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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1905년 · 5명
군부대신
학부대신
외부대신
내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을사삼흉 1905년 · 3명
궁내부대신
탁지부대신
법부대신
정미칠적 1907년 · 7명
군부대신
내각총리대신
탁지부대신
학부대신
법부대신
내부대신
농상공부대신
경술국적 1910년 · 8명
궁내부대신
승녕부총관
시종원경
친위부장관 · 시종무관장
내각총리대신
탁지부대신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고영희
Go Yeong-hui
국적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조선
출생지조선 한성부
본관제주 고씨
직업외교관, 관료, 정치인, 친일파
관련 사건정미7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한일병합조약
추가 정보
사망1916년 1월 25일
아들고희경
아버지고진풍(高鎭豊)
자자중(子中)
작위일본 제국 자작(子爵)
작위 수여1910년 10월 7일
주요 관직주일특명전권공사, 탁지부대신, 법부대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주요 행적고종 강제 퇴위 협력, 정미7조약 체결 협력, 한일병합 추진, 경술국치 협력, 식민통치 찬양
출생1849년 11월 2일
친일 포상자작 작위, 은사공채 10만 원
한자 이름高永喜

개요

고영희(高永喜, 1849년 11월 2일 ~ 1916년 1월 25일)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자 고위 관료였으며, 일본의 국권 침탈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중(子中)이다. 일본어에 능통한 역관 출신으로 일본에 파견된 외교사절단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주일특명전권공사와 탁지부대신, 법부대신 등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특히 1907년 이완용 내각의 탁지부대신으로서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으며, 1910년에는 한일병합을 결정한 어전회의에 참여하여 순종에게 병합조약 체결을 수용하도록 압박했다.

이 때문에 고영희는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되는 대표적인 매국노로 분류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1916년 사망할 때까지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일본에 나라를 넘기는 데 협력하고, 나라가 망한 뒤에는 일본이 준 귀족 작위와 돈을 받아먹으며 식민통치를 찬양한 매국노 새끼다.

특히 이 인간이 황당한 이유는 처음부터 일본의 식민통치를 주장했던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영희는 젊은 시절 일본어를 배워 외교관으로 활동했고, 갑오개혁에 참여했으며, 1896년에는 독립협회 창립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이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보다는 일본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

1909년에는 일본 총리대신을 직접 만나 자신들이 구상한 한일병합안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독립협회에도 참여했던 인간이 나중에는 일본을 찾아가 나라를 어떻게 병합하면 좋을지 제안한 것이다.

그야말로 개화파 관료에서 매국노로 전직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고영희는 정식 을사오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의 다섯 대신을 가리킨다.

고영희는 1907년 정미칠적과 1910년 경술국적에 포함된 인물이다.

을사오적 명단에 이름이 없다고 면죄부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새끼는 1907년과 1910년에 각각 나라를 팔아먹는 과정에 협력했으니 오히려 매국 경력이 두 번이나 기록된 셈이다.

생애

출생과 가문

1849년 11월 2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 고씨이며, 아버지는 역관 고진풍(高鎭豊)이다.

고진풍은 중국어 통역을 담당했던 역관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역관은 외국과의 외교 및 통상업무에서 통역을 담당하던 전문 기술관이었다.

특히 역관들은 외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정치와 경제, 사회에 관한 정보를 비교적 빨리 접할 수 있었다.

일부 역관들은 무역과 외교활동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부를 축적하거나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고영희 역시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외국어와 외교업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어 능력을 바탕으로 외교관으로 진출했다.

역과 급제

1867년 고영희는 역과(譯科)에 급제했다.

역과는 조선시대에 외국어 통역관을 선발하기 위해 실시한 국가시험이었다.

고영희는 특히 일본어를 담당하는 왜학(倭學) 분야에 능통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 오랫동안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적인 국가로 변화하면서 새로운 외교적 환경이 형성되고 있었다.

고영희는 일본어 능력을 인정받아 외교사절단의 통역과 실무업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냥 외국어 잘해서 출세한 인물이었다.

외국어를 배우고 국가의 외교업무에 참여하는 것 자체는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문제는 나중에 그 능력을 어느 나라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느냐는 것이다.

1876년 수신사 수행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군사적 압력 속에서 체결된 불평등조약으로, 조선의 항구를 개방하고 일본인에게 여러 특권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약 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의 정치와 사회, 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했다.

당시 수신사는 김기수였으며, 고영희는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는 수행원으로 참여했다.

이때 고영희는 일본을 방문하여 메이지 유신 이후 변화하고 있던 일본의 모습을 직접 관찰했다.

특히 일본의 근대적인 군사시설과 행정제도, 교통과 통신시설 등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

이 경험은 이후 고영희가 대일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영희의 사진 가운데에는 이 시기 수신사 수행원으로 촬영된 사진도 있다.

당시에는 아직 젊은 외교 실무자였지만, 훗날 일본의 한반도 병합에 협력하는 고위 관료가 된다는 점에서 그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원산항 개항 업무

1880년 고영희는 원산항 개항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다.

원산은 일본과의 통상관계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개항된 항구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개항장에서 일본인 상인과 외교관들의 활동을 관리하고, 통상과 치안에 관한 여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고영희는 일본어 능력을 바탕으로 이러한 실무에 참여했다.

특히 외국인과의 교섭과 행정절차를 담당하는 과정에서 외교 분야의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일본의 상업적 진출이 확대되면서 조선의 경제적 자주권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항장의 행정과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관료들의 역할은 중요했다.

