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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晉州城)은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남성동 일대, 남강 북쪽 절벽과 평지에 자리한 성곽이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진주의 방어거점을 바탕으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계속 정비됐고, 특히 임진왜란 때 벌어진 두 차례의 진주성 전투로 가장 유명하다.

진주성은 그냥 지방도시 읍성 하나 정도가 아니다. 남강을 끼고 절벽 위에 자리한 천연요새에 성벽과 누각, 군사시설이 결합되어 있었고, 경상우도의 행정·군사 중심지 역할까지 맡았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는 핵심 방어선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조선과 일본 양쪽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거점이었다.

현재 성 안에는 촉석루, 의암, 김시민장군전공비, 진주성 전투 관련 유적과 기념시설,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으며, 성벽을 따라 남강과 진주시가 내려다보이는 경관도 매우 유명하다.

한마디로

산성 + 읍성 + 임진왜란 격전지 + 논개 전설 + 강변 관광지

가 한 공간에 다 들어 있는 곳이다.

역사

진주성의 기원은 매우 오래됐다.

정확한 최초 축성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시대부터 진주 일대에 방어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진주의 행정·군사 중심지로 성곽이 계속 사용됐다.

진주는 지리적으로 경상도 서부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동쪽으로는 함안·창원 방향, 서쪽으로는 하동·전라도 방향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남해안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반드시 지켜야 할 지역이었다.

특히 남강이 성 남쪽을 감싸고 흐르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했다. 강을 등지고 절벽 위에 성을 만들면 적이 정면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향이 제한되고, 성 안에서는 높은 곳에서 강과 주변 평야를 감시할 수 있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면서 진주성의 군사적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1379년 왜구가 진주 일대를 공격하면서 성이 함락되기도 했고, 이후 성벽을 다시 보강하면서 방어력이 강화됐다.

조선시대에도 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요한 행정도시였기 때문에 성 안에는 관아와 군사시설이 함께 들어섰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진주성은 대한민국 역사책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장소가 된다.

임진왜란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조선군은 초기 전투에서 거의 연속으로 패배했고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한양과 평양까지 북상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군의 보급로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특히 전라도는 당시 일본군이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전라도에는 곡창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동도 활발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전라도까지 장악해야 전쟁을 안정적으로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 가운데 하나가 진주였다. 그래서 진주성은 뚫리면 전라도까지 위험해지는 전략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1592년과 1593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제1차 진주성 전투

1592년 10월,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격했다.

당시 진주목사는 김시민이었다.

김시민은 이미 전쟁 초기부터 지역 군사력을 정비하고 무기와 식량을 확보하면서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수만 명 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포위했지만 성 안의 조선군은 훨씬 적었다. 정확한 병력수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조선군은 수천 명 수준이었던 것으로 본다.

하지만 진주성은 남강과 절벽, 성벽을 이용한 방어에 유리했고 김시민은 병력과 무기를 효율적으로 배치했다.

조선군은 화포와 총통, 활, 돌 등을 사용해 공격을 막았고 성 안의 백성들도 전투에 참여했다.

특히 일본군이 성벽에 접근하면 화약무기와 투석, 활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면서 큰 피해를 입혔다. 성 밖에서도 의병과 조선군이 일본군을 압박했다.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세력은 진주성 주변에서 일본군의 움직임을 견제했고, 이 때문에 일본군은 완전히 성 공격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결국 일본군은 수차례 공격에도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거둔 대표적인 방어전 승리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특히 전쟁 초기 조선군이 계속 패배하던 상황에서 대규모 일본군을 상대로 성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컸다. 그래서 당시에는 행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주요 승리로 꼽혔다.

김시민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이야기하면 김시민을 빼놓을 수 없다. 김시민은 충청도 목천 출신의 무관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 진주목사를 맡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진주성을 정비하고 병력을 모았으며, 무기와 식량을 확보해 일본군 공격에 대비했다.

1592년 진주성 전투에서는 적은 병력으로 대규모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투 막바지에 총탄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김시민은 결국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나이는 39세였다.

그래서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성은 지켰는데 영웅은 살아서 못 나감” 이라는 비극적인 승리였다.

김시민은 이후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래서 대한민국 역사에는 충무공이 한 명만 있는 게 아니다. 이순신도 충무공이고 김시민도 충무공이다.

다만 이순신의 인지도가 너무 압도적이라 일반인에게 “충무공 김시민” 이라고 하면 “충무공은 이순신 아님?” 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진주성 전투

문제는 일본군이 진주성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1593년 6월 일본군은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다.

