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영 Yun Deok-yeong | |||||||||||||||||||||||||||||||||||||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조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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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
| 본관 | 해평 윤씨 | ||||||||||||||||||||||||||||||||||||
| 직업 | 관료, 정치인, 기업인, 지주, 친일파 | ||||||||||||||||||||||||||||||||||||
| 관련 건축물 | 벽수산장, 옥인동 윤씨가옥, 박노수미술관 | ||||||||||||||||||||||||||||||||||||
추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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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윤덕영(尹德榮, 1873년 12월 27일 ~ 1940년 10월 18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일제강점기의 정치인으로, 일본의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덕(仲德), 호는 벽수(碧樹)이다.
대한제국의 비서원경과 의정부 찬정, 시종원경 등을 역임했으며,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백부라는 지위를 통해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1910년에는 시종원경으로서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결정하는 어전회의에 참여했고, 국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 때문에 경술국적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되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한 뒤 윤덕영에게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을 수여했다.
이후 윤덕영은 이왕직 찬시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939년에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1940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황제의 비서실장이나 다름없는 시종원경이었고, 나라가 망한 뒤에는 일본 귀족이 되어 일본 제국의회 의원까지 해 먹은 매국노 새끼다.
윤덕영이 특히 악명 높은 이유는 일반적인 친일 관료들과 달리 대한제국 황실의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국권 침탈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그의 동생 윤택영은 순종의 장인이었고, 윤덕영은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였다.
즉, 윤덕영은 황실의 외척이면서 황제를 가까이에서 보좌할 수 있는 정치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려 하자 이를 막기는커녕 병합조약 체결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당시 일본의 한일병합 과정을 기록한 자료에서는 윤덕영이 병합조약을 처리하는 어전회의에 참여해 강력하게 찬성했다고 기록한다.
황제의 가족이라는 신분으로 출세한 인간이 정작 그 황제의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앞장선 것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행적이다.
윤덕영은 일본의 귀족 작위와 경제적 보상을 받은 뒤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대규모 토지를 확보하고 프랑스식 초호화 저택을 지었다.
그 건물이 바로 벽수산장이다.
1927년 당시 윤덕영이 소유한 옥인동 토지는 약 1만 9,467평으로, 옥인동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에 해당했다.
나라가 망하자 서울 한복판의 동네 절반을 자기 땅으로 만들어 놓고 아방궁 같은 저택을 지은 것이다.
그런데 윤덕영의 친일 행적은 개인적인 부와 권력의 축적에 그치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을 위한 국방헌금을 제공하고 북중국 전선의 일본군을 위문했다.
또한 조선인 지원병제도를 찬양하고,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여러 단체에서 활동했다.
부인 김복수 역시 김복완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자료에서 애국금차회 회장을 맡아 일본군을 위한 금비녀와 귀금속 헌납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나타난다.
남편은 일본이 나라를 빼앗는 데 협력하고, 아내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금비녀를 모아 일본군에게 바쳤다.
참으로 일본 제국의 충성스러운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윤덕영은 정식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에 협력한 경술국적의 한 명이다.
생애
출생과 가문
1873년 12월 27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평 윤씨이며, 자는 중덕(仲德), 호는 벽수(碧樹)이다.
아버지는 영돈녕부사를 지낸 윤철구(尹徹求)이며, 할아버지는 의정부 의정대신을 지낸 윤용선(尹容善)이다.
윤덕영은 전통적으로 조선의 고위 관료를 배출한 양반 가문에서 성장했다.
특히 해평 윤씨는 조선 후기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가문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동생은 윤택영이다.
윤택영은 훗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
따라서 윤덕영은 순정효황후의 백부에 해당한다.
이러한 가문적 배경은 윤덕영이 황실과 가까운 위치에서 활동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 인간은 왕실과 인연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는 걸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황실의 핵심적인 의사결정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다.
동생 윤택영
윤덕영의 동생 윤택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아버지다.
1906년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면서 윤씨 집안은 대한제국 황실의 외척이 되었다.
윤택영은 이러한 혼인관계를 통해 왕실 내부에서 상당한 지위를 확보했다.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
후작은 자작보다 높은 귀족 작위였다.
따라서 윤덕영과 윤택영 형제는 모두 일본의 귀족제도에 편입되었다.
특히 일본은 윤택영에게 매우 큰 규모의 은사공채를 지급했다.
1910년 작위 수여 관련 자료에 따르면 윤덕영이 받은 은사공채는 5만 원이었으며, 윤택영은 약 50만 4,000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두 금액은 서로 구분해야 한다.
형은 자작에 5만 원, 동생은 후작에 50만 4,000원.
나라가 망한 뒤에 형제가 나란히 일본 귀족이 되었지만, 일본에서 받은 대우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윤택영이 받은 은사공채의 규모가 더 컸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윤덕영보다 한일병합에 더 적극적으로 협력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본의 작위와 포상에는 왕실과의 친족관계, 기존 신분 및 일본 정부의 정치적 판단 등이 함께 영향을 미쳤다.
문과 급제
1894년 윤덕영은 식년시 문과에 응시했다.
그는 시험에 입격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했다.
당시 문과는 조선의 고위 문관으로 진출하기 위한 대표적인 국가시험이었다.
윤덕영은 이를 통해 중앙정부의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했다.
1895년에는 비서감 우비서랑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일본을 방문하여 근대적인 정치와 행정제도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
당시 조선은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으로 정치적·사회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일본은 군사적인 영향력을 바탕으로 조선 정부의 개혁과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윤덕영 역시 이러한 시기에 관료로 성장했다.
독립협회에 기부하다
1896년 7월 윤덕영은 독립협회에 5원의 보조금을 기부했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서재필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정치·사회단체였다.
설립 초기에는 독립문 건립과 국민 계몽사업을 추진했고, 이후 민권 신장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윤덕영은 당시 독립협회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1897년 11월에는 독립협회가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도 참석했다.
이러한 행적은 윤덕영이 초기에는 근대적인 정치·사회운동과 접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설립 초기부터 모든 회원이 동일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단체는 아니었다.
특히 초기에는 왕실과 정부의 고위 관료들도 참여하거나 후원했다.
따라서 윤덕영이 독립협회에 5원을 기부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이후의 민권운동과 의회설립운동까지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후 한일병합에 협력한 행적과 비교하면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1896년에는 독립을 내세운 단체에 5원을 기부하더니, 1910년에는 독립국가 자체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했다.
그야말로 독립협회에 냈던 5원이 무색해지는 정치적 경력이다.
중앙정부의 주요 관직
1896년 윤덕영은 학부 참서관과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내각 참서관 및 경연원 시독관 등을 역임했다.
1897년에는 중추원 의관과 비서원승으로 활동했다.
1898년에는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했으며, 파리 만국박람회 관련 위원과 농상공부 참서관 등을 맡았다.
