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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유적(王宮里 遺蹟)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있는 백제 후기의 대규모 왕궁 유적이다. 남북 약 490m, 동서 약 240m의 직사각형 궁성 담장 안에 대형 건물지와 정원, 후원, 공방, 화장실, 각종 행정·생활시설이 확인되었으며, 백제 말기 무왕 시기의 익산 경영을 보여주는 핵심 유적으로 평가된다. 2015년에는 미륵사지, 공산성, 정림사지, 부소산성 등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구성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왕궁리 유적이 중요한 이유는 그냥 옛 건물터 몇 개 나온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문헌에서만 거론되던 백제 무왕의 익산 왕궁 또는 별도가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대규모 궁성시설이 발견됐고, 그 안에서 왕실급 건물과 정원, 공방, 수세식에 가까운 대형 화장실까지 확인됐다. 이후 궁성 기능이 약화된 뒤에는 일부 공간이 사찰로 바뀌었고, 그 흔적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다.

쉽게 말하면 백제 왕이 살던 궁궐터를 파봤더니 건물터뿐 아니라 정원, 금속공방, 화장실, 사찰, 국보급 석탑까지 한꺼번에 나온 곳이다.

백제 후기 익산이 단순한 지방도시가 아니라 사비와 병행해 운영된 중요한 왕실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미륵사지와 함께 익산 백제문화의 양대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

무왕과 익산

왕궁리 유적을 이해하려면 백제 무왕 시기의 익산 개발부터 봐야 한다.

백제의 공식 수도는 538년 성왕이 천도한 사비성, 즉 현재의 부여였다. 그런데 7세기 초 무왕이 즉위한 뒤 익산 지역에는 이상할 정도로 규모가 큰 왕실 관련 시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것이

등이다.

이 정도 시설을 한 지역에 몰아넣은 것은 단순히 지방개발 사업으로 보기 어렵다.

조선 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백제 무왕이 익산의 금마 지역에 성을 쌓고 별도(別都)를 두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별도는 문자 그대로 별도의 도읍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무왕이 수도를 부여에서 익산으로 옮기려고 했던 것 아닌가?” 라는 익산 천도설이 제기됐다.

다만 현재는 무왕이 사비성을 완전히 버리고 익산으로 공식 천도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익산을 왕실의 별도 또는 제2의 정치거점으로 대규모 개발했다는 해석이 비교적 널리 받아들여진다.

유네스코도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를 사비 수도와 관련된 익산의 부수적 왕도 혹은 제2 중심지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니까 익산은 부여에 수도 있는데 왜 여기에도 왕궁이 있음? 이라는 질문 자체가 유적의 핵심이다.

발견과 발굴

왕궁리 일대에는 오래전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

모질메토성

등 왕궁과 관련된 지명이 전해졌다. 게다가 들판 한가운데 거대한 오층석탑이 서 있었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곳에 상당한 규모의 시설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있었는지는 오랫동안 알 수 없었다. 마한 왕궁터라는 주장도 있었고, 백제 무왕의 왕궁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며, 통일신라 때 고구려계 왕족 안승이 세운 보덕국의 도읍이었다는 설이나 후백제 견훤과 관련됐다는 주장까지 여러 학설이 나왔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89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수십 년에 걸친 조사 결과 백제 후기의 궁성 담장과 대형 건물터, 정원, 공방, 화장실 등 궁궐시설이 대규모로 확인되면서 적어도 이곳의 핵심 조영주체가 백제였다는 사실은 사실상 확실해졌다.

그리고 “여기 왕궁 아니냐?” 수준의 추측이 “아니 이 정도면 진짜 왕궁시설인데?” 로 바뀌었다.

궁성 구조

왕궁리 유적은 낮은 구릉의 경사면을 이용해 조성됐다.

궁성 외곽은 남북 약 490m, 동서 약 240m의 직사각형에 가까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전체 면적은 약 12만㎡ 정도로 상당히 크다.

