원래 근친이 좀 많았다. 왕건이 좆같은 사상을 가진 병신이 아니라, 그 당시의 어느정도 보편화된 생각인 것이다. 당장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유럽 귀족사로 가면 조금만 살펴도 족보가 얽히고 섥혀있다. 아무래도 결혼이 권력이랑 밀접한 연관이 있다보니 그런 것이다. 다만 왕건 이후 3-4대까지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근친이 심하다. 남매, 삼촌, 사촌, 오촌이 서로 결혼을 해대니 3-4대쯤 가면 외삼촌 겸 고모부 겸 사촌 형이라는 좆같은 족보가 만들어 지기도 한다.

그 유명한 천추태후도 왕건 후손인데 천추태후의 아빠와 엄마가 모두 왕건의 (배다른)자식이라 왕건이 친할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가 된다. 다만 왕건은 존나 페미니스트라 여자는 외가 성을 쓰라고 했기 때문에 할머니 성을 따라서 황보씨이다. 그리고는 사촌인 경종이랑 결혼 했고 동시에 자기 오빠랑 시누이도 결혼함. 그니까 천추태후는 부모가 남매근친, 본인과 남편, 시누이, 오빠 사촌근친겸 겹사돈이다. 근데 여자는 할머니 성씨지만 남자는 왕씨기 때문에 천추태후 친오빠는 왕씨라 천추태후 남편인 경종이 죽자 왕이 되서 성종이 된다.

왕 된지 26년 만에 저세상으로 갔고 가기 전 훈요십조를 남기고 갔는데 이는 주작썰이 있긴 있다. 여하튼 뒤지기 직전 유언은 씨발 인생 존나 덧없네. 사스가 모든 걸 이룬 진정한 상남자의 좆간지 나는 최후라고 할 수 있다.

죽으면서 후대 왕들에게 지키라고 훈요10조를 남겼다. 그런데 훈요10조의 8번째 조항에 호남지역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고 했다. 이걸로 요즈음 지역드립과 엮어서 논란 정도 있는것 같은데 생각해봐라. 자신에게 유일하게 끝까지 저항한 망국 출신의 인물을 등용이나할 수 있겠냐? 가뜩이나 고려는 성종 이전까지 전국호족연합국 이었는데 후백제 본거지인 전라도쪽 인물이 고위직 잡고 다른 호족 애들 선동해서 반란 일으키면 당장 제 2차 후삼국 시대로 돌아가는 건데. (참고로 이 삼국계승의식은 졸라 오래 고려시대에 남는다. 후삼국 통일해서 300년 지난 이후에도 고구려 계승,백제 계승,신라 계승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킨게 숱하다. 이게 사라진건 이성계가 사실 알고보면 우린 다 단군의 후손임!! 따라서 우리의 조국은 조선밖에 없음!!! 이라고 지랄해서 서서히 없어졌다.)

ㄴ근데 요건 좀 논란이 있다. 아들인 혜종 외가가 나주인데 그러면 안그래도 왕자들 가운데 장남이란 이점 빼면 지지기반 약한 자식 새끼를 아주 조져 놓는거라서

ㄴ이건 호남지역이 아니라 궁예의 세력권이었던 청주 주변 인물들을 등용하지 말라고 한거다. 실제로 왕건에 대해 가장 적대적이었던 게 이 주변 지역들이다. 좆무위키 가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궁예 휘하에서의 성장

왕건은 877년 송악의 호족이었던 왕륭과 한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송악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비교적 약했으며, 예성강과 서해의 해상교통을 통해 경제력을 축적한 지방 호족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왕건의 가문은 송악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세력이었으며, 이러한 기반은 왕건이 어린 나이에 군사적·정치적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896년 무렵 궁예가 패서 지역으로 진출하자 왕륭은 자신의 근거지였던 송악을 궁예에게 바치고 귀부하였다. 궁예는 송악을 새로운 정치적 거점으로 활용했으며, 왕륭을 금성태수로 임명하고 왕건에게도 군사적 임무를 맡겼다. 왕륭은 897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서 군사적 경력을 쌓으면서 점차 핵심적인 장수로 성장하였다.

왕건은 900년 궁예의 명령에 따라 광주와 충주, 청주 등 여러 지역을 공격하여 평정했으며, 이러한 군공을 인정받아 아찬의 관등을 받았다. 이후 그는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안 지역으로 진출하여 후백제의 배후에 위치한 나주 일대를 장악했으며, 이는 궁예의 세력이 호남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왕건이 수군 지휘관으로 성장했다는 점은 그의 정치적·군사적 경력에서 중요한 특징이다. 당시 후삼국의 전쟁은 육상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상교통로를 장악하는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왕건은 송악 가문의 해상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수군의 운용에 능숙했으며, 이러한 능력은 후백제의 배후지역을 공격하거나 지방 호족들과 협력하는 데 중요한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왕건은 이후 궁예의 핵심적인 군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913년에는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시중은 당시 국가의 주요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높은 관직으로, 왕건이 단순한 군사령관을 넘어 태봉 정권의 핵심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했음을 보여 준다. 다만 이 시점에서 왕건이 궁예와 동등한 수준의 독자적인 권력을 확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궁예가 여러 지방 호족과 장수들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왕건의 정치적·군사적 지위가 변화했을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4]

나주 경략과 수달의 몰락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서 거둔 대표적인 군사적 성과 가운데 하나는 나주 지역의 장악이다. 903년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서해를 따라 남하하여 후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금성군을 공격했으며, 주변의 여러 군현을 점령하고 군사를 배치한 뒤 귀환하였다. 궁예는 이 지역의 이름을 나주(羅州)로 변경했으며, 이후 나주는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는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나주는 영산강 하구와 서남해안의 해상교통로를 연결하는 지역으로, 후백제가 호남 내륙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경제적·군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왕건이 나주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지방의 한 성을 점령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왕건의 수군은 나주를 통해 후백제의 배후를 공격하고 호남의 여러 지역세력과 교류할 수 있었으며, 이는 후백제가 북쪽의 고려 세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건은 후백제의 해상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능창을 격파하기도 했다. 능창은 수달(水獺)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남해안의 해상교통에 밝고 수군 운용에 능숙했던 인물이었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능창의 움직임을 파악한 뒤 기습작전을 통해 그를 사로잡았으며, 이후 궁예에게 압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능창을 후백제의 정식 해군참모총장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현대적인 군사조직의 개념을 당시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한 표현이다. 실제로 능창은 서남해안의 독자적인 해상세력이거나 후백제와 협력하던 지역 군사령관으로 이해되며, 당시 후백제에 현대적인 의미의 해군참모총장이라는 관직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왕건은 이러한 해상작전에서 여러 차례 군공을 세우면서 궁예의 신임을 얻었으며, 나주 지역의 호족들과도 혼인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나주의 유력한 호족인 오다련의 딸 장화왕후 오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훗날 고려 제2대 국왕이 되는 혜종 왕무가 태어났다.