1899년에는 내부 지방국장에 임명되었다.
1900년에는 법부 법무국장과 법률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경력을 통해 윤덕영은 행정과 법률, 교육 및 경제정책 등에 폭넓게 관여했다.
특히 그는 황실의 문서와 비서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을 여러 차례 맡았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시종원경으로서 황제와 가까운 위치에서 활동하는 기반이 되었다.
경기·황해도 관찰사
1901년 윤덕영은 경기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경기 관찰사는 서울을 둘러싼 지역의 행정과 재정, 사법업무를 담당하는 중요한 지방관이었다.
그는 경기재판소 판사도 겸임했다.
같은 해 5월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전임되었다.
황해도에서는 황해도재판소 판사도 함께 맡았다.
당시 대한제국은 지방행정과 사법제도를 개편하면서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려 했다.
윤덕영은 이러한 과정에서 지방행정과 재판업무를 경험했다.
이후 1902년에는 철도원 부총재와 지계아문 부총재를 역임했다.
지계아문은 토지의 소유관계와 관련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1903년에는 비서원경과 내장원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중앙은행 창설 관련 업무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경력은 윤덕영이 황실과 중앙정부의 행정뿐 아니라 토지와 금융, 철도 및 경제정책에도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황실 외척으로 출세
순정효황후의 백부
1906년 윤덕영의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그 인물이 바로 순정효황후이다.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황후가 된 인물이다.
이 혼인으로 윤씨 집안은 황실의 외척으로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윤덕영은 순정효황후의 백부였으므로 황실 내부의 정치적인 상황에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특히 조선과 대한제국에서는 왕비와 황후의 친족들이 궁중의 주요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윤덕영 역시 이러한 환경에서 여러 황실 관련 관직을 맡았다.
순종의 황후가 자기 조카딸이었으니, 황실 입장에서는 거의 집안 어른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이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서 핵심적인 협력자가 되었다.
황후궁대부
1907년 윤덕영은 규장각 학사와 시강원 일강관에 임명되었다.
이어 태의원경과 황후궁대부도 겸임했다.
황후궁대부는 황후궁의 주요 업무를 담당하는 고위 관직이었다.
윤덕영은 순정효황후의 백부라는 친족관계와 기존의 관료 경력을 바탕으로 황실 관련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
1908년에는 시종원경도 겸임했다.
시종원은 황제의 측근에서 비서와 의례, 관련 행정업무 등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시종원경은 이러한 업무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오늘날의 직책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황제의 비서실장과 비슷한 위치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시종원경은 황제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었으므로 정치적인 중요성이 컸다.
윤덕영은 이러한 직책을 이용해 일본과 친일 내각이 황실에 요구하는 사항을 전달하는 위치에 있었다.
일본의 훈장 수령
1907년 윤덕영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들에게 훈장과 여러 형태의 포상을 제공하면서 자신들의 정책에 협력하도록 유도했다.
윤덕영 역시 이러한 포상의 대상이었다.
이후에도 일본의 적십자사와 여러 친일단체에 참여하며 일본과의 정치적 관계를 강화했다.
1908년에는 일본적십자사 특별사원으로 위촉되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 아래 조직된 대동학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행적은 윤덕영이 한일병합 이전부터 일본의 정치적·사회적 조직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 추도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통감으로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내정권 침탈, 고종 강제 퇴위 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대한제국과 일본의 정치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 저항하던 한국인들에게 이토는 국권 침탈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반면 친일 관료들은 이토의 죽음을 애도하는 정치적 활동에 참여했다.
윤덕영 역시 이러한 추모활동을 전개했다.
고종의 조문사로 다롄에 가다
윤덕영은 고종의 조문사 자격으로 중국 다롄에 파견되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은 일본으로 운구되고 있었다.
윤덕영은 황실의 조문사로서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쫓아내는 데 앞장섰던 일본 정치인이 죽자, 그를 조문하기 위해 고종의 측근이 파견된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황실이 일본에 얼마나 심각한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장충단 추도회
1909년 11월 서울 장충단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관민추도회가 개최되었다.
윤덕영은 추도회 개최를 발의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궁내부 대표로 참석해 제문을 낭독했다.
장충단은 원래 국가를 위해 희생된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일본의 국권 침탈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가 열린 것이다.
나라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장소에서 나라를 빼앗은 일본 정치인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고, 윤덕영은 궁내부 대표로 참석해 제문까지 읽었다.
이후 같은 해 12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추도회에도 참석했다.
윤덕영의 일본 관련 정치활동이 단순한 외교적 의례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일병합
1910년의 상황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 위한 최종적인 절차에 착수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으며, 경찰권과 사법권도 일본의 통제를 받게 했다.
일본은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국가적 지위를 완전히 제거하려 했다.
특히 일본은 한일병합에 반대하는 한국인들의 정치활동을 억압하기 위해 헌병과 경찰을 동원했다.
서울의 주요 장소에 군대를 배치했고, 언론과 집회도 제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완용 내각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병합조약 체결을 추진했다.
윤덕영은 당시 시종원경이었다.
그는 황제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고위 관료이자 순정효황후의 백부였다.
따라서 한일병합을 추진하는 일본과 친일 내각이 황실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치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1910년 8월 22일 순종 앞에서 한일병합을 결정하는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당시 회의 장소는 창덕궁의 흥복헌이었다.
일본은 회의가 개최되기 전부터 서울의 주요 장소에 군대와 헌병을 배치했다.
특히 황제가 머무는 창덕궁과 고종이 있는 경운궁 주변에서도 무력시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합조약을 심의하는 어전회의가 진행되었다.
윤덕영은 시종원경으로서 회의에 참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윤덕영이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협박과 회유에 동조하면서 병합조약 체결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킨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황제의 비서실장 격인 인물이 일본의 요구에 따라 황제의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앞장선 것이다.
특히 그는 순정효황후의 백부였으므로 황실 내부에서 매우 가까운 인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윤덕영은 한일병합에 협력한 다른 관료들과 비교해 더욱 강한 비판을 받는다.
민병석과 함께 병합을 알리다
당시 민병석은 궁내부대신이었다.
민병석 역시 황실의 주요 업무를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1910년 8월 22일 오전 두 사람은 순종에게 일본과의 병합 협의가 이루어졌으며, 이완용에게 조약 체결의 전권을 위임하는 어전회의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의 일본 측 기록과 후대의 역사연구에 나타난다.
특히 민병석과 윤덕영은 황제의 측근으로서 관련 사항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일본의 병합정책은 군사적인 강압을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이를 자유로운 외교적 협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궁내부대신과 시종원경이라는 인간들이 황제에게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전달한 것이다.
황실을 보좌해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국권 침탈을 진행하는 창구가 된 셈이다.
