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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가산업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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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충남 아산국가산업단지 (포승·원정 · 고대·부곡 ·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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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이 완료된 단지뿐 아니라 산업단지계획이 승인되어 조성 중인 국가산업단지도 포함한다. 국가산업단지 후보지 단계의 사업은 제외한다.
※ 한국수출산업단지·반월특수지역 등 일부 국가산업단지는 여러 하위 단지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수출산업단지(韓國輸出産業團地)는 1960년대 대한민국의 수출산업 육성을 위해 서울특별시인천광역시에 단계적으로 조성된 국가산업단지다. 역사적으로 서울의 제1~3단지, 인천 부평의 제4단지, 인천 주안의 제5~6단지를 통틀어 가리키며, 대한민국의 초기 산업단지 개발과 수출 중심 제조업의 발전을 설명할 때 중요한 사례로 다뤄진다.[1]

1963년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설립되고 1964년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이 제정되면서 사업이 본격화됐다. 1965년 서울 구로동에서 제1단지 조성이 시작됐으며, 이후 서울과 인천에 모두 여섯 개 단지가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섬유·봉제·가발·전기전자 등 노동집약적인 제조업을 중심으로 수출상품을 생산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기계·금속·전자와 지식기반산업 등으로 산업구조가 변화했다.[2]

현재는 역사적인 여섯 단지가 하나의 이름으로만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부평국가산업단지, 주안국가산업단지로 구분되어 관리·소개된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의 국가산업단지 목록에서도 서울 지역은 한국수출(서울), 인천 지역은 한국수출(부평·주안)으로 구분된다.[3]

따라서 이 문서는 각 단지의 공장과 입주기업을 개별적으로 소개하기보다는 한국수출산업단지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개발사업의 배경과 전체 구성, 산업구조의 변화, 역사적 의미를 설명한다. 각 지역의 현황과 교통·입주기업 등 자세한 내용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부평국가산업단지, 주안국가산업단지 문서를 참고할 것.

개요

하나의 공단이 아니라 여섯 개 단지

한국수출산업단지는 특정한 한 지역에 조성된 단일 공업단지가 아니다. 서울의 구로·가산 일대와 인천의 부평·주안 일대에 걸쳐 여러 시기에 만들어진 여섯 개 단지를 하나의 개발·관리체계로 묶었던 산업단지다.

역사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분 지역 현재 연결되는 산업단지 준공 시기
제1단지 서울 구로동 서울디지털산업단지 1967년 4월
제2단지 서울 가리봉동 일대, 현재의 금천구 가산동 일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1968년 6월
제3단지 서울 가리봉동 일대, 현재의 금천구 가산동 일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1973년 11월
제4단지 인천 부평 일대 부평국가산업단지 1969년 10월
제5단지 인천 주안·가좌 일대 주안국가산업단지 1973년 7월
제6단지 인천 주안·가좌 일대 주안국가산업단지 1974년 11월

[1][2]

여기서 준공 시기는 각 단지의 조성공사가 완료된 시점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법적인 지정, 공사 착수, 일부 공장의 가동, 준공식은 서로 다른 날짜일 수 있다. 특히 제1단지는 1964년부터 개발이 구체화되고 1965년 기공식이 열렸으며, 1967년에 준공식을 개최했다.

또한 당시의 지명과 현재의 행정구역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서울 제2·3단지가 개발되던 시기에는 오늘날의 금천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고, 제3단지의 초기 개발범위에는 당시 경기도 광명군 철산리 일대도 관련되어 있었다.[4]

서울에 3개, 인천에 3개. 한국수출산업단지라는 이름은 이 여섯 개 단지를 연결하는 역사적인 상위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왜 서울과 인천에 만들었는가?

1960년대 대한민국은 수출상품을 생산할 공장과 설비, 자본과 기술이 충분하지 않았다. 정부는 수출을 확대하기 위해 제조업체가 한곳에 모여 생산하고 원료와 제품을 운송할 수 있는 산업단지를 조성하려 했다.

초기 입지로 서울과 인천이 선택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서울에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쉬웠고 기업·금융·행정기능이 집중되어 있었다. 인천에는 인천항이 있어 수입 원료의 반입과 수출상품의 선적에 유리했으며,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도로·철도망도 활용할 수 있었다.