신사유람단

1881년 고영희는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신사유람단은 조선 정부가 일본의 근대적인 행정과 산업, 군사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시찰단이었다.

박정양, 홍영식, 어윤중, 엄세영 등 여러 관료들이 조사로 참여했으며, 이들을 수행하는 통역관과 실무자들이 함께 파견되었다.

고영희는 홍영식의 수행원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군사제도를 조사했다.

당시 홍영식이 담당한 분야는 일본 육군의 조직과 운영이었다.

시찰단은 육군성과 참모본부를 비롯한 일본의 군사기관을 조사하고, 징병제도와 군대 편성 및 훈련방식 등을 살펴보았다.

고영희 역시 이 과정에서 일본의 군사제도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

당시 조선이 이러한 시찰단을 파견한 이유는 외국의 제도를 조사해 국가의 근대화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후 고영희는 일본의 군사력 확대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협력하는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일본 군대를 조사하러 갔던 인물이 나중에는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없애는 데 협력한 것이다.

일본 공사관과의 관계

1882년 고영희는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임시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임오군란이 발생하면서 일본과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임오군란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공격받았으며, 일본은 이를 구실로 조선에 배상과 여러 외교적 요구를 제기했다.

고영희는 이러한 정치적 환경에서 일본 공사관과 관련된 통역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인천항 개항에 따른 조계 설정 업무에도 참여했다.

일본어 능력과 대일외교 경험이 축적되면서 고영희는 외교 분야의 전문 관료로 성장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갑신정변 이후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급진개화파 인물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 정치체제를 개혁하려 했지만,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면서 정변은 실패했다.

정변 이후 일본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던 개화파 관료들은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고영희 역시 이 과정에서 중앙의 주요 관직에서 밀려났다.

그는 간성군과 삭녕군, 고양군 등에서 지방관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간성군수로 재임하면서 지역의 지리와 행정, 풍속 등을 정리한 《간성군읍지》를 편찬했다.

이 책은 당시 간성 지역의 역사와 행정, 인문지리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이다.

현재 전해지는 필사본은 국립적인 역사자료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중앙 관직 복귀

1886년 고영희는 중앙 관직으로 복귀했다.

그는 기기국 방판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여러 외교 및 행정 관련 직책을 맡았다.

기기국은 근대적인 군수품과 기계를 생산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이었다.

당시 조선은 외국의 군사적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무기와 군사기술을 도입하고 근대적인 군대를 양성하려 했다.

고영희는 이러한 제도 개편 과정에 관여했다.

그러나 1890년대에 들어 일본과 청나라 사이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조선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갑오개혁 참여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했으며, 조선 정부에서는 기존의 행정과 신분제도, 재정 및 군사체제를 개편하는 갑오개혁이 추진되었다.

고영희는 학무아문 참의와 협판 등을 역임하면서 개혁에 참여했다.

또한 의화군 이강을 수행하여 일본을 방문했다.

1895년에는 학무아문 협판과 내부 참의, 농상아문 협판 등 여러 주요 관직을 맡았다.

그는 일본의 정치와 행정제도에 익숙했으므로 근대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활용될 수 있었다.

특히 학부의 초대 대신은 박정양이었으며, 고영희는 초대 협판을 맡았다.

여기서 협판은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관직이었다.

즉, 고영희는 대한제국 이전부터 정부의 고위 행정관료로 성장하고 있었다.

다만 갑오개혁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모든 활동을 처음부터 매국행위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근대적인 행정과 교육제도의 도입은 국가의 발전을 위한 정책이라는 성격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된 상황에서 일본에 협력했다는 점이다.

주일특명전권공사

일본 외교에 능통했던 관료

1895년 고영희는 주일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었다.

주일특명전권공사는 오늘날의 주일대사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고영희는 일본에서 근무하면서 양국 사이의 외교문제를 담당했다.

그러나 약 3개월 뒤 공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농상공부 협판과 외부 협판, 탁지부 협판, 한성부 판윤, 양지아문 총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903년에는 다시 주일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고영희는 두 차례 주일공사를 역임할 정도로 일본과의 외교업무에 경험이 많은 관료였다.

일본의 정치와 외교, 군사제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력은 그가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행적을 평가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일본이 대한제국에 어떤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외교관에서 친일 관료로

고영희의 초기 대일외교 활동은 일본의 근대적인 제도를 조사하고 양국의 외교관계를 관리하는 업무였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국정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영희는 일본의 정책에 협력하는 정치적 선택을 했다.

특히 1907년 이완용 내각의 탁지부대신으로 임명된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외교관으로 출세한 인간이 결국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의 편에 서서 자기 나라의 내정권까지 넘기는 데 협력한 것이다.

독립협회 창립 참여

고영희의 생애에서 상당히 의외인 부분은 1896년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서재필 등의 주도로 설립된 근대적인 정치·사회단체였다.

처음에는 독립문 건립과 국민 계몽사업을 추진했으며, 이후 민권 신장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단체로 발전했다.

고영희는 독립협회의 발기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독립협회에는 안경수, 이완용, 김가진 등 정부의 개화파 관료들이 참여했다.

독립협회가 설립 초기부터 반정부적인 정치조직으로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기에는 왕실과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종속적 외교관계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따라서 고영희가 창립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이후 독립협회의 민권운동과 정치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1896년에는 자주독립을 표방하던 단체의 설립에 참여한 관료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리고 십여 년 뒤에는 일본을 찾아가 자기 나라를 어떻게 병합하면 좋을지 제안하는 인간이 되었다.