다만 왕건이 나주를 완전히 장악한 이후 후백제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후백제는 여러 차례 나주를 공격했으며, 고려 역시 이 지역의 해상교통로를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투입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나주가 후삼국시대의 군사적 경쟁에서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궁예의 몰락과 918년 정변

궁예는 후고구려를 건국한 뒤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변경했으며, 911년에는 다시 태봉으로 바꾸었다. 또한 송악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초기와 달리 철원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재편하였다. 이러한 국호와 수도의 변경은 단순한 명칭의 문제가 아니라 궁예가 기존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넘어 독자적인 왕권과 국가체제를 확립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궁예는 재위 후반에 신하들을 의심하고 처벌하면서 정치적 지지를 잃어 갔다. 특히 스스로 미륵불을 자칭하고 미륵관심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충성을 의심받는 신하들을 처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행동은 궁예 정권의 주요한 군사적·정치적 지지기반이었던 지방 호족들과 장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918년 홍유와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네 명의 장수가 왕건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왕건을 찾아가 궁예의 폭정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며 새로운 왕조의 건설을 요구했으며, 왕건은 처음에는 주군을 폐위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결국 장수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왕건의 첫 번째 부인인 신혜왕후가 직접 갑옷을 가져와 왕건에게 입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왕건은 이후 군사들을 이끌고 궁예를 폐위했으며, 철원의 포정전에서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사용했으며, 궁예가 세웠던 태봉의 주요 제도와 군사조직을 이어받으면서 새로운 왕조의 정치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러한 정변은 고려 왕조의 입장에서는 폭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지만, 궁예의 관점에서는 자신이 신뢰했던 장수들에게 정권을 빼앗긴 군사적 쿠데타이기도 했다. 특히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편찬된 역사서이므로, 궁예의 폭정과 왕건의 정치적 의도를 설명할 때에는 사료의 편찬 배경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고려 건국 직후의 정치적 혼란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직후부터 여러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특히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태봉의 군사조직과 지방 호족들이 모두 새로운 왕조에 충성을 맹세한 것은 아니었다. 궁예를 지지하던 세력과 새로운 권력질서에 불만을 품은 장수들은 왕건에게 저항했으며, 일부는 직접적인 반란을 준비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918년 발생한 환선길의 모반이다. 환선길은 왕건의 즉위에 협력했던 인물로, 고려 건국 이후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군사조직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에서 자신이 충분한 권력을 얻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반란을 준비했으며, 복지겸이 이를 미리 파악해 왕건에게 보고하였다.

왕건은 처음에는 환선길의 반란 가능성을 믿지 않았지만, 실제로 환선길이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궁궐에 침입하면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왕건은 당황하지 않고 반란군을 꾸짖었으며, 환선길은 왕건의 태연한 태도를 보고 매복한 군사들이 있을 것으로 의심해 달아났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후에도 임춘길과 이흔암 등 여러 인물들이 새로운 왕조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왕건은 이러한 반란을 진압하면서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모든 반대세력을 무조건 제거한 것은 아니었으며, 귀부하거나 협력하는 지방 호족들에게는 관직과 재산을 하사하고 기존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등의 유화적인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 단순히 강력한 군사력을 이용해 모든 지역을 직접 통제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지방세력의 협력을 확보하면서 점진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전략을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후삼국 통일전쟁

고려와 후백제의 경쟁

918년 고려가 건국된 이후 한반도의 주요 정치세력은 고려와 후백제, 신라로 나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상실한 상태였으며, 실제로 후삼국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 국가는 고려와 후백제였다. 특히 후백제의 견훤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했으며, 고려의 왕건은 송악과 패서 지역의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두 국가는 초기에는 외교적인 협상과 일시적인 화친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의 주요 성과 교통로를 차지하기 위해 점차 군사적인 충돌을 확대하였다. 특히 후백제는 신라를 공격하면서 고려와 신라의 연결을 차단하려 했으며, 고려는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백제의 공세를 견제하였다.

이러한 전쟁은 단순히 두 국가의 정규군끼리 벌인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각 지역의 호족들과 성주들이 어느 국가를 지지하는가에 따라 세력 균형이 크게 달라지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왕건과 견훤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뿐 아니라 지방 호족들의 귀부를 유도하고 새로운 지배지역의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왕건은 신라와의 관계에서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경순왕을 비롯한 신라 왕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반면 견훤은 927년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경순왕을 새로운 국왕으로 세우면서 신라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후삼국 통일전쟁의 후반부에 신라 왕실과 지방 호족들이 고려를 지지하는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5]

조물성 전투

924년부터 925년 사이 고려와 후백제는 조물성(曹物城) 일대에서 치열하게 충돌하였다. 조물성은 오늘날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군사적 거점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당시 왕건과 견훤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치했으며, 양국의 군사력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전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925년 조물성 전투에서는 왕건과 견훤이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장기간 대치했지만, 어느 한쪽도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였다. 이후 양측은 협상을 통해 일시적으로 화친을 맺었으며, 서로의 친족이나 유력 인물을 인질로 교환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따라서 조물성 전투를 단순히 고려군의 일방적인 패배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전투 과정에서 고려가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는 해석은 가능하지만, 전체적인 결과는 장기간의 군사적 대치와 화친으로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양국의 인질 문제가 발생하면서 화친관계가 무너졌고, 고려와 후백제는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공산 동수 전투

927년 공산 동수 전투는 왕건의 생애에서 가장 심각한 군사적 패배로 평가된다. 당시 견훤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경순왕을 새로운 국왕으로 세웠으며,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고 후백제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였다.