이번에는 사실상 “작년에 우리 쪽팔리게 만든 성 이번엔 반드시 먹는다” 수준으로 병력을 몰고 왔다. 일본군 병력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수만 명에서 9만 명 이상까지 언급된다.

진주성 안에는 조선군과 의병, 백성들이 모여 방어했다.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 여러 장수가 방어를 지휘했다.

하지만 상황은 제1차 전투와 달랐다.

일본군은 이미 진주성의 구조와 방어방식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 일본군은 성벽에 접근하기 위해 대나무와 목재로 방패와 공격시설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조총사격과 성벽 공격을 반복했다. 조선군도 화포와 활, 돌 등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병력과 물자가 부족해졌다. 결국 장마로 성벽 일부가 무너진 것을 계기로 일본군이 성 안으로 진입했다.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은 함락됐다.

성 안에 있던 군인과 민간인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학살당했다.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의 숫자는 기록마다 다르지만 당시 성 안에는 군사뿐 아니라 피난민까지 대규모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희생자가 매우 많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조선의 패배였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진주성 공격에 상당한 병력과 시간을 소모했고, 전라도로 대규모 진격하는 전략적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진주성 전투는 제1차는 완벽한 방어승리 / 제2차는 함락됐지만 엄청난 저항을 한 전투로 기억된다.

논개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 가장 유명하게 전해진 이야기가 논개다. 전승에 따르면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한 뒤 촉석루 일대에서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하거나 실제 관기 신분으로 이 연회에 참석한 뒤 일본 장수를 남강 절벽 쪽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일본 장수를 끌어안은 채 강으로 뛰어내려 함께 죽었다고 전해진다. 논개가 뛰어내렸다고 전해지는 바위가 현재의 의암이다.

이 이야기에서 일본 장수의 이름을 게야무라 로쿠스케라고 하는 경우가 많지만,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의 세부내용은 후대 기록과 전승이 섞여 있어 역사적으로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니다. 논개에 대한 초기 기록도 전투 직후 공식기록보다 훨씬 뒤에 나타난다. 그래도 조선 후기부터 논개는 충절의 상징으로 크게 추앙받았고, 의암이라는 이름도 이러한 전승에서 비롯됐다. 현대 진주에서는 논개가 지역의 대표적인 역사인물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래서 진주성 관광가면 거의 김시민 → 촉석루 → 논개 → 의암 세트로 설명을 듣는다.

촉석루

진주성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촉석루다. 남강 절벽 위에 세워진 누각으로 진주를 대표하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촉석루의 기원은 고려 고종 때인 12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지며, 이후 여러 차례 중건됐다. 평상시에는 관료와 문인들이 남강 경치를 감상하는 누각으로 사용됐지만 전쟁이 나면 지휘소 역할을 했고, 임진왜란 당시에도 진주성 방어의 핵심 지휘공간 가운데 하나였다.

남강 바로 위 절벽에 자리해 있어 전망이 매우 좋다. 누각에 올라가면 강과 진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래서 평소에는 “와 경치 좋다” 인데, 1593년 기준으로 보면 “저 강 건너 일본군 존나 많네” 였을 장소다.

원래의 촉석루는 한국전쟁 때 화재로 소실됐고, 현재 건물은 1960년에 재건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보는 촉석루가 조선시대 원본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위치와 전통적인 형태를 복원해 진주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의암

촉석루 아래 남강가에는 의암이 있다. 논개가 일본 장수를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렸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다. 원래는 위험한 바위라는 뜻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렸지만 논개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으로 불리게 됐다. 바위에는 후대에 새긴 義巖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현재는 촉석루 옆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가까이 볼 수 있지만, 강물 바로 옆 바위라 비가 많이 오거나 수위가 높을 때는 접근이 제한될 수 있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생각보다 바위 작네?” 할 수도 있다.

성곽 구조

진주성은 남강을 남쪽의 천연 방어선으로 이용하고 북쪽과 동·서쪽을 성벽으로 둘러싼 구조다. 현재 성곽의 둘레는 약 1.7km 정도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여러 차례 파괴와 복원을 반복했다.

성 안에는 관아와 군사시설, 창고, 누각 등이 있었다. 성문도 여러 곳에 있었고, 주변 지형에 따라 방어시설이 배치됐다.

현재의 성벽과 문루 일부는 현대에 복원된 것이다. 진주성 역시 강화산성 같은 다른 오래된 성곽과 마찬가지로 지금 보는 돌 하나하나가 400년 전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전쟁과 도시개발,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성곽 상당 부분이 훼손됐고 이후 복원됐다.

