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彌勒寺址)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터다. 백제 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절 자체는 사라지고 터와 석탑, 당간지주, 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2015년에는 왕궁리 유적, 공산성, 정림사지, 부소산성 등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구성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미륵사지는 규모부터가 그냥 크다. 백제의 일반적인 사찰이 1탑 1금당 구조를 취한 경우가 많았던 데 비해 미륵사는 탑 3기와 금당 3동을 동서로 나란히 배치한 3탑 3금당식 가람을 갖추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목탑, 동쪽과 서쪽에는 석탑을 두고 각각의 탑 뒤에 금당을 배치한 뒤 이 세 구역 전체를 회랑으로 묶었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도 보기 드문 규모와 구성이라, 백제 왕실이 얼마나 큰돈과 인력을 들여 만든 절이었는지를 지금 남은 터만 봐도 대충 감이 온다.
특히 서쪽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건립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로 평가된다. 원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무너지면서 6층 일부까지만 남았고, 1915년 일제강점기에는 붕괴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시멘트 콘크리트를 떡칠해 놓았다. 이후 1998년부터 20년 넘게 해체·수리·복원 작업을 거쳐 2019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공개됐다.
그리고 이 복원과정에서 2009년 금제사리봉영기가 발견되면서 한국 고대사 교과서에 꽤 큰 폭탄 하나가 떨어졌다.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사가 무왕과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지어졌다고 전하는데, 사리봉영기에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절을 세우고 639년에 사리를 봉안했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미륵사지는 단순히 큰 절터가 아니라 백제 건축사 + 무왕 시대 정치사 + 서동요 떡밥 + 일제강점기 문화재 수리의 흑역사까지 한 장소에 다 들어 있는 유적이 됐다.
창건
미륵사의 창건은 일반적으로 백제 무왕 재위기인 7세기 전반으로 본다.
가장 유명한 기록은 《삼국유사》의 무왕조에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무왕과 왕비가 사자사에 가던 도중 용화산 아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는 광경을 보았고,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워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사자사의 승려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연못을 메웠고, 그 위에 미륵삼회를 상징하는 전각과 탑을 세워 미륵사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설화 그대로 믿으면 연못에서 부처 튀어나옴 → 왕비가 절 지어달라 함 → 스님이 연못을 하루 만에 메움 → 동아시아 최대급 절 완성이라는 상당히 판타지스러운 전개다.
당연히 현대 역사학에서는 이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다만 미륵사 창건이 왕실 차원의 대규모 사업이었고,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중요하게 취급한다.
미륵이라는 이름은 미래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에서 나온다. 불교에서는 미륵이 장차 세상에 내려와 세 번 설법한다는 미륵삼회 사상이 있는데, 미륵사의 독특한 3탑 3금당 구조 역시 이를 공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즉 건물 세 채 예쁘게 나란히 세운 게 아니라 미래불 미륵이 세 번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세계관을 절 전체로 구현한 것에 가깝다.
무왕과 익산
미륵사가 익산에 세워졌다는 점은 백제 무왕 시대 정치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백제 후기의 공식 수도는 사비성, 즉 현재의 부여였지만 익산 일대에는 미륵사뿐 아니라 왕궁리 유적, 제석사지, 쌍릉 등 왕실과 관련된 대규모 유적이 집중되어 있다. 이 때문에 무왕이 익산을 제2의 정치거점 또는 별도 왕도처럼 개발했다는 견해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유네스코 역시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을 백제 후기의 익산 지역 왕도 관련 유적으로 보고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했다.
익산은 지리적으로 부여보다 남쪽에 있고 호남평야와 연결되며, 금강 수계와도 가까웠다. 무왕이 기존 사비의 귀족세력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 자신만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미륵사의 규모를 보면 그냥 지방 사찰 하나가 아니었다.
왕실이 엄청난 재정과 노동력을 투입하지 않고서는 이런 크기의 사찰을 건설하기 어렵다. 특히 거대한 석탑 두 기와 중앙 목탑을 동시에 세우고 각각 금당과 회랑을 갖춘 것은 사실상 국가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미륵사는 단순한 종교시설이라기보다 무왕 시대 익산 개발의 랜드마크라고 볼 수 있다.
선화공주와 사택왕후
미륵사 이야기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 선화공주다.