국가기록원은 초기 수출산업단지 개발에서 재일교포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고 당시 국내에서 비교적 풍부했던 노동력을 활용하려 했다고 설명한다.[5]

공장을 전국에 흩어놓기보다 서울과 인천에 집중하면 공장용지와 기반시설을 조성하고 기업을 유치하는 데 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이후 입주 수요가 증가하면서 서울의 제1단지가 제2·3단지로 확대되고 인천의 제4~6단지도 개발됐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산업집적의 초기 사례다. 가까운 지역에 여러 제조업체가 모이면 부품과 원자재를 조달하고 인력을 확보하며 물류시설을 공동으로 이용하기가 쉬워진다.

조성 배경과 역사

1960년대 수출산업 육성

한국수출산업단지가 계획된 시기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던 1960년대 초반이다.

당시 정부는 외화 획득과 제조업 육성을 위해 수출 확대를 추진했다. 하지만 국내 기업의 자본과 생산설비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출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업용지와 기반시설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했다.

1963년 10월 26일 주식회사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출범했다. 이 조직은 수출산업을 위한 공업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했으며, 이후 사단법인 한국수출산업공단으로 개편됐다.[2]

1964년 9월 14일에는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이 제정·공포됐다. 이 법은 수출용 공업단지의 개발을 추진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 됐다.[6]

한국수출산업단지는 국가가 공업용지를 계획적으로 조성하고 기업을 유치해 수출상품 생산을 지원한 초기 사례로, 이후 대한민국의 산업단지 개발제도가 확대되는 데 중요한 선례가 됐다.

다만 한국수출산업단지가 대한민국 최초의 모든 산업단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초에는 이미 울산공업지구 등의 개발도 추진되고 있었다. 한국수출산업단지의 의미는 수도권에서 수출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조성된 초기의 계획적 공업단지라는 점에서 이해해야 한다.[5]

서울에서 시작해 인천으로 확대되다

첫 사업은 서울 구로동의 제1단지였다.

1965년 3월 제1단지 기공식이 열렸고, 1967년 4월 준공식이 개최됐다. 초기에는 재일교포 기업의 투자와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유치가 중요한 목표였다.[4]

이후 공장용지 수요가 증가하면서 서울의 제2단지와 제3단지가 조성됐다. 제1단지에서는 섬유·봉제와 전기전자, 정밀기기 등의 업종이 활동했으며, 제2·3단지에서도 봉제와 전자·전기 등 노동집약적 제조업의 비중이 컸다.

인천에서는 별도로 추진되던 인천수출산업공단의 개발이 한국수출산업단지 체계로 연결됐다.

인천의 제4단지는 1969년 준공됐으며, 1971년 11월 인천수출산업공단이 한국수출산업공단에 흡수·통합되면서 제4·5단지가 통합 관리체계에 편입됐다. 이후 제6단지까지 조성되면서 서울과 인천에 걸친 여섯 개 단지의 체계가 완성됐다.[2]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서울의 제1~3단지를 그대로 인천까지 확장한 단순한 연속공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인천에서는 별도로 진행되던 공업단지 개발사업이 있었고, 이후 관리조직과 단지체계가 통합됐다.

1970~1980년대의 성장

한국수출산업단지에는 섬유·봉제·가발과 전기전자, 금속·기계 등 여러 제조업체가 입주했다. 이들 기업은 국내에서 생산한 상품을 해외로 판매하며 외화를 획득하는 역할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구로공단 제1단지의 초기 입주기업은 섬유·봉제와 전기전자, 정밀기기·시계제조 등의 업종을 중심으로 구성됐으며, 제2·3단지에서도 섬유·봉제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7]

1980년대에는 전자·금속·기계 등으로 업종이 다양해졌고, 서울과 인천의 공단들은 수도권 제조업과 수출산업의 주요 집적지로 기능했다.

다만 이 시기의 성장을 설명할 때 수출액 증가와 노동자의 생활수준 향상을 같은 의미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산업단지의 생산과 수출이 증가하는 동안에도 많은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과 낮은 임금, 열악한 작업환경 등의 문제를 겪었다. 이러한 조건은 이후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운동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7]

한국산업단지공단으로 이어지다

초기의 한국수출산업공단은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입주기업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은 조직이었다. 이후 전국에 여러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각 지역의 산업단지를 관리하는 공단도 늘어났다.