하지만 남강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전체적인 입지와 성곽의 핵심 구조는 과거 진주성이 왜 방어에 유리했는지를 지금도 잘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진주성은 일제강점기에 상당한 훼손을 겪었다. 일제는 전국의 읍성을 도시개발과 도로건설 과정에서 철거하는 경우가 많았고, 진주성 역시 성벽과 시설 일부가 사라졌다. 성 안에 있던 관아와 건물도 많이 철거됐다.

당시에는 오래된 성곽을 지금처럼 “문화재니까 보존해야 함” 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강하지 않았고, 도시 확장에 걸리면 그냥 허무는 경우가 많았다. 해방 이후에도 진주시가 성장하면서 성곽 주변 개발이 계속됐지만, 이후 역사적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복원사업이 진행됐다.

오늘날 진주성의 모습은 여러 시대의 잔존유구와 현대 복원시설이 섞여 있는 결과다.

한국전쟁

진주성은 한국전쟁 때에도 큰 피해를 입었다. 1950년 전쟁 과정에서 진주는 전선이 지나간 지역 가운데 하나였고, 진주성 내부 건축물도 피해를 입었다. 특히 촉석루가 화재로 완전히 소실됐다. 현재 촉석루가 1960년 복원건물인 이유가 이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성벽이 훼손되고 한국전쟁 때 대표 누각까지 타버렸으니 임진왜란 버티고 나왔더니 20세기에도 계속 맞은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960~1970년대부터 진주성 복원과 정비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 내부에는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1984년 개관한 국립박물관으로, 임진왜란과 경남지역 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전시한다.

특히 임진왜란 관련 전문 전시가 강하다. 진주성이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격전지인 만큼 이 위치에 박물관을 둔 것이 매우 적절하다.

전시에서는

  • 임진왜란 전개
  • 조선군과 일본군의 무기
  • 진주성 전투
  • 의병 활동
  • 조선 수군
  • 전쟁 이후 사회 변화

등을 다룬다. 그래서 진주성만 한 바퀴 돌고 나오기보다 박물관까지 같이 보는 편이 좋다. 성벽에서는 “여기서 싸웠구나” 하고, 박물관에서는 “그래서 어떻게 싸웠는데?” 를 볼 수 있다.

진주대첩과 3대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는 흔히 진주대첩이라고 불린다.

전통적으로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은

을 가리킨다.

한산도에서는 이순신이 수군으로 일본 함대를 격파했고, 행주에서는 권율이 일본군을 막았으며,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적은 병력으로 성을 지켜냈다. 세 전투 모두 일본군의 전략적 움직임을 크게 제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진주대첩은 특히 전라도 방어에 중요한 영향을 줬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바로 돌파해 전라도로 들어가지 못하면서 조선의 중요한 곡창지대와 이순신 수군의 후방이 상대적으로 보호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진주성 하나 지킨 것이 “성 하나 방어함 ㅋㅋ” 정도로 끝난 게 아니라 전쟁 전체 보급과 전략에 영향을 준 것이다.

진주성 함락 이후

1593년 제2차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된 뒤 성 안에서는 대규모 희생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성 내부의 군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공격했고, 방어에 참여한 주요 장수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자결했다.

김천일은 아들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졌다고 전해지고, 최경회 역시 전투 후 강에 투신했다. 황진은 성벽을 방어하다 전사했다.

이 때문에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시대부터 충절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됐다. 하지만 당시 성 안에 피난민이 얼마나 있었고 실제 희생자가 몇 명이었는지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매우 크다. 후대에는 6만~7만 명이 희생됐다는 기록과 전승도 나타나지만 이를 그대로 현대적인 인구통계처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확실한 것은 군인뿐 아니라 상당수 민간인이 전투에 휘말렸고, 성이 함락된 뒤 큰 피해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진주성과 남강

진주성의 풍경을 만드는 핵심은 남강이다. 성 남쪽 성벽과 촉석루가 강을 바로 내려다보고 있고, 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성벽과 누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군사적으로는 천연 해자 역할을 했고, 평상시에는 뛰어난 경관을 제공했다.

그래서 진주성은 전쟁유적이면서 동시에 경승지라는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도 촉석루와 남강 풍경을 자주 시로 남겼다. 오늘날에는 남강 일대에서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열리면서 성과 강이 진주 관광의 중심공간이 됐다. 밤에는 강 위에 유등이 뜨고 진주성 성벽과 촉석루에 조명이 켜져 관광지 분위기가 강하다. 임진왜란 당시 여기를 알던 사람이 현대 축제 모습을 보면 “여기 사람 죽던 곳 맞냐?” 싶겠지만, 역사유적이라는 게 계속 장례식장처럼 존재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사람들이 계속 찾고 기억하는 것도 보존의 한 방식이다.

진주남강유등축제

진주성과 남강에서는 매년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열린다.