순종의 침묵
1910년 8월 22일의 어전회의는 일본의 군사적 압력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순종이 회의에서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일본 측 기록과 후대의 역사적 평가에 차이가 있다.
일본의 데라우치는 순종이 병합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취지로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의 군사적 상황과 순종의 행동을 고려하면 이러한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순종은 한일병합을 공포하는 조칙에 자필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한일병합조약의 강제성과 절차적 문제를 논의하는 중요한 근거로 제시되어 왔다.
윤덕영은 이러한 상황에서 병합조약 체결을 추진한 황실 측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순정효황후 옥새 강탈 일화
치마폭에 옥새를 숨겼다는 이야기
윤덕영과 관련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 가운데 하나는 순정효황후가 한일병합에 반대하며 옥새를 치마폭에 숨겼는데, 윤덕영이 이를 빼앗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려 하자 순정효황후는 한일병합을 승인하는 옥새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는 옥새를 치마폭에 숨기고 일본과 친일 대신들의 요구에 저항했다.
그러나 황후의 백부였던 윤덕영이 나서서 옥새를 빼앗았다고 한다.
이 일화는 여러 역사 관련 서적과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자기 조카딸이 나라를 지키겠다며 치마폭에 숨긴 옥새를 큰아버지가 빼앗아 일본에 넘겼다는 이야기다.
만약 실제로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면 황실의 친족이 국권 침탈에 협력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화를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 위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확실한 사료는 부족하다
순정효황후가 치마폭에 옥새를 숨기고 윤덕영이 이를 직접 빼앗았다는 일화는 동시대의 확실한 사료로 모두 입증된 사건은 아니다.
박은식의 《한국통사》에는 윤덕영이 국권 양여 조칙에 어새를 찍는 문제와 관련하여 부정한 행동을 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러나 당시의 소문과 후대의 구술에 바탕을 둔 부분이 있어 구체적인 장면을 모두 사실로 확정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1910년의 마지막 어전회의를 검토한 역사연구에서도 윤덕영이 어새를 몰래 찍었다는 이야기는 존재하지만, 이를 확실하게 증명할 자료가 부족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구분해야 한다.
- 확인되는 사실 - 윤덕영은 시종원경으로서 한일병합을 결정하는 어전회의에 참여했고, 병합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 사료 검토가 필요한 일화 -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마폭에 숨겼으며 윤덕영이 이를 직접 빼앗았다는 구체적인 장면.
즉, 윤덕영이 한일병합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만 옥새를 직접 강탈했다는 일화의 세부 내용까지 확정적인 사실로 서술해서는 안 된다.
일화가 사실이 아니어도 책임은 달라지지 않는다
윤덕영의 친일반민족행위를 평가하기 위해 반드시 옥새 강탈 일화를 사실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결정한 어전회의에 참여하고, 일본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역사적 책임이 존재한다.
특히 그는 순정효황후의 백부이자 시종원경이었다.
황실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이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여러 역사자료에서 확인된다.
옥새를 치마폭에서 직접 빼앗았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사실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굳이 확인되지 않은 장면까지 만들어 내지 않아도 비판할 근거가 충분한 인물이다.
경술국적
윤덕영은 1910년 한일병합에 협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을 가리키는 경술국적(庚戌國賊) 가운데 한 명이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포함된다.
| 인물 | 당시 직책 |
|---|---|
| 이완용 | 내각총리대신 |
| 박제순 | 내부대신 |
| 고영희 | 탁지부대신 |
| 조중응 | 농상공부대신 |
| 민병석 | 궁내부대신 |
| 윤덕영 | 시종원경 |
| 이병무 |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
| 조민희 | 승녕부 총관 |
윤덕영은 정식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황실의 시종원경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다만 한일병합조약의 공식적인 서명자는 윤덕영이 아니었다.
당시 조약에 서명한 사람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윤덕영의 책임은 조약문에 직접 서명한 것이 아니라 황실 내부에서 병합 결정에 협력하고 이를 추진한 데 있다.
서명은 이완용이 했고, 윤덕영은 황제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결정이 가능하도록 협력했다.
일본의 포상
자작 작위 수령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관료와 유력 인물들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윤덕영은 이때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일본의 귀족제도에서 자작은 백작의 아래, 남작의 위에 해당하는 작위였다.
일본은 한일병합에 협력한 기존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들에게 작위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을 식민통치 체제에 포섭하려 했다.
윤덕영 역시 이러한 포상을 받아들였다.
나라가 망했는데 황제의 측근이었던 인간은 일본 제국의 귀족이 되었다.
대한제국의 황제권은 사라졌지만, 그 황제의 측근이었던 윤덕영은 새로운 지배체제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것이다.
은사공채 5만 원
1911년 1월 윤덕영은 일본 정부로부터 5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은사공채는 일본이 조선귀족들에게 지급한 국채 형태의 경제적 보상이었다.
당시 5만 원은 일반적인 조선인이 쉽게 확보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특히 은사공채는 이자 수익을 발생시키는 금융자산이었다.
윤덕영은 이러한 혜택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한 공로로 귀족 작위와 금융자산까지 지급받은 것이다.
다만 윤덕영의 전체 재산을 은사공채 5만 원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는 이후 기업과 금융기관의 경영에 참여했고, 토지와 부동산도 대규모로 소유했다.
또한 이왕직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여러 직책을 맡으면서 높은 수당을 받았다.
따라서 그의 경제적 부는 귀족 작위와 은사공채, 토지 소유 및 기업활동 등 여러 요인이 결합한 결과였다.
동생 윤택영과의 비교
윤덕영의 동생 윤택영은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
당시 윤택영은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이자 순종의 장인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왕실과의 친족관계를 고려하여 윤택영에게 높은 작위를 수여했다.
윤택영이 받은 은사공채는 약 50만 4,000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윤덕영이 받은 금액은 5만 원이었다.
| 구분 | 윤덕영 | 윤택영 |
|---|---|---|
| 관계 | 형 | 동생 |
| 순정효황후와의 관계 | 백부 | 아버지 |
| 일본 작위 | 자작 | 후작 |
| 은사공채 | 5만 원 | 약 50만 4,000원 |
형제가 나라가 망한 뒤 나란히 일본 귀족이 되었는데, 동생은 황후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훨씬 높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다만 은사공채 금액이 일본에 대한 충성도만을 기준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다.
작위와 포상에는 기존의 신분과 왕실의 친족관계도 영향을 미쳤다.
벽수산장
서울 한복판에 지은 아방궁
벽수산장은 윤덕영의 친일 행적과 경제적 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벽수산장은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인왕산 자락에 있었던 대규모 저택이다.
윤덕영의 호인 벽수(碧樹)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당시 윤덕영은 옥인동 일대의 토지를 대규모로 매입하고 여러 건물과 정원, 연못 등을 조성했다.
