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신라 시대의 대사찰 황룡사 터이다. 국가유산 공식 명칭은 경주 황룡사지이며,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을 시작해 선덕여왕대 구층목탑이 완성되기까지 약 100년에 걸쳐 국가적 규모로 조성된 사찰이었다. 신라 왕실의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국찰이었으며, 거대한 장륙존상과 높이 80m 안팎으로 추정되는 구층목탑으로 특히 유명했다.
문제는 그 엄청난 건물들이 지금 하나도 안 남아 있다는 것. 1238년 몽골 제국의 침입 때 사찰 전체가 불타버렸고 이후 복원되지 않았다. 현재는 광활한 평지에 금당, 목탑, 회랑 등의 초석과 건물터만 남아 있다.
그래서 처음 가면 "여기가 그 황룡사라고?" 싶을 정도로 허허벌판인데, 오히려 주춧돌 간격과 건물터 규모를 따라가다 보면 당시 절 크기가 얼마나 미쳤는지 체감할 수 있다.
황룡사지는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역사유적지구 가운데 황룡사지구의 핵심 유적이다. 인근의 분황사와 함께 신라 왕실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다.
역사
황룡사 창건은 진흥왕 14년인 553년에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는 새로운 궁궐을 지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공사 도중 황룡, 즉 누런 용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진흥왕이 궁궐 건립계획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절을 짓도록 했다고 한다.
황룡사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실제 유적조사 결과 이 일대는 원래 습지 또는 늪지였던 곳을 메워 대규모 건축물을 세운 것으로 확인된다. 절은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왕대를 거치면서 계속 확장됐다.
진흥왕대에 기본적인 사찰이 조성된 뒤 574년에는 거대한 불상이 만들어졌다. 이후 진평왕 6년인 584년에는 이 불상을 봉안하기 위한 금당이 완성되었다.
황룡사가 결정적으로 거대한 국가사찰이 된 것은 선덕여왕 때였다.
643년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승려 자장이 황룡사에 거대한 구층목탑을 세우자고 건의했다. 외적의 침입을 막고 신라가 주변 국가들을 제압하기 위한 호국불교적 상징물이었다.
백제 출신 장인 아비지가 건축을 맡았으며 645년 구층목탑이 완성됐다.
| 연도 | 내용 |
|---|---|
| 553년 | 진흥왕 때 황룡사 창건 시작 |
| 570년경 | 초기 사찰 건립 완료 |
| 574년 | 장륙존상 조성 |
| 584년 | 장륙존상을 봉안할 금당 완성 |
| 645년 | 선덕여왕 때 황룡사 구층목탑 완성 |
| 1238년 | 몽골 침입으로 황룡사 전소 |
| 1963년 | 사적 지정 |
| 1976년 | 대규모 발굴조사 시작 |
| 2000년 | 경주 역사유적지구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통일신라 시기에도 황룡사는 계속 국가적인 사찰로 기능했다.
왕실의 각종 불교의식과 국가행사가 열렸으며 신라 최고 승려들이 활동한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고종 25년인 1238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절 전체가 불탔다. 구층목탑과 장륙존상, 금당 등 핵심 시설도 이때 모두 사라진 것으로 본다.
황룡사는 이후 다시 복원되지 못했다.
구층목탑
황룡사의 상징은 황룡사 구층목탑이었다.
643년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선덕여왕에게 건립을 건의했고, 백제 장인 아비지가 기술 책임자로 참여해 645년 완성됐다.
기록과 발굴자료를 종합하면 탑의 높이는 약 80m 전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아파트로 치면 대략 20층이 훌쩍 넘는 높이다. 목조건축 기술과 장비 수준을 생각하면 7세기에 이런 걸 지었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공사였다.
구층은 각각 신라 주변의 여러 나라와 세력을 상징하며 이들을 불법의 힘으로 제압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서는 9개 층을 일본, 중화, 오월, 탁라 등 신라 주변 세력과 연결해 설명한다.
즉 단순히 높은 탑을 세운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의 힘으로 주변 세력 다 눌러버리겠다"는 국가적 정치선언 비슷한 성격도 있었다.
목탑 중심에는 거대한 심초석이 놓였고 그 위에 중심기둥인 찰주를 세웠다.
현재 황룡사지에서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흔적 중 하나가 바로 이 목탑지다. 거대한 초석이 바둑판처럼 배치되어 있어 건물이 사라진 뒤에도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역사 동안 여러 차례 벼락과 화재, 지진 등으로 손상되어 수리를 반복했지만 결국 1238년 몽골 침입 때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아비지
구층목탑 건설에서 빠지지 않는 사람이 아비지다.
아비지는 백제 출신의 장인으로 신라의 요청을 받아 황룡사 구층목탑 건축을 담당했다고 전한다.