《삼국유사》의 서동설화에 따르면 어린 시절 서동이라 불리던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결혼했고, 이후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오랫동안 굉장히 유명했다.
백제 왕자 서동이 신라 공주 꼬셔서 결혼함 → 왕 됨 → 부인이 미륵사 지어달라고 함이라는 스토리가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9년 미륵사지 서석탑을 해체하던 중 완전히 다른 내용의 기록이 나왔다.
석탑 중심부의 심주석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영기에는 사리를 봉안한 사람이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 라고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봉영기에 따르면 이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639년 사리를 봉안했으며,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사택씨는 백제의 강력한 귀족가문 가운데 하나였다.
이 발견 이후 “그럼 선화공주는 뭐였음?” 이라는 문제가 터졌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선화공주 설화 자체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무왕에게 왕비가 여러 명 있었으며 선화공주와 사택왕후가 모두 실존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또 미륵사 전체를 한 명의 왕비가 한 번에 창건한 것이 아니라 동원·중원·서원이 시차를 두고 만들어졌고, 사택왕후는 그중 서원 조성을 주도했을 가능성도 논의된다.
따라서 “사리봉영기 발견으로 선화공주는 가짜로 확정됐다” 라고 단정하는 것도 지나치다.
확실한 것은 적어도 639년 서탑의 사리 봉안과 미륵사 조성에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역사라는 게 원래 문헌 하나 믿고 잘 살고 있다가 땅 파서 금판 하나 나오면 갑자기 1,300년 전 왕실 족보부터 다시 토론하게 된다.
가람배치
미륵사지의 가장 큰 특징은 독특한 3탑 3금당식 가람배치다.
발굴조사 결과 미륵사는 동원·중원·서원의 세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구역마다 탑과 금당이 하나씩 배치되어 있었다.
구조를 대충 표현하면 동탑 - 중앙 목탑 - 서탑이 일렬로 놓이고, 그 뒤에 각각 금당이 자리한 형태다.
중앙의 목탑과 금당 규모가 가장 컸고, 동·서원에는 석탑이 세워졌다. 이 세 구역은 각각 회랑으로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하나의 대규모 사찰을 구성했다.
일반적인 백제 사찰에서는 중문 → 탑 → 금당 → 강당식의 일탑일금당 구조가 흔했기 때문에 미륵사의 배치는 매우 독특하다.
특히 각 탑과 금당을 독립적인 영역처럼 구성한 뒤 세 공간을 병렬로 배치한 사례는 고대 동아시아에서도 드물다.
유네스코는 미륵사지가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사찰유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사례 중 하나이며, 세 개의 탑과 금당을 나란히 배치한 독특한 구조가 백제 불교문화와 건축기술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미륵사지를 직접 보면 현재 건물 대부분이 사라져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잔디밭 존나 넓네” 싶을 수 있다.
그런데 기단과 건물터 위치를 따라가 보면 이 넓은 땅이 거의 전부 절이었다.
백제시대 승려나 신도가 남문으로 들어왔다면 앞에는 탑 세 개가 늘어서 있고 그 뒤로 금당 세 동이 펼쳐진 엄청난 광경을 봤을 것이다.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은 서원에 있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다. 대한민국 국보이며, 현존하는 한국 석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현재 높이는 약 14m 정도지만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완전한 모습에서는 훨씬 높았을 것으로 본다.
이 탑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오래돼서가 아니다. 건축형식 자체가 목탑을 돌로 바꾸는 과정 을 거의 그대로 보여준다.
1층 탑신에는 실제 목조건물의 기둥처럼 돌기둥이 서 있고,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 등 목조건축 부재를 연상시키는 구조가 표현되어 있다. 네 방향에는 출입구가 있고 내부에는 십자형 통로가 만들어져 있으며, 중앙에는 심주석이 자리한다.
후대의 불국사 석가탑 같은 통일신라 석탑을 보면 돌을 이용한 탑의 형태가 이미 완전히 정형화돼 있다.
반면 미륵사지 석탑은 “원래 나무로 만들던 탑인데 이번에는 돌로 한번 만들어볼까?” 라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래서 한국 석탑 건축의 초기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데 엄청나게 중요한 자료다.
비슷한 특징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에서도 확인되지만, 미륵사지 석탑이 훨씬 복잡하고 목조건축적 요소가 강하다.