특히 중심 건물은 프랑스식 저택을 참고하여 건축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규모와 화려함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벽수산장을 아방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라가 망한 뒤 서울 한복판에 유럽 귀족 저택을 흉내 낸 초호화 주택을 지은 것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정치적 권리를 제한받고 있었지만, 윤덕영은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옥인동의 절반 이상을 소유
벽수산장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윤덕영이 소유했던 토지의 규모다.
당시의 지적자료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1927년 윤덕영이 소유한 옥인동 토지는 약 1만 9,467평이었다.
당시 옥인동 전체 면적은 약 3만 6,361평이었다.
따라서 윤덕영이 소유한 토지는 옥인동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에 해당했다.
이는 약 6만 4,000㎡에 달하는 면적이다.
쉽게 말해 서울 한복판의 동네 하나에서 절반이 넘는 땅이 이 인간의 소유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서울의 토지 가격을 생각하면 상당히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다.
다만 당시와 현재의 토지 가격과 경제적 가치를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윤덕영이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대지주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서울 도심에 막대한 부동산을 소유했다는 사실이다.
송석원 터
벽수산장이 들어선 곳은 원래 송석원(松石園)으로 알려진 지역이었다.
송석원은 조선 후기 문인 천수경이 활동하던 장소로, 인왕산 아래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문인과 서화가들이 모여 시문과 서화를 즐기던 문화공간이었다.
당시 송석원 일대는 인왕산의 계곡과 바위, 수목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장소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윤덕영이 이 지역의 토지를 대규모로 매입하고 호화로운 저택을 건설했다.
조선 후기 문인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에 친일 귀족의 아방궁이 들어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울의 역사적인 공간이 일제강점기의 정치적·경제적 지배층에 의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
프랑스식 저택
윤덕영은 1910년대에 벽수산장의 건축을 추진했다.
특히 1913년 무렵부터 서양식 본관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건물은 프랑스의 귀족 저택을 참고한 형태로, 높은 지붕과 장식적인 외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이러한 규모와 양식의 민간 저택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따라서 벽수산장은 건축 당시부터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완공 시기와 공사 기간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1917년 준공된 것으로 소개하지만, 다른 연구에서는 주요 건물과 부속시설의 조성이 1920년대까지 계속되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벽수산장 전체를 하나의 건물로 보아 특정 연도에 모든 공사가 끝났다고 단정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윤덕영이 일제강점기 초기에 옥인동 일대에 대규모 저택과 정원, 여러 부속건물을 조성했다는 사실이다.
여러 한옥과 정원
벽수산장에는 서양식 본관뿐 아니라 여러 한옥과 정원시설도 존재했다.
서울시의 조사에 따르면 윤덕영은 벽수산장 주변에 딸과 소실 등을 위한 한옥을 비롯해 여러 건물을 조성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부속 한옥이 20여 채에 달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대규모 정원과 연못,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등이 설치되었다.
특히 인왕산 자락의 자연지형을 이용해 대규모 별장지대를 형성했다.
친일파의 저택 하나를 지은 게 아니라 사실상 개인 소유의 작은 궁궐을 만든 것이다.
당시 일반적인 조선인들의 주거환경과 비교하면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벽수산장의 몰락
광복 이후
1945년 일본이 패전하면서 한국은 광복을 맞았다.
이후 윤덕영이 소유했던 벽수산장은 여러 기관에서 사용되었다.
특히 광복 직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과 관련된 정치활동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병원과 군사 관련 시설로 활용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유엔 산하의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즉 UNCURK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친일 귀족의 사저였던 건물이 광복 이후 국제기구의 업무시설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특이한 역사다.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한 인간이 지은 저택이, 일본이 패전한 뒤에는 전혀 다른 정치적·행정적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1966년 화재
1966년 4월 5일 벽수산장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벽수산장은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화재로 건물의 주요 부분이 크게 손상되었다.
특히 서양식 본관의 상부 구조가 불에 타면서 건물은 더 이상 정상적인 업무시설로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당시 벽수산장의 화재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다.
이후 건물은 상당 기간 폐허로 방치되었다.
1973년 철거
벽수산장은 1973년 철거되었다.
이로써 윤덕영이 건설했던 프랑스식 대저택의 주요 건물은 사라졌다.
다만 건물의 정문 기둥과 계단, 교량의 일부 흔적 등은 옥인동 주변에 남아 있다.
오늘날 벽수산장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당시 촬영된 사진과 건축도면 및 주변 유구를 통해 건물의 모습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돈을 처발라 지은 아방궁도 결국 불에 타고 철거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벽수산장의 역사적 의미는 단순히 친일파의 호화 저택이었다는 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건축과 서울의 도시변화, 광복 이후의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이기도 했다.
따라서 건축물의 문화재적 가치와 건물을 소유했던 윤덕영의 친일반민족행위는 구분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옥인동 윤씨가옥
소실을 위해 지은 한옥
윤덕영은 벽수산장 주변에 여러 한옥을 지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옥인동 윤씨가옥이다.
이 건물은 윤덕영이 자신의 소실을 위해 지은 한옥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시의 조사에 따르면 옥인동 윤씨가옥은 1919년 무렵 건립된 것으로 소개된다.
당시 건물은 화려한 장식과 고급스러운 목재, 궁중 건축에서 사용되는 요소 등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일반적인 민가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건축기술과 재력이 투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라가 망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된 상황에서 소실에게도 궁중 건축을 연상시키는 호화 한옥을 지어 준 것이다.
윤덕영의 경제적 규모를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순정효황후 생가로 잘못 알려지다
옥인동 윤씨가옥은 한때 순정효황후의 생가로 알려져 있었다.
이에 따라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적 조사에서 순정효황후의 생가가 아니라 윤덕영이 소실을 위해 지은 집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문화재 지정이 취소되었다.
이 사건은 역사적 건축물의 명칭과 유래를 조사할 때 단순한 전승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순정효황후가 살던 집인 줄 알았더니 실제로는 친일파 큰아버지가 소실에게 지어 준 집이었던 것이다.
다만 건물의 원래 소유주와 사용자가 누구였는지와 건축물 자체의 역사적 가치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남산골한옥마을의 복원 건물
현재 남산골한옥마을에는 옥인동 윤씨가옥의 모습을 재현한 건물이 있다.
원래는 옥인동의 건물을 이전하려 했으나 부재의 훼손이 심하여 기존 모습을 참고해 새로 조성한 것이다.
따라서 남산골한옥마을에 있는 건물을 윤덕영이 살던 원래 건물이 통째로 이전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한편 종로구 옥인동에도 원래의 윤씨가옥과 관련된 건축물이 남아 있다.
서울시는 2024년 해당 가옥을 정비해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사업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윤덕영과 관련된 건축물은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서울의 근대 건축문화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남아 있다.