독립협회 발기인에서 경술국적으로 이어진 경력 변화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참고로 독립협회의 초대 위원장이었던 이완용 역시 이후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즉, 독립협회의 초기 활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이후의 친일 행적을 정당화하거나 없애 주는 것은 아니다.

을사늑약 이후

1905년 11월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과 헌병을 동원해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했으며, 일부 대신들이 조약 체결에 찬성했다.

이때 찬성한 다섯 대신이 을사오적이다.

그러나 고영희는 을사오적에 포함되지 않는다.

당시 고영희는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 대신 가운데 한 명이 아니었으며, 정식으로 매국오적이라고 불린 인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을사늑약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내정권까지 장악하려 하자 고영희는 이러한 정책에 협력했다.

1907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탁지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일본의 내정권 침탈과 고종의 강제 퇴위에 참여했다.

을사오적에는 이름이 없었지만, 일본이 다음 단계로 나라를 팔아먹을 사람을 찾았을 때는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당시 고영희는 고위 관료로서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의 정책에 협력하는 것은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탁지부대신

이완용 내각에 참여

1907년 5월 고영희는 이완용 내각의 탁지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탁지부는 대한제국의 재정을 담당하는 중앙 행정기관이었다.

탁지부대신은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국가의 예산과 세금, 재정 운영에 관한 주요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은 이미 일본의 강한 간섭을 받고 있었다.

일본은 1904년부터 재정고문을 파견하고 대한제국의 재정제도를 개편하면서 국가의 재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특히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는 대한제국의 화폐제도와 금융제도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탁지부대신의 역할은 중요했다.

정부가 외국의 간섭에 맞서 독자적인 재정권을 지킬 수 있는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영희는 일본에 협력하는 이완용 내각에 참여해 국권 침탈에 동조했다.

나라의 살림을 책임지는 재정 책임자가 그 나라의 정치적·경제적 주권을 침략국에 넘기는 데 협력한 것이다.

1907년 장훈학교 설립

고영희는 1907년 2월 장훈학교를 설립하고 같은 해 4월 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근대적인 교육을 통해 국가의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었다.

여러 개화파 관료와 지식인들이 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육사업에 참여했다.

고영희 역시 이러한 교육사업에 관여했다.

그러나 교육기관 설립 자체가 이후 그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고영희는 학교를 설립한 지 몇 달 뒤 이완용 내각의 탁지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했다.

학교에서는 나라의 미래를 위한 인재를 키우겠다면서, 정작 본인은 그 나라의 미래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한 것이다.

고종 강제 퇴위

헤이그 특사 사건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국권 침탈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특사로 선발된 인물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활동이 을사늑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려 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이미 장악한 상태였지만, 고종이 국제사회에 일본의 침략을 알리려는 활동을 계속하자 이를 정치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황태자 순종을 즉위시켜 대한제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했다.

고종 퇴위에 협력

1907년 7월 이완용 내각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고영희 역시 탁지부대신으로서 고종의 강제 퇴위에 협력했다.

당시 친일 대신들은 황제가 스스로 물러나는 형식을 취하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의 군사적·정치적 강압에 의해 진행된 퇴위였다.

고종은 결국 1907년 7월 황제의 지위에서 물러났으며, 순종이 뒤를 이었다.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황제권까지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고영희는 이러한 과정에 참여한 대표적인 친일 관료로 기록되어 있다.

황제가 외국에 나라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려고 특사를 보냈더니, 자기 나라 대신이라는 놈이 침략국과 협력해서 황제를 쫓아내는 데 가담한 것이다.

국가의 재정과 행정을 책임지는 고위 관료로서 황제의 권위를 지키기보다 일본의 정치적 요구에 협력한 셈이다.

정미칠적

정미7조약 체결

1907년 7월 24일 일본은 대한제국에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정미7조약은 한일신협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법령 제정과 주요 행정처분, 고위 관료 임명 등에 일본 통감의 승인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일본인을 대한제국 정부의 주요 관직에 임명하여 행정권을 직접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즉,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이번에는 대한제국의 내정권까지 장악한 것이다.

고영희는 탁지부대신으로서 이러한 조약 체결에 협력했다.

그는 정미7조약에 찬동한 일곱 친일 대신 가운데 한 명으로 분류되며, 이들을 정미칠적이라고 부른다.

정미칠적 7명

인물 당시 관직
이완용 내각총리대신
임선준 내부대신
고영희 탁지부대신
이병무 군부대신
이재곤 학부대신
송병준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법부대신

이들은 대한제국의 행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다만 정미7조약에 직접 서명한 대표는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였다.

따라서 고영희가 두 나라를 대표해 조약문에 직접 서명한 인물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의 책임은 이완용 내각의 주요 대신으로서 조약 체결과 관련된 정치적 결정에 협력했다는 점에 있다.

을사오적이 외교권을 넘기는 데 협력했다면, 정미칠적은 남아 있던 내정권까지 일본에 넘기는 데 협력한 놈들이다.

고영희는 그 가운데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탁지부대신이었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정미7조약과 함께 추진된 중요한 조치 가운데 하나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이다.

일본은 대한제국에 군대가 남아 있을 경우 군사적인 저항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일본은 비밀각서 등을 통해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추진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시위대와 진위대를 비롯한 군사조직에 대한 해산 조치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군부대신 이병무가 군대 해산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시위대 장교였던 박승환 참령은 군대 해산에 항의해 자결했으며, 이에 분노한 대한제국 군인들이 남대문 전투에서 일본군에 저항했다.

