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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慶基殿)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전각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진전(眞殿)이다. 현재 남아 있는 태조 진전 가운데 사실상 유일하게 원형을 이어오고 있으며, 경기전 전체는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처음 세워진 것은 1410년 태종 10년으로, 조선 왕조의 본관이자 태조의 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온 전주에 태조 어진을 모시기 위해 건립됐다. 이후 1442년 세종 24년에 지금의 이름인 경기전이 붙었는데, 여기서 경기(慶基)는 대략 조선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뜻이다.

경기전은 단순히 왕 초상화 하나 걸어둔 건물이 아니다. 태조 어진을 모신 정전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 왕실 시조를 모신 조경묘, 제사를 준비하던 여러 부속건물, 그리고 현재의 어진박물관까지 한 공간 안에 모여 있어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기록문화가 동시에 드러나는 장소다.

게다가 바로 앞에는 전주한옥마을이 펼쳐져 있어 지금은 전주 관광의 핵심 코스 가운데 하나가 됐다.

쉽게 말하면 조선 왕조의 시조 초상화를 모신 성지 + 왕실 기록 보관소 + 제사시설 + 한옥마을 관광지가 한곳에 겹쳐 있는 곳이다.

역사

경기전의 시작은 태조 이성계 사후 조선 왕실이 왕조의 창업자를 기념하기 위해 전국 여러 곳에 태조 어진을 봉안하면서부터다.

1410년 태종은 전주와 경주, 평양 등에 태조의 어진을 모시는 전각을 세웠다. 전주는 이성계의 본관인 전주 이씨의 본향이라는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 중요했다.

초기에는 이 전각을 어용전 또는 태조진전이라고 불렀고, 1442년 세종 때 지역별로 이름을 따로 정하면서 전주의 진전을 경기전이라고 명명했다. 같은 시기 경주의 진전은 집경전, 평양의 진전은 영숭전 등으로 불렸다.

그러니까 지금 경기전이라는 이름은 그냥 “전주에 있는 태조 초상화 건물” 이 아니라 “여기가 조선 왕조의 뿌리다.” 라는 정치적 의미가 아주 노골적으로 들어간 이름이다.

조선왕조는 왕실의 정통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태조 어진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왕조 자체를 상징하는 일종의 정치적·종교적 성물에 가까웠다.

때문에 경기전에는 어진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는 전담인력이 배치됐고, 함부로 출입하거나 어진을 다루는 것이 엄격하게 제한됐다.

정유재란과 재건

현재 경기전 건물이 처음부터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경기전은 화재로 전소됐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 지역까지 왜군이 진출하면서 전주 일대도 큰 피해를 입었고, 태조 어진은 전란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다.

이후 전쟁이 끝난 뒤 한동안 경기전은 폐허 상태로 남아 있다가 1614년 광해군 6년에 다시 세워졌다. 현재 경기전 정전의 기본형태는 이때 재건된 건물에서 이어진다. 즉 지금 경기전에서 보는 정전은 태종 때 처음 지은 1410년 원본은 아니고 광해군 때 복구한 17세기 버전이다.

그래도 400년 넘게 같은 장소에서 같은 기능을 이어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

태조 어진

경기전의 존재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조선 태조 어진이다.

태조 어진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초상화로,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다만 경기전에 있는 현재의 태조 어진은 이성계가 살아 있을 때 그린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어진은 1872년 고종 9년에 기존 어진을 본떠 다시 그린 이모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초상화를 새로 제작하거나 오래된 어진을 모사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왕의 얼굴을 함부로 상상해서 그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기존 어진을 기준으로 매우 엄격한 절차를 거쳐 복제했다.

현재의 태조 어진은 붉은 곤룡포를 입고 익선관을 쓴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조선왕조 왕들의 초상화 대부분이 전쟁과 화재,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사라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태조 어진이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매우 귀하다.

특히 현존하는 태조 어진 가운데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대표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2012년 국보로 지정됐다.