박노수미술관과의 관계
윤덕영은 자신의 딸을 위해서도 옥인동에 별도의 저택을 지었다.
그 건물이 훗날 박노수미술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박노수미술관은 한국화가 박노수가 거주했던 집을 활용한 미술관이다.
건물은 서양식 요소와 한옥의 공간구성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특히 윤덕영이 옥인동 일대에 형성한 대규모 저택과 부동산의 일부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다만 현재의 박노수미술관이 윤덕영의 친일 행적을 기념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 광복 이후 새로운 소유자와 문화적 용도를 거치면서 시민들을 위한 미술관으로 변화한 사례이다.
친일파가 딸에게 지어 준 집이 오늘날에는 시민들이 방문하는 미술관이 된 것이다.
건축물의 역사와 그 소유자의 정치적 행적을 함께 설명할 필요가 있는 사례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중추원 고문
1925년 7월 윤덕영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자문기관이었다.
이 기관에는 대한제국의 전직 고위 관료와 조선귀족, 친일적인 유력 인물들이 다수 참여했다.
일본은 이들을 이용해 식민통치에 대한 협력을 확보하고 기존 지배층을 새로운 정치체제에 편입시키려 했다.
윤덕영 역시 이러한 기관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25년부터 1940년까지 약 15년 동안 중추원 고문으로 근무했다.
당시 고문에게는 매년 약 3,000원의 수당이 지급되었다.
일본 귀족 작위와 은사공채를 받은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일본 총독부 고문으로 매년 수천 원의 수당까지 받아먹은 것이다.
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그의 정치적·경제적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중추원 부의장
1940년 8월 윤덕영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당시 중추원에서 조선인이 오를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직책 가운데 하나였다.
윤덕영은 이미 6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여전히 식민통치 체제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망하기 불과 두 달 전에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나라를 팔아먹는 데 협력한 뒤 30년이 지나서도 일본 총독부에서 승진한 것이다.
친일 경력의 일관성만큼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기업과 경제활동
조선식산은행과 해동은행
윤덕영은 일제강점기 여러 금융기관과 기업의 경영에 참여했다.
1920년에는 조선식산은행 감사로 선출되었다.
조선식산은행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산업과 경제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금융기관이었다.
윤덕영은 1930년까지 감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에는 해동은행의 설립에도 참여했으며, 초대 취체역 사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해동은행의 사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활동은 윤덕영이 귀족 작위와 관직뿐 아니라 금융업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확보했음을 보여준다.
기업활동의 확대
윤덕영은 1920년대 여러 회사의 설립에 참여했다.
특히 일선신탁주식회사와 조선저축은행 등의 설립에 관여했다.
또한 경성방송국 창립총회에 참석해 취체역으로 선임되었다.
이는 그가 금융과 방송, 산업 관련 분야에서도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기업을 설립하거나 경영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윤덕영의 친일반민족행위는 한일병합 협력과 일본의 작위 수령, 식민통치 찬양 및 전쟁 지원활동 등을 중심으로 평가해야 한다.
백만 원 이상의 자산가
1933년 윤덕영은 재산 100만 원 이상을 보유한 대부호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100만 원은 일반적인 조선인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거액이었다.
특히 그는 서울 옥인동의 대규모 부동산뿐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기도 등 여러 지역에도 토지를 소유했다.
1929년에는 충청남도에 100정보 이상의 토지를 보유한 대지주로 기록되어 있다.
1937년에는 경기도 파주와 안성 등지에서도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한 인간이 일본 식민통치 아래에서 백만 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대부호가 된 것이다.
다만 윤덕영이 보유한 모든 재산이 직접적인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개별 토지와 자산의 취득 경위는 별도의 자료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이 수여한 귀족 작위와 은사공채, 여러 관직의 수당 및 식민지 경제체제에서의 기업활동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혜택을 누렸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부인 김복수의 친일 활동
애국금차회 회장
윤덕영의 부인 김복수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전쟁 지원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자료에서는 김복완(金福緩)이라는 이름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특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윤덕영 항목에서는 부인을 김복수(金福綏)로 소개하지만, 애국금차회 항목에서는 윤덕영의 부인을 김복완(金福緩)으로 기록한다.
따라서 두 표기의 정확한 관계와 한자 표기 차이는 원자료를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1937년 8월 20일 애국금차회가 조직되었다.
애국금차회는 조선귀족과 친일 고위 관료들의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친일 여성단체였다.
이 단체는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와 금반지 등 귀금속을 모아 헌납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윤덕영의 부인 김복완은 애국금차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남편은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해서 귀족이 되었고, 아내는 일본군을 위해 금비녀를 모으는 단체의 회장이 된 것이다.
이들 부부가 일본 제국의 지배체제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금비녀 헌납운동
애국금차회는 1937년 8월 20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결성식을 개최했다.
당시 참가자들은 금비녀 11개와 금반지 3개, 금귀고리 2개, 은비녀 1개 등을 헌납했다.
또한 현금 889원 90전을 모아 일본군에게 전달했다.
당시 일본은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확대하고 있었으며, 식민지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에 동원하려 했다.
애국금차회는 이러한 정책에 협력하는 조직이었다.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하자 조선의 친일 귀족 부인들이 금비녀와 금반지를 모아 일본군에게 바친 것이다.
그 가운데 윤덕영의 부인이 회장을 맡았다.
금차봉납도
당시 애국금차회의 귀금속 헌납 장면은 화가 김은호가 그린 「금차봉납도」라는 그림으로 남았다.
이 그림은 친일 여성 인사들이 일본군을 위해 귀금속을 헌납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선전과 관련된 자료로 활용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그림이 김은호와 윤덕영 사이의 친분관계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즉, 윤덕영의 가족은 일본의 전쟁 지원활동에 직접 참여했을 뿐 아니라 이를 시각적으로 선전하는 활동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중일전쟁 지원
일본군에 국방헌금을 기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려 했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한국인들에게 전쟁을 위한 기부금과 물자 제공, 노동력 동원 및 군사훈련에 참여하도록 요구했다.
윤덕영 역시 이러한 일본의 전쟁 지원정책에 협력했다.
1937년 9월 윤덕영은 친일 시국단체의 국방헌금 모금에 참여하여 500원을 기부했다.
당시 일본군에 전달된 국방헌금은 중국 침략전쟁의 수행을 지원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를 빼앗은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자 이번에는 그 일본군에게 돈까지 바친 것이다.
윤덕영의 친일 행적이 단순히 1910년 한일병합에 협력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다
윤덕영은 조선신궁에서 개최된 일본군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행사에도 참여했다.
특히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행사에서 조선귀족 대표로 활동했다.
무운장구란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래도록 무운이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당시 조선신궁은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과 신사참배를 강조하는 식민통치의 상징적인 시설이었다.
윤덕영은 이러한 행사에서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나라를 빼앗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전쟁을 벌이자 이번에는 그 일본군이 오래도록 잘 싸우기를 기원한 것이다.
