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말기의 개화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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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개념 | 개항 · 근대화 · 제국주의 · 불평등조약 · 친청파 · 친일파 · 친러파 · 대한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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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신사유람단은 1881년 조선 정부가 일본의 근대 문물과 제도를 시찰하기 위해 파견한 문물시찰단이다.
요즘 역사학계에서는 조사시찰단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쓴다. 당시 조선 조정이 이들을 공식적으로 “신사유람단”이라고 부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동래 암행어사처럼 움직였고, 일본에 가서는 사실상 개인 자격으로 각종 기관을 시찰했다.
쉽게 말하면 조선 말기판 “일본 벤치마킹 출장단”이다. 그런데 그냥 관광 간 게 아니다. 일본의 행정, 군대, 교육, 산업, 세관, 조폐, 박물관, 도서관 등을 보고 와서 조선 개화정책에 참고하려 한 것이다.
다만 이름이 “유람단”이라서 뭔가 놀러 간 느낌이 나는데, 실제로는 꽤 진지한 시찰이었다. 놀러 간 게 아니라 조선이 망하지 않으려고 허겁지겁 옆나라 시스템을 뜯어보러 간 것이다. 문제는 이미 타이밍이 늦었다는 점이다.
명칭
이 문서는 통용 명칭인 신사유람단으로 작성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조사시찰단이 더 정확하다.
“조사”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신하라는 뜻이다. 당시 이들은 조선 정부로부터 동래부 암행어사 직함을 받고 비밀리에 일본으로 갔다. 공식적으로 “신사유람단”이라는 이름을 달고 간 사절단은 아니었다.
“신사유람단”이라는 이름은 훗날 널리 쓰이게 된 명칭이다. 특히 윤치호의 회고와 최남선의 저술 등을 거치며 보편화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요약하면 이렇다.
| 명칭 | 설명 |
|---|---|
| 신사유람단 | 후대에 널리 굳어진 통용 명칭 |
| 조사시찰단 | 현재 더 정확하다고 보는 명칭 |
| 동래 암행어사 | 당시 조선 내부에서 부여된 위장성 직함 |
즉 “신사유람단”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부르는 이름이고, “조사시찰단”은 좀 더 정확한 역사 용어다. 검색 유입은 신사유람단이 더 세고, 정확도는 조사시찰단이 더 높다. 위키 입장에서는 둘 다 적어두는 게 제일 좋다.
한줄요약
조선이 일본 보고 배워보겠다고 보낸 비밀 출장단인데, 보고서는 잘 썼지만 조선 서버가 너무 낡아서 패치 적용이 늦었다.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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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일본에 문을 열었다.
이 조약은 불평등조약이었다. 일본은 자기가 서양에게 당한 방식을 조선에게 그대로 써먹었다. 맞고 배운 놈이 남 때릴 때 더 악랄한 법이다.
이후 조선은 수신사를 일본에 보냈다. 특히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은 일본에서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가져왔다. 이 책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면 친중, 결일, 연미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충격을 받았다. 밖에서는 러시아, 청나라, 일본, 미국 같은 나라들이 얽히고 있었고, 조선은 더 이상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니까 괜찮다” 같은 소리만 할 수 없게 되었다.
1880년에는 개화정책 추진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1881년에는 청나라에 영선사를 보내고, 일본에는 신사유람단, 즉 조사시찰단을 파견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조선도 드디어 “아 우리 진짜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님?” 모드에 들어간 것이다. 문제는 너무 늦었다.
왜 비밀리에 보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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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유람단은 대놓고 “일본 배우러 갑니다!” 하고 간 사절단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 내부에는 위정척사파의 반발이 거셌다. 유생들은 조선책략과 개화정책에 강하게 반대했다. 서양 오랑캐와 통하고 일본을 배우자는 말 자체가 이들에게는 나라 팔아먹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이들을 비밀리에 보냈다. 조사들에게 동래부 암행어사 직함을 주고 각자 움직이게 했다. 겉으로는 지방 민정을 살피는 암행어사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이건 조선 정부가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내부 반발을 얼마나 의식했는지 보여준다. 나라가 망할까 봐 일본을 보러 가는데, 일본 보러 간다고 말하면 유생들이 들고일어나니 몰래 가야 했다.
진짜 피곤한 나라다. 배가 침몰 중인데 구명보트 사러 가는 것도 비밀로 해야 하는 상황이다.