왕건은 후백제의 군대와 대구 일대의 공산 동수에서 충돌했지만, 후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특히 고려군은 적군에게 포위당했고 왕건 자신도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기에 처했으며, 신숭겸과 김락 등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후대에는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입고 자신이 왕건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후백제군의 주의를 끌었다는 전설이 형성되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신숭겸이 왕건 대신 전사하고 후백제군에게 목이 잘린 것으로 전해지지만, 실제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은 신숭겸과 김락이 왕건을 보호하다가 전사했다는 사실이 중심이다.

특히 공산 전투에서 고려군 1만 명 이상이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당시 왕건이 직접 이끌고 출전한 군사의 규모와 전체적인 피해 규모를 정확하게 확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전투가 고려군의 심각한 패배였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구체적인 전사자 숫자에 대해서는 사료의 기록과 후대의 추정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공산 전투의 패배 이후 고려는 한동안 후백제의 군사적 공세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견훤은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의 여러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후백제와의 전쟁을 포기하지 않고 지방 호족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전세를 회복하고자 했다.

고창 전투

930년 고창 전투는 후삼국 통일전쟁의 주도권이 후백제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당시 견훤은 경상북도 안동 일대의 고창군을 공격했으며, 왕건은 이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특히 이 전투에는 유금필을 비롯한 고려의 주요 장수들이 참여했으며,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고창 전투에서 고려군은 후백제의 주력부대를 격파하면서 공산 전투 이후 잃었던 군사적 주도권을 회복하였다. 《고려사》에는 이 전투에서 후백제군 8,000여 명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경상도 북부와 동해안 일대의 여러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단순히 한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의미를 넘어 후삼국 통일전쟁 전체의 정치적 흐름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지방 호족들은 고려와 후백제 가운데 어느 국가가 우세한가에 따라 정치적 선택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고창 전투에서의 승리는 고려에 대한 지지와 귀부를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고창 전투는 오늘날 안동의 민속놀이인 차전놀이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차전놀이가 실제로 고창 전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동시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전투와 민속놀이의 관계는 지역적인 전승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운주 전투와 후백제의 쇠퇴

934년 운주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다시 격파하였다. 운주는 오늘날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당시 고려와 후백제가 충청도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운주를 공격했으며, 견훤 역시 직접 군대를 동원하여 대응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은 유금필 등의 활약으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했으며, 이 전투 이후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창 전투와 운주 전투의 승리는 고려가 후백제보다 군사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의 지방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후백제의 군사적·정치적 기반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견훤은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의 결정적인 몰락은 외부의 군사적 패배뿐 아니라 내부의 왕위계승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견훤은 여러 아들 가운데 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장남 신검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정변을 일으켰으며, 결국 후백제는 왕실 내부의 분열로 인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경순왕과 견훤의 귀부

935년 신라의 마지막 국왕인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신라는 이미 지방의 대부분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며, 후백제의 군사적인 위협과 왕실의 정치적 한계 속에서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경순왕은 신라의 여러 귀족들과 의논한 뒤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기로 결정했으며, 왕건은 이를 받아들여 경순왕에게 높은 관직과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였다.

특히 왕건은 경순왕을 적대적인 망국의 군주로 취급하지 않고 자신의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도록 하였으며, 신라 왕실의 일부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신라 지역의 호족들과 귀족들이 고려에 저항하기보다 새로운 왕조에 협력하도록 유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같은 해 후백제에서도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견훤의 장남 신검은 아버지가 다른 아들인 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는 사실에 반발하여 정변을 일으켰으며, 금강을 살해하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였다. 이후 견훤은 금산사에서 탈출해 나주를 거쳐 고려에 귀부했으며, 왕건은 그를 극진하게 대우하면서 후백제에 대한 최종적인 군사작전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건은 오랫동안 자신과 경쟁했던 견훤과 신라의 마지막 국왕인 경순왕을 모두 받아들이게 되었다. 특히 견훤이 자신이 건국한 후백제에서 쫓겨나 고려에 귀부했다는 사실은 후백제의 정치적 정통성과 군사적 사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왕건에게는 후삼국 통일을 완성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하였다.

일리천 전투와 후삼국 통일

936년 왕건은 신검이 지배하던 후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추진하였다. 특히 후백제의 건국자였던 견훤이 고려에 합류하면서 후백제 내부의 정치적 상황과 군사적 기반에 관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신라와 여러 지방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군사력도 크게 확대된 상황이었다.

왕건은 아들 왕무와 박술희에게 선봉부대를 이끌도록 했으며, 이후 직접 대규모 군사를 지휘하여 후백제의 군대와 맞섰다. 이 전투에는 홍유, 유금필, 왕순식, 박수경 등 여러 장수들이 참여했으며, 고려가 확보한 지방 호족의 군사력과 북방세력의 기병도 동원되었다.

특히 《고려사》에는 유금필 등이 흑수와 달고, 철륵 등 여러 북방세력의 정예 기병 약 9,500명을 지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고려가 단순히 한반도 중부의 군사력만으로 후백제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북방의 여러 세력과 협력하면서 대규모 연합군을 편성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고려군은 경상북도 구미시 일대에 해당하는 일리천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했으며, 이후 신검은 황산군에서 고려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후백제는 멸망하고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완성하게 되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신라가 7세기에 당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과정과 달리, 별도의 외국 왕조가 정규군을 파견해 직접 참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방의 여러 부족과 발해 유민 등 다양한 세력이 고려의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참여했으므로, 이를 오늘날의 민족국가 개념에 따라 완전히 외부의 도움 없이 이루어진 통일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점은 왕건이 한반도 남부와 중부에 존재하던 여러 정치세력을 통합하고 새로운 왕조의 지배질서를 수립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신라 하대 이후 오랫동안 이어졌던 정치적 분열을 마무리하고 고려 왕조가 한반도의 주요한 통일국가로 성장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6]

통치 정책

호족 포섭과 사성정책

왕건의 정치적 능력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지방 호족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한 정책이다. 당시 고려는 전국의 여러 지역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인 행정체제를 갖추지 못했으며, 각 지역의 유력한 호족들이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실상 독자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건은 이들을 무력으로 일일이 제압하기보다는 관직과 재산을 하사하고 기존의 지역적 지위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협력을 확보하였다.