그가 어느 국가의 군사적 이익을 지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북지황군위문단
1937년 말 윤덕영은 북중국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조직인 북지황군위문단을 조직했다.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과 조선귀족을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했다.
위문단은 1937년 12월부터 1938년 1월까지 중국 톈진과 베이징 등을 방문했다.
당시 일본군은 중국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며 침략전쟁을 확대하고 있었다.
윤덕영은 이러한 일본군을 찾아가 위문활동을 전개했다.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해서 귀족이 된 인간이, 이번에는 일본군을 응원하겠다고 중국 전선까지 찾아간 것이다.
이미 60대 중반이었지만 친일 활동에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지원병제도 찬양
1938년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지원병이라는 형식으로 입대하도록 하는 정책이었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병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특히 조선인들을 일본군의 전쟁 수행에 동원하려는 정책이 확대되었다.
윤덕영은 이러한 지원병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938년 2월 23일 《매일신보》에는 윤덕영의 「국민된 책임의 중대함을 통감」이라는 글이 실렸다.
그는 일본의 국민으로서 전쟁 수행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며 지원병제도 시행을 환영했다.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한 인간이 이제는 조선의 청년들도 일본군에 들어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자신은 일본의 귀족 작위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선의 청년들에게는 일본 제국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장했다.
이는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인력을 전쟁에 동원하는 과정에서 친일 지배층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1938년 윤덕영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일본의 전쟁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친일단체였다.
이 단체는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과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국민적 동원을 강조했다.
특히 조선인들이 일본의 황국신민이라는 인식을 가지도록 만드는 황국신민화 정책에 협력했다.
윤덕영은 이러한 단체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일본의 전시동원체제에 협력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시국대책조사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전시체제와 관련된 정책 논의에 참여했다.
일본이 나라를 빼앗을 때에도 협력하고, 일본이 전쟁을 벌일 때에도 협력하고, 조선인들을 일본의 신민으로 만들려고 할 때에도 협력했다.
정말이지 친일 경력만큼은 한결같은 인물이다.
조선유도연합회
1939년 10월 윤덕영은 조선유도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설립된 친일 유림단체였다.
이 단체는 유교의 전통적인 가치와 도덕질서를 강조하면서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지지했다.
특히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과 전쟁 지원을 유교적인 의무와 연결하려 했다.
윤덕영은 이러한 조직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원래 조선의 양반 가문 출신으로 유교교육을 받았으며,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를 역임했다.
그런데 말년에는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유림단체의 회장이 된 것이다.
조선의 유교적 충성을 배운 인간이 결국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라는 단체의 회장까지 됐다.
전통적인 유교의 충성 개념을 생각하면 상당히 모순적인 행적이었다.
매국노 추도회
1939년 11월 일본의 극우단체인 흑룡회는 한일병합과 관련된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당시 흑룡회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한반도 및 만주 진출을 지지했던 단체였다.
행사에서는 일본의 한국병합에 협력한 인물들을 추모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이 있었다.
윤덕영은 이러한 추도행사에 참석했다.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했던 인간이 다른 매국노들을 추모하는 행사에도 참석한 것이다.
자기들의 정치적 행적을 일본 제국의 공로로 기념하는 행사였다.
당시 일본은 한일병합에 협력한 인물들을 식민통치의 공로자로 평가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독립을 침탈하는 데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었다.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칙선의원 임명
1939년 12월 윤덕영은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귀족원은 당시 일본 제국의회의 상원에 해당하는 기관이었다.
칙선의원은 일본 천황의 명령으로 임명되는 의원이었다.
당시 윤덕영은 조선귀족으로서 상당히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박영효가 사망하면서 공석이 된 귀족원 의원 자리에 임명되었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했던 인간이 29년 뒤에는 일본 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것이다.
나라가 망한 뒤에도 그의 정치적 경력은 일본의 지배체제 속에서 계속 확대되었다.
전시총동원 정책 지지
윤덕영은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된 뒤 일본의 전시총동원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1939년 12월 19일 《매일신보》에는 「직책을 다할 각오」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그는 일본 제국의회의 의원으로서 전쟁 수행에 기여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당시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조선인들을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동원하려 했다.
윤덕영은 이러한 정책을 지지했다.
나라를 넘겨준 데 협력한 공로로 일본 귀족이 되었고, 그 귀족 신분을 발판으로 일본 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어 일본의 전쟁정책을 지지한 것이다.
그야말로 일본 제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출세한 인물이었다.
조선신궁과 일본 천황 찬양
윤덕영은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의 여러 행사에 참여했다.
조선신궁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설치한 신사로, 일본 천황과 관련된 제례를 통해 식민통치와 황국신민화를 선전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일본은 신사참배를 통해 조선인들이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요구했다.
윤덕영은 조선귀족 대표로서 이러한 행사에 여러 차례 참석했다.
1940년에는 일본의 기원 2600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식민통치 30주년 관련 행사에도 참여했다.
특히 1940년 9월 개최된 행사에서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역할을 맡았다.
1940년이면 이미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지고 있던 시기였는데, 이 인간은 여전히 일본 천황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윤덕영의 친일 행적이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망
1940년 10월 18일 사망했다.
당시 만 66세였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일본의 자작 작위와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등의 지위를 유지했다.
또한 여러 친일단체의 고위직을 맡았으며, 상당한 부동산과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윤덕영은 일본의 패전과 대한민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1873년 조선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황실의 외척으로 출세했고, 나라가 망하자 일본 귀족이 되어 막대한 부를 누리다가 일본 제국의회 의원으로 생을 마친 것이다.
그의 정치적 생애는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과 일제강점기의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협력한 경력으로 평가된다.
작위 승계
윤덕영이 사망한 뒤 일본의 자작 작위는 양손자 윤강로가 승계했다.
이로써 윤덕영이 일본에서 받은 귀족 작위는 다음 세대에 이어졌다.
일본의 조선귀족제도는 작위의 세습을 허용했으므로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
다만 작위를 승계했다는 사실과 후손 개인의 친일반민족행위는 구분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윤덕영의 친일반민족행위는 그가 직접 참여한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 협력에 근거해 판단해야 한다.
친일재산 환수
2007년 국가귀속 결정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윤덕영과 관련된 토지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당시 위원회는 민영휘와 민병석, 윤덕영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명의 재산에 관한 조사를 진행했다.
2007년 8월 13일 발표된 결정에는 총 156필지, 약 102만㎡의 토지가 포함되었다.
해당 토지의 당시 시가 총액은 약 257억 원으로 발표되었다.
윤덕영 역시 국가귀속 대상자로 포함되었다.