백제 사람들은 자연경사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내부에 여러 단의 석축을 쌓아 평탄한 대지를 만든 뒤 그 위에 건물을 배치했다. 즉 산비탈에 건물 몇 채 얹은 게 아니라 땅부터 대규모로 다시 설계해서 궁궐 플랫폼을 만든 것 이다.

궁성 내부는 기능에 따라 여러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남쪽과 중앙에는 대형 건물과 행정시설이 집중됐고, 북쪽으로 갈수록 정원과 후원 같은 왕실 생활공간이 배치된 것으로 본다. 특히 중심부에서는 길이 약 35m에 달하는 대형 와적기단 건물지가 발견됐다.

와적기단은 기와를 층층이 쌓아 만든 건물 기단을 말한다.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이라면 일반 민가나 지방 관청 수준으로 보기 어렵다. 궁성 안에서는 왕실과 행정조직이 실제로 생활하고 업무를 수행했던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왕궁 시설

대형 건물지

왕궁리 유적에서는 여러 대형 건물지가 확인됐다.

특히 궁성 중앙부의 대형 건물터는 왕이 공식적인 의례나 행정을 수행하던 중심건물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기단과 초석 배치, 건물 규모를 보면 일반적인 사찰이나 주거시설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다만 목조건축물 자체는 오래전에 사라졌기 때문에 “이 건물은 정확히 편전이고 저 건물은 침전이다” 식으로 조선 궁궐처럼 정확하게 이름까지 복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현재는 건물의 규모와 위치, 주변 출토유물 등을 통해 기능을 추정하고 있다.

백제의 궁궐 목조건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왕궁리 유적의 건물배치는 백제 왕궁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정원

왕궁리 유적 북서쪽에서는 백제시대 정원 유적이 발견됐다. 돌을 이용해 물길과 연못을 만들고 주변 경관을 꾸민 형태다. 정원에서는 자연석을 일부러 배치하고 물이 흐르도록 시설을 조성한 흔적이 확인됐다. 이것은 단순한 배수시설이 아니라 왕실의 휴식과 경관을 위해 계획적으로 만든 정원으로 해석된다.

백제의 조경기술은 일본 고대 정원문화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하게 연구된다. 백제는 당시 중국의 건축·조경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켰고, 다시 일본에 기술과 문화를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그래서 왕궁리의 정원은 왕이 꽃 구경하던 곳이라는 의미를 넘어 고대 동아시아 정원문화의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후원

정원 주변 북쪽에서는 왕실 후원으로 추정되는 공간도 확인됐다. 후원은 왕과 왕실가족이 공식적인 정치공간에서 벗어나 휴식하거나 산책하는 사적인 영역이다. 궁성 남쪽이 행정과 의례를 위한 공적인 공간이었다면 북쪽은 상대적으로 왕실 생활과 휴식 기능이 강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앞쪽은 정치, 뒤쪽은 생활과 휴식이라는 구조는 이후 동아시아 궁궐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배치다.

왕궁리 유적이 단순한 관청이 아니라 실제 왕실이 머무르는 궁궐이었다는 해석을 뒷받침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화장실

왕궁리 유적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재미있어하는 시설은 아마 화장실일 것이다. 유적에서는 백제시대 대형 공동화장실이 여러 곳 발견됐다. 삼국시대 화장실 유적으로는 매우 큰 규모에 속한다. 단순히 구덩이 하나 파놓은 것이 아니라 오물을 모으고 처리하기 위한 별도의 시설이 있었고, 내부에서는 실제 인간 기생충 알까지 발견됐다.

그리고 더 유명한 것이 뒤처리용 나무막대다.

화장지가 없던 시대에는 얇고 길게 다듬은 나무막대 등을 이용해 뒤처리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왕궁리 화장실에서 이런 도구가 실제로 출토됐다. 현대인 입장에서는 “아니 그걸 어떻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당시 동아시아에서 비슷한 위생도구가 사용된 사례가 확인된다.