특히 왕건은 자신에게 귀부하는 지방 호족들에게 높은 관등을 부여하거나 왕씨 성을 하사하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왕씨 성을 하사하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국왕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정치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지방 호족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고려 왕조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명주 지역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김순식이 있다. 김순식은 궁예 정권과의 관계가 깊었던 인물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한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저항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그를 무조건 군사적으로 공격하기보다 여러 차례 회유했으며, 결국 김순식은 고려에 귀부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고 왕순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왕건이 단순히 강력한 군사력으로 지방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협상과 관직, 혼인과 사성을 활용해 지방의 지배세력을 고려의 정치체제 안으로 끌어들였음을 보여 준다. 특히 이러한 방법은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이후에도 여러 지역의 호족들이 새로운 왕조에 협력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혼인정책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과의 혼인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기록상 29명의 왕비와 부인을 두었으며, 이를 통해 송악과 정주, 나주, 충주, 황주 등 여러 지역의 유력한 호족 가문과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혼인정책은 왕건 개인의 사생활뿐 아니라 당시 고려 왕조의 정치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첫 번째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와의 혼인이다. 신혜왕후의 아버지 유천궁은 정주의 유력한 호족으로,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서 군사활동을 하던 시기에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왕건은 나주의 호족인 오다련의 딸 장화왕후 오씨와 혼인했고, 충주 유씨와 황주 황보씨 등 여러 가문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러한 혼인관계는 왕건이 여러 지방세력의 지지를 확보하고 국가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당시 지방 호족들은 자신들의 딸이 왕비가 되거나 왕실의 외척이 되는 것을 통해 높은 정치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왕건 역시 이들의 군사력과 경제적 기반을 활용해 후백제와의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건의 혼인정책은 장기적으로 심각한 왕위계승 문제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여러 왕비가 서로 다른 호족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각 왕자의 외가가 서로 다른 정치적 지지기반을 형성했으며, 왕건이 사망한 이후에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혜종과 정종, 광종의 즉위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광종이 왕권강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는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

왕건은 지방 호족들을 통제하면서도 이들의 협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제도를 활용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심관 제도와 기인제도이다. 사심관은 중앙에서 높은 관직을 가진 인물에게 자신의 출신 지역을 감독하고 관리하도록 하는 제도로, 지방의 유력자가 중앙정부와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다.

사심관 제도의 시작은 신라의 마지막 국왕인 경순왕과 관련되어 있다. 왕건은 고려에 항복한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으며, 이후 다른 지방 출신의 유력자들에게도 이러한 역할을 부여하였다. 이는 지방의 호족들이 고려의 중앙정부에 협력하면서도 자신들의 출신 지역과 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정책이었다.

한편 기인제도는 지방 호족의 자제나 유력 인물을 수도에 머물게 하는 제도로, 이들을 통해 지방과 중앙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지방 호족들이 독자적인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억제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의 중앙정부가 지방을 직접 통제할 만한 충분한 행정력을 갖추지 못했던 상황에서 현실적인 통치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다만 이러한 제도가 지방의 모든 호족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 초기에는 여전히 지방세력들이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앙정부의 지배력도 지역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사심관과 기인제도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완성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호족 연합정치의 성격을 가진 고려 초기의 정치체제가 점차 중앙집권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조세 경감과 민심 수습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이후 신라 말기와 태봉 시기에 심화되었던 조세 부담을 완화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당시 신라 하대에는 중앙정부의 재정이 약화되면서 지방에 대한 과도한 조세수취가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부담은 원종·애노의 난을 비롯한 여러 농민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왕건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조세수취의 적정한 기준을 마련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였다. 특히 취민유도(取民有度), 즉 백성에게 세금을 거둘 때에는 일정한 기준과 한도를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왕조가 기존의 국가보다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이미지를 형성하고자 했다.

또한 왕건은 후삼국 통일 이후 국가에 공로를 세운 인물들에게 역분전(役分田)을 지급하였다. 역분전은 관직의 높낮이뿐 아니라 고려 건국과 통일에 기여한 공로 등을 고려하여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로, 새로운 왕조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고려의 중앙정부가 새로운 정치질서를 형성하고 지방 호족들의 협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만 당시 고려의 토지제도와 조세수취 체계는 아직 완전히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이후 광종과 경종, 성종 등을 거치면서 점차 새로운 제도로 발전하였다.

북진정책과 대외관계

고구려 계승의식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면서 국호를 고려(高麗)로 정하고 고구려의 계승을 국가적인 정체성으로 강조하였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국가 이름을 재사용했다는 의미를 넘어, 고구려가 지배했던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의 역사적 유산을 계승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특히 왕건의 주요 정치적 기반이었던 송악과 패서 지역은 고구려의 옛 영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으며, 이 지역의 여러 호족들은 신라의 수도 경주와는 다른 정치적·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라는 국호는 이러한 지역세력의 역사적 정체성과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연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왕건은 고려 건국 이후 평양을 중요한 북방 거점으로 삼았으며, 이 지역을 서경(西京)으로 정비하면서 북방으로의 진출을 추진하였다. 특히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역으로,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가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북진정책은 왕건이 생존하던 시기에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고려 왕조가 북방의 영토를 확대하고 거란과 여진 등 여러 북방세력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책적 기반이 되었다. 특히 고려는 왕건 이후에도 서경을 북방의 주요 군사적·행정적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청천강과 압록강 방면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7]

발해 유민 수용

926년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면서 상당한 수의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이동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국가로, 왕건은 발해가 멸망한 이후 고려로 귀부하는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발해의 왕족이었던 대광현이 여러 유민들을 이끌고 고려에 귀부하자 왕건은 그에게 왕씨 성과 관직을 하사하였다. 이는 고려가 발해의 유민을 단순한 외국의 피난민으로 취급하지 않고, 고구려의 역사적 계승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받아들이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발해 유민들의 귀부는 고려의 인구와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북방의 군사적 경험과 지역적인 정보 역시 고려에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발해 유민들이 모두 고려의 군대에 편입되어 936년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쟁에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을 일률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특히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의 일부로 등장하는 흑수와 달고, 철륵 등의 북방 기병은 발해 유민 전체와 동일한 집단이 아니며, 당시 고려와 관계를 맺고 있던 여러 북방세력 가운데 일부였다. 따라서 발해 유민들의 수용이 고려의 국력 확대에 기여했다는 사실과 후삼국 통일전쟁에 참여한 구체적인 군사세력의 구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거란과 만부교 사건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고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므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북방의 주요한 위협으로 인식하였다.