원래 어진은 경기전 정전에 봉안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보존을 위해 옆에 있는 어진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정전에는 복제본이 봉안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전에 들어가서 “와 이성계 진짜 얼굴이다” 하고 보고 있는 그림은 실제 국보 원본이 아니라 복제품이다.

원본을 햇빛과 습기 속에 계속 걸어놓으면 몇백 년 된 그림이 먼저 죽는다.

정전

경기전의 중심건물은 정전이다.

태조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건물 자체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정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앞쪽에는 제례를 준비하고 이동하는 데 사용하는 월대가 놓여 있다.

정전으로 들어가는 길은 일반적인 건물과 조금 다르다. 입구에서 정전까지 이어지는 길 가운데 중앙 부분은 신도(神道)로 불리며 왕이나 신령을 위한 길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조선시대 제례공간에서는 중앙의 길을 함부로 밟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안내판에서 가운데 길 밟지 마세요 같은 설명을 볼 수 있다. 물론 현대 관광객은 사진 찍으면서 그냥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

정전 내부 뒤편에는 태조 어진과 함께 일월오봉도가 배치되어 있다. 일월오봉도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를 그린 왕실 상징화로, 왕의 권위와 국가의 영속성을 상징한다. 왕이 살아 있을 때는 왕좌 뒤에 놓이고, 죽은 왕의 어진을 모실 때도 비슷한 방식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배경 역할을 했다.

경기전의 구조

경기전은 정전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시설이 아니다. 왕실 제사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여러 부속건물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정전 주변에는

  •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 제사용 음식을 준비하는 조병청
  • 관리들이 머무는 수복청
  • 말을 관리하던 마구간
  • 어진을 임시로 옮겨 모시는 별전

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들 부속건물 상당수가 철거됐다. 경기전 경내가 학교와 관공서 등 다른 용도로 일부 사용되면서 원래 공간구조도 많이 훼손됐다.

1990년대 이후 발굴조사와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여러 건물이 복원되면서 현재 모습에 가까워졌다.

2004년에는 부속건물들이 대대적으로 복원됐다.

그래서 지금 경기전에 가면 생각보다 건물이 많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태조 어진 보러 왔는데 왜 집이 이렇게 많지?” 싶을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왕실 제사 하나 지내려면 음식 만들고 제기 보관하고 관리들 대기하고 말 관리하고 준비할 공간이 전부 필요했다.

왕 제사는 그냥 향 하나 피우고 끝나는 행사가 아니었다.

전주사고

경기전 동쪽에는 전주사고가 있다.

사고(史庫)는 조선왕조실록 등 국가의 중요 기록을 보관하는 장소다.

조선은 실록을 한 곳에만 보관하지 않았다. 불이나 전쟁이 나면 나라 역사책이 한 번에 날아갈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곳에 복사본을 나눠 보관했다.

초기에는

  • 춘추관사고
  • 충주사고
  • 성주사고
  • 전주사고

등 네 곳에 실록을 보관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터졌다.

춘추관·충주·성주사고의 실록은 전쟁 과정에서 모두 소실됐다.

전주사고만 살아남았다.

이건 조선 기록문화에서 진짜 존나 중요한 사건이다.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도 왜군이 전주로 접근하면서 위험해졌는데, 전주 지역 유생인 안의손홍록 등이 실록과 왕실족보를 내장산 등으로 옮겨가며 지켜냈다. 덕분에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실록을 다시 복제할 수 있었다. 만약 전주사고본까지 불탔다면 조선 전기 역사 상당 부분이 지금처럼 자세하게 남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전주사고는 그냥 옛날 책 창고 정도로 보면 안 된다. 조선왕조 200년치 국가기록의 마지막 백업본이 살아남은 곳이었다.

다만 현재 경기전 안에 있는 전주사고 건물은 원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경기전 부속건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옛 사고 역시 사라졌고, 1991년 발굴과 고증을 거쳐 현재 위치에 복원됐다.