고영희는 직접 군부대신으로서 해산 명령을 전달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군대 해산의 정치적 배경이 된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정미칠적 가운데 한 명이었다.

따라서 그의 책임은 군대 해산을 직접 명령한 이병무의 행적과 구분하면서도, 군사적 주권 침탈에 협력한 내각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평가해야 한다.

이병무가 직접 군대를 없애는 명령을 내렸다면, 고영희는 그 결정이 가능해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놈이었다.

국가의 군사력을 없애는 정책을 추진한 친일 내각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토사구팽을 당하다

1907년 9월의 해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고영희는 이후에도 고위 관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1907년 9월 그는 탁지부대신에서 물러나 경리원경으로 전임되었다.

경리원은 황실 재정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기관이었다.

당시 고영희가 탁지부대신에서 물러난 사실은 언론에서도 주목받았다.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이를 비꼬는 기사를 게재했다.

새 잡은 뒤 활을 감추다

1907년 9월 12일 《대한매일신보》는 고영희가 탁지부대신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새를 잡은 뒤 활을 감춘다는 표현으로 그를 조롱했다.

이는 흔히 토사구팽이라는 고사성어와 연결되는 비유이다.

고영희가 정미칠적의 한 명으로서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했지만, 정작 그 역할을 수행한 뒤에는 대신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일본에 나라를 넘기는 일을 도왔더니, 일이 끝나자 자신부터 인사발령이 나 버린 것이다.

매국행위로 출세를 이어가려던 인물이 오히려 이용당하고 밀려난 것처럼 보였던 셈이다.

당시 언론이 이러한 상황을 비꼬았다는 사실은 고영희의 친일 행적이 당대에도 비판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고영희가 탁지부대신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일본과의 관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후에도 법부대신과 탁지부대신을 역임했고, 일본으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1910년에는 다시 한일병합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한 번 잘렸다고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 다시 돌아와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참여했다.

일본의 훈장 수령

1907년 10월 고영희는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일본은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과정에서 고영희가 보여준 협력에 대해 공로를 인정했다.

훈1등 욱일대수장은 일본의 고위 훈장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관료들에게 훈장과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며 이들을 포섭하려 했다.

고영희 역시 이러한 포상의 대상이 되었다.

대한제국에서는 자기 나라의 주권을 지키지 못한 관료였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훈장을 줄 만큼 일을 잘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정치적 활동이 어느 국가의 이익에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법부대신과 재등장

1908년 고영희는 법부대신에 임명되었다.

법부대신은 오늘날의 법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사법제도 역시 일본의 강한 간섭을 받고 있었다.

일본은 재판과 형벌, 경찰 및 행정제도를 통제하면서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단계적으로 장악하려 했다.

고영희는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정부의 주요 대신으로 활동했다.

1909년에는 탁지부대신으로 복귀했다.

그가 다시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고위 관직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일본과 친일 내각에서 여전히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고영희는 이러한 과정에서 이완용과 협력하여 한일병합에 관한 정치적 활동을 전개했다.

일본에 직접 병합안을 제안하다

1909년의 정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통감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내정 간섭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힘을 얻었다.

특히 일본은 기존의 보호국 체제를 유지할 것인지, 대한제국을 일본의 영토로 직접 편입할 것인지에 관한 정책을 구체화했다.

당시 친일단체인 일진회도 한일병합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면서 병합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리고 고영희는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했다.

오사카 조폐국 시찰을 핑계로 일본에 가다

1909년 11월 고영희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공식적인 방문 명분은 오사카 조폐국을 시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 정부의 고위 인사들을 만나 한일병합 문제를 논의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당시 고영희는 이완용의 지시에 따라 일본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를 만나 한일병합에 관한 구상을 제시했다.

나라의 재정을 담당하는 대신이 조폐국 시찰을 핑계로 일본에 가서, 정작 일본 총리에게 나라를 병합하는 방법을 제안한 것이다.

조폐국 시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방문의 정치적 목적이 중요했다.

합병안 5개 조항

고영희와 이완용 측은 일본 정부에 다섯 가지 내용을 담은 합병안을 제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항 주요 내용
제1조 한국 황제의 지위를 종전대로 유지할 것
제2조 대한제국의 원로들을 일본 화족과 비슷한 지위로 대우할 것
제3조 일정한 경력을 가진 관료들에게 지위와 녹봉을 보장할 것
제4조 한국인을 일본 국적에 편입하여 일본의 신민으로 만들 것
제5조 한국에서 행하는 정무의 책임자는 한국인으로 할 것

이 내용은 고영희와 이완용 등이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이면서도 대한제국의 기존 황실과 관료층이 일정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황제와 고위 관료의 지위 및 녹봉을 보장하는 조항은 기존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었다.

반면 일반 백성들에게는 일본의 신민이 되는 것을 요구했다.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는 건 받아들이면서 황제와 고위 관료들의 지위와 월급은 보장해 달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자기들 밥그릇만큼은 끝까지 챙기려는 성실함이 돋보인다.

일본에서도 거절당하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고영희가 제시한 합병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여 직접 통치하는 방향을 추진하고 있었다.

반면 고영희와 이완용 측의 구상에는 한국 황제의 지위와 기존 관료들의 역할을 상당 부분 유지하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조건이 자신들이 추진하는 식민지 지배체제와 맞지 않았다.

결국 고영희가 제안한 합병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에 나라를 넘기겠다고 직접 제안서를 들고 갔는데, 일본이 조건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절한 것이다.