942년 거란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고 낙타 50필을 선물했지만,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국가라고 비난하면서 외교관계를 거부하였다. 특히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 50필을 개경의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 굶겨 죽이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거란 : 친하게 지내자고 낙타 50마리 가져왔습니다.

왕건 : 니들이 발해 멸망시킨 놈들이지?

거란 : 네?

왕건 : 낙타는 다리 밑에 묶어놔라.

이 사건은 왕건이 외교적으로 상당히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이다. 특히 평소에는 지방 호족들과의 협상과 포용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확대했던 왕건이 거란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적대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사실은, 그의 정치적 판단이 단순히 모든 세력과 화친하는 방식에만 의존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다만 이러한 행동이 실제로 고려의 장기적인 국익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거란은 이후 북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으며, 고려와 거란 사이의 갈등은 993년 이후 여러 차례의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만부교 사건은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발해 유민에 대한 입장을 보여 주는 사례이면서, 동시에 고려의 대외정책이 상당한 군사적 위험을 동반할 수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8]

왕위계승과 왕실의 문제

혜종을 후계자로 삼다

왕건은 여러 왕비와 자녀를 두었지만 후계자로는 장남인 왕무를 선택하였다. 왕무는 나주의 호족 오다련의 딸이었던 장화왕후 오씨에게서 태어났으며, 왕건의 여러 아들 가운데 가장 먼저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러나 왕무의 외가인 나주 오씨 가문은 다른 왕비들의 친정 가문에 비해 정치적인 기반이 약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왕건은 충주 유씨와 황주 황보씨 등 강력한 지방 호족 가문과도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들 가문에서 태어난 왕자들은 상당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왕무가 장남이라는 사실만으로 안정적인 왕위계승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건은 왕무를 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박술희의 도움을 받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은 왕무의 외가가 약하다는 점을 우려하여 직접 태자 책봉을 발표하는 대신 장화왕후에게 자황포(柘黃袍)를 담은 상자를 전달하였다. 장화왕후가 이를 박술희에게 보여 주자 박술희는 왕건의 뜻을 알아차리고 왕무를 정윤(正胤)으로 책봉할 것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왕무를 후계자로 삼았으며, 이후 943년 사망하기 직전에는 박술희에게 왕무의 보좌와 국가의 중요한 일을 부탁하였다. 특히 훈요십조를 박술희에게 전달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왕건은 그를 신뢰했으며, 이러한 조치는 혜종의 왕위계승을 안정시키기 위한 중요한 시도였다.

그러나 왕건이 사망한 이후에도 여러 외척세력과 왕자들의 정치적 경쟁은 계속되었으며, 결국 혜종이 즉위한 뒤 왕규를 비롯한 여러 세력이 왕위계승 문제에 개입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였다.[9]

혼인정책이 남긴 부작용

왕건의 혼인정책은 후삼국 통일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후 고려 왕실의 정치적인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특히 여러 지방 호족의 딸들이 왕비가 되면서 각 왕자의 외가는 서로 다른 지역적·경제적 기반을 확보했으며, 왕위계승 문제는 단순히 장남과 차남의 경쟁을 넘어 여러 호족세력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확대되었다.

왕건이 사망한 이후 혜종은 외척세력의 정치적 압박을 받았으며, 왕규의 모반과 다른 왕자들에 대한 참소 등 여러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혜종이 사망하고 정종이 즉위하면서 박술희와 왕규 등이 제거되었고, 광종의 재위 시기에는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호족과 공신들이 숙청되었다.

다만 이러한 정치적 혼란의 원인을 왕건이 부인을 많이 두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당시 고려는 여러 지방 호족들의 협력을 통해 형성된 국가였으며, 중앙정부가 지방세력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제도가 충분히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왕건의 혼인정책은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왕위계승 경쟁을 복잡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발생시킨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왕건이 여러 호족의 딸과 혼인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결혼이 개인적인 성적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실제로 일부 혼인은 지방 호족과의 정치적 협력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왕건이 직접 어떤 감정과 동기로 각각의 혼인을 결정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

왕실의 족내혼

고려 초기의 왕실에서는 가까운 친족 사이의 혼인이 상당히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왕건의 자녀와 손자 세대에서는 이복남매와 사촌 사이의 혼인 등이 나타났으며, 이러한 관습은 고려 초기 왕실의 정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고려 제4대 국왕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혼인이 있다. 광종과 대목왕후는 아버지가 왕건인 이복남매 사이였으며, 두 사람의 혼인을 통해 왕실 내부의 정치적인 결합을 강화하였다. 이후 광종의 아들인 경종은 왕건의 손녀들과 혼인했으며, 이러한 관계는 왕실의 여러 가계가 복잡하게 연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천추태후로 알려진 헌애왕후 황보씨는 왕건의 아들인 대종 왕욱과 선의왕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두 사람 역시 왕건의 자녀였다. 따라서 천추태후는 왕건을 친할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로 둔 인물이었으며, 이후 사촌관계에 해당하는 경종과 혼인하여 목종을 낳았다.

이러한 족내혼은 왕실의 재산과 정치적인 영향력이 외부의 호족 가문으로 분산되는 것을 막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왕실 내부의 혈연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왕씨 왕실의 여성들이 황보씨나 유씨 등 어머니의 성씨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왕실 내부의 혼인관계를 유지하면서 성씨가 같은 사람들 사이의 혼인을 피하려는 관습과도 관련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을 현대적인 의미의 여성주의나 양성평등 정책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당시의 성씨 사용과 혼인제도는 왕실의 혈통과 정치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으며, 현대적인 개인의 자유나 성평등이라는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10]

훈요십조

개요

훈요십조(訓要十條)는 왕건이 사망하기 직전 후대의 국왕들이 지켜야 할 정치적 원칙을 정리하여 남겼다고 전해지는 열 가지의 유훈이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943년 사망하기 직전 박술희를 불러 훈요십조를 전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고려 왕조에서는 이를 국가 운영의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였다.