고고학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런 유물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왕관이나 금붙이는 왕실의 의례와 권력을 보여주지만 화장실에서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먹고 싸고 살았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분변과 기생충 분석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과 위생상태까지 연구할 수 있다. 그래서 왕궁리 화장실은 농담거리가 아니라 실제로 한국 화장실 고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유적이다.

왕도 똥은 쌌다. 그리고 1,400년 뒤 고고학자가 그걸 연구한다.

공방

왕궁리 유적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공방시설이다. 궁성 안에서는 금속과 유리 등을 가공한 공방 흔적과 각종 도가니, 유리구슬, 금제품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발견됐다. 특히 금속가공 과정에서 나온 폐기물이 상당량 발견됐다. 왕궁 안에 이런 시설이 있었다는 것은 왕실에 필요한 고급 장신구와 물품을 현장에서 직접 생산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왕실에서는

  • 금속 장신구
  • 유리제품
  • 의례용품
  • 장식품

같은 고급품을 지속적으로 소비했다.

일반 시장에서 “금 귀걸이 하나 주세요” 하고 사오는 구조가 아니라 숙련된 장인을 궁성 내부 또는 왕실 통제 아래 두고 직접 생산했던 것이다. 실제로 왕궁리에서는 금제 장식품과 유리구슬 등 왕실 또는 상위계층과 관련된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이런 공방유적은 왕궁리 유적이 단순한 행정시설이 아니라 실제 왕실경제를 운영하는 복합적인 궁성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출토 유물

왕궁리 유적에서는 수천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대표적으로

  • 연화문 수막새
  • 각종 기와
  • 토기
  • 중국제 청자
  • 금제 장식품
  • 유리구슬
  • 도가니
  • 철제품
  • 인장기와

등이 있다.

특히 수부(首府)라고 찍힌 기와가 중요하다. 수부라는 글자는 문자 그대로 중심이 되는 관청 또는 국가 중심시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왕궁리 유적의 위상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받았다. 또 왕궁사 / 대관관사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도 발견됐다.

중국제 청자와 같은 고급 수입품 역시 왕궁리 유적을 사용한 사람들의 높은 신분을 보여준다. 일반 농촌마을에서 중국산 고급 도자기와 금세공 공방, 대형 정원, 공동화장실이 동시에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래서 출토품을 하나하나 합치다 보면 “여기 그냥 성이 아니라 진짜 왕실급 시설 맞네” 라는 결론으로 가게 된다.

왕궁에서 사찰로

왕궁리 유적의 재미있는 특징은 시간이 지나면서 공간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이다.

백제시대에는 궁성으로 사용됐지만 이후 왕궁기능이 사라진 뒤에는 일부 지역이 사찰로 바뀌었다. 궁성 중심부와 남쪽에는 금당과 강당 등 불교사찰과 관련된 건물지가 들어섰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도 이 시기의 종교시설과 관련된다.

왜 왕궁이 절로 바뀌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백제가 660년 멸망한 뒤 정치적 기능을 잃은 궁성부지를 통일신라시대에 불교시설로 재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대에는 기존 왕궁이나 관청 자리에 절이 들어서는 일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었다. 넓고 평탄한 부지에 이미 담장과 기반시설까지 갖춰져 있으니 “왕도 없어졌는데 이 좋은 땅 그냥 버릴 거임?” 할 이유도 없었다.

덕분에 왕궁리 유적에서는 백제 왕궁통일신라 이후 사찰이 서로 겹쳐 있는 복잡한 층위가 확인된다.

왕궁리 오층석탑

왕궁리 유적 한가운데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건축물이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다. 높이 약 8.5m의 오층석탑으로 대한민국 국보다.