조경묘

경기전 북쪽에는 조경묘가 있다.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그의 부인 경주 김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771년 영조 47년에 창건됐다.

태조 이성계보다 훨씬 이전의 조상을 왕실의 시조로 모시는 공간이다. 경기전이 조선을 세운 태조를 기리는 곳이라면 조경묘는 그 태조가 나온 전주 이씨 집안의 뿌리를 기리는 장소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실의 족보와 정통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강해졌기 때문에 이런 시설도 중요하게 취급됐다.

현재 조경묘 역시 경기전 경내의 중요한 유적으로 남아 있다.

어진박물관

경기전 경내에는 어진박물관이 있다. 2010년 개관했으며 조선왕실의 어진과 관련 유물을 전문적으로 전시한다.

가장 중요한 소장품은 국보인 조선 태조 어진이다. 원본은 보존문제 때문에 항상 무조건 전시되는 것은 아니며, 전시 일정에 따라 복제본이나 관련자료를 함께 볼 수 있다.

박물관에서는 태조뿐 아니라 조선시대 왕들의 어진 제작과 봉안과정, 경기전의 역사, 왕실 제례 등을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 얼굴을 직접 볼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어진 자체가 엄청난 권위를 가진 물건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대통령 공식사진 걸어놓는 것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차원이 달랐다. 왕이 죽은 뒤에도 어진 앞에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초상화 자체가 왕이 거기 실제로 있는 것처럼 취급됐다.

경기전과 전주

경기전이 전주에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주는 전주 이씨의 본향이다.

태조 이성계 자신이 전주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왕실 혈통이 전주 이씨였기 때문에 조선 왕실은 전주를 왕조의 뿌리로 중요하게 여겼다. 경기전이라는 이름 자체도 그런 의미를 반영한다. 그래서 전주에는 조선왕조와 관련된 상징이 상당히 많다.

경기전 바로 앞에는 전동성당이 있고, 주변에는 전주한옥마을, 풍남문, 오목대, 이목대 등이 있다. 특히 오목대는 이성계가 고려 말 왜구를 물리치고 돌아가는 길에 전주 이씨 종친들을 모아 연회를 열었다고 전해지는 장소다. 이런 유적들이 한 지역에 몰려 있으니 전주 입장에서는 관광하기 굉장히 편하다.

조선왕조 이야기 몇 개 묶어서 걸어서 다 보여줄 수 있음.

전주한옥마을이 지금처럼 전국적인 관광지가 된 데에도 경기전의 존재가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경기전은 일제강점기에 상당한 훼손을 겪었다.

일제는 경기전의 영역을 축소했고 여러 부속건물을 철거했다. 특히 1910년대 이후 일부 공간이 학교시설과 관공서 등으로 활용되면서 원래의 건축구조가 많이 사라졌다.

왕실을 상징하는 공간을 굳이 온전하게 보존해야 할 이유를 일본 식민당국이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장소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제 입장에서 별로 예뻐 보일 리도 없었다. 이 과정에서 별전과 전주사고를 비롯한 여러 건물이 없어졌다.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원형복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지만, 1990년대 이후 경기전 전체에 대한 정비와 발굴조사가 본격화됐다.

1991년 경기전 전체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같은 해 전주사고도 복원됐다.

이후 2000년대에는 부속건물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태조 어진 피난

태조 어진은 경기전에 가만히 앉아서 600년을 버틴 것이 아니다. 전쟁이 날 때마다 존나게 도망다녔다. 임진왜란 때 경기전이 위험해지자 어진은 다른 곳으로 피난했고, 병자호란과 동학농민운동 등 나라가 어수선할 때에도 안전한 장소로 옮겨졌다.

어진은 왕조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적에게 빼앗기거나 불타는 것은 단순히 미술품 하나 잃는 문제가 아니었다.