훈요십조에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보호할 것, 풍수지리의 원칙을 고려해 사찰을 건립할 것, 왕위계승의 질서를 유지할 것, 거란을 경계할 것, 서경을 중요하게 여길 것, 연등회와 팔관회를 지속할 것,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경험했던 여러 정치적 문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고려는 여러 지방 호족들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국가였으므로, 후대의 국왕들이 왕권을 유지하면서도 지방세력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훈요십조가 왕건이 직접 작성한 원문 그대로 전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쟁이 존재한다. 특히 후대의 정치적인 상황이 일부 조항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견해가 있으며, 이러한 논쟁은 제8조의 지역적인 차별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11]

제8조와 지역 차별 논란

훈요십조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조항은 제8조이다. 이 조항에는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바깥의 지세가 배역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해당 지역의 인물들이 조정에 참여해 높은 지위를 차지하면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여기서 차현은 일반적으로 차령산맥과 관련된 지명으로 이해되며, 공주강은 오늘날 금강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조항은 특정한 지리적 범위에 속한 인물들의 중앙정치 진출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해석되어 왔으며, 특히 호남 지역에 대한 차별과 연결되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제8조의 실제 지리적 범위와 정치적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일부 연구에서는 이 조항이 후백제의 중심지였던 호남 지역을 경계한 것이라고 설명하며, 다른 연구에서는 청주를 비롯한 충청도 지역의 반왕건 세력과 관련된 문제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특히 왕건의 장남인 혜종의 외가가 나주 지역의 호족이었다는 사실은 제8조의 해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왕건이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한 왕자의 외가까지 정치적으로 배제하려 했다는 설명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 해당 조항이 어떤 지역과 정치세력을 대상으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한편 제8조가 후대에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위작설도 존재한다. 특히 고려의 정치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특정 지역의 인물을 견제하기 위해 훈요십조의 일부 내용을 수정하거나 새롭게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작설 역시 모든 연구자들이 받아들이는 확정된 결론은 아니므로, 훈요십조 전체가 반드시 가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제8조는 왕건이 특정 지역의 모든 주민을 무조건 차별하라고 지시했다는 단순한 설명보다는, 당시 고려의 지역적인 정치세력과 풍수지리 사상, 후대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논쟁적인 조항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12]

왕건의 정치사상

훈요십조에는 왕건이 고려를 통치하면서 중요하게 여겼던 여러 정치적 원칙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불교를 국가적으로 보호하고 서경을 중시하며, 후대의 국왕들이 왕위계승의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내용은 고려 초기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왕건은 통일 직후 《정계》(政誡)와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작성해 신하들과 관리들이 지켜야 할 정치적 원칙을 제시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이들 문서는 오늘날 원문이 전해지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내용을 완전히 확인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저술과 훈요십조는 왕건이 단순히 군사적인 승리를 통해 왕조를 세운 인물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정치적·도덕적 질서를 형성하고자 했던 군주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특히 후삼국 통일 이후 여러 지방 호족들을 하나의 정치체제 안에 통합해야 했던 상황에서 왕건은 왕실의 권위와 국가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원칙을 후대에 전달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최후

943년 왕건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국가의 주요 업무를 후계자인 왕무에게 맡기기 시작하였다. 《고려사》에는 그가 음력 5월 초부터 병을 앓았으며, 이후 여러 재상들을 불러 자신의 죽음과 후계자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왕건은 한나라 문제의 유언을 인용하면서 모든 생명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며, 죽음을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자신이 병을 앓은 지 오래되었지만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므로 걱정할 일이 없다고 설명하면서, 이후 국가의 중요한 문제는 태자 왕무와 재상들이 함께 처리하도록 지시하였다.

943년 음력 5월 29일, 양력으로는 7월 4일 왕건은 병세가 악화되자 학사 김악에게 유언을 작성하도록 명령하였다. 유언이 완성된 뒤 왕건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주변 신하들은 그가 이미 사망했다고 생각하고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

그러자 왕건은 신하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며, 신하들은 국왕이 자신들을 떠나려 한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 눈물을 참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왕건은 이러한 말을 듣고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浮生自古然矣.
뜬구름 같은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

”

이 말을 끝으로 왕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세는나이로 67세였으며, 고려의 국왕으로 재위한 기간은 918년부터 943년까지 26개 연도에 걸쳐 있었다.

왕건은 자신의 장례를 지나치게 화려하게 치르지 말고 검소하게 진행하도록 유언하였다. 이후 왕건의 시신은 송악의 서쪽에 위치한 현릉(顯陵)에 안장되었으며,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신성(神聖)으로 정해졌다.

특히 왕건의 마지막 말은 그가 오랫동안 군사적·정치적 경쟁을 경험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인물이었음에도 결국 인간의 생명이 덧없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유명하다. 물론 이러한 기록은 고려 왕실의 역사서에 전해지는 내용으로, 후대의 역사적 평가와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고려사》에 실제로 남아 있는 왕건의 마지막 말이라는 점에서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군주의 유언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13]

역사적 평가

후삼국 통일의 주역

왕건은 신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을 마무리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군주로,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창업 군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특히 그는 궁예의 휘하에서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아 성장한 뒤 고려를 건국했으며, 견훤의 후백제와 오랫동안 경쟁하면서 여러 차례의 군사적 위기를 극복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군사적 경력은 항상 승리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는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받을 정도로 크게 패배했으며, 이후 후백제의 공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왕건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지방 호족들의 협력을 유지하고 새로운 군사적 전략을 추진하면서 전세를 회복하였다.

특히 930년 고창 전투와 934년 운주 전투의 승리는 후삼국 통일전쟁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견훤과 경순왕의 귀부를 받아들인 뒤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따라서 왕건의 통일은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가 아니라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협상, 지방세력의 포섭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포용력

왕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적대적인 세력이라 하더라도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포섭했다는 점이다. 특히 신라의 마지막 국왕인 경순왕과 후백제의 건국자인 견훤을 받아들였으며, 궁예의 옛 신하나 지방 호족 가운데서도 귀부하는 인물들에게 관직과 정치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왕건이 단순히 군사력으로 모든 지역을 정복하기보다 기존의 지방 지배세력을 고려의 정치체제 안으로 통합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특히 후삼국시대에는 여러 지역의 호족들이 독자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제거하는 방식으로 통일을 추진할 경우 장기간의 내전과 정치적 혼란이 계속될 가능성이 있었다.