축제의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남강에 등불을 띄워 군사신호를 보내거나 성 밖 가족들과 연락했다는 이야기에서 찾는다.

오늘날에는 남강에 다양한 형태의 유등을 띄우고 진주성 주변을 조명으로 장식하는 대규모 지역축제로 발전했다. 실제 임진왜란 당시 유등 사용방식이 현재 축제와 정확히 같은 형태였던 것은 아니지만, 진주성 전투의 역사적 기억을 현대 관광축제로 재해석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진주 입장에서는 400년 전 전쟁통의 군사신호를 지역대표 관광상품으로 만든 것이다. 축제기간에는 진주성 내부와 남강 주변에 사람이 엄청나게 몰린다. 평소 조용한 성곽을 보고 싶으면 축제기간을 피하는 것도 방법이고, 야경과 행사를 좋아하면 반대로 축제기간에 가는 것이 좋다.

현재

현재 진주성은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주소는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일대.

성 안에는 촉석루·의암·김시민장군전공비·쌍충사적비·창렬사·호국사·국립진주박물관 등 여러 유적과 시설이 모여 있다. 성곽길 전체를 천천히 걸으면 남강과 진주 시내를 여러 방향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촉석루 주변이 가장 유명하지만 북쪽과 서쪽 성벽도 산책하기 좋다.

전체가 도심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접근성도 매우 좋다. 다른 산성처럼 등산화 신고 산속으로 몇 시간 들어가야 하는 유적이 아니라 시내에서 밥 먹고 걸어가서 바로 성벽 올라갈 수 있는 역사유적이다.

그래서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관광하기 부담이 적다.

역사적 의미

진주성의 가장 큰 역사적 의미는 임진왜란의 승리와 패배를 모두 같은 공간에서 보여준다는 점이다. 1592년에는 김시민과 조선군이 압도적으로 많은 일본군을 막아내면서 임진왜란 대표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런데 불과 8개월 정도 뒤인 1593년에는 일본군이 훨씬 큰 병력으로 다시 공격해 성을 함락시켰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진주성은 “우리 조상님들이 용감하게 싸워서 이겼습니다” 라는 단순한 승전기념지가 아니다. 승리한 전투와 처참하게 무너진 전투가 모두 있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훌륭한 지휘와 성곽 방어, 의병 지원으로 승리했고, 두 번째 전투에서는 병력과 물자의 압도적인 차이를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 전쟁이라는 것이 영웅 한 명의 용기만으로 항상 결과가 뒤집히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준다.

동시에 논개·김시민·김천일·최경회 등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이곳에 겹쳐지면서 진주성은 조선시대부터 충절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국립진주박물관과 남강유등축제까지 결합하면서 전쟁유적을 보존하면서 현대도시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여담

  • 진주성은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도심 한가운데에 있다.
  • 남쪽으로 남강이 흐르기 때문에 천연 방어선 역할을 했다.
  • 현재 성곽 둘레는 약 1.7km다.
  • 임진왜란 때 두 차례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 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였다.
  • 이 전투는 흔히 진주대첩이라고 불리며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당시 지휘관은 진주목사 김시민이었다.
  • 김시민은 전투 중 총상을 입고 얼마 뒤 사망했다.
  • 김시민의 시호도 충무공이다. 그래서 충무공이라고 해서 무조건 이순신만 있는 것은 아니다.
  •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성을 함락했다.
  • 제2차 전투 당시 군인뿐 아니라 성 안에 피난한 민간인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 논개가 일본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었다는 전설도 제2차 진주성 전투 직후를 배경으로 한다.
  • 논개가 뛰어내렸다고 전해지는 바위가 의암이다.
  • 성 안의 대표적인 누각은 촉석루다.
  • 촉석루는 한국전쟁 때 불탔고 현재 건물은 1960년 복원한 것이다.
  • 진주성 내부에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관련 전시가 특히 강하다.
  • 진주성 전체를 임진왜란 테마파크처럼 생각하면 곤란하다. 기원 자체는 임진왜란보다 훨씬 오래됐다.
  • 일제강점기 도시개발 과정에서 성벽과 건축물 상당 부분이 훼손됐다.
  • 현재 성곽에는 현대에 복원된 구간도 많다.
  • 남강유등축제 기간에는 진주성과 남강 일대에 관광객이 엄청나게 몰린다.
  • 촉석루에서 보는 남강 풍경이 상당히 좋다. 옛날에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현재는 관광객들이 앉아서 사진 찍는 곳이 됐다.
  • 진주성은 대한민국에서 이겼던 전투와 졌던 전투가 둘 다 유명한 상당히 특이한 전쟁유적이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