반쯤 무너진 탑
미륵사지 석탑은 조선시대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 못했다.
정확히 언제 크게 무너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근대에 촬영된 사진에서는 이미 서쪽과 북쪽 상당 부분이 붕괴하고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있었다.
더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17~18세기 이전부터 1층 외곽 일부에 석축을 쌓아 보강한 흔적도 확인됐다.
그리고 1915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석탑을 보수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그래도 문화재 살려줬네?” 싶겠지만 방식이 문제였다. 무너진 서쪽 부분에 엄청난 양의 시멘트 콘크리트를 부어버렸다. 덕분에 탑은 당장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원래 석재와 콘크리트가 뒤엉킨 기괴한 상태가 됐다.
사진을 보면 말 그대로 1,300년 된 백제 석탑 옆구리에 콘크리트 덩어리를 처박은 모습이었다.
당시 기준에서는 붕괴를 막기 위한 현실적인 응급조치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콘크리트 자체가 노후화하고 내부 석재에 영향을 주면서 다시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해졌다.
20년짜리 수리
1990년대 후반 미륵사지 석탑의 구조안전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완전한 해체수리를 결정했다.
1998년 안전진단을 거쳐 2001년부터 본격적인 해체가 시작됐고, 콘크리트를 제거하면서 석재 하나하나를 조사하고 기록했다.
문제는 이게 레고가 아니었다.
석재만 수천 개이고 각 돌의 위치와 균열, 가공흔적, 구조적 역할을 전부 확인해야 했다.
게다가 원래 탑이 절반 이상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원래 9층이었다니까 새 돌 깎아서 9층까지 예쁘게 올리자” 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해버리면 문화재 복원이 아니라 현대인이 상상해서 만든 새 탑이 되어버린다.
결국 원래 남아 있던 석재와 확인 가능한 구조를 최대한 유지하고, 부족한 부분만 새 석재로 보강해 기존 6층 높이 수준으로 복원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수리에는 약 20년이 걸렸고 2019년 공식적으로 완료됐다.
대한민국 문화재 수리 역사에서 단일 석조문화재로는 가장 길고 복잡한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였다.
결과적으로 일제가 부어놓은 콘크리트는 제거됐고, 서탑은 다시 돌 구조물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리장엄구 발견
석탑 수리과정에서 역사책을 뒤집은 사건이 터진 것이 2009년이다.
1층 중앙 심주석을 조사하던 중 사리공에서
- 금제사리봉영기
- 금제사리내호
- 금동제사리외호
- 청동합
- 각종 구슬
- 공양품
등이 발견됐다.
이 유물들은 현재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라는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금제사리봉영기다. 얇은 금판 앞뒤에 총 193자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절을 세웠으며 기해년**, 즉 639년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고대사 연구에서 연도가 정확히 적힌 자료가 발견되는 건 엄청난 일이다.
보통 백제 유적 연구는 토기 형태 보니까 7세기쯤인 듯? 기와 양식 보니까 무왕 때 같은데..? 하면서 추정하는데, 여기서는 백제 사람이 직접 금판에 639년이라고 박아놨다.
덕분에 미륵사지 서탑의 건립시기와 사리 봉안시기를 매우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왕후의 출신가문까지 적혀 있었으니 역사학자 입장에서는 거의 고대 백제판 USB 하나 발견한 수준이었다.
동탑
미륵사지 동쪽에는 현재 동원 구층석탑이 서 있다.
그런데 이 탑을 보고 “와 백제 탑 두 개 다 살아남았네” 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동탑은 오래전에 완전히 무너져 기단과 일부 석재만 남아 있었다. 현재 보이는 탑은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1993년 복원한 현대 복원탑이다. 원래 동탑이 서탑과 비슷한 형태의 9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고, 서탑과 출토 부재 등을 참고해 복원했다.
문제는 당시 복원이 지나치게 완전한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비판이다. 고대 건축복원에서는 근거가 부족한 부분까지 상상으로 만들어버리면 역사적 진정성이 떨어질 수 있다.
동탑은 딱 보면 굉장히 깨끗하고 완벽하다. 반면 서탑은 한쪽이 불완전하고 돌 색깔도 제각각이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오히려 “동탑이 원본이고 서탑은 왜 저렇게 찌그러졌냐?” 싶을 수 있다.