구성
신사유람단은 12명의 조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각 조사는 수행원, 통역, 하인 등을 데리고 하나의 반을 이루었다. 전체 규모는 자료에 따라 약 60명 또는 62명, 64명 등으로 설명되지만, 핵심은 12개 반으로 나뉘어 각 분야를 시찰했다는 점이다.
주요 조사로는 다음 인물들이 있다.
| 인물 | 비고 |
|---|---|
| 조준영 | 조사 |
| 박정양 | 훗날 주미공사로도 활동 |
| 엄세영 | 조사 |
| 강문형 | 조사 |
| 조병직 | 조사 |
| 민종묵 | 조사 |
| 이헌영 | 조사 |
| 심상학 | 조사 |
| 홍영식 | 훗날 우정총국 총판, 갑신정변 참여 |
| 어윤중 | 온건개화파 계열 실무 관료 |
| 이원회 | 무장 출신, 군사 분야 시찰 |
| 김용원 | 화원 출신, 수신사 수행 경험 있음 |
이 중 홍영식과 어윤중은 비교적 젊은 관료였다. 특히 홍영식은 훗날 보빙사, 우정총국,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핵심 인물이 된다.
또 유길준과 윤치호도 수행원 성격으로 참여했고, 일본에 남아 유학했다. 이들이 훗날 조선 근대 지식사에서 큰 이름이 되는 걸 보면, 신사유람단은 단순 시찰단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시찰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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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유람단은 일본의 여러 분야를 나누어 조사했다.
대략 다음과 같은 기관과 제도를 살펴보았다.
- 외무성
- 문부성
- 내무성
- 농상무성
- 재무 관련 기관
- 세관
- 조폐 시설
- 육군 제도
- 포병 공창
- 군사 훈련
- 도서관
- 박물관
- 학교
- 산업 시설
조선 입장에서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선이 “왜놈”이라고 깔보던 나라였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행정기관, 근대 군대, 공장, 학교, 박물관, 세관이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은 아직도 성리학 명분론과 낡은 관료제에 묶여 있었고, 일본은 이미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 시스템을 갈아엎고 있었다.
이때 조선 관료들이 받은 충격은 꽤 컸을 것이다. “쟤네가 벌써 여기까지 왔다고?” 느낌이었을 것이다.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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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유람단은 시찰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해 조선 정부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흔히 문견사건이라고 불린다. 각 분야별로 일본의 제도와 시설을 보고 들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보고서들은 이후 조선의 개화정책 추진에 참고 자료가 되었다. 신식 군대, 우편제도, 교육제도, 산업정책, 행정제도 등을 고민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물론 보고서가 있다고 나라가 바뀌는 건 아니다. 보고서는 잘 썼는데 정치권이 못 움직이면 그냥 파일철에 꽂힌다. 조선은 이쪽에 가까웠다.
요즘으로 치면 컨설팅 보고서 300페이지 받아놓고 임원회의에서 “음 좋은 내용이네요” 하고 끝나는 느낌이다. 보고서는 있는데 실행력이 없다. 이게 제일 무섭다.
신사유람단과 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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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유람단은 개화파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을 직접 보고 온 인물들은 조선이 바뀌어야 한다는 걸 더 강하게 느꼈다. 특히 홍영식, 어윤중,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인물들은 이후 조선의 개화정책과 근대 지식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다만 이들이 모두 같은 노선을 걸은 것은 아니다.
- 홍영식은 급진개화파 쪽으로 기울어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 어윤중은 온건개화파 실무 관료로 활동했다.
- 유길준은 일본과 미국 유학을 거쳐 서유견문을 썼다.
- 윤치호는 훗날 복잡한 친일 논란까지 가는 인물이 된다.
즉 신사유람단은 개화파를 키운 계기였지만, 그 결과가 전부 아름답지는 않았다. 조선 말기답게 좋은 씨앗도 이상한 토양에 심으면 줄기가 꼬인다.
신사유람단과 영선사
1881년에는 일본에 신사유람단이 파견되고, 청나라에는 영선사가 파견되었다.