이쯤 되면 매국행위에도 협상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웃기지도 않은 사례이다.

물론 일본의 거절은 대한제국을 병합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려 했기 때문에 고영희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고영희가 한일병합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병합을 제안하면서 기존 지배층의 권익을 보장받으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경찰권 침탈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경찰권까지 장악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권, 군사권 및 사법권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특히 대한제국의 경찰을 일본의 통제 아래 두면 국내의 치안과 정치활동을 직접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경찰권 위임을 요구했다.

고영희는 당시 탁지부대신으로서 관련 정부의 논의 과정에 참여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공개 결정자료에는 그가 대한제국 경찰권을 통감부에 넘기는 문제의 심의·의결 과정에 관여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다만 《한민족독립운동사》에는 고영희와 학부대신 이용식이 1910년 6월 경찰권 이양 요구에 강하게 반대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따라서 경찰권 이양 과정에서 고영희가 처음부터 아무런 반대의견 없이 찬성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일본은 결국 경찰권을 장악했으며, 고영희 역시 이후 한일병합을 추진하는 내각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경찰권을 넘기는 문제에서는 반대의견을 밝혔다고 하지만, 정작 나라 전체를 넘기는 과정에는 협력했다는 것이 그의 행적에서 중요한 모순이다.

경술국적

1910년 한일병합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 위한 최종적인 절차에 착수했다.

당시 일본은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대한제국의 정치활동과 언론을 통제했으며, 병합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억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완용 내각은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추진했다.

당시 고영희는 탁지부대신으로 내각에 참여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18일 내각회의에서는 병합조약안이 논의되었으며, 이후 8월 22일 순종 앞에서 어전회의가 개최되었다.

고영희는 이 과정에서 병합에 찬성하고 조약 체결을 추진한 주요 대신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영희가 이완용 등과 함께 어전회의를 통해 순종에게 병합조약 체결을 승인하도록 강요했다고 설명한다.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는 일본의 군사적·정치적 압력 속에서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 회의는 자유로운 국가 간 합의가 아니라 일본의 강제적인 병합정책을 형식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절차였다.

마지막 어전회의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내각의 대신뿐 아니라 황족 대표와 원로 대신 등이 참석했다.

당시 조약을 주도한 이완용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한일병합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고영희 역시 탁지부대신으로서 병합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결국 일본의 군사적 압력 아래에서 한일병합조약 체결이 결정되었다.

이날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사람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따라서 고영희가 일본과 대한제국을 대표해 조약문에 직접 서명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고영희의 책임은 내각의 주요 대신으로서 병합을 결의하고 황제에게 이를 강요하는 과정에 협력했다는 점에 있다.

1907년에는 내정권을 넘기는 데 협력하더니, 1910년에는 아예 나라 전체를 넘기는 데 협력한 것이다.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던 관료가 국가 자체가 사라지는 결정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책임이 크다.

경술국적 8명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 협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을 경술국적(庚戌國賊)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다음 여덟 명이 거론된다.

인물 당시 직책
이완용 내각총리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고영희 탁지부대신
조중응 농상공부대신
민병석 궁내부대신
윤덕영 시종원경
이병무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조민희 승녕부총관

경술국적은 1905년 을사오적이나 1907년 정미칠적과는 다른 사건을 기준으로 한 분류이다.

고영희는 정미칠적과 경술국적 양쪽에 모두 포함된다.

이는 그가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단 한 번만 협력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에 협력했고, 1910년에는 국가 전체가 일본에 병합되는 결정에 참여했다.

1907년과 1910년, 두 차례나 나라를 팔아먹는 과정에 이름을 올렸으니 매국 경력만큼은 확실하다.

정미칠적과 경술국적 2관왕

고영희가 역사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구분 정미칠적 경술국적
연도 1907년 1910년
사건 정미7조약 한일병합조약
주요 내용 대한제국의 내정권 침탈, 군대 해산 대한제국 국권의 완전한 박탈
고영희의 직책 탁지부대신 탁지부대신
고영희의 행적 일본의 내정권 침탈에 협력 한일병합 결정에 협력

고영희는 두 사건에서 모두 탁지부대신으로 활동했다.

이는 국가의 재정과 경제 운영을 담당하는 관료가 일본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같은 재정 책임자의 위치에서 서로 다른 두 차례의 국권 침탈 사건에 협력했다는 사실이 특징이다.

국가의 재정을 책임지는 사람이 나라의 정치적 권한을 넘기는 데 협력하고, 마지막에는 국가 자체를 없애는 데 찬성한 것이다.

여기서 그가 어떤 개인적인 목적을 가지고 행동했는지를 완전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와 거액의 은사공채를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일본의 포상

자작 작위 수령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이후 일본 정부는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에 협력한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와 유력 인물들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1910년 10월 7일 고영희는 일본 제국으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자작은 일본의 귀족제도에서 사용하던 작위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은 조선의 기존 지배층을 식민통치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 작위를 제공했다.

고영희는 이러한 작위를 받아들였다.

나라가 망했는데 이 새끼는 일본 귀족이 됐다.

대한제국이 사라지고 국민들이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상황에서, 고영희는 일본의 귀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확보한 것이다.

물론 작위 수령자들이 모두 동일한 수준의 친일 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영희의 경우 정미7조약 체결과 한일병합 과정에 직접적으로 협력했다는 기록이 확인되므로, 일본이 제공한 작위는 그의 국권 침탈 협력과 연결해 평가할 수 있다.