실제론 반대다. 찌그러진 서탑이 진짜 백제 탑이고, 멀쩡한 동탑은 1993년산이다.
그래서 두 탑을 나란히 보는 것 자체가 문화재 복원 철학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중앙 목탑
동탑과 서탑 사이 중앙에는 원래 거대한 목탑이 있었다. 현재는 탑 자체가 사라지고 기단과 주춧돌 흔적만 남아 있다. 발굴 결과 중앙 목탑 역시 상당한 규모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왜 양쪽은 석탑인데 가운데만 목탑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미륵삼회를 상징하는 독특한 공간구성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백제는 원래 뛰어난 목조건축 기술을 가진 나라였다. 문제는 나무로 만든 건물은 천 년 넘게 버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제 왕궁과 사찰의 화려한 목조건축은 거의 전부 사라졌다.
미륵사지 석탑이 특별히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목탑은 사라졌지만 옆에 세운 석탑이 목조건축의 구조를 돌에 그대로 남겨놓았기 때문에 백제 건축기술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나무 건물은 죽었는데 돌로 만든 복사본이 살아남은 셈이다.
당간지주
미륵사지에는 석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륵사지 당간지주도 남아 있다.
당간은 사찰에서 불교행사나 의식 때 깃발을 거는 긴 장대이고, 그 장대를 양쪽에서 고정하는 돌기둥이 당간지주다.
미륵사지에는 남쪽 영역에 두 쌍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며, 미륵사가 백제 멸망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고 확장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백제가 660년에 망했다고 절까지 바로 문 닫은 것은 아니다.
왕조는 없어졌지만 승려들은 계속 있었고 불교신앙도 유지됐기 때문에 미륵사 역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계속 운영됐다.
백제 멸망 이후
미륵사는 백제가 멸망한 660년 이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존속했다.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의 기와와 유물이 계속 확인됐다.
즉 백제 왕실사찰로 시작했지만 왕조가 사라진 뒤에도 불교사찰로 계속 사용된 것이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거대한 3원 구조는 점차 변화했고, 일부 건물은 폐기되거나 다시 지어졌다.
고려시대에도 미륵사는 상당한 규모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 기록에도 미륵사 또는 미륵산 일대 사찰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이미 사찰 기능이 크게 쇠퇴했고 결국 폐사했다.
정확히 언제 완전히 절이 사라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근대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서탑 일부와 당간지주, 건물터만 남아 있었다.
한때 동아시아 최대급 사찰이 돌탑 반쪽 + 돌기둥 몇 개 + 논밭이 된 것이다.
발굴조사
미륵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고고학 조사는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졌다.
1980년부터 1994년까지 장기간 대규모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사찰 전체 구조가 본격적으로 밝혀졌다.
이 조사 이전에도 미륵사지가 큰 절터였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정확한 건물 배치와 규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발굴 결과 중앙·동·서의 세 구역에 각각 탑과 금당이 배치되고, 그 뒤로 강당과 승방 등이 이어지는 복잡한 가람구조가 확인됐다.
엄청난 양의 기와와 토기, 건축부재 등도 출토됐다.
덕분에 미륵사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설적인 사찰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백제 왕실이 만든 대규모 국가사찰이었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확실해졌다.
이후에도 석탑 해체수리와 주변 발굴조사가 이어지면서 지금도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국립익산박물관
미륵사지 바로 옆에는 국립익산박물관이 있다.
미륵사지와 익산지역 백제문화 유물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국립박물관으로, 2020년 현재의 건물로 개관했다.
건물 자체가 미륵사지 경관을 가리지 않도록 지면 아래로 낮게 들어가 있는 구조가 특징이다.
박물관에서는 미륵사지 발굴조사에서 나온 기와·토기·불교유물과 왕궁리 유적 등 익산 백제유적 출토품을 볼 수 있다.
특히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 관련 유물은 미륵사 연구의 핵심 자료다.
그래서 미륵사지에 가서 잔디밭과 탑만 보고 나오기보다는 박물관까지 같이 보는 편이 훨씬 낫다.
절터에서는
“와 크다.”
하고,
박물관 들어가서 사리봉영기 보면
“아 그래서 이게 639년이구나.”
가 연결된다.