왕실 입장에서는 태조 할아버지 얼굴을 적군에게 태워먹음이라는 정치적 대참사다. 그래서 위험상황이 발생하면 어진을 제일 먼저 챙겨 피난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남아 있는 태조 어진이 조선 후기 모사본이라고 해도 그 모사본 역시 여러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보존된 것이다.

관광지로서의 경기전

오늘날 경기전은 전주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가운데 하나다. 위치가 전주한옥마을 한가운데에 있고 바로 맞은편에 전동성당이 있기 때문에 전주를 처음 방문하는 관광객이라면 거의 자동으로 지나가게 된다.

경기전 내부는 한옥마을 바깥의 북적이는 분위기와 비교하면 꽤 조용한 편이다. 넓은 마당과 오래된 나무, 낮은 전각들이 이어져 있어 산책하기 좋고, 한복을 빌려 입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특히 경기전 내부의 대나무 숲과 돌담길은 사진촬영 명소로 많이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사람에게 보여주면 “여기 태조 어진 모신 성스러운 곳인데 왜 사람들이 한복 입고 셀카 찍고 있냐” 할 만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다.

오히려 현재는 이런 관광수요 덕분에 경기전 자체를 찾아오는 사람이 훨씬 많아졌다.

역사적 의미

경기전의 가치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조선 왕실의 정통성이다. 전주는 조선 왕실의 본향이고, 경기전은 왕조를 창건한 태조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조선 왕실이 자신들의 뿌리를 어떻게 기억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했는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는 어진 문화다. 조선시대 왕의 초상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왕의 존재를 대신하는 상징물이었다. 현존하는 태조 진전이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경기전은 그 제례공간과 봉안방식을 비교적 잘 보여준다.

세 번째는 기록문화다. 바로 옆 전주사고가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실록을 보존하면서 조선왕조실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경기전은 왕 얼굴 보관소이면서 왕조의 정통성을 선전하는 장소이고, 동시에 조선 역사 백업서버가 살아남은 곳이기도 하다.

한 장소에 조선왕조의 이미지와 기록이 둘 다 남아 있다는 점이 상당히 독특하다.

여담

  • 경기전은 1410년 태종 10년에 처음 세워졌다.
  • 1442년 세종 24년에 경기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경기(慶基)는 대략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다.
  • 현재 경기전 전체는 대한민국 사적이다.
  • 사적 지정면적은 약 49,589㎡다.
  • 현재 정전의 기본형태는 1614년 광해군 때 재건된 것이다.
  •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소됐다.
  • 경기전 정전 자체도 별도의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경기전에 봉안되었던 조선 태조 어진은 국보다.
  • 현재 남아 있는 태조 어진은 1872년 고종 때 모사한 것이다.
  • 태조 어진 원본은 현재 어진박물관에서 관리한다.
  • 정전에 있는 어진은 보존을 위해 복제본이다.
  • 경기전 뒤편에는 왕실 시조를 모신 조경묘가 있다.
  • 경기전 동쪽에는 전주사고가 있다.
  • 임진왜란 때 전국 네 곳의 사고 가운데 전주사고의 실록만 살아남았다.
  • 전주사고본이 없었다면 조선 전기 실록 상당수가 현재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 현재의 전주사고 건물은 1991년 복원한 것이다.
  • 일제강점기에 경기전 부속건물 상당수가 철거됐다.
  • 2004년 여러 부속건물이 복원됐다.
  • 현재 경기전 바로 맞은편에 전동성당이 있다.
  • 경기전 주변 전체가 전주한옥마을 관광권이다.
  • 한복 대여점이 주변에 존나 많기 때문에 경기전 안에서 조선시대 복장을 한 관광객을 보는 것은 매우 흔하다.
  • 경기전 내부 대나무 숲과 돌담길은 사진촬영 명소로 유명하다.
  • 태조 이성계는 전주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전주가 중요한 이유는 전주 이씨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 전주 이씨 입장에서는 거의 본진 성지 같은 곳이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