은사공채 10만 원

1911년 1월 고영희는 일본 정부로부터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은사공채는 일본이 조선귀족들에게 제공한 국채 형태의 경제적 보상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자작 작위 수령자에게 지급된 은사공채는 5만 원 수준이었지만, 고영희는 그보다 많은 10만 원을 받았다.

이는 그의 정치적 협력이 일본 정부에서 상당한 공로로 평가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당시 10만 원은 일반적인 조선인이 쉽게 확보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특히 은사공채는 단순히 한 번 지급되는 현금이 아니라 이자 수익을 발생시키는 금융자산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경제적 보상을 통해 기존 대한제국의 지배층을 식민통치 체제에 포섭하려 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본인의 재산은 오히려 늘어나는 기적을 보여준 것이다.

참고로 일부 언론 기사에서는 고영희가 받은 은사공채를 11만 원으로 기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공개 결정자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고희경 항목에서는 10만 원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본 문서에서는 이를 기준으로 한다.

은사공채의 의미

당시 일본이 수여한 은사공채는 단순한 개인적인 선물이 아니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이후 기존의 고위 관료와 왕족, 유력 인물들을 식민통치 체제에 편입시키려 했다.

특히 귀족 작위와 거액의 은사공채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이 새로운 정치체제에 협력하도록 유도했다.

고영희는 이러한 정책의 대표적인 수혜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했으며, 이후 일본으로부터 작위와 경제적 보상을 받았다.

일본 입장에서는 나라 하나를 차지하는 데 협력한 인물에게 주는 보상이었고, 고영희 입장에서는 나라가 없어지는 대신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이익을 확보한 셈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식민통치 기관에 들어가다

1910년 10월 고영희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지배를 위해 설치한 자문기관이었다.

이 기관에는 대한제국의 전직 고위 관료와 귀족, 친일적인 유력 인물들이 다수 참여했다.

일본은 이들을 이용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조선인 사회의 협력을 확보하려 했다.

고영희 역시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식민통치 체제에 편입되었다.

그는 1910년부터 1916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대한제국에서는 일본에 나라를 넘기는 데 협력하고, 나라가 망한 뒤에는 일본 총독부의 고문으로 취직한 것이다.

관직을 맡았던 국가만 바뀌었을 뿐, 자신의 정치적 지위는 계속 유지한 셈이다.

연봉 1,600원

고영희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연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이는 당시 일반적인 조선인의 소득 수준을 고려하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연간 1,600원은 단순히 12개월로 나누면 월평균 약 133원에 해당한다.

고영희는 1916년 사망할 때까지 이러한 수당을 받았다.

이미 일본에서 자작 작위와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은 상태였으므로, 중추원 고문 수당은 추가적인 경제적 혜택이었다.

나라를 팔아먹고 받은 귀족 작위와 금융자산에 총독부 고문 수당까지 얹어 받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수당은 당시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라는 직책에 지급된 금액이지만, 고영희가 그 직책을 얻은 배경에는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에 대한 협력이 있었다.

식민통치 찬양

한일병합 1주년 축사

1911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일본은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여러 행사를 개최하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했다.

당시 《매일신보》 역시 병합 1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을 발행했다.

고영희는 이 신문에 한일병합 1주년을 축하하는 글을 게재했다.

글의 제목은 「공축 병합 일주년 기념」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매일신보》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선전하는 데 활용된 신문이었다.

고영희는 이러한 언론매체에 국권 피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축사를 발표한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망했는데, 1911년 8월 29일에는 그걸 축하하는 글을 실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국권을 빼앗긴 날을 기념하며 슬퍼하거나 일본의 침략을 비판할 수 있지만, 고영희에게는 축하할 만한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그는 일본의 귀족 작위와 경제적 보상을 받은 상태였으므로, 일본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이후에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행적은 고영희의 친일이 일제강점기 이전의 일시적인 선택이 아니라 식민통치가 시작된 이후에도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일본 천황 추모행사

고영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황실과 관련된 여러 행사에도 참여했다.

1912년에는 일본의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또한 일본 교토에서 열린 일본 황실 관련 추모행사에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했다.

1913년에는 메이지 천황의 사망 1주기 추도식에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했다.

이러한 활동은 고영희가 단순히 조선총독부의 고문으로 이름만 올린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정치적·사회적 행사에도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일본 황실의 행사에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했다는 점은 그가 일본 제국의 귀족질서에 편입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물산공진회

1915년 일본은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일본이 조선의 산업과 경제, 농업 및 각종 생산물을 전시하면서 식민통치의 성과를 선전하기 위해 개최한 행사였다.

당시 일본은 자신들의 지배를 통해 조선의 산업과 경제가 발전하고 있다는 주장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전은 식민지 지배에 따른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 박탈과 경제적 수탈 문제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다.

고영희는 조선물산공진회의 경성협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후 특별유공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행사에 50원을 기부했다.

한일병합에 협력한 것도 모자라, 나라를 빼앗은 지 5주년이 됐다고 일본이 개최한 홍보행사까지 도와준 것이다.

고영희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가 정당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협력했다.

사망

1916년 1월 25일 사망했다.

당시 만 66세였다.

고영희는 사망할 때까지 일본의 자작 작위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직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고영희의 사망에 맞춰 종3위를 추서했다.

또한 장례식에는 일본 정부가 파견한 칙사가 참석했다.

이는 일본이 고영희를 식민통치에 공헌한 유력 인물로 대우했음을 보여준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는 데 협력한 인물이 일본 정부의 예우를 받으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고영희는 생전에 일본의 귀족 작위와 은사공채, 중추원 고문 직책을 통해 경제적·사회적인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에도 일본의 귀족 작위는 가족에게 이어졌다.