1997년 1월 10일에는 기존의 여러 국가산업단지 관리공단을 통합해 한국산업단지공단이 출범했다.[2]

따라서 한국수출산업단지한국수출산업공단은 구분해야 한다.

  • 한국수출산업단지 : 서울과 인천에 조성된 산업단지들을 가리키는 명칭.
  • 한국수출산업공단 : 해당 산업단지의 조성·관리를 추진했던 조직.
  • 한국산업단지공단 : 1997년 출범한 국가산업단지 관리기관으로, 한국수출산업공단의 역사적 기능을 이어받아 전국의 여러 산업단지를 관리한다.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리기 쉽지만 공장이 모여 있는 땅과 그 공단을 관리하는 기관은 다른 개념이다.

구성 산업단지

서울 제1~3단지

서울에 조성된 제1~3단지는 일반적으로 구로공단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초기에는 섬유·봉제·가발과 전기전자 등의 수출 제조업이 중심이었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 산업구조가 변화하면서 전통적인 제조업체의 이전과 폐업, 새로운 산업의 유입이 진행됐다.

1990년대에는 연구개발과 정보통신 등 지식기반산업의 입주를 확대하기 위한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졌고, 2000년 구로공단의 명칭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경됐다.[7]

오늘날 서울 제1~3단지에는 정보통신과 소프트웨어·연구개발, 전기전자와 제조업 등 다양한 업종이 입주해 있다. 이 지역은 G밸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과거의 공장부지에는 여러 지식산업센터와 업무시설이 들어서 있다.

현재의 입주기업과 교통·산업구조, 지역별 특징에 관해서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문서를 참고할 것.

인천 제4단지

인천의 제4단지는 오늘날 부평국가산업단지로 불리는 지역이다.

서울의 수출산업단지 개발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됐으며, 1969년 준공됐다. 이후 1971년 한국수출산업공단의 통합 관리체계에 편입됐다.[1]

부평지역은 인천항과 수도권의 교통망을 활용할 수 있는 제조업 입지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제조업체의 유치가 중요한 목표였고, 이후 전기전자와 기계·금속 등 여러 업종이 활동했다.

현재는 기존 공업시설의 노후화와 입주기업의 업종 변화에 대응하는 산업단지 재생·구조고도화 사업 등도 추진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부평국가산업단지 문서를 참고할 것.

인천 제5~6단지

인천의 제5·6단지는 오늘날 주안국가산업단지로 묶어 설명하는 지역이다.

제5단지는 기존의 폐염전 지역을 매립해 조성됐으며 1973년 준공됐다. 제6단지는 비철금속 관련 공업단지 부지를 편입해 개발됐고 1974년 준공됐다.[1]

이 지역은 인천 서구 가좌동과 주안 일대에 걸쳐 있으며, 공장과 물류시설·주거지역이 가까이 자리한 도시형 산업지역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오늘날의 주안산업단지는 기계·금속과 전기전자 등 여러 제조업체가 입주한 산업단지로 운영되고 있다.

주안이라는 이름 때문에 인천의 옛 남구, 현재의 미추홀구 주안동에만 위치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산업단지의 범위는 인천 서구 가좌동 등 여러 지역에 걸쳐 있다.[8]

자세한 내용은 주안국가산업단지 문서를 참고할 것.

한국수출산업단지의 산업구조

초기에는 경공업과 수출 제조업

한국수출산업단지의 초기 산업구조를 대표하는 업종은 섬유·봉제·가발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이었다.

이들 업종은 대규모의 중화학공업 설비를 필요로 하는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었으며, 당시 국내에서 확보할 수 있었던 노동력을 활용해 수출상품을 생산하는 방식과 연결됐다.

전기전자와 정밀기기 등의 제조업도 초기부터 입주했다. 따라서 한국수출산업단지를 단순히 옷과 가발만 만들던 곳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노동집약적 경공업이 초기 발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사실이다.[7]

공단 안에는 완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뿐 아니라 원자재와 부품을 공급하거나 제품의 일부 공정을 맡는 업체들도 자리했다. 가까운 지역에 여러 기업이 모이면 물류와 인력, 생산설비를 활용하기 쉬웠다는 점에서 산업단지의 집적효과가 나타났다.