이는 윤덕영이 한일병합에 협력해 일본의 귀족 작위와 경제적 보상을 받은 인물이라는 사실과 관련된 조치였다.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한 대가로 확보한 재산의 문제가 광복 이후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국가적인 청산의 대상이 된 것이다.
다만 이 결정에 포함된 토지 전체가 윤덕영 한 사람의 재산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시 발표된 156필지와 257억 원은 여러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합산한 수치였다.
윤덕영 개인과 관련된 환수 재산의 범위는 개별 결정자료를 통해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친일재산 환수의 의미
친일재산 환수는 일제의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기 위한 제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관련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여러 친일 인물과 후손들이 소유한 재산의 취득 경위가 조사되었다.
윤덕영은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므로 관련 재산조사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친일재산에 해당하는지는 개별 재산의 취득 시기와 경위, 관련 법률의 요건 등을 통해 판단해야 한다.
따라서 윤덕영이 소유했던 모든 토지가 자동으로 국가귀속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평가
공식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윤덕영은 대한민국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특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권에는 윤덕영의 친일 행적을 조사한 결정이유서가 실려 있다.
주요 친일 행위는 다음과 같다.
- 1910년 한일병합을 결정하는 어전회의에서 병합에 적극적으로 협력
-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 수령
- 이왕직 찬시로 식민통치 아래의 황실 관련 업무 수행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부의장으로 활동
-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임명
- 일본의 식민통치와 전쟁정책을 찬양하는 언론활동
- 일본군을 위한 국방헌금 제공
- 일본군 위문단을 조직하여 중국 전선 방문
- 조선인 지원병제도 찬양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조선유도연합회 등 친일단체에서 활동
- 일본 천황의 권위와 식민통치를 선전하는 행사에 참여
이러한 행적은 윤덕영이 1910년 한일병합에 한 차례 협력한 인물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전반에 걸쳐 일본의 지배체제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황실 외척의 배신
윤덕영의 역사적 책임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황실의 외척이라는 지위다.
그는 순정효황후의 백부이자 순종의 측근이었다.
또한 시종원경으로서 황제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이 한일병합을 추진하자 이를 저지하기보다 일본의 요구에 협력했다.
황실의 권위를 보호해야 하는 사람이 오히려 황실이 속한 국가의 독립을 없애는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단순한 친일 관료가 아니라 황실 내부에서 국권 침탈에 협력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이완용과의 차이
이완용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대한제국 측 공식 서명자였다.
반면 윤덕영은 시종원경으로서 황실 내부에서 병합을 추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구체적인 책임은 다르다.
이완용은 조약의 공식적인 협상과 서명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었다.
윤덕영은 황제의 측근으로서 병합을 결정하는 어전회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완용이 나라를 넘기는 서명을 했다면, 윤덕영은 황제에게 그 서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결정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순정효황후의 백부라는 친족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정치적·도덕적인 책임이 더욱 크게 비판받는다.
벽수산장과 친일의 경제적 혜택
윤덕영은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다.
또한 이왕직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여러 직책을 맡고, 기업과 금융기관의 경영에 참여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확보했다.
그 결과 서울 옥인동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호화 저택 벽수산장을 지을 수 있었다.
이러한 행적은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일부 지배층이 식민통치 체제에서 상당한 경제적 혜택을 누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라가 사라지는 과정에 협력한 인간은 나라가 망한 뒤 오히려 서울 한복판에 아방궁을 짓고 살았다.
이러한 점에서 벽수산장은 윤덕영의 경제적 부와 친일 지배층의 특권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평가된다.
일본의 침략전쟁까지 지원
윤덕영의 친일 행적은 한일병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을 위한 국방헌금을 제공하고 북중국 전선의 일본군을 위문했다.
또한 조선인 지원병제도를 찬양하고 일본의 전시동원체제에 협력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단순히 일본의 군사적 압력 때문에 한 차례 병합에 협력했다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국권 피탈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일본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나라를 팔아먹는 데 협력한 것도 모자라,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까지 지원했으니 친일 행적이 평생 이어진 것이다.
부부의 친일 활동
윤덕영은 일본의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에 협력했으며, 부인 김복수 역시 애국금차회 회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애국금차회는 일본군을 위한 귀금속 헌납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일본의 전쟁정책에 협력한 지배층이 남성 관료뿐 아니라 그 가족과 여성단체를 통해서도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부라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친일반민족행위를 다른 사람에게 자동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윤덕영은 한일병합 협력과 식민통치 관련 정치활동으로, 부인은 애국금차회의 운영과 일본군 지원활동으로 각각 평가해야 한다.
주요 행적 정리
| 연도 | 주요 행적 |
|---|---|
| 1873년 | 12월 27일 한성부에서 출생 |
| 1894년 | 식년시 문과 급제 |
| 1895년 | 비서감 우비서랑 임명, 일본 방문 |
| 1896년 | 학부 참서관,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등 역임 |
| 1896년 7월 |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 기부 |
| 1897년 | 독립협회의 대한국경축회에 참석 |
| 1900년 | 법부 법무국장, 비서원경 등 역임 |
| 1901년 | 경기 관찰사와 황해도 관찰사 역임 |
| 1902년 | 철도원 부총재와 지계아문 부총재 역임 |
| 1903년 | 비서원경, 내장원 감독 등 역임 |
| 1906년 |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 |
| 1907년 | 황후궁대부와 태의원경 등 역임 |
| 1907년 10월 | 일본 훈1등 서보장 수령 |
| 1908년 | 시종원경 임명, 대동학회 등 관련 단체 활동 |
| 1909년 | 순종의 지방 순행 수행 |
| 1909년 10월 | 이토 히로부미 조문사로 다롄 방문 |
| 1909년 11월 | 장충단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참여 |
| 1910년 8월 22일 | 한일병합을 결정하는 마지막 어전회의에 참여 |
| 1910년 | 경술국적의 한 명으로 지목 |
| 1910년 10월 7일 | 일본의 자작 작위 수령 |
| 1910년 | 서울 옥인동 일대의 대규모 토지 확보 시작 |
| 1911년 1월 | 은사공채 5만 원 수령 |
| 1911년 | 이왕직 찬시 임명 |
| 1913년 무렵 | 벽수산장 건축 추진 |
| 1915년 | 조선물산공진회 관련 활동 |
| 1917년 | 순종의 일본 방문 수행 |
| 1919년 | 이은과 이방자의 혼인을 일선융화의 상징으로 찬양 |
| 1919년 | 고종의 국장 관련 업무 참여 |
| 1920년 | 조선식산은행 감사, 해동은행 사장 |
| 1924년 | 일본 훈1등 욱일대수장 수령 |
| 1925년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임명 |
| 1927년 | 옥인동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토지 소유 |
| 1933년 | 재산 100만 원 이상의 대부호로 기록 |
| 1937년 | 중일전쟁 관련 일본군 지원활동 |
| 1937년 | 부인 김복완이 애국금차회 회장으로 활동 |
| 1937~1938년 | 북지황군위문단 조직, 중국 전선의 일본군 위문 |
| 1938년 | 조선인 지원병제도 찬양 |
| 1938년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
| 1939년 | 일본군 지원 및 친일 유림단체 활동 |
| 1939년 10월 | 조선유도연합회 회장 |
| 1939년 12월 |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임명 |
| 1940년 8월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임명 |
| 1940년 9월 | 일본 천황 만세 봉창 관련 행사 참여 |
| 1940년 10월 18일 | 사망 |
| 1945년 | 광복 이후 벽수산장이 여러 정치·행정시설로 활용 |
| 1966년 | 벽수산장 화재 |
| 1973년 | 벽수산장 철거 |
| 2007년 | 윤덕영 관련 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 |
| 2024년 | 서울시가 옥인동 윤씨가옥 정비·공개사업 발표 |
여담
- 경술국적의 한 명이다. 정식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 본관은 해평 윤씨이며, 자는 중덕, 호는 벽수이다.