당시 신라와 백제는 서로 전쟁까지 벌이는 경쟁국이었는데, 신라 최대 국가사업에 백제 기술자를 불러왔다는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만큼 백제의 건축기술이 당시 동아시아에서도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전승에 따르면 아비지는 공사를 하던 도중 백제가 멸망하는 환상을 보고 작업을 중단하려 했지만 다시 마음을 바꿔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설화적인 기록이지만 신라가 백제 기술자를 활용했다는 점 자체는 당시 삼국 간 문화교류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장륙존상
구층목탑 이전 황룡사를 대표했던 것이 장륙존상이다.
'장륙'은 불상의 높이가 한 장 육 척이라는 의미로, 약 5m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을 뜻한다.
《삼국유사》에는 인도의 아소카왕이 거대한 불상을 만들려고 철 57,000근과 금 3만 분을 준비했지만 완성하지 못했고, 불상 모형과 재료를 배에 실어 보냈다는 전설이 나온다.
이 재료가 신라에 도착해 황룡사의 장륙존상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기록을 역사적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당시 신라인들이 황룡사를 인도 불교의 정통성과 연결하고 싶어 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574년 장륙존상이 만들어졌고 이후 이를 모시기 위해 대형 금당을 건립했다.
발굴조사에서는 금당 내부에서 거대한 불상을 받쳤던 석조대좌 흔적이 확인됐다.
본존불 양옆에는 협시불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거대한 삼존불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룡사의 장륙존상 역시 1238년 화재 때 소실됐다.
가람 구조
황룡사는 처음부터 지금 우리가 아는 최종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초기에는 중문에서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놓인 1탑 1금당식 구조에 가까웠다.
이후 장륙존상이 조성되고 사찰이 확대되면서 중앙 금당 양옆에 동금당과 서금당이 추가됐다.
결과적으로 황룡사는 1탑 3금당식이라는 독특한 가람배치를 갖게 됐다.
목탑 양옆에는 종루와 경루가 대칭으로 배치되었고 전체 사찰 영역은 회랑으로 둘러싸였다.
대략적인 중심축은 다음과 같다.
남문 → 중문 → 구층목탑 → 금당 → 강당
이라는 방식이다.
중심 금당 좌우에는 작은 금당이 배치되면서 규모가 더욱 커졌다.
유네스코는 황룡사 전체 사찰 규모를 약 72,500㎡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 한반도에서 건설된 사찰 가운데 최대 규모급이었다.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현재 황룡사지 전체 면적은 주변 유적 보호구역까지 포함해 약 390,418㎡다.
발굴
황룡사지에 대한 대규모 발굴조사는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유적지 내부와 주변에는 민가도 상당수 남아 있었는데, 정비사업을 진행하면서 주민들을 이주시킨 뒤 발굴을 시작했다.
조사를 통해 중문, 목탑, 금당, 강당, 회랑 등 주요 건물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가 확인됐다.
특히 거대한 초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목조건축물의 크기를 비교적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었다.
발굴조사에서는 약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금동불입상
- 금동귀걸이
- 풍탁
- 기와
- 와당
- 각종 유리제품
- 중국계 도자기
- 건축부재
특히 유명한 것이 높이 약 182cm에 달하는 거대한 치미다.
치미는 전통 건축물 지붕 양끝에 설치하는 장식인데 보통 사람 키보다 큰 치미가 발견됐다는 것 자체가 황룡사 건물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목탑지에서는 당나라 백자 항아리도 발견되어 당시 신라와 중국 간 문물교류를 보여주는 자료가 되었다.
1976년 이후 황룡사 발굴은 한 번에 끝난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로 장기간 이어졌다. 이후에도 유적 보존과 복원을 위한 조사와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황룡사와 신라 왕실
황룡사는 그냥 큰 절이 아니라 왕실이 직접 만든 국가사찰이었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뒤 왕실은 불교를 왕권 강화와 국가통합에 적극 활용했다.
특히 진흥왕 이후 신라가 급격히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에 황룡사는 국가의 힘과 불교적 권위를 동시에 보여주는 공간이 되었다.
장륙존상과 구층목탑 역시 이런 흐름에서 만들어졌다.
황룡사에는 신라의 세 가지 보물이라는 신라삼보 가운데 두 가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 황룡사 장륙존상
- 황룡사 구층목탑
- 진평왕의 천사옥대
즉 세 개 가운데 두 개가 한 절에 있었다.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절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황룡사에서는 왕실과 국가를 위한 각종 불교행사가 열렸으며 유명한 승려들이 활동했다.
몽골 침입과 소실
황룡사의 마지막은 상당히 허무했다.
고려 고종 25년인 1238년 몽골군이 경주 일대를 공격하면서 황룡사가 불탔다.