탑은 백제계 석탑의 형태와 통일신라계 석탑의 요소가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건립시기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졌다. 과거에는 통일신라 초기 또는 고려 초기의 탑으로 보는 견해가 강했지만, 최근에는 백제 말기의 목탑 또는 석탑 구조와 연결해 더 이른 시기로 보는 연구도 제기된다. 현재도 정확한 건립연대는 완전히 확정됐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왕궁리 오층석탑은 무조건 백제탑이다” 또는 “무조건 고려탑이다” 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다. 다만 백제계 석탑 전통을 강하게 이어받은 중요한 탑이라는 점 자체는 분명하다.

1965년 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물건들이 발견됐다.

사리장엄구

1965년 왕궁리 오층석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던 중 기단부와 1층 지붕돌에서 대규모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대표적으로

  • 녹색 유리제 사리병
  • 금제 사리함
  • 금동제 외함
  • 금강경판 19매
  • 금동여래입상
  • 청동요령
  • 향류

등이 나왔다.

이 유물들은 현재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라는 이름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금강경판이 굉장히 특이하다.

금속판에 《금강경》 내용을 새기고 여러 장을 책처럼 연결한 형태로 제작됐다. 불교경전을 그냥 종이에 써서 넣은 것이 아니라 귀금속으로 아예 책을 만들어 탑 안에 봉안한 것이다. “부처님께 경전 한 권 넣어드립시다” 했는데 종이책이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이 사리장엄구는 당시 불교공예기술과 금속가공기술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다만 사리장엄구의 제작시기 역시 학계에서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백제 무왕대와 관련해 보는 견해도 있고, 통일신라 또는 고려시대까지 여러 시기를 검토하는 연구도 있어 탑의 정확한 연대 문제와 함께 계속 연구되고 있다.

무왕 천도설

왕궁리 유적이 알려지면서 가장 크게 주목받은 역사문제가 무왕의 익산 천도설이다. 조선 후기 《대동지지》에는 백제 무왕이 금마에 성을 쌓고 별도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왕궁리에서 실제 대규모 궁성까지 발견되자

“김정호 기록이 진짜였던 거 아님?” 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무왕이 공식적으로 수도를 사비에서 익산으로 완전히 옮겼다고 명시하는 백제 당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첫째는 실제로 무왕이 익산 천도를 추진했거나 일정 기간 수도 기능을 옮겼다는 견해다.

둘째는 사비가 공식수도로 유지되는 가운데 익산에 별도 또는 제2왕궁을 건설했다는 견해다.

셋째는 왕실 직할의 정치·종교 거점으로 익산을 개발했다는 견해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설명에서는 익산을 백제 후기 사비 수도체계와 연결된 secondary capital 성격의 지역으로 설명한다.

“익산이 공식 수도였음” 이라고 확정하기보다는 “적어도 왕이 궁궐까지 지어놓고 중요한 정치거점으로 사용한 것은 맞음” 정도가 가장 안전하다.

미륵사지와의 관계

왕궁리 유적을 단독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미륵사지와 같이 보면 그림이 상당히 명확해진다. 두 유적은 모두 익산에 있고 무왕 시기의 대규모 국가사업과 관련된다.

왕궁리 유적이 정치와 왕실생활의 중심이었다면, 미륵사지는 왕실 불교와 종교적 권위의 중심에 가까웠다. 여기에 제석사지와 쌍릉 등 주변 유적까지 포함하면 익산 일대 전체가 무왕시대에 계획적으로 개발됐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쉽게 말해서 무왕이 궁궐 하나 덜렁 짓고 끝낸 게 아니다.

왕궁 짓고 → 거대한 절 짓고 → 왕실 묘역 만들고 → 주변 교통과 방어시설까지 정비하는 수준의 도시개발을 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익산이 무왕에게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점 자체는 의심하기 어렵다.

제석사지

왕궁리 유적 동쪽에는 제석사지가 있다.