둘 다 조선이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보낸 시찰·학습 성격의 사절이었다. 다만 방향이 달랐다.
| 구분 | 신사유람단 | 영선사 |
|---|---|---|
| 파견지 | 일본 | 청나라 |
| 목적 | 일본의 근대 제도와 문물 시찰 | 근대 무기 제조와 군사기술 학습 |
| 성격 | 문물·행정·군사·산업 전반 시찰 | 기술 학습·유학생 파견 성격 |
| 관련 노선 | 개화파 성장과 연결 | 온건개화·양무운동 영향 |
둘 다 필요한 일이었다. 일본도 보고, 청나라도 보고, 서양 기술도 배워야 했다. 문제는 조선이 이걸 국가 개조 프로젝트로 끝까지 밀어붙일 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배우러는 갔다. 그런데 배운 걸 적용하는 데 실패했다. 시험 범위는 봤는데 공부를 못 한 학생 느낌이다.
신사유람단과 수신사
신사유람단 이전에는 수신사가 있었다.
수신사는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과의 외교 관계 속에서 파견된 공식 사절에 가까웠다. 반면 신사유람단은 훨씬 더 실무적이고 조사 중심이었다.
수신사가 “일본과 외교관계 맺고 분위기 파악하러 간 사절”이라면, 신사유람단은 “일본 시스템 뜯어보고 베껴올 것 찾으러 간 시찰단”에 가깝다.
즉 수신사가 문을 열어본 것이라면, 신사유람단은 문 안쪽을 들여다본 것이다.
신사유람단과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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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유람단은 갑신정변과도 연결된다.
대표적으로 홍영식이 그렇다. 홍영식은 신사유람단으로 일본 육군을 시찰했고, 이후 보빙사로 미국까지 다녀온 뒤 우정총국 설치에 관여했다. 그리고 바로 그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이 갑신정변의 무대가 되었다.
신사유람단이 직접 갑신정변을 만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의 근대화와 조선의 후진성을 직접 본 일부 인물들이 급진적 개혁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사실이다.
즉 신사유람단은 개화정책의 지식 기반이 되었고, 그 지식 기반 일부는 급진개화파의 정치 행동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급진개화파가 너무 성급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보고 왔고, 조선이 뒤처졌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그걸 고치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3일 만에 망했다. 벤치마킹은 했는데 실행 전략이 폭탄이었다.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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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화를 직접 확인함
신사유람단의 가장 큰 의미는 조선 관료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직접 확인했다는 점이다.
보고 들은 것과 직접 본 것은 다르다. “일본이 바뀌었다더라”와 “일본이 진짜 바뀌었네”는 충격의 크기가 다르다.
조선 지배층에게 이 시찰은 정신적 충격요법이었다.
분야별 실무 조사
신사유람단은 단순 관광이 아니었다.
각 조사들이 분야를 나누어 행정, 교육, 군사, 산업, 세관, 조폐, 박물관 등을 살펴보고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조선 개화정책의 자료가 되었다.
즉 “와 일본 좋다” 하고 돌아온 게 아니라, 나름대로 업무보고를 했다. 이건 꽤 의미 있다.
개화파 성장에 기여
신사유람단은 개화파 성장의 중요한 계기였다.
홍영식, 어윤중,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인물들이 이 흐름에서 성장했다. 이들은 이후 조선의 개화정책, 근대 지식, 외교, 교육, 정치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정부가 자주적으로 추진함
일본이 시찰단 파견을 권장한 것은 맞지만, 조선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고 독자적으로 추진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일본이 다 해준 프로젝트라기보다는 조선이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고 움직인 측면이 있다. 물론 일본의 영향권 안에서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조선 내부의 문제의식도 분명히 있었다.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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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었다
가장 큰 문제는 타이밍이다.
1881년에 일본을 보고 와서 “아 우리도 근대화해야겠다”라고 느꼈다면, 솔직히 늦었다. 일본은 이미 메이지 유신을 하고 국가 시스템을 갈아엎는 중이었다. 서양은 산업혁명 이후 세계를 찢고 있었다.
조선은 너무 늦게 세계를 봤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옆집은 공장 돌리고 있었고, 자기는 아직 붓 말리고 있었다.
실행력이 약했다
보고서는 제출되었지만, 조선의 개혁 실행력은 약했다.
정보를 얻는 것과 나라를 바꾸는 것은 다르다. 신사유람단은 좋은 정보를 가져왔지만, 조선 정치 구조는 그 정보를 제대로 처리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
개혁을 하려면 돈, 군대, 행정력, 정치적 지지, 대중 설득이 필요하다. 조선은 다 부족했다.
일본에 대한 환상
일부 개화파는 일본을 근대화 모델로 강하게 보았다.
문제는 일본이 조선의 순수한 선생님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조선을 돕는 척하면서 자기 영향력을 키우려 했다. 실제로 일본은 훗날 조선을 집어삼킨다.