구층목탑도 이때 완전히 소실됐다.
목조건축물인 데다 규모까지 엄청났으니 한 번 화재가 시작되면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륙존상과 여러 건물, 사찰이 보유했던 수많은 유물도 함께 사라졌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황룡사가 불탄 뒤 약 수십 년 뒤에 활동한 인물이기 때문에 황룡사의 소실은 그에게도 그리 먼 옛날 일이 아니었다.
황룡사는 이후 폐사되었고 다시 복원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절터 위에 민가와 농경지가 들어서면서 정확한 가람구조도 잊혀졌다가 20세기 발굴을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복원 논의
황룡사는 규모와 상징성이 워낙 큰 유적이라 구층목탑을 복원하자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온다.
문제는 80m짜리 9층 목탑을 무슨 근거로 어떻게 복원할 것이냐다.
구층목탑의 정확한 설계도와 외관이 남아 있지 않다.
문헌기록과 초석, 비슷한 시대의 건축물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추정은 가능하지만 실제 모습이 어땠는지를 100% 알 수는 없다.
세계유산 보존 원칙에서도 근거가 불충분한 상상복원은 오히려 유적의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
게다가 신라시대 방식 그대로 목조건축을 한다고 해도 내진, 화재, 안전문제까지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현재는 실제 구층목탑을 바로 세우기보다는 장기간의 고증과 연구, 디지털 복원, 축소모형 등을 통해 모습을 재현하는 방향이 중심이다.
인근 황룡사역사문화관에는 황룡사의 전체 모습과 구층목탑을 복원한 대형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모형을 보면 현재 허허벌판만 보고는 상상하기 힘든 사찰의 규모를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경주 역사유적지구
황룡사지는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역사유적지구의 황룡사지구에 포함된다.
황룡사지구는 황룡사지와 분황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네스코는 황룡사를 신라시대 한국 불교건축 발전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했다.
경주 역사유적지구 전체는 등재기준 (ii), (iii)을 충족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경주 월성이 신라의 정치 중심지라면 황룡사는 국가불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유적 사이의 거리도 매우 가까워 당시 신라 왕궁과 국가사찰이 사실상 하나의 왕경 중심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관람
주소는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 일대다.
현재 황룡사지 자체는 무료로 개방되어 있으며 정해진 관람시간도 없다.
유적 전체가 넓은 야외공간이라 금당터, 목탑터, 회랑터 등을 따라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
처음 방문하면 건물이 아무것도 없어서 재미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가능하면 바로 옆의 황룡사역사문화관을 먼저 보는 것을 추천한다. 내부에 황룡사의 복원모형과 영상자료, 발굴 관련 전시가 있어 사찰의 원래 구조를 이해한 뒤 실제 절터를 보면 훨씬 알아보기 쉽다.
황룡사역사문화관은 유료 시설이며 일반적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한다.
분황사는 황룡사지 북동쪽에 붙어 있어 같이 관람하기 좋다.
조금 더 걸으면 동궁과 월지, 경주 월성, 첨성대 등으로 연결되므로 경주 역사유적지구 도보여행에 포함시키기 좋다.
황룡사지 앞에는 황룡사마루길이라는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다.
여담
- 황룡이라는 이름 때문에 중국 황제나 황룡사상과 직접 관련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승상으로는 공사현장에 누런 용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 지금은 아무 건물도 남지 않아 황량하게 느껴지지만 신라시대에는 수도 경주에서 가장 거대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가 있던 곳이다.
- 황룡사 구층목탑이 실제로 약 80m였다면 오늘날 경주 시내에서도 상당히 멀리서 보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현대 고층건물도 없었으니 체감 존재감은 훨씬 컸을 가능성이 높다.
- 구층목탑이 백제 장인 아비지에 의해 지어졌다는 점 때문에 신라와 백제가 맨날 전쟁만 한 것처럼 생각하면 당시 사회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 장륙존상과 구층목탑은 진평왕의 천사옥대와 함께 신라삼보로 전해졌다.
- 황룡사지는 넓이가 워낙 커서 사진만 보면 그냥 잔디밭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석 위치를 알고 보면 건물 규모가 보이기 시작한다.
- 높이 182cm의 치미가 출토됐다. 지붕 장식 하나가 웬만한 성인 남성 키만 했다.
- 황룡사 금당에는 신라의 화가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는 전승도 있다.
- 국가유산 공식 명칭은 과거 '황룡사지'였으나 2011년 경주 황룡사지로 변경됐다.
- 인근 분황사에는 신라시대 석탑이 실제로 남아 있어서 황룡사지와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 황룡사는 신라 멸망 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라 멸망 뒤에도 약 300년간 존속했다. 최종적으로 절을 끝장낸 것은 몽골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