산업구조의 고도화

1980년대 후반부터는 임금과 지가의 상승, 산업구조 변화와 해외 생산기지의 확대 등으로 초기의 노동집약적 제조업 중심 구조가 약해졌다.

특히 서울의 구로공단에서는 전통적인 제조업체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폐업하는 경우가 증가했고, 기존의 공업지역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정부와 관리기관은 업종 제한을 완화하고 정보통신·연구개발 등 새로운 산업의 입주를 유도했다. 서울의 제1~3단지는 2000년대 이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화하면서 지식산업센터와 업무시설이 밀집한 지역으로 발전했다.[7]

인천의 부평·주안지역에서도 산업구조가 변화했지만, 서울과 똑같은 방식으로 모두 정보통신 업무단지로 바뀐 것은 아니다. 기존 제조업체와 새로운 기업이 공존하며, 산업시설의 노후화와 생산환경 개선 등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따라서 한국수출산업단지 전체를 두고 “옛날 봉제공장이 전부 IT 회사로 바뀌었다”고 설명하면 서울과 인천의 서로 다른 변화를 놓치게 된다.

노동과 산업도시의 형성

공장뿐 아니라 노동자가 모인 공간

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공장 건물을 세우는 일이 아니었다.

전국에서 노동자들이 서울과 인천으로 이동하면서 공단 주변에는 주거지역과 상점, 식당과 교통시설이 발달했다. 공장 출퇴근에 맞춰 지역의 생활권이 형성됐고, 공업지역 주변의 인구와 도시공간도 변화했다.

특히 서울의 구로공단은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노동자들이 집중된 지역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여성 노동자가 많았으며, 섬유·봉제와 전자업체 등에서 근무했다.[7]

산업단지의 역사는 공장의 생산량과 수출액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공단에 다니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생활과 주거, 임금과 노동조건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노동운동과 사회적 갈등

한국수출산업단지의 성장 과정에서는 노동자들의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노동조합 결성 요구도 나타났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은 구로공단에서 1970년대부터 체불임금과 노동조합 결성 등을 둘러싼 노동쟁의가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이후 1985년에는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간부의 구속에 항의해 여러 사업장의 노동조합이 공동으로 파업한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7]

이는 구로공단을 비롯한 당시 산업지역이 수출 제조업의 집적지인 동시에 노동자의 권리와 기업의 생산활동, 정부의 노동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나타난 공간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1985년 구로동맹파업이 한국수출산업단지의 여섯 개 단지 전체에서 동시에 진행됐다는 뜻은 아니다. 해당 사건은 주로 서울 구로공단의 노동조합들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관련 사건과 노동자들의 생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구로동맹파업서울디지털산업단지 문서를 참고할 것.

현재의 관리체계

서울과 인천은 구분해서 관리된다

한국수출산업단지라는 이름은 역사적으로 서울과 인천의 여섯 개 단지를 포괄하지만, 오늘날의 관리계획과 통계에서는 서울과 인천의 단지들을 구분해 다루는 경우가 많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은 관리대상 국가산업단지 목록에서 한국수출(서울)한국수출(부평·주안)을 별도로 표기한다.[3]

또한 2025년 고시된 인천 지역 관리기본계획은 부평과 주안의 위치·입주업종·용도별 구획 등을 다루고 있다.[8]

이 때문에 현재의 산업단지 면적이나 입주기업 수, 생산액과 수출액을 확인할 때에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수치인지, 부평·주안의 수치인지, 세 지역을 합산한 수치인지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입주기업 수를 한국수출산업단지 전체의 입주기업 수처럼 소개하면 인천의 기업들이 빠지게 된다. 반대로 과거 여섯 개 단지의 면적을 현재의 단지별 관리면적과 아무 설명 없이 비교하면 개발·관리구역의 변경과 집계기준 차이를 놓칠 수 있다.

각각 다른 방향으로 변화한 산업단지

현재 한국수출산업단지의 세 지역은 같은 역사에서 출발했지만 서로 다른 산업적 특성을 가진다.