- 1873년 12월 27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는 윤철구, 할아버지는 윤용선이다.
- 동생은 윤택영으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이다.
-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였다. 즉, 순종의 황후와 직접적인 친족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 1896년에는 독립협회에 5원을 기부했다. 나중에 나라의 독립을 없애는 데 협력할 인간이 독립협회에 기부했던 것이다.
- 1897년 독립협회의 대한국경축회에도 참석했다.
- 경기 관찰사와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했으며, 철도원 부총재와 비서원경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 1906년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면서 황실 외척으로서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 190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
- 1908년 시종원경으로 임명되었다. 시종원경은 황제의 비서실장과 비슷한 지위에 있었다.
-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자 조문사로 중국 다롄에 파견되었다.
- 장충단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에 참석해 제문까지 낭독했다.
-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결정하는 어전회의에 참여했고, 병합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력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마폭에 숨기자 윤덕영이 이를 빼앗았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장면을 확인할 확실한 동시대 사료는 부족하다.
- 옥새 강탈 일화의 진위와 관계없이 윤덕영이 한일병합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대표는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윤덕영은 황실 측의 주요 협력자였다.
- 1910년 10월 7일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 1911년에는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다.
- 동생 윤택영은 후작 작위와 약 50만 4,000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형제가 나란히 일본 귀족이 됐지만 동생이 훨씬 많은 돈을 받았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매년 약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역임했다.
-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황제의 시종원경이었는데, 나라가 망한 뒤에는 일본 제국의회 의원이 됐다.
-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벽수산장이라는 호화 저택을 지었다.
- 1927년 당시 옥인동 소유 토지는 약 1만 9,467평으로, 동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이었다.
- 벽수산장의 중심 건물은 프랑스식 저택을 참고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 건물의 화려함 때문에 당시에는 아방궁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 나라가 망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서울 한복판의 동네 절반을 자기 땅으로 만들고 유럽식 아방궁을 지었다.
- 벽수산장은 광복 이후 여러 기관에서 사용되다가 1966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고, 1973년 철거되었다.
- 오늘날 종로구 옥인동에는 벽수산장과 관련된 정문 기둥과 계단 등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
- 윤덕영이 소실을 위해 지은 옥인동 윤씨가옥도 남아 있다.
- 옥인동 윤씨가옥은 한때 순정효황후의 생가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 남산골한옥마을에도 옥인동 윤씨가옥의 모습을 재현한 건물이 있다. 원래 건물을 그대로 이전한 것은 아니다.
- 박노수미술관으로 사용되는 건물 역시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집과 관련되어 있다.
- 1933년에는 재산 100만 원 이상의 대부호로 기록되어 있다.
- 부인 김복수는 김복완이라는 이름으로도 기록되며, 1937년 애국금차회 회장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 애국금차회는 일본군을 위해 금비녀와 금반지 등 귀금속을 모아 헌납했던 친일단체다.
- 남편은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하고, 부인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해 금비녀를 모았다.
-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에 국방헌금을 제공했다.
- 북지황군위문단을 조직해 중국 톈진과 베이징의 일본군을 위문했다.
- 1938년에는 조선인 지원병제도를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다.
-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조선유도연합회에서도 활동했다.
- 1939년에는 이완용과 송병준 등 친일 인물들을 추모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 1940년에도 일본 천황 만세를 외치는 공식 행사에 참여했다.
- 1940년 10월 18일 사망했다.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다.
- 2007년에는 윤덕영과 관련된 친일재산에 대한 국가귀속 결정이 내려졌다.
- 독립협회에 5원을 기부했던 인간이 한일병합에 협력하고, 일본에서 5만 원짜리 은사공채를 받은 뒤, 서울 서촌의 동네 절반을 소유하는 대부호가 되었다.
- 대한제국 황실의 외척이면서 나라를 지키지 않았고, 일본의 귀족이 된 뒤에는 일본군을 위해 돈을 바치고,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군에 들어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 윤덕영의 인생을 요약하면 황제의 가족으로 출세해서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하고, 그 대가로 일본 귀족이 되어 아방궁을 지은 뒤, 늙어서는 일본 제국의회 의원까지 해 먹은 인간이다.
관련 문서
- 을사오적
- 정미칠적
- 경술국적
- 경술국치
- 한일병합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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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복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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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차봉납도
- 조선신궁
- 친일재산 환수
- 친일파
- 친일반민족행위자
외부 링크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윤덕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애국금차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일병합조약
- 서울신문 -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에선 무슨 일이」
- 조선일보 -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
- 미국 국무부 역사국 - 1910년 한일병합조약 외교문서
- 서울특별시 - 「친일파 윤덕영의 윤씨가옥, 열린 공간으로 변신한다는데?」
- 연합뉴스 - 「여기가 친일파 집이라고요? 서울 곳곳에 불편문화유산」
- 한국일보 - 「1919년 지어진 옥인동 윤씨가옥 새 단장」
- 연합뉴스 - 「민영휘 등 친일파 재산 257억 국가귀속」
- 민족문제연구소 - 친일 미술과 애국금차회 관련 자료
- 매일신문 - 「적산, 누구나 욕했지만 누구나 탐냈던 그곳」
- 서울신문 - 「이분법 시대 회색 소시민」
- 한국일보 - 「친일재산 환수 시즌2」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자료 - 윤덕영
- 연합뉴스 - 옥인동 윤씨가옥의 역사와 친일문화유산 문제
- 《친일인명사전》 제2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윤덕영 결정이유서, 85~206쪽.
- 《한국통사》, 박은식.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매일신보》 관련 기사, 1910~1940년.
- 《조선총독부관보》 관련 기록.
- 김해경,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 정원의 조영 기법 해석」, 《서울학연구》 제62호, 2016.
- 《조선귀족열전》, 오무라 도모노조, 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