왕건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혼인정책과 사성정책, 관직 하사 등의 방법을 활용했으며, 이는 고려 왕조가 여러 지역세력의 협력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만 이러한 포용적인 정책은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지방 호족들의 독자적인 권력을 상당 부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므로 장기적으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남겼다.

한계와 비판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군주였지만, 그의 정치적 선택이 모두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여러 지방 호족들과 혼인관계를 맺는 정책은 단기적으로 국가의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데 유리했지만, 이후 왕실 내부의 왕위계승 경쟁과 외척세력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고려 건국 초기에는 중앙정부가 지방의 호족세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으며, 각 지역의 유력자들은 상당한 규모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왕건이 사망한 이후 혜종과 정종, 광종의 재위 기간에 발생한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광종이 강력한 왕권강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특히 왕건은 지방 호족의 협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의 자율성을 상당 부분 인정했지만, 이러한 정책은 후대의 국왕들에게 지방세력을 통제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남겼다. 따라서 왕건의 포용적인 정치방식을 무조건적인 장점으로만 평가하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적합한 현실적인 전략이었지만 장기적인 부작용도 존재했던 정책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편 훈요십조의 제8조를 비롯한 일부 내용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지역 차별이나 정치적 배제와 관련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항이 실제로 왕건이 작성한 내용인지, 어떤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하므로, 당시의 정치적 맥락과 사료의 신뢰성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이성계와의 비교

왕건과 이성계는 모두 기존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창업 군주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왕건은 궁예의 태봉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건국했으며, 이성계는 고려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권력을 장악한 뒤 조선을 건국하였다. 또한 두 사람 모두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인맥을 바탕으로 새로운 왕조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적 환경과 건국 과정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왕건은 신라 말기 여러 지방 호족들이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후삼국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고려를 건국했으며, 이후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의 귀부를 받아들여 통일을 완성하였다. 반면 이성계는 고려 말기 원나라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군사적 공로를 세운 뒤,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특히 이성계는 왕건과 달리 이미 존재하던 고려 왕조의 정치적·행정적 체제를 상당 부분 계승하면서 새로운 왕조를 건설했으며, 이후 성리학을 중심으로 국가의 정치적 이념과 제도를 재편하였다. 반면 왕건은 후삼국시대의 여러 지방세력과 군사조직을 통합하면서 새로운 국가체제를 형성해야 했으므로, 지방 호족들과의 협력과 정치적 포용이 더욱 중요한 과제였다.

따라서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뛰어난 군주였는지를 단순히 비교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정치적 환경에서 어떠한 문제를 해결했으며, 새로운 왕조의 제도를 어떻게 정비했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적절하다.

기타

  • 왕건은 한민족 최초 질외사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ㄴ 지만 알아먹는 드립 자제요

ㄴ 너만 모르는거 아니냐

ㄴ 혜종의 애미되는 장화왕후 오씨와의 일화를 말하는거다 오씨라는 여인이 시냇가에서 빨래하는데 왕건이 그 뒷태에 반해서 돗자리깔고 원나잇함. 근데 꼐임 좀 할줄아는 왕건은 "너같은 암퇘지한테는 정자가 아까워!!" 라면서 질외사정했다.시발 상남자;;;; 역시 왕은다르다.

여기서 끝났다면 왕건의 테크닉자랑으로 끝났겠지만 상대가 보통 독한년이 아닌게 오씨는 왕건이 돗자리에 싸지른걸 줏어담았다 그러고 혜종을 임신했다고 한다 별미친...

ㄴ 다만 저 질외사정 드립은 혜종 까려고 만든거다. 첫째아들인데 외가가 애미없는 흙수저(씨발 원래는 존나 잘나가던 나주지방 호족이었는데, 후백제랑 싸우면서 기반 싸그리 날려먹어서 망함)라 왕비랑 아들이랑 둘 다 깔라고 왕건이 "너 한테는 정자도 아까워!!" 라고 질외사정 했지만 독한 오씨가 "임신공격으로 가...가버렸!" 할라고 질외사정한거 줏어담아 임신함 ㅇㅇ 그래서 혜종이 얼굴개빻았넼ㅋㅋㅋㅋ" 라는 식으로.... ㅇㅇ?

솔까 왕건이 오씨랑 떡치는걸 누가 본것도 아니고 왕건이 얘기하고 다녔을리도 없고, 씨발 왕비가 질외사정한 걸 억지로 넣어서 임신했다고 떠들고 다녀도 어쩌지 못 할 호구였다는 소리

그리고 혜종이는 그래서 망함 ㅋㅋㅋㅋ

  • 궁예가 윽띵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태조 왕건에선 이새끼도 철퇴를 날렸다. 것도 뒤통수친 청주 호족들과 그 가족들에게 말이다.


주소


  • 왕건은 살아생전 내내 신라를 오랑캐로 여겼다. 이는 왕건이 자신의 진짜 조국을 고구려로 인식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자기가 나라를 세워 왕이 될 때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의미의 고려라 정한 것이다. 훗날 요나라 놈들이 "이 신라 새끼가 어디 북쪽으로 오고 지랄이야?"라고 하자 서희 장군은 "떼끼, 이놈! 신라 같은 오랑캐를 우리랑 견주다니 이거 미친 거 아냐? 우리는 고구려의 후손이라서 나라 이름도 고려이거늘!"이라고 일갈했다.

장화왕후의 돗자리 일화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 사이에서 혜종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고려사》 후비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왕건이 나주에서 수군을 지휘하던 시기에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오씨를 발견하고 잠자리를 함께했다는 내용이 전해지며, 당시 왕건이 오씨의 가문이 상대적으로 미약하다는 이유로 임신을 피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돗자리에 사정했지만 오씨가 이를 자신의 몸에 넣어 임신했고, 이후 태어난 혜종의 얼굴에는 돗자리 무늬와 비슷한 주름살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혜종은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는 왕건의 많은 왕비와 왕자들 가운데 장화왕후와 혜종의 출신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실제로 발생한 사건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특히 왕건과 오씨의 사적인 관계에 관한 내용이 수백 년 뒤에 편찬된 역사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상황과 관련된 전승일 가능성을 보여 준다. 또한 혜종의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의 외모를 설명하는 후대의 설화적 요소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장화왕후의 친정 가문은 나주 지역의 유력한 호족이었지만, 왕건의 다른 왕비들과 비교하면 정치적인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혜종이 장남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외척세력의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러한 설명 역시 하나의 해석이며, 왕건이 실제로 장화왕후를 싫어했거나 혜종의 출생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왕건은 혜종을 정윤으로 책봉하고 후계자로 삼기 위해 박술희의 도움을 받았으며, 사망하기 직전에는 혜종의 왕위계승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따라서 장화왕후의 돗자리 일화는 실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이야기이지만, 그 내용 전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고려 초기의 왕위계승 문제와 외척세력의 정치적 지위를 설명하는 전승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14]