  • 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기존 제조업에 정보통신과 소프트웨어·연구개발 등 지식기반산업이 결합한 도시형 산업단지로 변화했다.
  • 부평산업단지는 기존 제조업의 생산기반을 유지하면서 산업시설 개선과 업종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 주안산업단지는 도시 내부의 제조업 집적지로서 공장과 기반시설의 노후화, 산업구조 고도화 등을 주요 과제로 다루고 있다.

서울과 인천 모두 1960~1970년대의 수출산업 육성이라는 공통된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시기에 같은 업종으로 변화한 것은 아니다.

출발점은 같은 한국수출산업단지였지만, 반세기가 지나면서 각 지역이 서로 다른 산업단지로 성장한 셈이다.

역사적 의미

한국수출산업단지는 대한민국에서 산업단지를 활용해 제조업과 수출을 육성하려 했던 초기의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는 공업용지를 계획적으로 마련하고 기반시설을 조성했으며, 기업은 그 안에서 수출상품을 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원자재·부품·노동력·물류시설이 가까운 지역에 모이는 산업집적의 효과가 나타났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전국의 산업단지 개발에도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에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됐고, 1970년대 이후에는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 온산국가산업단지, 창원국가산업단지, 구미국가산업단지 등 중화학공업과 전자·기계산업을 중심으로 한 여러 산업단지가 성장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4년 산업단지 출범 60주년을 기념하면서 1964년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의 제정과 구로수출공업단지 조성을 대한민국 산업단지 역사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소개했다.[9]

동시에 한국수출산업단지의 역사는 산업화의 성과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발생한 장시간 노동과 낮은 임금, 노동조합 활동을 둘러싼 갈등, 공장 주변의 주거·생활환경 문제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산업단지를 단순히 수출을 많이 해서 경제가 발전한 곳 또는 노동환경이 열악했던 옛 공단이라는 한 문장으로만 설명하면 전체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서울의 봉제·전자공장과 인천의 제조업단지에서 시작된 수출산업이 훗날 서로 다른 형태의 산업지역으로 변화했다는 점이 한국수출산업단지를 하나의 포괄적인 개념으로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여담

  • 한국수출산업단지는 하나의 연속된 공단이 아니라 서울과 인천에 조성된 여섯 개 단지를 포괄하는 역사적인 명칭이다.
  • 서울의 제1~3단지는 현재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어진다.
  • 인천의 제4단지는 부평국가산업단지로 알려져 있다.
  • 인천의 제5·6단지는 주안국가산업단지로 묶어 설명한다.
  • 1963년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설립됐다.
  • 1964년 9월 14일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이 제정됐다.
  • 1965년 서울 구로동에서 제1단지 조성이 시작됐다.
  • 제1단지는 1967년 4월 준공됐다.
  • 인천에서는 별도로 추진되던 인천수출산업공단이 1971년 한국수출산업공단에 흡수·통합됐다.
  • 마지막으로 조성된 제6단지는 1974년 준공됐다.
  • 초기에는 섬유·봉제·가발과 전기전자 등 노동집약적인 수출 제조업이 중심이었다.
  • 당시 공장들은 수출상품의 생산뿐 아니라 서울·인천으로 유입된 노동자들의 생활권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 구로공단에서는 1985년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 다만 여섯 개 단지 전체가 같은 파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 1997년 여러 산업단지 관리공단이 통합되면서 현재의 한국산업단지공단이 출범했다.
  • 2000년 구로공단의 명칭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경됐다.
  • 그렇다고 부평과 주안의 산업단지까지 전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뀐 것은 아니다.
  • 현재의 한국산업단지공단 관리대상 목록에서는 한국수출(서울)과 한국수출(부평·주안)을 구분한다.
  • 역사적 산업단지 명칭인 한국수출산업단지와 관리기관의 옛 이름인 한국수출산업공단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 전국의 모든 수출기업이 입주한 산업단지를 한국수출산업단지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다. 특정한 서울·인천의 단지들을 가리키는 고유명칭이다.
  • “한국수출산업단지 어디로 가면 되나요?”라고 물으면 서울 구로인지, 인천 부평인지, 주안인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 각 지역의 현재 모습은 상당히 달라졌다. 같은 이름으로 출발했다고 지금도 전부 가발과 봉제공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