백제역사유적지구
미륵사지는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부여·익산에 남아 있는 백제 후기의 8개 유적으로 구성된다.
공주에는
이 포함되고, 부여에는
이 포함된다.
익산에는
- 왕궁리 유적
- 미륵사지
가 포함된다.
유네스코는 이 유적들이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도시계획·건축·불교문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다시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전달한 과정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미륵사지는 그중에서도 백제 불교와 건축기술을 가장 압도적인 규모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특히 거대한 석탑과 독특한 3원식 사찰배치는 다른 백제유적과 비교해도 존재감이 강하다.
역사적 의미
미륵사지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옛날 절이 존나 컸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첫째, 백제 후기의 건축기술을 보여준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건축에서 석조건축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의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백제 건축가들이 돌을 목재처럼 다루면서 새로운 석탑 형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백제 왕실과 귀족사회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사택왕후의 존재와 639년 사리봉안 기록은 문헌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백제 왕실 내부의 정치관계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다.
셋째, 백제의 미륵신앙을 보여준다.
세 개의 탑과 금당을 병렬로 배치한 형태는 미륵불의 세 차례 설법을 구현한 공간으로 해석되며, 당시 백제 불교가 단순히 개인신앙이 아니라 국가와 왕실 이념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넷째, 문화재 복원 자체의 역사를 보여준다.
서탑과 동탑을 같이 보면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 한국 문화재 복원 철학의 차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완벽하게 새로 만들어놓은 동탑 과 불완전하지만 남아 있던 원형을 최대한 존중한 서탑이 바로 옆에서 서로 쳐다보고 있다.
그래서 미륵사지는 백제시대 연구뿐 아니라 현대의 문화유산 보존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
현재 미륵사지는 넓은 유적공원 형태로 정비되어 있다.
주소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일대다.
산을 배경으로 매우 넓은 평지에 서탑과 복원된 동탑, 건물터가 펼쳐져 있으며, 바로 옆에 국립익산박물관이 자리한다.
건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화려한 궁궐이나 사찰을 기대하면 처음에는 허전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전체 규모를 보려면 오히려 지금처럼 터가 드러난 것이 도움이 된다.
동탑과 서탑 사이에서 뒤쪽 금당터까지 바라보면 이 넓은 공간 전체가 절 하나였다고? 라는 느낌이 온다.
그리고 뒤의 미륵산까지 함께 보면 왜 백제 왕실이 이곳에 대규모 사찰을 배치했는지도 어느 정도 감이 온다.
여담
-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됐다.
- 서탑 사리봉영기에 의해 적어도 639년에는 대규모 사찰과 서탑이 완성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 미륵사지는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유적으로 평가된다.
- 일반적인 백제 사찰의 일탑일금당 구조와 달리 3탑 3금당 구조다.
- 중앙탑은 목탑이었고 동·서탑은 석탑이었다.
- 현재 중앙 목탑은 남아 있지 않는다.
- 서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다.
- 서탑은 현존하는 대한민국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 원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6층까지만 복원됐다.
- 일제강점기인 1915년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부어 보강했다.
- 이 콘크리트는 2000년대 해체수리 과정에서 제거됐다.
- 서탑 수리는 1998년 조사 시작부터 2019년 준공까지 약 20년이 걸렸다.
- 2009년 서탑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 금제사리봉영기에는 639년이라는 연대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 사리봉영기에는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적혀 있다.
- 이 발견 때문에 《삼국유사》의 선화공주 설화가 다시 대규모 논쟁거리가 됐다.
- 그렇다고 선화공주의 실존 자체가 완전히 부정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 현재 동쪽의 9층석탑은 1993년 복원한 것이다.
- 그래서 동탑이 더 멀쩡해 보이지만 백제 원형이 많이 남은 것은 서탑이다.
- 동탑 복원방식은 현재 기준으로는 원형고증이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미륵사는 백제 멸망 이후에도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까지 오랫동안 유지됐다.
- 1980~1994년 대규모 발굴조사를 통해 전체 가람배치가 본격적으로 밝혀졌다.
- 현재 바로 옆에 국립익산박물관이 있다.
- 유적 자체가 존나 넓다. 한여름에 돌아다니면 백제사보다 햇빛을 먼저 체감할 수 있다.
- 사진으로 보면 서탑 하나만 유명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전체 사찰터 규모가 훨씬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