왕건과 신라의 관계

왕건이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다고 해서 신라를 단순히 오랑캐로 취급하거나 신라의 모든 문화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왕건은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신라의 경명왕과 경애왕, 경순왕 등 여러 국왕들과 외교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견훤이 927년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하자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했으며, 이 과정에서 직접 공산 동수 전투에 참여했다가 크게 패배하였다. 또한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왕건은 그를 극진하게 대우하고 신라 왕실의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일정 부분 인정하였다.

따라서 왕건이 신라를 오랑캐라고 생각했다는 주장은 실제 정치적 행동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왕건은 고려의 국가적 정체성을 고구려의 계승에 두었지만, 이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완전히 부정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한편 원문에서 언급한 서희의 외교 담판은 왕건이 사망한 지 약 50년 뒤인 993년의 사건이다. 당시 거란의 장수 소손녕은 고려가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으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차지하려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므로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반박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이지만, 서희가 실제로 신라를 오랑캐라고 부르거나 신라 사람들을 멸시했다는 내용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신라를 적대적인 외국으로 취급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15]

태조 왕건의 청동상

오늘날 왕건의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유물 가운데 하나는 개성의 현릉에서 발견된 태조 왕건 청동상이다. 이 청동상은 고려 제4대 국왕인 광종이 951년 제작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왕실에서 태조 왕건을 기념하고 제사를 지내는 데 사용되었던 유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청동상은 실제 고려 왕실의 초상과 조각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현재 남아 있는 한국의 고대·중세 군주상 가운데서도 매우 희귀한 사례에 해당한다. 청동상의 높이는 약 138cm이며, 관모와 복식의 형태를 통해 고려 초기 왕실의 의례와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청동상이 왕건의 생전 모습을 정확하게 재현한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 특히 왕건이 사망한 뒤 광종의 명령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실제 외모뿐 아니라 왕실의 정치적·종교적 상징성이 함께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오늘날 인터넷에서 널리 사용되는 왕건의 초상화 역시 실제 생전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후대에 제작되거나 복원된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왕건이 실제로 매우 잘생긴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확인할 만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

드라마 《태조 왕건》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최수종이 왕건 역할을 맡았다. 드라마는 신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후고구려·후백제의 건국, 궁예의 몰락과 고려의 건국, 후삼국 통일전쟁까지 약 40년에 걸친 역사를 다루었다.

특히 왕건은 드라마에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판단력이 뛰어나면서도 주변 인물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백성들을 배려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궁예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재위 후반에 폭정을 일삼는 인물로, 견훤은 뛰어난 전투능력과 강한 야심을 가지고 있으나 정치적으로 여러 한계를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이러한 세 인물의 대비는 드라마의 주요한 극적 구조를 형성하였다. 특히 왕건은 궁예와 견훤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의 단점을 피하는 인물로 묘사되며, 이러한 설정은 고려 왕조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관점과도 관련이 있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왕건이 언제나 이상적인 도덕적 판단을 내렸거나 모든 갈등을 협상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고려 건국 직후의 반란을 강경하게 진압했으며, 후백제와의 전쟁에서도 대규모 군사작전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묘사된 왕건의 성격과 실제 역사적인 정치적 행동은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왕건과 궁예의 관계, 신숭겸과 박술희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의 대화, 후삼국 전투에서의 구체적인 장면 등은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하거나 극적인 재미를 위해 창작한 부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드라마가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전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높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후대의 왕실과 고려의 멸망

왕건이 건국한 고려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약 474년 동안 존속하였다. 특히 고려는 후삼국 통일 이후 북방의 거란과 여진, 몽골 등 여러 세력과 군사적·외교적 관계를 맺었으며, 불교문화와 국제무역, 독자적인 정치제도를 발전시키면서 한반도의 대표적인 왕조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영향력 약화와 홍건적·왜구의 침입,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사이의 정치적 갈등 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계는 군사적 공로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뒤 1392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특히 왕건이 918년 궁예를 폐위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했듯이, 약 474년 뒤에는 이성계가 고려의 왕실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아이러니로 자주 언급된다. 다만 두 사건의 정치적 배경과 군사적 과정, 국제적인 상황은 서로 상당히 달랐으므로 단순히 왕건이 궁예에게 했던 일을 이성계가 왕건의 후손에게 그대로 되갚았다고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그럼에도 두 사건 모두 기존 왕조가 정치적·군사적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유력한 장수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사에서 왕조교체와 군사적 권력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연표

연도 주요 사건
877년 신라 송악에서 왕륭과 한씨 부인 사이에서 출생.
896년 무렵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게 귀부하면서 궁예의 세력에 합류.
897년 왕륭 사망.
900년 광주·충주·청주 등 여러 지역을 평정하며 군공을 세움.
903년 수군을 이끌고 금성군을 공격해 나주 지역을 장악.
913년 궁예의 태봉에서 시중에 임명됨.
918년 궁예를 폐위하고 고려를 건국. 연호를 천수로 정함.
919년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개경을 정비.
921년 장남 왕무를 정윤으로 책봉.
925년 후백제 견훤과 조물성에서 전투를 벌인 뒤 일시적인 화친.
926년 발해 멸망 이후 고려로 귀부하는 유민들을 수용.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 후백제군에게 대패. 신숭겸·김락 전사.
930년 고창 전투에서 승리하며 후삼국 통일전쟁의 주도권을 회복.
934년 운주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
935년 견훤의 귀부를 받아들이고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음.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후삼국 통일 완성.
940년 역분전 지급과 삼한공신 책봉 등 통일 이후의 정치체제 정비.
942년 거란의 사신을 거부하고 만부교에서 낙타를 굶겨 죽이게 함.
943년 훈요십조를 남겼다고 전해지며 음력 5월 29일 사망.

관련 문서

참고 자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