일본을 배우는 건 필요했다. 하지만 일본을 믿는 건 위험했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 일부 개화파는 훗날 큰 문제를 일으킨다.
내부 반발을 돌파하지 못함
신사유람단 자체가 비밀리에 파견되었다는 점은 조선 내부 반발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준다.
개화정책은 필요했지만, 조선 사회는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부족했다. 유생들은 반발했고, 백성들은 개화가 자기 삶에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엘리트 몇 명이 일본 보고 왔다고 나라 전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결국 개화는 위에서 맴돌았고, 아래로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주요 인물
홍영식
신사유람단으로 일본 육군을 시찰했다.
훗날 보빙사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을 다녀왔고, 우정총국 총판이 되었다. 이후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 후 고종을 호위하다 살해되었다.
신사유람단 → 보빙사 → 우정총국 →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구한말 개화파 루트의 대표 인물이다.
어윤중
신사유람단에 참여한 뒤 온건개화파 계열 실무 관료로 활동했다.
재정과 경제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갑오개혁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급진개화파처럼 쿠데타로 판을 엎기보다는 제도와 실무를 통해 개혁하려 한 쪽에 가깝다.
박정양
신사유람단의 조사 중 한 명이다.
훗날 주미공사로 활동하며 조선 외교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청나라의 간섭을 받던 조선이 미국과 외교를 펼치려던 과정에서 의미 있는 인물이다.
유길준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유학했다.
이후 미국 유학까지 경험하고 서유견문을 저술했다. 조선 지식인에게 서양 문명과 근대 제도를 소개한 대표 인물이다.
윤치호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일본에 남아 유학했다.
훗날 개화운동, 독립협회, 기독교계, 친일 논란까지 이어지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다. 윤치호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빛과 어둠을 압축한 인물에 가깝다.
평가
신사유람단은 조선이 근대화를 위해 본격적으로 정보를 수집한 중요한 사건이다.
좋게 보면 조선 정부가 세계 변화를 인식하고 일본의 근대 제도를 직접 조사한 자주적 시도였다. 보고서도 제출했고, 개화정책의 자료도 만들었다. 개화파 성장에도 기여했다.
나쁘게 보면 너무 늦었다. 그리고 배운 것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조선은 일본을 보고 충격을 받았지만, 그 충격을 국가 개조로 연결할 힘이 부족했다.
결국 신사유람단은 조선이 드디어 세계를 보러 나간 사건이면서 동시에 그 세계를 보고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한 사건이다.
신사유람단은 성공했나
부분적으로는 성공했다.
시찰 자체는 잘 이루어졌다. 보고서도 작성되었고, 일본의 근대 제도와 시설을 조사했다. 개화파 인물들의 성장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한계가 컸다.
왜냐하면 신사유람단의 목적은 단순히 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을 바꾸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은 바뀌는 데 실패했다. 시찰은 성공했지만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니까 “출장 보고서는 성공, 프로젝트 실행은 실패”라고 보면 된다. 회사에서 제일 흔한 그 상황이다. PPT는 좋았는데 매출은 안 나오는 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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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신사유람단”이라는 이름 때문에 진짜 유람하러 간 느낌이 나지만, 실제로는 조선 정부가 비밀리에 보낸 문물시찰단이었다.
또한 이들은 일본 정부가 제공하는 공식 숙소에 묵지 않고 자기 비용으로 여관에 머무는 등, 겉으로는 사적 시찰처럼 보이게 움직였다. 그만큼 조선 정부는 국내 여론과 외교적 모양새를 신경 썼다.
지금 식으로 비유하면 “공식 해외연수 보내면 내부 반발 터지니까, 비공식 리서치 출장으로 처리한 것”에 가깝다.
결론
신사유람단, 정확히는 조사시찰단은 조선이 일본의 근대화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보낸 시찰단이다.
이들은 일본의 행정, 군사, 산업, 교육, 세관, 조폐, 박물관 등을 조사했고, 보고서를 통해 조선 개화정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또한 홍영식, 어윤중,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인물들의 성장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일본은 이미 근대국가로 변신 중이었고, 조선은 뒤늦게 보고서를 들고 허둥댔다.
신사유람단은 조선이 근대 세계를 배우려 한 의미 있는 시도였지만, 조선이라는 낡은 시스템을 갈아엎기에는 너무 늦고 너무 약한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