제석사는 《관세음응험기》 등의 기록을 통해 백제 무왕과 관련된 왕실사찰로 알려져 있다. 639년 화재로 제석사가 불탔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실제 발굴에서도 화재흔적이 확인돼 문헌과 고고학 자료가 연결된다. 왕궁리 유적과 매우 가까워 궁성의 왕실 불교시설 또는 왕궁과 밀접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보면 익산 왕궁 주변에는 왕궁리 궁성 + 제석사 + 미륵사라는 거대한 왕실 정치·종교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었던 셈이다.

백제 무왕이 왜 이 지역에 이렇게까지 투자했는지는 여전히 연구주제지만, 익산이 단순 지방거점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백제 멸망 이후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왕궁리 유적의 정치적 기능도 사라졌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사찰이 들어섰고, 주변지역 역시 새로운 행정체계 아래 재편됐다.

왕궁리 유적과 관련해 안승이 세운 보덕국의 도읍지였다는 설도 오랫동안 제기됐다. 고구려 멸망 뒤 신라에 귀순한 안승은 익산 일대에 보덕국을 세웠고, 이 지역이 정치적 중심지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왕궁리 유적 자체를 정확히 보덕국 왕궁으로 단정할 정도의 증거는 부족하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왕궁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고, 오층석탑만 들판에 남아 옛날 이곳에 큰 시설이 있었다는 흔적을 보여줬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도 “왕궁이라는 이름도 있고 탑도 있는데 옛날에 뭔가 대단한 곳이었나 봄” 정도로 기억했던 것이다.

발굴조사

왕궁리 유적의 본격적인 발굴은 1989년부터 시작됐고, 조사가 장기간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단순한 성터 정도로 이해됐던 유적의 성격이 점점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궁성 담장이 확인되고, 대형 건물지가 나오고, 정원이 나오고, 공방이 나오고, 화장실이 나오고, 왕실급 유물이 나오면서 결국 유적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왕궁리 발굴은 백제 왕궁의 구체적인 모습을 연구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공주와 부여에서도 왕궁 관련 유적이 확인되지만 현대도시가 겹쳐 있어 전체 궁성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반면 왕궁리 유적은 비교적 넓은 영역이 보존되어 있어 왕궁 전체 구조를 고고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익산에서는 왕궁리 유적을 백제왕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왕궁리 유적은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구성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부여·익산에 위치한 8개의 백제 후기 유적으로 구성된다.

공주에는

이 있으며, 부여에는

이 있다.

익산에는

가 포함된다.

유네스코는 이 유적들이 백제가 중국에서 받아들인 도시계획과 건축, 불교문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뒤 이를 일본 등 동아시아에 전달한 과정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특히 왕궁리 유적은 익산지역에 존재했던 왕궁의 실체와 백제 후기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핵심 구성유산이다.

왕궁리 유적전시관

왕궁리 유적 옆에는 백제왕궁박물관이 있다. 과거에는 왕궁리유적전시관으로 운영됐지만 이후 시설을 확대하고 개편해 백제왕궁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왕궁리 발굴 과정과 궁성 구조, 출토 유물, 백제의 왕궁생활 등을 전시한다. 특히 왕궁리 유적은 실제 건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박물관을 먼저 보거나 함께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유적만 걸어다니면 “잔디밭에 돌 좀 있는데?” 싶을 수 있다. 박물관에서 여기가 대형전각이고 저기가 화장실이고 저쪽이 왕실정원이었다는 설명을 보고 다시 나가면 갑자기 공간이 다르게 보인다.

건물이 안 남았으니 상상력이 좀 필요하다.

현재

현재 왕궁리 유적은 넓은 유적공원 형태로 정비되어 있다.

유적 중앙에는 오층석탑이 서 있고 주변에는 발굴된 건물지와 정원, 궁성 담장 등이 정비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탑 하나만 들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주변 전체가 옛 왕궁 영역이다.

왕궁리 유적은 미륵사지보다 상대적으로 관광객에게 덜 알려져 있지만 역사적 중요성은 결코 작지 않다.