아들 고희경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다

고영희의 장남은 고희경(高羲敬)이다.

고희경 역시 대한제국의 외교관과 일제강점기의 관료로 활동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특히 고희경은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조선 왕실과 통감부 사이의 연락과 교섭에 관여했다.

또한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서도 일본의 정책에 협력했다.

1916년 고영희가 사망하자 고희경은 부친의 자작 작위를 승계했다.

이와 함께 고영희가 받은 은사공채 10만 원에 관한 권리와 조선귀족으로서의 예우도 이어받았다.

아버지가 나라를 팔아먹는 과정에서 받은 귀족 작위와 금융자산을 아들이 물려받은 것이다.

고희경 역시 이후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행적이 확인된다.

아들은 백작이 되다

1920년 고희경은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伯爵)으로 승작했다.

당시 고희경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이은과 일본 황족 이방자의 혼인 과정에 관여했다.

일본은 이 혼인에 기여한 공로 등을 인정해 고희경의 작위를 자작에서 백작으로 높였다.

백작은 자작보다 높은 귀족 작위였다.

이처럼 고영희가 받은 자작 작위는 장남에게 승계되었으며, 이후 더 높은 작위로 올라갔다.

아버지가 일본에 나라를 넘기는 데 협력해서 자작이 되었고, 아들은 일본 왕실과 조선 왕실의 혼인에 협력해서 백작이 되었다.

이 부자의 행적은 일본이 기존 대한제국의 지배층을 식민지 귀족으로 포섭하고, 그 지위와 혜택을 세습하도록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고희경의 구체적인 친일 행위는 고영희 본인의 행적과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는 사실은 각각의 행적에 근거한 것이며, 단순히 혈연관계만으로 책임이 결정된 것은 아니다.

역사적 평가

공식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고영희는 대한민국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수록되어 있다.

주요 친일 행위는 다음과 같다.

  •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과정에 협력
  •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
  • 1910년 한일병합을 위한 정치적 활동에 참여
  • 1910년 한일병합을 결정한 어전회의에서 병합에 동조
  •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 수령
  • 1911년 일본 정부로부터 은사공채 10만 원 수령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식민통치에 협력
  • 한일병합 1주년 축사를 발표하여 식민통치를 찬양
  • 일본 황실 관련 행사와 식민통치 기념행사에 참여

이러한 기록은 고영희의 친일 행위가 일시적인 정치적 선택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과정과 국가 전체가 병합되는 과정에 모두 협력했으며, 이후에도 식민통치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책임이 크다.

개화파에서 매국노로

고영희는 젊은 시절 일본의 근대적인 제도를 조사하고 대일외교를 담당했던 관료였다.

그는 일본어에 능통했으며, 갑오개혁에 참여하고 독립협회 창립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행적만 보면 근대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활동한 개화파 관료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자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보다 일본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1907년에는 정미칠적, 1910년에는 경술국적에 포함되었으며, 이후 일본의 귀족 작위와 경제적 보상을 받았다.

특히 일본 정부에 직접 한일병합안을 제시한 사건은 그의 정치적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근대화를 위해 일본의 제도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과 일본에 나라 자체를 넘겨야 한다는 주장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고영희는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에 협력했다.

따라서 초기 개화파 활동을 이유로 그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국가 재정 책임자로서의 책임

고영희는 1907년과 1910년 모두 탁지부대신으로 활동했다.

탁지부대신은 국가의 재정과 예산을 관리하는 중요한 관직이었다.

국가의 재정권을 유지하는 일은 정치적·군사적 독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일본이 대한제국의 재정과 행정제도를 장악하려 했던 상황에서 탁지부대신의 역할은 중요했다.

그러나 고영희는 국권 침탈 과정에서 일본의 정책에 협력했다.

이러한 행적은 국가의 재정과 행정을 책임지는 관료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국가의 자주권을 약화시키는 결정에 참여한 사례로 평가된다.

나라의 살림을 책임지라고 앉혀 놨더니 나라 자체를 없애는 데 협력한 것이다.

일본의 병합안까지 제시한 인물

고영희의 친일 행적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09년 일본에 병합안을 제시한 일이다.

그는 이완용의 지시에 따라 일본을 방문하여 가쓰라 다로 총리대신에게 다섯 가지 조항을 담은 병합안을 제출했다.

이러한 행적은 그가 단순히 일본의 군사적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조약에 동의한 관료였다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병합 이후 황제와 고위 관료의 지위와 녹봉을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친일 관료들의 이해관계를 드러낸다.

국가의 존속보다 병합 이후 자신들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다만 일본이 제안을 거절했다는 사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고영희와 이완용이 제안한 병합 방식과 일본 정부가 실제로 추진한 식민지 지배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고영희가 한일병합 자체를 반대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가 한일병합을 전제로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의 차이

고영희는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다.

정미칠적은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한 일곱 친일 대신을 가리킨다.

경술국적은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 협력한 대표적인 친일 인물들을 가리킨다.

두 명칭은 서로 다른 국권 침탈 사건을 기준으로 한 분류이므로, 같은 인물이 두 명단에 모두 포함될 수 있다.

고영희가 두 명단에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은 그가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여러 차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1907년에는 내정권을 넘기는 데 협력하고, 1910년에는 나라 전체를 넘기는 데 협력했으니 친일 행적이 아주 단계적으로 진행된 셈이다.