미륵사지가 거대한 석탑 덕분에 “와 백제 절 존나 컸구나” 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면, 왕궁리 유적은 “백제가 익산에 왕궁까지 지어놨다고?” 라는 정치사적 충격이 더 큰 유적이다.

두 곳의 거리는 멀지 않기 때문에 익산 백제유적을 보러 간다면 함께 방문하는 편이 좋다.

역사적 의미

왕궁리 유적의 가장 큰 의미는 백제 후기 왕궁의 실체를 고고학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문헌만으로는 무왕이 익산을 어느 정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기 어렵다.

그런데 실제 땅을 파보니 남북 490m짜리 궁성 담장 안에서 대형 건물과 정원, 왕실공방, 화장실까지 나왔다.

이건 “무왕이 익산을 좋아했다더라”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 수준의 인력과 재정을 투입한 대규모 왕궁 프로젝트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백제 왕실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보통 고대왕국 유적이라고 하면 왕릉과 금관, 불상 같은 화려한 물건만 주목받는데, 왕궁리에서는 화장실과 공방, 배수시설, 정원처럼 왕과 궁궐 사람들이 실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시설까지 발견됐다.

세 번째는 백제 멸망 이후 공간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왕궁이 폐기된 뒤 사찰로 재사용되고, 그 사찰의 석탑이 오늘날까지 남았다. 따라서 왕궁리 유적 하나 안에 백제 왕궁 → 통일신라계 사찰 → 폐허 → 현대 발굴유적이라는 1,400년 이상의 역사가 겹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익산이 백제 말기에 단순한 지방도시가 아니라 왕실이 직접 운영한 핵심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여담

  • 왕궁리 유적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에 있다.
  •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 궁성은 남북 약 490m, 동서 약 240m 규모다.
  • 평면 형태는 대체로 직사각형이다.
  • 백제 무왕 시기에 조성된 왕궁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 무왕이 실제로 익산으로 완전히 천도했는지는 아직 논쟁이 있다.
  • 적어도 익산에 왕궁급 시설을 건설하고 중요한 정치거점으로 운영했다는 점은 고고학적으로 강하게 뒷받침된다.
  • 유네스코는 익산을 사비 수도체계와 연결된 백제 후기의 제2 중심지로 설명한다.
  • 궁성 내부에서 길이 약 35m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됐다.
  • 왕실 정원과 후원시설도 확인됐다.
  • 대형 공동화장실도 발견됐다.
  • 화장실에서 뒤처리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나무막대가 출토됐다.
  • 실제 기생충 알까지 발견돼 당시 식생활과 위생환경 연구에도 사용된다.
  • 금속과 유리 등을 제작했던 왕실공방 흔적이 발견됐다.
  • 수부(首府)라는 글자가 찍힌 기와가 출토됐다.
  • 중국산 청자 등 고급 수입품도 발견됐다.
  • 백제 멸망 이후에는 왕궁 일부가 사찰로 바뀌었다.
  • 현재 중앙에 있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국보다.
  • 오층석탑의 정확한 건립시기는 아직 학설이 갈린다.
  • 1965년 석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대규모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 사리장엄구 역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 금속판에 《금강경》을 새긴 금강경판 19매도 발견됐다.
  • 유적 근처에 제석사지가 있다.
  • 익산의 미륵사지와 함께 무왕시대 익산 개발을 보여주는 핵심 유적이다.
  • 1989년부터 장기간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 현재는 백제왕궁박물관이 옆에 있어 발굴유물을 함께 볼 수 있다.
  • 미륵사지처럼 거대한 원형 건축물이 많이 남은 곳은 아니라서 아무 정보 없이 가면 “탑하고 잔디밭인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 반대로 유적 배치를 알고 가면 “이 잔디밭 전체가 왕궁이었다고?”가 된다.
  • 백제왕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화장실을 현대인이 1,400년 뒤 관광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하면 묘하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