식민통치의 경제적 수혜자

고영희는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와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또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이러한 혜택은 그가 국권 침탈에 협력한 이후 일본의 식민통치 체제에 편입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고영희가 사망한 뒤에도 아들 고희경이 작위와 경제적 권리를 승계했다는 사실은 일본이 친일 지배층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세습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고영희가 보유했던 모든 재산이 친일반민족행위의 대가로 취득되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개별 재산의 취득 경위와 법적 성격은 별도의 자료와 조사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수여한 작위와 은사공채, 중추원 고문 수당은 그의 식민통치 협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경제적 혜택이었다.

주요 행적 정리

연도 주요 행적
1849년 한성부에서 출생
1867년 역과 왜학에 급제
1876년 김기수의 수신사 수행원으로 일본 방문
1880년 원산항 개항 관련 업무 담당
1881년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일본 시찰
1882년 일본 공사 하나부사의 임시 통역관으로 활동
1884년 이후 갑신정변 이후 지방관으로 활동
1886년 중앙 관직 복귀
1894년 갑오개혁 참여
1895년 주일특명전권공사 임명
1896년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
1903년 주일특명전권공사 재임
1907년 장훈학교 설립, 교장 역임
1907년 5월 이완용 내각의 탁지부대신 임명
1907년 7월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
1907년 9월 탁지부대신에서 물러나 경리원경으로 전임
1907년 10월 일본 정부의 훈1등 욱일대수장 수령
1908년 법부대신 임명
1909년 탁지부대신 재임
1909년 11월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에게 한일병합안 제출
1910년 8월 한일병합을 결정한 어전회의에 참여
1910년 10월 일본 자작 작위 수령,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임명
1911년 은사공채 10만 원 수령
1911년 8월 한일병합 1주년 축사 발표
1913년 메이지 천황 사망 1주기 추도식 참석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활동
1916년 1월 25일 사망
1916년 아들 고희경이 자작 작위 승계
1920년 고희경이 백작으로 승작

여담

  •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되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두 명칭은 서로 다른 국권 침탈 사건을 기준으로 한 분류이다.
  • 정식 을사오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 대신을 가리킨다.
  • 본관은 제주 고씨이며, 자는 자중(子中)이다.
  • 1867년 역과 왜학에 급제한 일본어 통역관 출신이다. 외국어 능력을 바탕으로 고위 관료가 된 인물이었다.
  • 1876년에는 김기수의 수신사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촬영된 사진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했다. 당시 시찰단에는 박정양과 홍영식 등도 참여했다.
  • 1884년 갑신정변 이후에는 지방관으로 밀려났으며, 간성군수로 활동하면서 《간성군읍지》를 편찬했다.
  • 1894년 갑오개혁에 참여했으며, 이후 학무아문 협판과 주일전권공사 등을 역임했다.
  • 1896년에는 독립협회 창립에도 참여했다. 훗날 경술국적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대조적인 행적이다.
  • 이완용 역시 독립협회 창립 당시 주요 지도자였다. 독립협회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이후 친일 행적까지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다.
  • 1907년 장훈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같은 해 이완용 내각의 탁지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협력했다. 이 때문에 정미칠적의 한 명으로 분류된다.
  • 1907년 군대 해산을 직접 명령한 군부대신은 이병무였다. 고영희는 그 배경이 된 정미7조약에 협력한 탁지부대신이었다.
  • 1907년 9월 탁지부대신에서 물러나자 《대한매일신보》는 새를 잡은 뒤 활을 감춘다는 식으로 그의 처지를 조롱했다.
  •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정미7조약 체결 등에 협력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 1909년에는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를 만나 한일병합안을 제시했다. 공식적인 방문 명분은 오사카 조폐국 시찰이었다.
  • 당시 제출한 병합안에는 황제와 고위 관료들의 지위와 녹봉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라를 일본에 넘기면서 자기들 자리와 월급은 유지해 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 일본 정부는 고영희와 이완용 측의 병합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지배하려 했기 때문이다.
  • 1910년 경찰권 이양 문제에서는 처음에 반대의견을 밝혔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 한일병합 과정에서는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 1910년 8월 22일 마지막 어전회의에 참여해 한일병합에 동조했다.
  •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대표는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고영희는 조약 체결을 추진한 내각의 주요 대신이었다.
  •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 은사공채는 10만 원을 받았다. 일반적인 자작 작위 수령자들이 5만 원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큰 액수였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 1911년 한일병합 1주년을 맞아 《매일신보》에 축사를 발표했다. 나라가 망한 날을 축하하는 글을 쓴 것이다.
  • 1913년에는 메이지 천황 사망 1주기 추도식에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했다.
  •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과 특별유공회원으로 활동했다.
  • 1916년 1월 25일 사망했으며, 일본 정부가 장례식에 칙사를 파견했다.
  • 아들 고희경이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에 관한 권리를 승계했다.
  • 고희경은 1920년 백작으로 승작했으며, 역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고영희와 관련된 은사공채 금액을 일부 언론에서는 11만 원으로 기록하지만,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자료에는 10만 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 대한제국의 외교와 재정을 담당했던 관료가 일본의 국권 침탈에 협력하고, 이후에는 일본의 귀족이 되어 식민통치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친일 관료로 평가된다.
  • 독립협회 발기인에서 시작해 정미칠적, 경술국적을 거쳐 일본 제국의 자작으로 생을 마쳤다. 나라가 근대화되고 독립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접했던 인물이 정작 그 독립을 빼앗는 데 협력한 것이다.

관련 문서

외부 링크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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